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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딸,괴문서)일등성이 그려 온 궤적의 마침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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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 출처: https://www.pixiv.net/artworks/108788058)



이전 편: [1화][2화][3화][4화][5화][6화][7화][8화][9화]






유달리 눈이 많이 흩날리는 겨울의 어느 날.
‘딸칵, 딸칵.’
트레이너실에는 자그마한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좋아, 끝났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나던 그 소리는 다소 진이 빠진 듯한 트레이너의 말과 함께 멎었다.
“매번 느꼈던 거지만 정말 당신의 관리는 엄청 꼼꼼해.”
“우마무스메에게 발은 단순히 보행기관을 넘어선 무언가니까 관리에 대한 교육을 좀 강하게 받거든.”
담당의 말에 답해주면서 그는 빠르게 뒷정리를 진행했다. 최대한 청결하도록 구석구석을 빠르게 쓸어낸 후 떨어져 있던 먼지가 담긴 쓰레받기를 휴지통에 탈탈 터는 트레이너를 자수정 색 눈으로 보던 아야베는 발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그래? 트레이너 과정은 몰랐는데, 그런 사소한 일에도 깊게 신경 쓰는구나.”
“나한테 익숙해져서 그렇겠지만, 기본적으로 URA 트레이너들은 우마무스메를 위한 교육자야. 제자들이 조금이라도 다치지 않게 노력해야지.”
“그렇구나, 잊고 있었어.”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보며 일말의 날카로움도 없이 둥글게 전부 다듬어진 발톱을 꼼꼼히 확인한 아야베는 다리를 움츠려 덮고 있는 담요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창 너머,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나는 나풀나풀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보다가 말했다.
“경주를 위한 발 손질을 받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네.”
그녀의 말에 최대한 연하게 우린 따뜻한 밀크티를 한때 입에 달고 살던 커피 대신 잔에 담은 트레이너 역시 실감이 안 간다는 느낌으로 받아줬다.
“그렇지, 오늘이 마지막이지.”
역시나 찻잔을 받은 아야베는 찬찬히 연한 밀크티를 홀짝거리면서 지난 세월을 떠올렸다. 아직도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는 처음 만난 순간. 그것이 아련한 옛날의 기억처럼 떠오르는 가운데,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지난 몇 년 사이 최고의 행운은 당신을 만나게 된 것으로 생각해.”
진심이 담긴 아야베의 말에 트레이너는 입에 가져갔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네가 날 받아준 것이 최고의 행운이었던 것 같거든.”
“후후, 우리 둘 다 생각이 같네?”
그녀가 살짝 웃으면서 찻잔을 양손으로 쥐는 가운데 그 역시 웃음을 띠며 옆에 앉았다.
“근데 오늘 정말 기숙사로 안 돌아갈 거야?”
“응, 후지 씨한테 미리 통보해서 허가도 받았거든. 그래서 이불 건조기도 가져왔어.”
“정말 그건 잊지 않고 챙기는구나.”
“이불은 폭신폭신해야 하고 폭신폭신해야 이불이니까.”
‘아니 여기서 닭과 계란의 논쟁을 꺼내면 이상한데’라 생각한 트레이너는 왜 굳이 후지 키세키가 순순히 허락해 줬는지 추측을 시도했다.
“어쩌면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보내지 못한 거에 대해 나름 타협해 준 게 아닐까 싶네.”
그리고 그가 나름 고심한 끝에 내놓은 추론에 아야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맞다 그랬지.”
