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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한 수 앞

절도 전과자 최무정은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지만, 세상이 그렇게 친절하지가 않았다. 

좋은 직장은 구하기 힘들었고,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도 한 번은 쫓겨났다.
그가 겨우 구한 직업은 방충망을 설치하는 외삼촌의 조수 역할 이었다. 수입이 변변찮을 수밖에 없었고, 한철이 지나면 또 다른 직업을 구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아내가 임신했다. 정말 많은 돈이 필요했다. 곰팡내 나는 단칸방에서 아이를 키울 순 없었다.
앞길이 막막하던 최무정에게 악마의 유혹이 찾아왔다.

방충망 작업을 하던 건물에서 우연히 어떤 집의 통화를 엿듣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그를 흔들리게 했다.

[ 현금으로 1억 원 준비했어요! 예! 경찰에 신고도 안 했고요! 우리 애는 괜찮죠? ]

아이를 유괴당한 집이었다. 최무정은 그 통화를 엿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해버렸다.

지금 저 1억 원을 내가 훔친다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둑질을 한다면. 그 마지막 한 번으로 최무정은 정말 열심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이 힘든 생활을 극복하고, 태어날 아이도 제대로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말 성실하게 살기로 맹세했었다. 게다가 유괴 몸값을 훔친다는 건 정말 끔찍한 행동이다. 그것 때문에 유괴당한 아이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는 절도 전과자였지 살인 전과자는 아니었다.

최무정은 자기 안의 악마와 싸웠다. 눈 딱 감고 한 번만 도둑질을 하자는 마음과 절대 안 된다는 마음이 대립했다.

고민하던 최무정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어쩔 수 없이 훔쳐 들은 날짜를 선명하게 기억했다. 앞으로 이틀간은 그 집에 현금 1억 원이 있다.
장물도 아닌 현금. 어느 부자의 집을 털어도 현금이 그렇게 나오진 않는 세상이다. 독한 마음만 먹으면 도둑놈에게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집에 도착한 최무정은, 살 수도 없는 아기용품을 인터넷 장바구니에 담고 있는 아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쓰레기가 될까?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 남의 집 아이보다는 내 아이가 더 우선이 아닌가?
아니다, 그럴 순 없다. 아내와 만나면서 새사람이 되어 성실하게 살기로 맹세했었다. 이제 부모가 될 사람으로서 그런 끔찍한 행동은 절대로 해선 안 된다.

" ... "

최무정은 자신이 이 번뇌를 떨쳐버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떨쳐버릴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을 했다.

" 여보. 나 지금 할 말이 있어. 들어줘. "

최무정은 가감 없이 모든 걸 털어놓았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자체로 부끄럽지만, 아내에게는 다 털어놓을 수 있었다. 아내는 그의 구원이었으니까.
한데,

" ... "

아내에게선 최무정이 기다렸던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털어놓아 줘서 고맙다고, 흔들리지 말자고, 우리 힘들더라도 성실하게 노력하며 살자고. 그런 말들이 나오질 않았다.

" 여보...? "
" ... "

말없이 고개 숙인 아내는 두 손으로 배를 감쌌다. 그 모습은 최무정의 눈치를 자극하여 설마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고개를 든 아내는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 오빠. 악당은, 악당 짓을 당해도 되지 않을까? "
" 뭐? "
" 돈을 꼭 그 집에서 훔칠 필요는 없잖아. 아이가 무사히 돌아간 뒤 유괴범에게서 훔쳐도 되잖아. "
" ! "

최무정은 머리가 번쩍하는 느낌을 받았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왜 유괴당한 집의 돈을 훔칠 생각을 했을까? 아이와 돈의 교환이 이루어진 뒤 유괴범의 돈을 훔치면 되는데! 

" 악당은, 악당 짓을 당해도...되지 않을까? "

스스로도 어색한 아내의 표정을 보며, 최무정은 심각해진 얼굴로 입술을 다물었다.

.
.
.

최무정은 심플하게 계획을 세웠다. 

당일 돈을 들고 나가는 아주머니를 미행한다. 유괴범에게로 돈 가방이 옮겨가면 유괴범을 쫓는다. 만약 여기서 유괴범이 너무나 뛰어나서 놓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로 깔끔하게 포기한다.
유괴범을 쫓는 데 성공하면, 기회를 봐서 그놈의 돈을 훔친다.

나름 잔뼈가 굵은 최무정은, 아주머니를 미행하는 데까진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었다. 실제로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않아서 더 쉬웠다.

접선 장소는 어린이 대공원이었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아주머니는 초조한 모습으로 분수대에서 기다렸다.
최무정은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멀리서 주변을 관찰했다. 
얼마 뒤, 선글라스에 모자를 쓴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절부절못하던 아주머니는 곧, 남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황급히 달려갔다! 

