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공부하다 가장 재밌는 순간은
다름이 아니라,
기존의 시각과는 정반대의 역사적 진실이 나타날 때입니다.
예를 들어,
'노론벽파 수장인 심환지는
정조 임금의 정적인줄로만 여겼는데,
알고보니 임금의 둘도 없는 심복이었더라.'
이런 역사적 진실 말이죠.
그래서 그런지 요즘 불거져 나오는
정조 임금의 이미지 역시
개혁적 군주 보단 보수 군주.
심지어는 유교 탈레반이 아니었나 하는 말까지 나옵니다.
하지만, 이런 편견을 부수는
재밌는 사실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것 역시, 인터넷에서 우연히 구한 사진입니다.
이 책은 '어제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御製華山龍珠寺奉佛祈福偈)'로서
정조 임금이 1796년(정조 20년)에
아버지가 계신 화성 현륭원 옆
용주사라는 사찰을 창건하고
부처님의 은덕을 찬양하면서 지은 게송(偈頌)입니다.
친필 글씨를 목판에 새긴 겁니다.
성리학 창시자 주희와
노론의 스승 우암 송시열을
존경해 마지 않았던
유교 탈레반(?) 정조 임금이 절을 세워
아버지의 복을 기원하고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했다니
이게 무슨일인가 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사진에 쓰인 글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
임금이 친히
화산 용주사에 부처님을 봉안하고 복을 기원한 게송.
이 사찰은 현륭원(顯隆園 :사도세자 무덤)의
재궁(齋宮 : 능 옆에 제사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으로 건립하였다.
"소자(小子: 정조 임금 본인을 지칭)가
큰 바다(大海) 양만큼의 먹과
수미산(須彌山) 무더기만큼의 붓을
몰래 가져다가
8만 4천 보안법문(普眼法門)의
경의(經義)와 교의(敎義)를 베끼고
삼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게어(偈語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어
삼업공양(三業供養)을 드림으로써
은혜에 보답하는 복전(福田)을 닦으려 합니다."
---------------------------------------------------------
이 내용만으로 보았을때,
정조 임금이 과연 유교를 열렬히 신봉한 유학자인지
아니면 부처님을 믿은 불자인지 구분이 힘들 정도입니다.
역사적 팩트를 말씀드리자면
정조 임금은 불교에 그리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연한 기회에
정조 임금께서 경외로 행차하실때
보경 스님이란 분이 길을 막고
'부모은중경'이란
불경을 임금에게 받쳤는데,
임금이 이걸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고 합니다.
홍재전서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글이 남아 있습니다.
"과인은 불승(佛乘 부처의 교법)에 대해서는
일찍이 어두운 바였다.
그런데 대보부모은중경(大報父母恩重經)은
게송(偈頌)으로 깨우침이
절실하고 간절한 나머지
중생(衆生)을 손잡고 인도하여
극락(極樂)에 오르도록 하니,
우리 유교의 조상의 은혜를 갚으며
인륜을 돈독하게 하는 취지와
부절처럼 들어맞는다..."
(홍재전서 제56권 잡저 3)
그래서 정조 임금은
부모 은중경을 읽고 얻은 감동으로
불경을 빠지셨는지
부처님을 찬양하는 노래까지 지으시죠.
========================
"이와 같이 들었노라 / 如是我聞
부처님께서 열 가지 은혜를 깨치시고 사람들에게 권하시니 / 佛諦十恩爲人勸
수미산 둘레를 천 바퀴 돌고 / 遶須彌千匝
경전 만 권을 만들지라도 / 造經典萬卷
여덟 종류의 법음(부처님 말씀)으로 대중에게 고하는 것만 못하는구나 / 不如以八種梵音告大衆
각각 어버이를 위하여 / 各各爲爺孃
천상에서 쾌락을 누리도록 일제히 발원하리라. / 得生天上快樂齊發願"
(홍재전서 제56권 잡저 3)
=================================
명절이 되면
의례적으로 관상감(천문과 역법을 관장하던 관청)에서는
달력을 배포했는데
이때, 정조임금께서 명을 내리길
달력과 함께 부모은중경을 인쇄하고
세간에 널리 반포해
부처님의 덕이 민간에까지 미칠수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범우고(梵宇攷)'라는 책도 펴냈는데,
전국에 산재한 불교 사찰의 연혁과 위치를 소개한
서적이었습니다.
이 책은 조선시대 당시 사라진 불교사를 복원, 연구하는데
사료적 가치가 뛰어나다고 합니다.
