임진왜란은 아픔의 역사나 고통의 역사로 서술되기도 하지만, 이 7년간의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는 신화가 되어 무수한 이야기거리와 수많은 영웅들을 만들었습니다. 그 절정에 있는 인물은 바로 이순신이지만, 이순신 외에도 곽재우, 권율, 김시민, 사명대사, 유성룡 등의 조선 인물들, 심지어 가토와 고니시 등의 일본 측 주요 장수들까지 상당한 대중적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들 대다수는 합당한 공을 세워 두고두고 회자되는 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김덕령 입니다.
임진왜란에 참여한 주요 인물 중 김덕령은 그 인지도에 있어 최고 수준에 있습니다. 김덕령보다 이름이 더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봐야 핵심 중의 핵심이었던 이순신, 권율, 유성룡이나 김시민 정도에 왕이었던 선조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괴력의 전사로서의 김덕령의 이미지,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김덕령의 이미지를 제외하고 그의 '전공' 을 생각해보면? 권율의 이치와 행주 싸움, 이순신의 무수한 전설들, 김시민의 장렬한 전투, 수많은 장수들이 기억나는 활약상을 가지고 있지만 김덕령의 전공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조 55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9월 2일(정축) 3번째기사
도원수 권율의 전과에 대한 치계
도원수 권율(權慄)이 치계(馳啓)하였다.
“왜적(倭賊) 2백여 명이 고성(固城) 지방에 하륙(下陸)하여 멋대로 노략질을 하는데 복병장(伏兵將) 최강(崔堈)이 소탕해 잡아들이지 못하였으므로 김덕령(金德齡)으로 하여금 군사 2백 명을 뽑아 힘을 합해 복병을 설치하게 하였습니다. 적이 남녀 50여 명을 사로잡아 갈 적에 복병이 싸우다 후퇴도 하며 혹은 요로(要路)로 곧장 달려가 숨어서 요격한 결과 비록 1급(級)도 참획하지는 못했지만 잡혀가던 사람들은 남김없이 모두 데려왔습니다.”
방대한 분량의 조선왕조실록에서 보이는 김덕령의 '전공' 는, 놀랍게도 실록의 기사를 전부 살펴보아도 오직 이 사례 밖에 없습니다. 전개를 보자면, 권율의 명령으로 김덕령은 2백여명의 병사와 함께 조선 백성 50여명을 납치해 가는 일본군을 공격했는데, 이들의 목을 단 하나도 베지 못했습니다. 일단 잡혀가던 사람을 모두 구출했으니 작전은 성공했지만, 아군의 전사자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상황을 보면 복병을 본 일본군이 포로를 두고 달아난 것으로 보입니다.
성공적인 작전이긴 하지만, 용맹과 전설이 덧붙여질 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게 끝' 입니다.
모양새를 제외한 '공적' 에 대한 언급 자체가 실록에서는 오직 이건 밖에 없습니다. 차분하게 한번 실록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선조 46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12월 29일(무인) 2번째기사 병조 판서 이덕형이 중국군의 동태와 김덕령에게 일면의 방어를 맡길 것 등을 아뢰다
(생략)그리고 김덕령(金德齡)의 군대가 거의 3천여 명이나 되는데 기마병(騎馬兵)이 날래고 건장하여 군용(軍容)이 매우 성대하다고 합니다.
김덕령이 군사를 처음 일으켰다고 나오는 1593년인데, 이때 조정에서는 "그 거느린 군사가 크다." 는 말은 나왔지만 특별히 이전에 전공을 세웠다는 언급은 하지 않습니다. 선조는 김덕령에 대해 유성룡에게 물었고, 유성룡은 "나이가 28이다. 사실 잘 모르지만, 지략에 대해서는 들어본적이 없다." 라는 말을 합니다.
좀 더 뒤에서 비변사는 김덕령의 부대에 충용군(忠勇軍)이라는 호칭을 내리려고 하지만, 선조는 "아직 김덕령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지 않는가." 라고 하여 조금 비판적인 의견을 냅니다. 따라서 이때까지는 김덕령이라는 인물에 대해 조정도 잘 알지 못하고 있고, 그만큼 김덕령이 뚜렷한 전과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선조 47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월 5일(갑신) 1번째기사 김덕령을 선전관에 제수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김덕령은 아직 공을 세우지 못했으니 갑자기 고관(高官)에 제수하기는 곤란할 것 같습니다. 선전관(宣傳官)은 내신(內臣)이므로 서관(庶官)에 견줄 것이 아니니 우선 선전관에 제수하고 그대로 충용장(忠勇將)이라는 명칭으로 군대를 통령하게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하니, 상이 따랐다.
'공' 을 세우지 못했다는 것은 이후 좀 더 분명하게 언급됩니다. 그런데 이 해가 1594년이니, 1594년까지의 김덕령은 별다른 전공이 없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얼마 후 선조는 "김덕령이 단기로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는데, 저 이름 높은 명장인 악비조차도 그렇지는 않았다. 호언장담을 하는것을 보니 크게 쓰면 안될것 같다." 며 의뭉스러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장 앞서 말한 '적을 죽이지 못한 전공' 은 이해 9월 입니다. 그때까지도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다만 김덕령의 이름 자체는 이 시점에서도 상당히 유명해진것 같지만, 역시 전공은 없습니다.