“솔직히 그때 도토가 말 안 해줬으면 크리스마스가 지나간 줄도 몰랐을걸.”
최후의 레이스를 앞둔 최후의 트레이닝 일정은 크리스마스 이틀 전부터 찾아온 폭설이라는 자연의 힘 앞에 모조리 가로막혔다. 결국 플랜B를 꺼내 들어 겨울방학 시기인 것, 그리고 아리마 기념이-여담으로 오페라 오는 패배를 만회하나 싶었지만, 결국 5착이라는 엄청난 패배를 기록했다-막 끝났음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이른 새벽부터 점심시간까지 이루어진 실내 트레이닝 시설 순회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그 후 몰려오는 피로 탓에 트레이닝실과 기숙사로 돌아가자마자 뻗었다가 깨어난 후 들은 소리가 문제였는데.
‘하, 하루 늦었지만 두 분 다 메리 크리스마스에요오오….’
그랬다.
트레이너나 어드마미어 베가나 피로로 뻗어버리고 하루 종일 일어나지 못해 생각지도 못하게 성탄절 하루를 통으로 날려버린 것이었다. 가끔 술독에 빠진 후 이틀 동안 못 깨어나면 커플천국 성탄절을 겪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냐는 유머가 돌긴 했지만, 막상 실제로 자고 일어나니 진짜로 하루가 삭제되어 버린 사태를 겪은 두 사람은 어이가 없긴 했다. 뭐, 어차피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가벼운 트레이닝으로 최종 점검을 마치려던 계획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오늘 관리를 끝낼 수 있어서 다행이야.”
트레이너의 안도감이 담긴 말에 귀를 살짝 까딱거린 아야베는 점차 식어가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신 후 그에게 몸을 기댔다.
“내일이면 정말로 마지막이 찾아오는구나.”
“응.”
“언제 그날이 오려나 싶었는데, 막상 눈앞에 다가오니 느낌이 이상한 걸.”
“인생에 큰 비중을 차지했던 일의 끝이 다가오면 누구나 그럴 거야.”
“후후, 그러려나.”
몇 시간 후면 찾아오는 여정의 마지막을 소재로 가벼이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이내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며칠째 계속해서 내리는 눈이 모든 소음을 가라앉히는 가운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내일이 지나고 나면, 이제 정말 졸업만이 남게 되는구나.”
“그렇지.”
덤덤히 답해주는 트레이너의 말을 들으며 아야베는 눈을 감았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게.”
“그래, 모든 미련을 털어내면서 끝을 마주하는 거야.”
작지만, 일념이 담긴 그녀의 말에 답해주며 트레이너의 눈도 천천히 감겼다.
아 맞다, 이불 건조기.
막상 아야베가 가져왔는데 쓰기도 전에 잠들게 된다니.
새삼 그 위력을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무언가 아깝기도 했다.
전야의 밤은 그렇게 평소보다 조용히 잠든 두 사람의 숨소리를 곁들이며 지나가고 있었다.
-⏲-
눈, 추위, 잔디.
그리고 게이트.
마지막 경주로부터 1년이 조금 더 지난 탓일까.
입장 통로 너머에서 보이는 교토 경기장의 모습은 어딘가 낯익으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게 그리 큰 불편함을 주진 않았다.
-그날도 이랬지.
부여된 번호에 맞춰서 게이트 안에 들어간 채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어드마이어 베가는 생각 했다. 이건 그날, 그녀가 고꾸라질 뻔했던 국화상의 재현이라고. 계절의 차이가 있지만 같은 경기장, 같은 거리, 심지어 우연이겠지만 번호조차 같은 것을 받았다.
「수많은 명망 높은 우마무스메 중에서 올해의 겨울 장거리를 제패할 것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마지막 게이트 인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을 천천히 풀며 자세를 갖추는 아야베의 눈에는 주변에 어떤 우마무스메들이 있는지 그리 크게 의식되지 않았다. 애초에 이 경주에서 넘어서야 하는 것은 이름만 들어도 바로 알 수 있는 다른 경쟁자들이 아니다.