" ! "

남자는 자연스럽게 바닥에 있는 가방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고, 최무정이 얼른 그 뒤를 쫓았다. 돌아보면 아주머니는 유모차에서 아이를 꺼내어 오열하고, 남자는 점차 달리기 시작했다. 최무정도 그 페이스를 맞춰갔다.

어린이 대공원을 빠져나간 남자는 그대로 지하철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간 최무정은, 그가 화장실에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멀리서 기다렸다.
다시 나타난 남자의 모습이 너무 달라져서 하마터면 놓칠 뻔 했지만, 최무정은 직감적으로 그를 쫓았다. 가방의 종류가 바뀌었는데 소중하게 들고 가는 모습이 그랬다.

남자와 같은 지하철에 올라탄 최무정은 고민했다. 지금 혼자일 때 기회를 보는 게 나을까?
단독범이라면 완벽한 계획을 세워서 나중에 훔치는 게 낫다. 하지만 공범이 있다면 지금 혼자일 때 어떻게든 훔쳐내는 게 더 낫다.

매우 중요한 문제였지만, 사소한 충동으로 결정했다. 그 남자가 한 손으로 핸드폰을 조작하는 순간, 최무정은 그에게로 접근했다.
그리고 지하철 문이 닫히기 직전, 양손으로 가방을 잡고 발로 남자를 강타했다!

" 컥?! "

쓰러진 남자를 뒤로하고, 그대로 닫히는 문 너머로 빠져나가는 최무정! 등 뒤에서 들려오는 고함을 무시하고 미친 듯이 달렸다!
개찰구를 뛰어넘고, 지하철을 빠져나와 곧바로 택시를 잡아타는 최무정! 

" 동대문 빨리요! "

동대문에서 다시 버스로 옮겨타며 안전하게 집까지 도착한 최무정. 그는 1억 원이 든 가방을 아내 앞에 내려놓았다.

" 아이는 무사해. "
" 오빠...! "
" 이게 내 평생 마지막이야. 다시는 하지 않을게. 정말로. 태어날 우리 아이에게 맹세하고. 아이를 위해서. "
" ... "

서로 눈을 마주한 둘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최무정은 1억 원을 들고 경찰서로 향했다.

" 자수하겠습니다. 제가 어제 1억 원을 훔쳤습니다. "
" 예?! "


어젯밤. 잠든 줄 알았던 아내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녀는 가만히 이불을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 오빠. "
" ... "

그녀는 최무정이 깨어있는지 어떤지도 확인하지 않고 말했다.

" 오빠 나 모르는 척했어. "
" ... "
" 유괴범이 갑자기 돈을 도둑맞게 되면, 그 아이에게 해코지 하지 않을까? 돈을 훔친 범인이 뻔하다고 생각할 거 아니야. "
" ... "
" 잠이 안 와 "

그 밤, 최무정도 아내처럼 잠들 수 없었다. 


최무정은 경찰에게 말했다.

" 최대한 제 범행을 널리 알려주세요. 유괴범의 귀에도 들어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

그의 말대로 되었다. 유괴 몸값을 훔친 도둑의 이야기는 충분히 흥미로웠다.
사람들은 이 특이한 사건을 널리 공유했고, 신문과 TV에서도 다뤘다.

1억 원을 되찾게 된 아주머니는 경찰서에서 최무정을 만났다.
최무정은 각오했지만, 아주머니는 고개를 숙였다.

" 저는 당신의 처벌을 원치 않아요. 고맙습니다. "
" 아... "

최무정은 그녀의 용서에 감동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
" 괜찮아요. 당신의 사정을 이해해요. 사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

이렇게 되자, 경찰에서도 처벌이 애매해졌다.
한없이 좋게 보면 돈을 주워서 되찾아준 것이었고, 나쁘게 보면 '최무정이나 유괴범이나'였다.

죄를 의도에 둘 것인가 결과에 둘 것인가?

궁금한 그 판결이 아직 나오기도 전. 
아내는 또, 최무정이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 오빠가 그렇게 나선 건 나도 참 자랑스러워. 그런데...그 유괴범이 우리한테 해코지하면 어쩌지? 나중에 우리 애한테 그러면 어쩌지? "
" !! "

최무정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 생각을 왜 못 했을까!
이 세상은 악당에게 너무 유리하다. 예전에 자신이 악당일 땐 몰랐다. 악당이 너무 유리하다.