그렇게 1594년도 가고 1595년이 됩니다. 1월 경 선조는 이항복에게 김덕령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고, 이항복은 "잘 모르겠다. 용력은 뛰어나다. 지려(知慮)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용렬하진 않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후 다음 달에는 김응남 등이 "장수 중에 오로지 이시언만이 김덕령이 쓸만 사람이라고 말하니 둘이 힘을 합치게 하면 어떨까." 라고 제안을 합니다. 여하간 1595년에도 별다른 모습이 보이지 않고, 그렇게 1596년이 되었습니다.
1596년 1월 13일의 기사를 보면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김덕령이 군령도 아니고, 관하(管下)도 아닌데 아무 이유도 없이 조선 사람 세 명을 때려 죽인 것입니다. 선조는 당장은 사면을 면했지만, 사헌부에서는 이 사건을 작지 않게 여겨 선조에게 죄를 줄 것을 요청했고, 선조는 "흉적이 있는데 용사를 벌 주는 것은 힘들다." 면서 반대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신들도 의견을 나눕니다.
선조 71권, 29년(1596 / 명 만력(萬曆) 24년) 1월 17일(갑신) 2번째기사
조강 후, 제주 방어 조치와 주문의 내용, 충청 목사의 적임자 등을 논의하다
호민이 아뢰기를,
“김덕령(金德齡)이 살인한 일은 극히 놀라운 일이니, 대간이 논한 바가 극히 타당한 것으로 국문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그러나 적의 진퇴를 아직 알 수 없고 나라의 성패 또한 헤아릴 수 없는 터인데, 이 때를 당해 하나의 장사(壯士)라도 잃는 것은 좋은 계책이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법을 맡은 관원은 진실로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상께서 특별히 정국(停鞫)을 허락하고 형틀을 풀어주어 그로 하여금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충성을 바치게 하소서. 이것이 사람을 쓰는 활법(活法)인 것입니다. 대신에게 문의하여 조처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이 말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고, 지평(指平) 이형욱李馨郁은 아뢰기를,
“덕령은 놓아줄 수 없는 중죄인이거니와, 일찍이 털끝만한 공로도 기록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그를 완전히 석방하여 무장들의 방자한 습성을 열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폐단이 장차 사람의 목숨 보기를 초개같이 여기는 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덕령의 살인은 실로 놀라운 일인데, 주현(州縣)도 감히 발설하지 못하고 피살된 집 또한 감히 고발하지 못하였으니, 나라에 기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이 내려간 후에 비로소 계문(啓聞)하였으니, 방백(方伯)이 있다 할 수 있으며, 어사(御史)가 있다 할 수 있겠는가. 대간은 의당 먼저 이들은 탄핵하여야 옳을 것이다.”
이 때의 반응을 보면 김덕령의 살인은 충격적인 일인 동시에, 이형욱 등은 "김덕령의 공은 털끝만큼도 없다." 고 말하였고, 이에 대해 유성룡이던 선조던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습니다. 1596년까지 김덕령의 별다른 전공은 보이지 않고, 김덕령이 임진왜란 도중 참살했다고 기록된 공식적인 숫자는 '일본군' 도 아닌 '조선 사람 세명' 뿐 입니다.
이후로도 그런 식으로 흐름으로 전개 됩니다. 이몽학의 난까지 말입니다.
조선은 고대에 비해서 기록이 풍부하고, 따라서 임진왜란 등의 사건을 실록으로만 판단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 기록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기록에서는 어떤가?
당시 의병장이었던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김덕령의 공으로 언급되는 기록은 없고, 정작 이런 기록이 있는데,
"김덕령을 잡아다 문초하였다. 이때에 김덕령이 두치복병장(豆恥伏兵將)이 되어 군사를 일으킨 지 3년에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한갓 잔혹(殘酷)한 것만 일삼아서 무죄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
라며 별다른 공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견을 전혀 넣지 않고, 일단 되는대로 각종 문집과 야사등을 총합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경우에도, 곽재우나 정문부 정도의 군공을 김덕령이 해내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김덕령의 기록이 없지는 않은데, 대체적으로
용맹했다, 지략에 능했다, 가토가 두려워했네, 명나라와 왜국에서도 그 용맹함을 무서워했네 등등
그럴듯한 이야기만 잔뜩 있지만 실제 군사적인 공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신경이 쓴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의 경우에, 애시당초 학술이라기 보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라 역사적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고 할 순 없지만, 일단 거기서의 언급을 또 보면,
"그가 타는 백마도 그 사람같아 하루 천리를 달리고 가는 곳마다 승전하고 포위를 뚫고 전진에 뛰어들기를 마치 사람이 없는 곳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왜적들이 서로 돌아보고 어이없이 놀라며 부르기를, ‘비장군(飛將軍)이다’ 하고, 그가 지나는 곳에는 모두 칼을 거두고 피하며 감히 교전하지 못하니, 위세와 명성이 크게 떨쳐, 용사와 무부들이 구름과 안개처럼 모여들었다. 드디어 그는 군사를 이끌고 영남에 진입하였는데, 적들이 듣고 여러 곳에 유둔한 적병을 거두어 한 곳에 합쳐 대군(大軍)을 만들어 가지고 항거하였다.