‘탕!’
ㅡ철컹!
「시작되었습니다! 겨울의 명예를 향하여 모두 순조롭게 출발을 이뤘습니다!」
이건 그녀가, 어드마이어 베가가 자신이라는 벽을 넘기 위한 경주.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하여, 그녀의 편자는 얼어붙은 땅을 부수고 헤집으며 박차고 나아갔다.
-⏲-
몇 분 전.
게이트 입장을 앞두고 승부복으로 갈아입은 아야베에게서 트레이너는 이전과 다른 점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승부복에 무늬가 생겼네.”
생각해 보면 여름에 승부복을 손보겠다는 말을 들었었다. 하지만 요청 사항은 물론이오, 업체에 맡겼다가 다시 받은 승부복도 꼭꼭 숨겨진 채 빛을 볼 날이 되기 전까지 꺼내지지 않았다. 물론 좀 궁금해서 말해보려 하면 ‘그날이 오면 제일 먼저 볼 건데 굳이 지금 볼 필요가 있어?’라는 답이 돌아왔을 뿐.
즉, 수정을 거친 승부복을 보게 된 것은 지금, 이 순간이 처음이라는 소리였다.
“바로 알아챘네?”
“별자리 형태니까 눈에 바로 들어올 수밖에.”
이전과 달리, 왼쪽 다리 그리고 왼쪽 가슴부터 오른쪽 옆구리에 걸쳐 새겨진 새로운 무늬. 그건 다소 익숙한 점과 선으로 그려진 문양이었다.
“그럼 어떤 별자리인지 알겠어?”
“일단 왼쪽 다리에 새겨진 건 쌍둥이자리 같은데.”
트레이너가 그녀와 함께 플라네타리움을 비롯하여 별을 보러 다니던 기억을 떠올리며 추측해 낸 것은 쉽게 들어맞았다.
“정답. 그러면 상의에 새긴 건?”
“흠.”
솔직히 승부복이라 한들 아무래도 바로 눈에 확 들어오지 않으면 트레이너들은 크게 의식하려고 하지 않았다. 잘못하면 이상한 취급 받기 딱 좋은데 누가 그런 자기 무덤을 파는 짓을 할까.
“좌측에 그려진 건 일단 거문고자리인가.”
“어떻게 알았어?”
“그야 베가가 강조되어 있는 형태로 새겨져 있으니까.”
약간 중심으로 기울어진 형태로 거문고자리의 베가가 새겨진 형태의 별자리 문양 역시 그러했다. 그냥 넘어가면 좋아하는 별자리를 새겼구나, 하고 넘길 만한 위치. 하지만 좀 주의 깊게 관찰하면 심장이 있을 만한 자리를 표현하듯 다소 크게 묘사된 하나의 별이 있었다. 뭐 위치가 위치인 이상 어지간해서 신경을 깊게 쓰기 힘든 게 문제긴 하지만, 그 강조된 별을 중심으로 이리저리 머릿속에서 돌려보면 곧바로 어떤 별자리인지 답이 나왔다.
문제는 우측 아래, 배부터 옆구리로 이어지는 무늬였지만.
마치 중심의 축을 이루는 장식과 단추에 의해 갈라진 것 같은 그 무늬는 영 알아보기… 잠깐 거문고자리, 그것도 연한 색의 상의 중심을 축으로 삼아 마주 보고 있는 별자리? 한순간 어떤 신화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베가를 일본에서, 동양에서 어떤 이름으로도 불리던가?
그리고 그 별이 어떤 별하고 엮인 설화가 있던가?
“…알타이르?”
그렇게 기억을 더듬어간 끝에 베가와 대응되는 동양 신화에 나오는 별의 이름을 말하자, 아야베는 슬쩍 미소 지었다.
“소속된 별자리 이름을 못 맞춘 게 아쉽지만, 그 정도면 훌륭해.”
“끙, 아직 전부 머릿속에 담아둘 수준은 아니다 보니.”
“후후, 그럴 수도 있지.”
여전히 별자리에 관한 건 어려워하는 듯한 그의 말에 그녀는 다시 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결국 그 취미에 끌려간 것도 그녀, 어드마이어 베가의 고집에 의한 것. 하지만 다소 난해하더라도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 별의 이름만이라도 외우고 있다는 건, 결코 보통 사람이 취할 수 있는 행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했다.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이 사람은, 트레이너는 그녀에게 있어서 분에 넘치게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럼 가볼게, 나중에 봐.”
언제나 생각하던 걸 다시금 선명히 느낀 아야베는 그 감정을 품은 채, 게이트에 입장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야베.”