게다가 아버지의 복을 기원하기 위해
무덤 옆에다가 절까지 지었습니다.
이쯤되면 정조 임금이
유교 탈레반으로 불릴 정도의
광적인 유교주의자는 아닌게 확실해 집니다.
사실, 정조 임금 시기는
조선왕조의 번영이 서서히 저물어가던 때였습니다.
광작의 발달로 농촌의 노동자가 서울에 유입되고
또 상업의 진전으로 부익부 빈익빈의 경향이 심화되어
사회적 갈등과 모순이 이곳 저곳에서 나타납니다.
북방에선 도적떼와 남방에는 천주교도들이
민간에선 아들이 아버지를 구타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구박하는 등
유교 사회라고는 믿기 힘든 일들이 빈번해지죠.
조선이란 나라는
사대부에겐 유교국가이지만,
백성들에겐 여전히 불교국가였으므로
부처님의 법력을 빌어
아버지의 복을 빈다는 핑계로
도처에 발생하던
부도덕-비윤리적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시 임금의 자리는 힘든 자리였겠죠?
마지막으로 정조 임금이 부처님을 찬양한
게송을 좀더 읽어 보도록 하죠.
다섯째,
복덕은 무량하라[福德無量]
유해(乳海)의 무량한 복을 초생(初生) 때부터 주심이
도마죽위(稻麻竹韋)와 같이 서로 얽히어
십승(十乘)의 불국토에 꽉찼도다.
일곱째,
보살의 원력[菩薩願力]
여러 세(世)의 부처님을 다시 모시니,
하나하나가 다 부처님의 정(情)으로서
내가 진실됨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아니
법력(法力)이 가없이 비치는 도다.
================================
予卽阼二十年乙卯仲夏
奎章之寶
“내 즉위 20년 을묘 5월에 게를 쓰다.”
규장지보(임금의 글을 규장각에서 만들어 반포했다는 도장)
오른쪽 도장들 해석:
홍재(弘齋: 정조 임금의 호를 새긴 도장)
만기여가(萬機餘暇: 바쁜 정무사이에 얻은 여가에 쓴 글이라는 뜻)
애초에 성리학이랑 불교랑 크게 차이가 없죠..이상향만 다를뿐..
성리학이라는게 불교에서 따온게 많다보니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정조는 아마 할아버지 영향이 아니었나 싶어요. 영조 본인이 자기 친모 모시려고 소령원 옆에 보광사 짓고 그랬으니까요.
그랬던 할아버지가 아픔을 대물림하니 이건 뭐 버틸 도리가 있었겠습니까. 참 아팠던 사람들일거에요.
어차피 역사는 문학적 성격이 강하죠. 사료를 해석하는 역사가들의 관점이 투영된 것일 뿐 사실 그대로를 말해주지 않는다느게 역사의 재미죠. 교과서라는 텍스트만 봐도 정조랑 노론이랑 어울린다는 건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인데... 여러 다양한 사료와 자료를 보면 또 해석이 달라집니다. 역사가 재미있는 건 이런 이유 때문..
열조마마// 맞습니다. 성리학 자체가 유불도의 세가지 학문을 종합해 만든 것이니...그래서그런지 잠깐 불교에 심취했던 율곡 선생의 이통기국론과 이기일원론의 성리학적 해석이 더 정확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리플수정]gicaesar//맞는 말씀입니다. 강건한 왕이었지만, 사람으로써 어찌 인생의 난고가 없었겠습니까? 내심 불교에 의지했을수도 있다고 봅니다.
마키아벨리// 넹. 맞습니다. '역사'는 객관적 서술의 역과 주관적 서술의 사가 등나무처럼 얽히고설킨다고 하지 않습니까? 역사가의 관점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거죠.
유교탈레반 우가우가 추장 그이상도 아님
글 잘봤습니다 ^^
정조 본인이 주자학 신봉자였고 그 시대 최고수준의 성리학자이긴 했으나 천주교에 대한 입장도 그렇고 교조화된 사람은 아닌듯.
F.파울루스// 대가리 빈거 인증?
그나 저나 글씨 정말 지릴 정도로 잘 쓰시네요.
저런 글씨 써서 집에 걸어 놓으면 흐뭇할 듯... ㅠㅠ
돗돔115// 별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왕은 아닙니다 아비로서도 좋은왕도 아니고 후에 조선후기의 세도정치의 길을 연 인물인데 말은 머갈통 비게 말ㅎㅏ긴 했어도 당신한테 피해줬습니까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리플수정].
정조는 본인 스스로가 성리학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를 용인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죠. 불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던것 같고요.