뭔가 거창하긴 한데, 기본적으로 연려실기술과 다를게 없습니다. 명성이 엄청나고 적들이 두려워했네, 용맹했네, 이런 이야기는 있어도 구체적으로 대체 어떻게 적군과 싸웠고, 어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하는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김덕령이 초창기에는 다른 의병군의 부장으로 활동하다가 부모 문제로 낙향 후 독자적으로 재봉기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부장 시절에 올린 군공이 있고, 그것때문에 평이 좋았을 가능성도 있는데,
호남 출신 의사들을 기록했던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서, 의녕에서 곽재우와 함께 적을 기습하여 적의 절반을 익사시킨 전공이 드디어 하나 나옵니다. 이게 적이 강을 건널 때 사용하는 표목을 강 깊은 곳에 세워서 이들을 유인한 후 야습으로 전멸시킨 것인데, 그런데 적군 숫자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가? 김덕령의 명성은 그 자체가 신기루였던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임진왜란 당시의 김덕령은 손꼽히는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 의병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긴 했지만, 바로 이 김덕령이 의병을 모을 시 모인 숫자가 무려 5천여 명입니다. 그전까지 김덕령이 별다른 전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건 순전히 이름값의 힘으로, 그만큼 김덕령의 명성이 대단했다는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어떠한 종류의 인지도' 라는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괴력' 입니다.
굳이 연려실기술 같은 야사 모음집을 보지 않더라도, 처음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조선왕조실록에서부터
"신력을 지녔다."
"비호처럼 날래다."
이런 언급등이 보입니다. 이름값이라는것은 이 사람이 워낙 유명한 선비라서 주위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던가, 워낙 전과가 대단한 장군이라 주위에 모였다던가, 하는 부류가 있을텐데 김덕령은 그 두가지 모두 포함되지 못합니다
상이 이르기를,“대개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참작하지 않고 마구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무군사일기(撫軍司日記)》를 보았더니 ‘김덕령이 말하기를 「총통(銃筒) 3백 자루를 쏘고 있었더니, 왜적이 저절로 무너졌다. 」고 했다.’ 하였고, 또 ‘쌍무지개가 몸을 둘렀다.’고 하였는데, 어찌 이럴 리가 있겠는가.
항복이 아뢰기를,“약간은 압니다. 담양(潭陽)의 금성 산성(金城山城)에 불끈 솟은 바위가 있는데, 사람이 도저히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아닌데도 김덕령은 그 바위를 걸어서 넘기를 매우 경첩(輕捷)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고을 사람 20여 명이 목격한 것이라 합니다”
“신이 동궁을 배종하고 남하했을 때 호남 사람이 김덕령의 기이한 일을 극도로 말하니, 듣는 자는살피지 않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 진에 속한 사람들은 심지어 상소를 올려서 유 총병(劉總兵)으로 하여금 철수해 돌아가게 하고 영남의 일을 오로지 김덕령에게 맡기려고까지 하였으나, 신은 그 위인을 믿지 않았습니다. 옛 역사책속에 실린 관우(關羽)·장비(張飛)의 지혜와 용맹에 대한 일을 보아도 김덕령이 하는 바와 같은 것은 있지 않습니다.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는 조정이 사호(賜號)까지 하였는데 지금 이시언의 관하를 삼는다는 것은 사체에 부당하다. 나는 처음에도 믿지 않았지만, 이귀(李貴)는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양쪽 겨드랑이에서 범이 나온다는 말을 감히 하였는가. 어찌 그럴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 용력은 쓸 만하니, 어찌 쉽사리 얻을 수 있는 인물이겠는가. 모름지기 영남·호남으로 하여금 군량을 계속 조달하여 군세를 도와서 장려해 쓰도록 하는 것이 가하다.”
이 언급을 보면 대략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김덕령 같은 경우는 "괴력" 등으로 이름을 날렸고, 상황을 보면 김덕령이 실제적으로 괴력을 가진건 확실하고, 다만 이게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퍼지면서 과장되기도 하고, 추어올리기도 하면서
날라다닌다,힘이 장사시다,귀신과도 같은 재주를 부린다.양쪽 겨드랑이에서 범이 나온다 -_-
는 식으로 조금 더 부풀어진것으로 보입니다.
즉 김덕령이 실제적으로 괴력이 있음 - 이게 이야깃거리로 퍼짐 - 난리통에 뭔가 대단한 인물을 기대하는 백성들의 심리 때문에 이야기가 커져 이게 조정 대신들에게까지 그런 이야기가 퍼지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그런 점들 때문에, 실질적인 전과는 뭔가 그렇다 할만한게 없어도, 명성은 엄청나고조정에서도 계속 주목을 하고, - 선조의 경우 몹시 궁금한지 끊임없이 "김덕령이 어떤 사람인가." 하고 물어봅니다.