그런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시간에 맞춰야 했으니,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걸 알기에, 일등성이 마음에 품은 사람은 말했다.
“원하는 대로 끝을 보고 와.”
“…응.”
여러 생각이, 말이 녹아 들어있는 말.
그것에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답해준 그녀는 문을 열고 나섰다.
-⏲-
다시 시간을 돌려서 현재.
‘투두두두두-.’
18명의 우마무스메들이 질주하면서 일어나는 진동이 경기장 전체를 선명히 울린다. 아무리 새벽부터 관리 측에서 점검했어도 남아있는 눈이 얼어있는 잔디가 단단해진 흙과 함께 튀어 오르고 한 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골을 향해 모두가 달려 나간다.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명예일 것이오.
누군가에게는 그저 즐거운 연말 연장전으로 여기는 윈터 드림 트로피.
하지만 트레이너는 알고 있었다, 그의 담당에게 있어서 이 경주는 그 다수를 차지하는 두 사례에 전혀 부합되지 않음을.
장거리라는 특성상 아직 본격적으로 마군이 형성될 시점은 아니었기에 바로 눈에 들어오는 남색의 승부복. 아주 잠깐 눈에 담긴 후 궤적을 그리며 나아가는 그 색을 쫓으며 그는 팔짱을 낀 손에 힘을 넣었다.
“달려라, 아야베.”
-모든 걸 털어낼 수 있을 정도로, 원 없이.
비록 단 한 번으로 그것이 가능할지는 몰랐으나, 그는 누구보다 그녀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를 원했다. 그걸 위해서 그가 어드마이어 베가의 담당 트레이너가 된 거 아니던가. 쓰러지지 않고, 원하는 대로 달릴 수 있도록. 우마무스메라면 누구나 품는 갈망의 끝을 볼 수 있도록.
그러기에 그는 어느새 두 번째 코너로 향하고 있는 우마무스메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원하는 대로 뛰어라, 아야베.
마지막을 바라는 대로 그려낼 수 있도록.
여정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도록.
-⏲-
한편 관중석 어느 곳.
자리의 예약이 열리기 전부터 ‘클래식 때 함께한 리바르의 마지막 경주라는데 반드시 두 눈으로 보고 와야 하지 않겠나’라는 매우 타당한 감정적인 논리를 밀어붙인 티엠 오페라 오의 고집은 꽤 좋은 결과로 증명하고 있었다. 그녀를 비롯하여 나리타 탑 로드, 메이쇼 도토는 전부 최대한 경주를 우러러볼 수 있는 최적의 자리들을 휩쓸어 그녀들의 트레이너들과 함께 연말의 마지막 경주를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생각해 볼수록 이해가 안 가는 게, 어째서 아야베 씨는 중거리가 아닌 장거리를 택했는지 모르겠어요.”
코너를 돌아가며 본격적으로 마군을 형성하기 시작한 양상을 보며 탑 로드는 솔직하게 먼저 감상을 밝혔다.
“그림 리퍼가 아야베 씨에게서 떠나간 날, 그날에 대한 미련이 생겼으니 그런 것이 아니겠나.”
그 말에 대해 오페라 오는 오페라글라스로 양상을 두 눈으로 좇으며 다소 덤덤히 답했다. 국화상 당시 아야베에게 이상 증세가 닥쳤던 것은 후일 녹화된 영상을 돌려보다가 알게 되었다. 그걸로 인해 사실상 간신히 완주에 성공한 수준이었던 그 경주는 어찌 보면 넘어야 할 최후의 벽으로 남게 되었으리라는 건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근데 뭔가 오페라 오 씨가 그런 말 하니 안 어울-.”
“도토, 스탑!”
“아, 핫핫핫!”
문제는 물끄러미 그걸 듣고 있던 도토가 눈치도 없이 오페라 오의 아픈 부분을 말하려 하자 그녀의 트레이너가 빠르게 입을 막았다는 거지만. 물론 오랜 친구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바로 눈치챘기에 곧바로 웃어넘긴 ‘패왕’은 다시금 경기에 집중했다.
-제일 의문인 건 거리도 거리지만 작전인데.
한창 질주할 때나 보일 법한 예리한 눈빛으로 옛 라이벌을 뒤쫓고 있던 오페라 오는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소리로 혼잣말했다.