그는 후회했다. 평범하게 살겠다는 힘든 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악당이 되지 않겠다는 힘든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한데 천만다행으로, 최무정에게는 뜻밖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 유괴범은 곧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 그게 정말입니까?! "
" 최무정 씨가 지하철에서 가방을 훔쳐 달아날 때, 그 유괴범이 최무정 씨를 잡기 위해 역사로 찾아왔답니다. CCTV를 보여달라고. "
" 아! "
" 결과적으로 최무정 씨 덕분에 유괴범을 잡게 되었군요. 하하하 "

실제로 며칠 만에 유괴범은 잡혔다. 
그동안에 최무정은 처벌에서도 자유로워졌다. 아내의 불안도 덜어줄 수 있었다.

" 이제 보복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유괴범이 잡혔으니까. "
" 응 오빠. "
" 오빠가 이젠 정말 열심히 살게. 일자리를 구해주겠다는 분들의 연락도 계속 오고 있으니까..그 감사함을 생각해서라도 오빠는 이제 정말 열심히 살 자신이 있어. "

최무정은 이번 사건을 통해, 세상에 좋은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자신을 용서해주었던 그 아주머니가 그랬다.

그리고 그 좋은 아주머니는 방송에서 말했다.

[ 저는 유괴범의 처벌을 원치 않아요. 그에게도 사정이 있었겠지요. ]

" ... "

할 말을 잃은 최무정은 생각했다. 
유괴범의 형량이 얼마나 될까. 그동안 나에 대한 원한을 씻어낼 수 있을까..
댓글
  • 복날은간다 2017/10/20 00:55

    며칠간 바짝 이야기 쓰기에만 집중하다가, 한순간 풀어졌더니 머리가 맹하네요. 중반까지 잘 쓰다가 멈추고, 중반까지 잘 쓰다가 멈추고 하는 일이 늘어나네요; 이상합니다 흐하하..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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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색이리 2017/10/20 01:04

    첫댓이라니! 선추천 후감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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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ㅇㅅㅇ 2017/10/20 01:33

    잘 풀린다 했더니만 마지막에서 소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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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똥의흐름 2017/10/20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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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SOY 2017/10/20 02:32

    최무정은 왜 아주머니의 용서에 감동한건가요? 1억원을 아주머니한테 돌려준 게 아니라 자기가 쓰려 해서 그런가요? 아주머니는 오히려 최무정한테 고마워해야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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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rp 2017/10/20 10:33

    헐...
    이번 거 결과가 어떻든(법적으로 형사처벌은..) 대박입니다. ㅎㅎ
    이야기의 무대를 한국에 한정하지 말고, 법 적용이 우리와는 다른 외국을 무대로 하는 것도 더 무궁무진한 소재를 찾을 수 있을 듯 하네요.
    태형이라던가, 형량의 차이, 기소권, 공소시효, 친일청산(독일은 90넘은 사람도 감옥가는데...) 등등 말이죠.
    특히 이런 현실적인 법 적용의 이야기에선 복날은간다님의 창의력을 한국의 법 테두리는 감당할 수 없을 듯 해서 말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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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질풍의라빈 2017/10/20 11:01

    잘봤습니다~
    아이도 무사히 찾고, 돈도 잃지 않았으니 아주머니는 유괴범이 별로 밉지 않아졌나보네요 허...
    그래도 형법상 유괴는 죄가 좀 무겁지 않나요? ㅎㅎ;;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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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이내린미모 2017/10/20 11:06

    복날님 이야기는 항상 예측을 할수없어서 좋아요 전 글 읽는 내내 뭔가 아내가 흑막! 아내가 반전! 이 있을 거라고 두근거렸는데 아니었네요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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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지개솔로처 2017/10/20 14:05

    복날님 글을 읽으면 항상 숨이차요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입장이 (그들의 사연이) 공감이 가기때문에 과연 결말이 어찌 될것인지 더 긴장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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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gdha 2017/10/20 16:32

    최무정씨는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미성년자약취유인죄는 유괴당한 아이 엄마가 선처를 요청해도 강력범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양형에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불기소가 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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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똑똑똑! 2017/10/21 09:35

    `집에 도착한 최무정은, 살 수도 없는 아기용품을 인터넷 장바구니에 담고 있는 아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심리묘사 또한 대단하셔요. 어떻게 단박에 최무정의 심경을 이해하게 만들 수가 있죠?! ㄷ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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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래오래살자 2017/10/23 00:59

    혹시나 유괴법을 강력히 처벌하길 원한다고 말했으면 또 해코지 할까봐 그런거 아니었을까 싶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것은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 되는 허술한 법이기 때문인 것이 드러나는 슬픈 상황이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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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리시 2017/10/23 01:39

    주인공들의 이름은 어떤식으로 생각하시나요?
    최무정이라는 인물을 그리기 위해 이름부터 정하는건가요?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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