하여 실질적인 전공이 비해 위상이나 네임맬류도 대단하고...
다만 이런점도 있긴 합니다. 김덕령이 활동하던 시기가, 전선이 고착화되고 질질 끌어가기 시작하던 시점이라 일본군과 격돌하여 전공을 마구 세울 수 있던 그런 시기는 아니라는 게 있씁니다. 만약 제대로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 엄청난 명망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어쨌건 결과적으로 기록으로는 일본군 병사 한명의 수급도 얻지 못했고...
나중에 이르면 김덕령 본인조차도, 이런 막연한 기대
- 잘 싸우는 장군이다 정도의 기대가 아니라, 무슨 도술로 적군을 섬멸하는 수준의 기대 -
때문에 부담스러워 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체찰사(體察使) 윤두수(尹斗壽)가 장수를 보내 거제(巨濟)에 주둔한 왜적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양사가 윤두수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당시 왜적은 해상의 8읍(邑)을 점거한 채 깊이 침입하지 않고 화평(和平)하려는 의사만 비치고 있었다. 두수는 군사가 피로하고 군량이 떨어진 데다가 화평은 기필코 이룰 수 없다 하여 매양 공전(攻戰)하자는 의논을 내세웠으나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이 때에 이르러 중국 장수가 병력을 철수하여 견제(牽制)하는 바가 없자 두수는 우선 거제에 주둔한 적을 토벌하자고 청했는데, 그 장계에,
“승전하면 황천(皇天)이 우리 나라를 도운 것이요, 이기지 못하더라도 마땅히 조종(祖宗)에 떳떳히 할 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그의 계책을 따를 것을 명했다. 이에 두수는 남원(南原)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휘하의 병사 수천 명을 선거이(宣居怡)에게 주어 거느리고 고성(固城)에 나아가 주둔하게 하는 한편, 도원수(都元帥)·통제사(統制使)·충용장(忠勇將)에게 거제의 왜적을 수륙(水陸)으로 협공하라고 전령하였다. 산의 요새지에 웅거하고 있는 적에 대해 제군(諸軍)이 배를 타고 거제도(巨濟島)에 들어갔는데, 김덕령(金德齡) 등이 용사(勇士)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었다. 적이 높은 위치에서 총을 쏘아대니 덕령의 군사가 위를 향해 공격하다가 많이 탄환에 맞았다. 이에 선거이를 포함한 제장(諸將)이 모두 퇴각하니, 덕령이 대열을 수습하여 돌아왔다.
이에 앞서 국인(國人)들이 말하기를,
“덕령은 신용(神勇)이 있으니 싸우지 않으면 몰라도 싸우기만 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 와서 한 차례 시험에 공이 없자 변경 사람들이 실망하였다. 제군(諸軍)이 진격할 무렵 진주 목사(晋州牧使) 곽재우(郭再祐)가 덕령에게 말하기를,
“장군은 정말 바다를 건너 적을 섬멸할 수 있겠소?”
하니, 덕령이 말하기를,
“이번 일은 나의 계책이 아니오. 굴(窟)을 점거하고 버티는 적을 난들 무슨 수로 제압하겠소.”
하자, 재우가 말하기를,
“장군의 명성이 온통 적경(賊境)에 퍼져 있으므로 적이 움츠러들어 감히 제멋대로 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소. 만일 지금 경솔하게 진격하다가 약세를 보이기라도 하면 위엄을 잃어 실책함이 클 것이오.”
하였다. 그리고 이내 원수(元帥)에게 치보(馳報)하여 그 계책이 옳지 않음을 말했으나 원수는 체부(體府)에서 이미 결정한 것이라고 하여 따르지 않았다.
상황을 보면, 일본군이 요충지를 장악하고 위에서 총을 쏠 수 있는 환경이라 공격하기에 극히 불리한데,
윤두수가 싸우자고 주장을 해서 김덕령이 그런 지시에 따라 나가서 싸우는데, 당연히 상황이 안 좋으니 패퇴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멋대로
"야, 김덕령 나가기만 하면 무조건 이기지! 질리가 있겠어!"
이러다가, 극히 상황이 좋지 않아 별 재미도 못 보고 돌아온것을 보고 또 자기 마음대로 실망을 합니다.
저런 상황에서 공격해서 승리를 거두자면, 아군의 병사가 압도적으로 많은게 아니라면 김덕령이 사이오닉스톰 이라도 사용해서 일본군을 섬멸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저런 상황에서 멋대로 말도 안되는 기대를 걸어놓고 패배하니까 실망하고,
김덕령 본인조차
"난들 무슨 수로 당하겠냐?"
하는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다음은 이항복의 말입니다.
이항복은 아뢰기를,
“당초 조정이 너무 포장(褒奬)을 한 것입니다. 신이 남쪽 지방에 있을 때에 주의를 시켰더니 그 역시 깊이 새겨 들었습니다.
다음은 선조의 말입니다.