“대체 왜 선입을 택한 거지? 아야베 씨.”
-⏲-
아야베의 라이벌들만 그녀의 마지막 경기를 보러 왔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오, 빠르다 빨라! 이게 세대를 풍미한 최강들의 경주지!”
일단 정글 포켓.
재팬컵에서 슬럼프를 이겨내고 ‘패왕’의 지배를 종결시킨 그녀는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는 이들을 보면서 신이 제대로 나 있었다.
“출주한 우마무스메들이 하나같이 너무 유명하네요. 저도 언젠간 저기에서 뛸 순 있을까요?”
아직 자신의 재능에 대해 자신감을 그리 크게 가지지 못한 채, 어쩌면 아리마 기념보다 더 호화로울 수 있는 이들로 구성되어 새벽에 내린 눈이 흔적을 남기고 있는 터프를 질주하는 모습을 바라 보고 있는 단츠 플레임.
“흐음, 역시 한번 한계를 돌파한 우마무스메들이다, 이건가. 꽤 진귀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겠군.”
올해 사츠키상 이후 한동안 다리 문제로 요양하다가 아리마 기념에서 복귀하며 화려한 부활을 알리기 시작한 아그네스 타키온.
“….”
특기인 장거리 경주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눈으로 말없이 뒤쫓고 있는 맨하탄 카페 등.
올해 이름을 날린 이들은 전부 왔다고 봐도 무방했다.
“카페? 무엇을 그렇게 보고 있나?”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동기에게 타키온이 작은 호기심이 생겨서 묻자, 들려온 말인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친구’가….”
“친구? 자네의 이매지너리 프렌드?”
“네, ‘친구’가 터프의 선두에서 달리고 있어요.”
“…뭐라?”
과학적으로 규명하기 어려워서, 비꼬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카페는 상상 친구를 본다’라는 쪽으로 생각하던 타키온이었기에 그녀의 말이 가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고 보니 야요이상과 사츠키상 이후에도 ‘당신은 ‘친구’를 따라잡을 뻔했다’라는 돌이켜 생각해도 뭔가 이상한 말을 듣긴 했는데….
-이거 참 신기한 일이로군.
타키온은 여태 비슷한 말을 들었던 기억을 토대로 곰곰이 생각하며 다시 꽤 유별난 형태의 붉은 눈동자를 터프로 돌렸다.
“이번에는 누구를 인도하고자 뛰는 것인가, 카페의 프렌드여.”
-⏲-
환호가 들려온다.
“후우-.”
바닥을 박차고 나아가며 끓어오르는 열이 입에서 하얀 김처럼 뿜어진다.
추위에 반역하듯 치솟는 땀의 폭포는 점차 얼굴과 몸을 뒤덮었다.
마군을 형성했다가 흩어지고 다시 형성하고를 반복하는 우마무스메들의 형태가 보이지만, 자수정 색 눈은 오직 앞을 향했다.
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그날의 기억이 흉터처럼 잔류하는 자신이다.
‘파사삭.’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긴 귀에 얼음인지 서리인지 모를 것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어드마이어 베가는 그 소리에 더는 집중하지 않았다.
-넘어 보이겠다.
반드시.
그것이 트레이너와, 그 사람과 한 약속이니까.
가진 모든 것을 불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강렬한 그 각오가 가슴을 가득 채운 순간, 어드마이어 베가의 시야가 바뀌었다.
오직 그녀만이 존재하는 것만 같은 밤하늘 아래의 호수.
그 위를 질주하기 위해, 일등성은 왼쪽 다리에 강한 힘을 불어넣으며 바닥을 흩날리며 튀어 나갔다. 수없이 많은 유성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넘어야 할 것은 눈앞에 자리하고 있었으니.
일등성이 내뿜는 빛은 순식간에 비대해지기 시작했다.
-⏲-
어디서 본 것만 같은 주법이다.
그 생각은 벌써 3번째 코너를 향하는 어드마이어 베가의 위치는 물론이고, 전술의 양상에서 가까운 이들 모두가 느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누구랑 비슷한가, 하면 무언가 표현하기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었다.