“김덕령(金德齡)은 내가 잘 모른다. 당초에 사람들이 사실과 너무 지나치게 말하더니, 지금은 도리어 무능하다고 여긴다. 위명이 꺾이자 군졸들이 떨어져 나간다고 한다. 나의 생각에는 비록 필부의 용맹이라 하더라도 쉽게 얻을 수 없는데 그는 한쪽 지역을 방어하게 할 만하니, 지금 전라 감사에게 하서하여 군병을 뽑아 보내 주기도 하고 또는 군량을 계속 공급해 주기도 해서 군세를 돕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처럼 해이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종합하자면 김덕령이 활동하던 시기 자체는, 딱히 그가 아니더라도 큰 공을 세우기는 별로 좋지 못한 시기지만, 김덕령은 초반에 본인이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건 너무 말도 안되는 수준으로 명성이 퍼져나갔고, 앞서 말했다시피 별로 공을 세우기 좋은 시기도 아닌데, 너무 기대치가 말도 안되게 높다 보니
- 여기서 말하는 기대치가 지휘 잘 하는 장수 수준이 아니라 양 팔에서 범이 튀어나오고 하는 수준 -
역으로 실망하는 사람들이 나올 정도입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이러한 '명성' 이 바로 김덕령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반란 세력이 잡혔을때 아무렇게나 불어댄 이름이 김덕령이었는데, 필시 그가 유명한 인물이었던 점이 있었을테니 꼼짝없이 말려들어가고 만 측면도 있었을 겁니다.
다음은 임진왜란 당시 퍼졌던 온갖 해괴한 '김덕령 최강전설' 과 이에 따른 조정의 반응들입니다.
1. 오오라 쓰는 김덕령
선조 59권, 28년(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년) 1월 8일(신사) 1번째기사
주강에 《주역》을 강하고, 군공의 논상·김덕령의 사람됨 등에 대해 논의하다
“대개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참작하지 않고 마구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무군사일기(撫軍司日記)》를 보았더니 ‘김덕령이 말하기를 「총통(銃筒) 3백 자루를 쏘고 있었더니, 왜적이 저절로 무너졌다. 」고 했다.’ 하였고, 또 ‘쌍무지개가 몸을 둘렀다.’고 하였는데, 어찌 이럴 리가 있겠는가.
당시에 퍼진 김덕령 전설로 보면, 김덕령은 평소에 무지개로 오오라를 쓰며 다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선조는 어이가 없었는지 "우리나라 사람들이란 매사에 좀 말을 침착하게 생각해서 안하고 늘쌍 막 되는대로 내뱉는구나" 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2. 낭중취물 김덕령 장군님
“소신도 이 사람에 대한 일을 듣고 처음에는 믿었으나 본인을 직접 보았더니 별로 취할 만한 실상이 없었습니다. 신이 이귀(李貴)와 같이 자면서 자세히 물었더니 ‘김덕령이 말하기를 「이 왜적을 내가 다 섬멸할 수는 없고 다만 현소(玄蘇)와 의지(義智) 등의 머리를 베어오겠다……. 」 했다.’고 했는데, 이귀의 말이 이처럼 부탄(浮誕)합니다.”
정경세가 극렬 김덕령 빠였던 이귀에게 들은 말로, 김덕령이 "아따 내가 딱 저 놈들을 다 쓸어버리기는 좀 힘들고, 대신 가서 겐소와 소 요시토시 목만 딱 따오겠수다." 라고 말했다는 것으로, 선조는 여기에 대해 "이귀는 본래 헛소리를 잘 하는 놈" 이라고 말하고, 정경세는 "안그래도 신이 이귀 그 사람에게 '헛소리 좀 그만 해라' 라고 말좀 했습니다." 라고 덧붙입니다.
극렬 김덕령 빠였던 이귀. 김덕령 생전에도 온갖 말도 안되는 김덕령 무쌍 전설을 이야기 하고 다녀 선조가 몇번 "헛소리 좀 해라." 라고 한마디씩 했습니다. 이후 인조반정에게 큰 공을 세워 권력의 중심이 되었는데, 수정실록 등에서 보여지는 김덕령의 위엄 넘치는 모습 등에는 이귀의 영향력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귀와 김덕령은 같이 성혼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김덕령은 이귀에게 귀여운 후배- 이자 의외로 나이차 상관이 적던 당시 분위기에서는 동창도 됩니다. 거기에 김덕령이 거병 한것도 이귀가 권유한 것도 있습니다. 친분은 둘째치고 자기가 김덕령을 부추겨서(결국은 그덕분에 헛된 명성으로 죽게 되었으니) 일을 크게 만든것이 미안했었을지 몰라도, 이귀는 김덕령을 띄어주기 위해 별소리를 다하고 다닙니다.