“아야베 씨의 지금 주법, 도토랑 비슷하지 않은가?”
‘패왕’이 놀란 눈으로 좇으며 무심코 내뱉기 전까지는.
“확실히…. 그런데 저렇게 파워로만 치고 나가면 나중에 무리가 따르지 않아요?”
“스테이어의 자질이 있지 않다면, 확실히 그러하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투로 탑 로드가 말하자 오페라 오는 쉽게 수긍했다. 저 방법은 도토나 그녀처럼 타고난 파워와 그걸 뒷받침해 주는 체력이 있지 않으면 반드시 뒤탈이 일어나는 주법이었다.
“그, 제가 보기에는 탑 로드 씨와도 비슷한 거 같은데요…. 평소의 아야베 씨와는 달라요오….”
한편 자신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도토는 또 다른 것을 읽어내고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저 말을 듣고 다시 보니 기존의 추입 계획에 따라 뛰던 것과는 달리, 우직할 정도로 정직하게 마군을 벗어나기 위한 시도가 어느 정도 읽히긴 했다.
“저걸 위해서 선입 작전으로 틀었다고? 아니, 그렇게 생각해도 뭔가 이상한데.”
친구들의 말을 종합하자 더 말이 안 되는 상황에 그 오페라 오가 큰 의문을 품는 가운데, 관람석의 또 다른 곳에서 아야베가 무엇을 보이려는 지 깨달은 카렌짱은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막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저게 가능한 거였어요?”
같은 시기에 뛰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렇기에 오히려 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카렌은 룸메이트인 그녀가 왜 훈련 양상을 숨겨온 것인지 오래도록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마치 뒷각질의 트릭스터와도 같은 모습은 그 의문을 순식간에 해결하고 있었다.
일등성은 찬란한 태양과도 같은 친구의 정직함을 따라 했다.
일등성은 끝없이 도전하는 친구의 근성을 선보였다.
이 순서대로면 다음은-.
「어드마이어 베가! 마군에서 벗어났습니다! 바깥에서 순식간에 치고 올라갑니다!」
카렌의 분홍 눈이 홀린 듯이 경주장을 향해있는 가운데, 한순간에 경쟁자들을 제치면서 한순간에 치고 올라가는 룸메이트의 모습에는 파란 궤적과 하얀 궤적이 뒤섞여 있었다.
-⏲-
가슴이 터질 듯이 뛴다.
폐가 끝없이 차가운 공기를 갈망한다.
뜨거워진 피가 전신을 달구면서 쏟아지는 땀이 하얀 궤적을 그리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다리가 한계를 향해갔다.
근육이 뒤틀렸다 풀리기를 반복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아직 안 돼.
이를 악문 어드마이어 베가는 다시금 땅을 부수며 전진했다.
지금 여기에서 고꾸라지면, 한계에 가로막히면 안 되었다.
하지만 장거리에 최적화되어 있지 않은 그녀의 몸이 끝없이 반발했다.
한 걸음, 한 걸음만 더.
어금니가 짓이겨지며 입안에서 비릿한 쇠 맛이 퍼지는 가운데, 자수정 색 눈동자에 붉은색 고리 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렇게 궤적에 보랏빛이 뒤섞이는 가운데, 여전히 앞서나가고 있는 우마무스메들이 저 멀리 나아가는 혜성처럼 아른거렸다.
한계가 다가온 것인지 쏟아지던 땀의 폭포는 이내 시야를 가렸다.
다시금 반복되는 것만 같은 상황에 얼굴에 절망이 아른거리는 찰나.
땅으로 떨어진 후 빛을 잃은 작고 푸른 별에서 한 줄기 빛이 치솟았다.
그리고 그 빛은 벽에 가로막히기 시작한 그녀의 왼쪽 다리를 떠밀었다.
생전 얼굴을 마주한 적 없던 자매가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며, 마지막으로 남겨뒀던 희미하기 이를 데 없는 빛. 그 작고 푸른 빛줄기는 다리에 새겨진 쌍둥이자리를 밝히며, 한계에 가파른 속도로 가로막혀 가던 어드마이어 베가가 마침내 그것을 깨트리고, 넘어설 수 있는 가속을 더해줬다.
일등성은 마침내 ‘패왕’의 터프를 지배하는 패도를 선보였다.