나름대로 후배를 아끼는 선배의 마음일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3. 탱크왕 김덕령 장군님
선조 47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월 11일(경인) 7번째기사
대신 등을 행궁에서 인견하고 송유진 역모, 김덕령 등의 문제에 대해 논의하다
“악비(岳飛)가 용맹을 떨치는 것이 때때로 신(神)과 같았는데도 종택(宗澤) 이 ‘그대는 적 몇 명을 대적할 수 있는가?’ 하니, 악비가 ‘용맹은 믿을 것이 못 된다. 도략(鞱略)을 알아야 적병을 대적할 수 있는 것이다.’ 하므로, 종택이 ‘그대는 항오(行伍) 가운데 있을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었다. 지금 덕령이 스스로 5∼6리(里) 밖에다 진을 치고 단기(單騎)로 돌입하여 짓밟을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 사람에게 큰일을 맡겨서는 안 되겠다.”
김덕령이 말하길 "까짓거 나 혼자서 적군에 달려들어서 다 짓밞을 수 있다" 고 말하자, 선조가 이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이 사람에게 큰 일 맡기면 안되겠다' 고 하는 부분입니다.
3. 원거리 마법 쓰는 김덕령 장군님
선조 60권, 28년(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년) 2월 6일(기유) 1번째기사
《주역》을 강하고, 관찰사의 임명·군공의 허위 문제 등을 논의하다
“신이 동궁을 배종하고 남하했을 때 호남 사람이 김덕령의 기이한 일을 극도로 말하니, 듣는 자는 살피지 않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 진에 속한 사람들은 심지어 상소를 올려서 유 총병(劉總兵)으로 하여금 철수해 돌아가게 하고 영남의 일을 오로지 김덕령에게 맡기려고까지 하였으나, 신은 그 위인을 믿지 않았습니다. 옛 역사책속에 실린 관우(關羽)·장비(張飛)의 지혜와 용맹에 대한 일을 보아도 김덕령이 하는 바와 같은 것은 있지 않습니다. 신이 김덕령을 전주(全州)에서 보고 말하기를 ‘옛날에는 군졸 중에서 뽑혀 상장(上將)이 된 사람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반드시 먼저 전공을 세운 후에야 명장이 될 수 있으니, 모름지기 정예한 군사를 뽑아서 뛰어난 공을 세우도록 힘쓰라.’ 하니, 그는 신의 말을 옳게 여겼으나 그 진중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신더러 오활한 말을 한다 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바야흐로 군사를 모집할 때에는 풍문을 들은 자들이 단지 기이한 말만을 믿고 적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전공을 세운다 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모여들었는데, 지금은 군량이 이미 고갈되고 기이한 일이 조금도 없기 때문에 진에 속한 군사들이 거의 다 흩어져 갔습니다. 또 말[馬]을 색출한 일 때문에 호남의 인심을 크게 잃어 비방이 벌떼처럼 일어나니, 조정에서 비록 군량을 조달해 준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그를 따를 군사가 없을 것입니다.”
이때 선조는 "김덕령을 사람들이 전에는 추켜세워올리더니, 이제는 무능하다고 하는데, 그래도 용맹은 쓸만하니 놀리지 말고 지원을 해주자" 고 제안하자, 이항복이 극도로 부정적인 평을 내리는 부분입니다.
당시에 이미 김덕령의 명성이 허무맹랑하게 퍼져, 주위에서 "김덕령이면 적군을 보지 않고도 공을 세운다" 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에 혹에 김덕령 주위에 몰려들어 한때 세력이 어마어마했으나, 당연히 김덕령이 메테오 스톰이라도 날릴 수는 없었기에 사람들이 실망해서 떠나 세력이 약해졌다는, 코미디 같은 사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4. 호랑이 소환하는 소환왕 김덕령
'이귀(李貴)는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양쪽 겨드랑이에서 범이 나온다는 말을 감히 하였는가. 어찌 그럴리가 있겠는가. '
또 이 분 입니다. 극 김덕령 빠였던 이귀는 이제는 아예 '김덕령은 양 어깨쭉지에서 호랑이를 소환한다' 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닙니다. 여기에 대해 선조는 '대체 이귀 그 놈 뭐하는 놈인가' 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리고 이 '호랑이 소환'은 좀 웃긴 방향으로 이후에도 남게 되는데..
5. 조선의 아크엔젤 김덕령
선조 68권, 28년(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년) 10월 17일(병진) 1번째기사
별전에서 남방과 서북쪽의 변고에 대한 비변사 당상들의 의견을 듣다
“당초 내가, 무군사(撫軍司)에서 한신(韓信)을 대접하듯 한다는 말을 듣고 웃었었다. 익호(翼虎)라는 칭호를 준 것은 더욱 사리에 당치 않은 일이다. 사람의 겨드랑이 아래에 어찌 날개가 있겠는가.”
당초 김덕령의 (저런 용력에 대한) 말도 안되는 명성으로 무군사에서 김덕령에 대한 대우를 마치 초한전쟁기의 명장 한신 대하듯 했는데, 선조가 그 이야기에 대해 '코웃음' 쳤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무슨 사람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나온다더냐' 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김덕령에 대해서 현재까지도 '익호장군 김덕령' 으로 불리는 편인데, 그 익호라는 칭호에는 바로 이런 곡절이 있습니다. 다른게 아니라 '겨드랑이에서 호랑이가 튀어나온다더니,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나온다느니' 하는 허무맹랑한 어원이었던게 어쩌다 보니 진짜 내려진 호칭으로 굳어져버린 겁니다. 말하자면 임금에게 조롱 당한 일종의 흑역사인데...
그런데, 이런 김덕령의 이야기를 결정적으로 높여준 것은 바로,
성룡이 아뢰기를,
“왜노(倭奴)가 익히 듣고 비장(飛將)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죄가 또한 많지만 우선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헌국은 아뢰기를,
“비장이니 협을이니 하는 것은 모두 장성 현감 이귀(李貴)의 설입니다.”
또 이 분 입니다. 또 헛소리 했다고 소환되서 조정에서 까이는 이귀.
김덕령에 대해 '날개설' 외에도 '비장 김덕령' 설 역시 이귀에 의해 널리 퍼지는데, 얼마나 이귀의 포장이 컸는지 심지어 김덕령과 제대로 싸워본적도 없는 일본군 쪽에서도 "저쪽에는 김덕령이라는 비장이 있다던데" 하는 기가막힌 상황이 됩니다.
그 외
4. 점프왕 김덕령 장군
선조 59권, 28년(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년) 1월 8일(신사) 1번째기사
주강에 《주역》을 강하고, 군공의 논상·김덕령의 사람됨 등에 대해 논의하다
"담양(潭陽)의 금성 산성(金城山城)에 불끈 솟은 바위가 있는데, 사람이 도저히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아닌데도 김덕령은 그 바위를 걸어서 넘기를 매우 경첩(輕捷)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고을 사람 20여 명이 목격한 것이라 합니다”"
5. 우리 장군님은 마법을 쓰시겠지.
이에 앞서 국인(國人)들이 말하기를,
“덕령은 신용(神勇)이 있으니 싸우지 않으면 몰라도 싸우기만 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 와서 한 차례 시험에 공이 없자 변경 사람들이 실망하였다.
제군(諸軍)이 진격할 무렵 진주 목사(晋州牧使) 곽재우(郭再祐)가 덕령에게 말하기를,
“장군은 정말 바다를 건너 적을 섬멸할 수 있겠소?” 하니,
덕령이 말하기를
“이번 일은 나의 계책이 아니오. 굴(窟)을 점거하고 버티는 적을 난들 무슨 수로 제압하겠소.”
이렇게 생전의 김덕령은 '허무맹랑한 명성으로 인한 고평가' 와, 여기에 대한 조롱이 혼재하는 평을 받았습니다. 난중잡록 등에서는 대놓고 "3년 동안 공도 못 세웠다" 고 욕먹기도 하고, 실록에서도 "예전에는 대단하다고 막 칭찬하더니 요새는 사람들이 욕한다"는 평처럼 비난도 많이 받은 듯 합니다.
그런 김덕령은 오히려 사망하고 나서 평가가 수직상승하게 됩니다. 선조수정실록에서 보여지는 김덕령의 최후는 흡사 태조 총서 등을 보는 듯한 착각이 일어날 정도입니다.
이건 수정실록을 작성한 주체가 인조반정 세력이다보니, 당파쪽으로도 맞고 김덕령 자체가 죽음이 억울한것 자체는 맞다보니 이 과정에서 많이 윤색된 것으로 보입니다. 어찌되었건 인조반정에서 활약하며 끝까지 김덕령을 돕는 이귀...
앞서 말했듯이 이귀는 김덕령을 거병하게 했고, 도와주기 위해서였는지 몰라도 심하게 김덕령을 윤색하며 명성을 높여주려 했는데, 결국 김덕령은 그 명성이 악영향이 되어서 죽었습니다.
사후 김덕령에 대한 엄청난 고평가는, 김덕령을 자신이 죽게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이귀의 미안함이 포함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스크랩, 추천 후 나중에 천처히 볼께요
선추천
이건 이전에 본 기억이 있는 주제군요..
뭘 하기도전에 죽은 감은 있지요..만 29세에 싸움터가 아닌 형장에서 죽었으니..
“왜적(倭賊) 2백여 명이 고성(固城) 지방에 하륙(下陸)하여 멋대로 노략질을 하는데 복병장(伏兵將) 최강(崔堈)이 소탕해 잡아들이지 못하였으므로 김덕령(金德齡)으로 하여금 군사 2백 명을 뽑아 힘을 합해 복병을 설치하게 하였습니다. 적이 남녀 50여 명을 사로잡아 갈 적에 복병이 싸우다 후퇴도 하며 혹은 요로(要路)로 곧장 달려가 숨어서 요격한 결과 비록 1급(級)도 참획하지는 못했지만 잡혀가던 사람들은 남김없이 모두 데려왔습니다.”
이것만 해도 어쨌든 대단한 공을 세운거고 잡혀가던 사람들에겐 생명의 은인일텐데
패리스힐튼에 비교하는건 좀 아닌듯요
[리플수정]스퀘어/
김덕령을 패리스 힐튼에 비유한것은, 다른게 아니라 '유명세' 라는 부분에 대한 비유 입니다.