ㅡ그 순간 일등성은 마침내 초신성에 다다랐다.
-⏲-
믿을 수 없는 급가속은 궤적을 남기다 못해 교토의 터프에 강렬한 빛과 함께 산화하는 것만 같이 일등성을 내달리게 했다.
각자의 애마를 열렬한 외침으로 응원하던 이들은 코스 안쪽에서 중심으로, 중심에서 바깥으로 이동한 후 잠시 실속하는 듯하다가 급격히 속도를 올리며 선두 집단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지는 푸른 유성의 모습에 순간 숨을 죽였다.
이것이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장거리라는 벽에 가로막혀 있던 위태로웠던 별이, 이토록 선명하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며 골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은 정말 찰나의 순간이지만 해설자의 외침 외에는 다른 소리가 안 들리게 할 정도로 시선을 빼앗기게 했다.
자신을 불태우던 푸른 혜성은, 이제 이 레이스를 보러온 모두의 기억에 남는 초신성으로 장렬하게 산화하고 있었다.
그건 결코 자기 파멸적인, 신체의 안위를 신경 쓰지 않고 도주하는 이들과는 달랐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재능을 오직 이 자리에서 전부 불태우는 덧없음에 가까웠으니,
「앞으로 100미터! 어드마이어 베가, 추격을 떨쳐냅니다! 거리가 점점 벌어집니다! 1마신! 2마신!」
급박한 말이 경기장을 울리는 가운데, 질주하고 있는 푸른 별에 시선이 고정된 트레이너의 눈에는 일순간 그녀의 표정이 보였다.
아야베의 입에는 짙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어드마이어 베가, 골인! 어드마이어 베가! 일등성의 광채가 겨울의 교토를 찬란히 밝히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이내 교토를 울리는 선언이 스피커를 통해 터져 나왔다.
일등성이 최후의 불꽃을 불태워 교토의 터프에 궤적을 남기는 데 성공함과 동시에, 선발 레이스에서부터 이어진 몇 년의 여정에 마침내 마침표가 찍힌 순간이었다.
-⏲-
골에 도달한 후, 빠르게 속도가 떨어져 가다가 이내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버티고 서있게 된 아야베의 감각은 마침내 본래대로 돌아왔다.
수없이 많은 이들의 환호.
끝없는 갈채.
그리고 여전히 계속되는 해설자의 쩌렁쩌렁한 외침.
-이겼다….
그제야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최후의 레이스에서, 마지막 명예를 품는 데 성공했다고.
한계가 찾아왔을 때, 순간 5착 안에 드는 것마저 포기할 생각이 들었다. 그저 완주만 하면 성공일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꺾여가던 순간, 가로막던 벽이 무너져 내렸다.
더비에서도 느껴본 본능을 따라서 생긴 짜릿함이 아닌, 알 수 없는 강렬한 해방감. 그것이 왼쪽 다리를 휘감음과 동시에 모든 것이 잊히며 그녀를 질주하게끔 했다.
그 감각을 되새기는 와중에 여전히 이마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땀은 겨울의 공기와 마주하며 순식간에 식어갔다. 점차 몸이 식어가는 와중에 아야베는 천천히 관람석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말없이 미소를 지은 채 몸을 숙이며, 이 순간과의 작별을 고했다.
그래, 이제 두 번 다시 이 열화와 같은 성원을, 겨울을 달구는 환호를 받을 수 없겠지.
작별을 알리는 것만 같은 그 인사에 다시금 환호성이 들리는 가운데, 교토의 겨울은 다시 찬찬히 공기를 식혀갔다.
-⏲-
퇴장 통로.
관람석에서 몸을 빼내어, 환호하고 있는 이들 사이를 지나온 트레이너는 아직도 울리고 있는 스피커의 진동이 왠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내 긴장을 유지하고 있던 팔은 믿을 수 없는 1착의 선언이 울리자, 한순간에 경련하듯 떨렸을 정도였다. 마침내 그의 담당의, 어드마이어 베가의, 아야베의 여정이 끝을 맺었다. 그것도 마지막 명예를 손에 넣으며.