물론 50명을 구한것을 큰 공이라고 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 일이 있기 아주 한참 전부터 아무런 전공이라던지 그런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덕령은 '기이할 정도로 유명한 인물' 이었습니다. 심지어 거병하자마자 5천명을 모으고 대번에 조정에서 화제의 인물이 되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별로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테니 그냥 수정하지요.
선추천 후정독
고전소설 임진록에도 김덕령 편이 따로 있을 정도로 민중들 사이에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결국 선조가 잡아 죽이고. 희대의 암군이죠.. 선조.. 의병장들은 이후 뭐 칩거해 버리니 선조 뜻대로 이룸
퇴마록 국내편 3권에서 박수 철기옹이 김덕령을 소환하여 빙의하는거 보고 오오~ 장군님 오오~ 이랬었는데 ㅎㅎㅎ 재밌게 잘 봤습니다.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
역시 믿고보는 신불해님 글이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김덕령은 이름만 들었지 자세한건 잘 몰랐는데 참 재밌는 일화네요
언제나 감사합니다. 잘 보고 있습니다 :)
정기룡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정기룡은 다행이 천수를 누렸습니다만
정말 재미있네요
느낀게 선조가 생각보다 날카롭다는 점 동시에 좀 의뭉스러움.
불펜에서 선조가 능력은 괜찮았다고 하는데 ㄷㄷ
꿀잼!
하아~ 선조 이개노무인간.
광주와 담양 경계에 있는 김덕령의 사당 '충장사'가 광주 시민들에게 나들이의 명소입니다. 정원이며 연못 같은 게 잘 꾸며져 있어서 참으로 소풍하기 좋은 곳이죠. 어릴 때 여기를 자주 방문한 나머지, 김덕령 장군이 엄청난 분인줄 알았었어요. 게다가 소설이긴 하지만 임진록에서도 대단한 무용을 보여줬고요.
이귀란 사람이 김덕령 뻥튀기하는 거 보니까 북한에서 김일성 뻥튀기하는 게 생각나네요. ㅡㅡ;;;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닥추천 드려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재미있네요
김덕령 이름이 좋아서 그러지 않았을까나...
이귀 혼자 떠들고 다닌다고 백성들까지 호응할 리도 없고...
임경업, 정기룡, 김덕령... 대개 후대의 필요에 의해 명장 이미지가 덧씌워진 부류.
그 중에서 김덕령은 TOP급이라 봐야.
신불해 님이 조심해서 글쓴다고 어느 정도 가감을 해서 그렇지
만일 김덕령이 조선 시대 의병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삼국지 인물이었다면
희대의 거품 소리 들어도 할 말 없을 정도...
재밌게 읽고 갑니다. 추천!
“왜적(倭賊) 2백여 명이 고성(固城) 지방에 하륙(下陸)하여 멋대로 노략질을 하는데 복병장(伏兵將) 최강(崔堈)이 소탕해 잡아들이지 못하였으므로 김덕령(金德齡)으로 하여금 군사 2백 명을 뽑아 힘을 합해 복병을 설치하게 하였습니다. 적이 남녀 50여 명을 사로잡아 갈 적에 복병이 싸우다 후퇴도 하며 혹은 요로(要路)로 곧장 달려가 숨어서 요격한 결과 비록 1급(級)도 참획하지는 못했지만 잡혀가던 사람들은 남김없이 모두 데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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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을 보면 왜적 200명을 우리 군 200명으로 이긱, 50명의 인질을 인질 피해 없이 무사히 구했다고 나오네요.
이게 쉬운 것이 아니죠. 복병 전술을 사용했다고 한들... 50명의 인질이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어렵다고 봅니다. 막말로 200명의 왜구가 칼질 한 번만 해도 200명이 순식간에 죽는 판국이잖아요?
흡사, 복병을 이용한 압도적 군세로 위장해서,,, 적장과 일기토를 하지 않은 이상 나오기 힘든 결과라고 봅니다.
유일한 팩트가 저것이라면... 글쎄요.. 지능이 부족한 장비나 허세 뿐인 장군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게다가, 당시가 지금처럼 가짜뉴스 판치는 sns가 있던 시절도 아니고, 한 사람의 구라에 의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는다? 어렵다고 봅니다. 적어도 한 지역에서 거병해서 5000명을 모이게 하려면, 소문만으로는 힘들어요. 막말로, 저렇게 거병한 사람들이 동네 소풍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자기 목숨줄을 거는 거병인데, 소문 뿐인 사람에게 누가 갈까요?
임진록 2+에서 김덕령 ㅎㅎ 호피옷 입고 "김덕령 대령했습니다" 하는 것맘 기억나네요
김덕령에 관한 이 글은 읽어도 읽어도 재미있음
어렸을때 임진왜란시 가장 싸움잘 했던 장군으로 곽재우와 김덕령으로 알고있었는데 나중에 이런 사실들을
알고 엄청 충격먹었다는...ㅎㅎ
추천 날리고 나갑니다..ㅎㅎ
정독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추천 드립니다~
오오 재미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신불해님 글은 항상 ㅊㅊ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