먼저 퇴장하는 우마무스메들과 그녀들의 트레이너들이 각자의 아쉬움을 들릴 듯 말 듯 하게 얘기하며 빠져나가는 가운데, 그의 담당은 아직 모습을 비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따각, 따각.’
그렇게 영원과 같이 느껴지는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금 환호가 울린 후 누군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니, 사실 굳이 누구인지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몇 년 동안 함께하며 이제 편자가 부딪히는 소리만으로 알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소리의 주인을 부르기도 전에, 그녀는 한순간에 달려왔다.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레이스 후의 모습에 무어라 반응할 시간도 없었다.
“아야-. 흡?!”
어드마이어 베가는 레이스의 잔열이 남은 채로, 다소 차이가 나는 키를 상쇄하기 위해 까치발을 들어 그대로 그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으니까.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그녀는 이내 입을 떼며 말했다.
“말했지, 때가 오면 난 당신만의 일등성이 될 거라고.”
“그랬지.”
“그 순간은 지금부터야.”
마침내 짊어지고 있던 짐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일까, 평소에는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대담함을 보인 아야베의 두 눈에는 강렬한 의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이전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았을 그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와버린 트레이너가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푹, 껴안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딸그락-.’
무언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순간 마주 안고 있던 두 사람이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것이고.
“아, 하하하…. 저희가 좀 더 늦게 올 걸 그랬나요?”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음이 분명한 나리타 탑 로드가 슬며시 벽 뒤에서 나옴과 동시에.
“승리의 기쁨을 반려와 나누는 건 당연한 일이지, 음음.”
“후에에에, 아야베 씨가 이렇게 대담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오.”
모든 걸 이해한 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티엠 오페라 오와 어지러움을 느끼게 만드는 메이쇼 도토까지 줄줄이 따라 나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들을 본 순간, 굳어버린 트레이너와 아야베의 머릿속에는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이건 망했다.’
‘음, 확실히 망했네.’
트레센을 휩쓸, 절대로 꺼지지 않을 핑크빛 광풍의 뇌관이 기폭 되고 말았다.
겨울, 교토의 하루는 참으로 평화롭게 지나가고 있었다. 







시리즈 내 아야베 G1(또는 같은 취급) 전적:

호프풀S

일본 더비

천황상 가을

윈터 드림 트로피(new)

댓글

  • 흑역사양산기
    2024/08/10 02:25

    그래 이게 문학이지
    내 친구놈도 글쓰게 해야하는데 이놈이

    (yXcjt8)


  • 카니에타
    2024/08/10 02:26

    재밌게 봤어요

    (yXcjt8)

(yXcjt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