오히려 정조는 천주교가 조선에 퍼지게 된 것은
그동안 조선의 성리학이 올바로 서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봤는데 그걸 문제삼아 유학자들은 훈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정조 집권 후반으로 갈수록 여러 불미스러운 일들이 생겨나자
천주교에 대해 강하게 나갔죠..
정조는 제가 봤을때 완벽한 성리학적 국가를 세우고 싶어했던 성리학 신봉자 군주.
뛰어난 인물인 건 틀림없지만, 그와 별개로 업적은 과다평가된 왕이라고 봅니다.
F.파울루스/ '머갈통 비게 말ㅎㅏ긴 했'으면 지적받는 게 당연합니다.
이심이//정조 임금의 정책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할아버지인 영조 임금의 정책을 계승, 발전시킨 것들이죠. 이를 일컬어 사학계에선 "계지술사(繼志述事:이전 세대의 문명을 잘 받들어 발전시킨 뒤 다음세대에 넘겨주는 일)란 말을 많이 하는데요. 맞습니다. 정조 임금은 영조 임금의 충실한 계승자였습니다.
마키아베리//
정조와 노론이 어울리지 않다니요?
영조가 노론이었고, 정조때는 노론소론보다는 시파벽파로 분류되었으니 정통노론소론과는 약간 궤가 달랐지요.
게다가 정조는 이미 임금이 되었으니 노론이든 남인이든 소론이든 모두 신하일뿐이지요.
그리고 정치는 이념과 당파도 중요하지만 실리도 중요하지요.
노론과 정조가 손잡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F.파울루스//
천박하게 글을 쓰는군.
욕을 부르는 글을 썼으면 욕이 따르는 건 필연이지요.
장수찬//퍼가도 될까요??
必死卽生// 퍼가셔도됩니다! 상업적으로 이용하셔도 괜찮습니당^^
잘 보았습니다. 정성어린 글 감사합니다
통치이념으로서 불교에 대해선 정조뿐만 아니라 당시 실학자들도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던걸로 어렴풋이 알고는 있습니다. 연암 박지원의 경우는 불교가 국가통치 이념으로 부적절한 이유에 대한 글을 남기기도 했다고 하고..물론 말씀하신대로 민간쪽에서는 조선이 불교를 억압했다고는 하나 그 영향력이 꾸준히 이어져왔기에 성리학. 유학의 나라 조선이라도 불교를 강압적으로 배척하기는 힘들었겠죠.
용주사 가보면 김홍도가 그린 불화 (탱화)그림도 있죠. 보물로 지정된 그림으로 알고 있습니다. 용주사 창건에 정조가 상당히 공을 들였고 김홍도같은 당대
의 화원도 직접적으로 용주사 설립하는 과정서 한몫을 담당했던거 보면 정조에게 용주사는 각별한 의미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예전 기억하기론 정조가 직접 용주사 앞에 세운 나무가 있었는데 그때 그 나무가 지금도 살아있는지는 모르겠군요. 십수년도 전에 그 나무가 그때 당시 링거를 맞고 있었기에...아무튼 정조와 불교에 관한 흥미로운 글 잘읽었습니다. 정조와 천주교 관련해선 예전에 읽은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이라는 책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다시 납니다.
buchanan//네..숭유억불이 조선의 기본 정책이긴 했지만, 여러 문헌들을 찾아보면 의외의 사실도 많은 거 같아요. 유명한 사찰의 고승들은 지방 수령들을 교체할 정도로 힘이 막강했다는 기록도 있더라고요. 관찰사들도 함부로 못할 정도로... 사실, 사대부들 가운데서도 불교에 의지한 사람도 많았던 거 같습니다. 추사집안인 월성위 가문경우엔 충청도 예산 고향집 옆에 개인 사찰까지 마련했다고 하니..
유교란게 내세관이 약하니
불교를 없애기는 쉽지않을 듯해요
재밌게 잘봤어요 추천👍
부모은중경 정말 감동적이죠
[리플수정]연암 박지원 경우엔 대놓고 중들을 싫어했죠. 열하일기속에 건륭황제의 스승인 라마승을 흐리멍텅하고 기괴한 모양으로 묘사한 걸 보더라도 그렇고, 청나라 어느 절에서 연암이 먹을 걸 훔쳐먹고도 중들이 의도적으로 청심환을 노려 먹을 걸 주위에 뿌려놓았다며 변명을 늘어놓은 걸 보면 아! 연암은 중을 정말 싫어했구나라고 느꼈습니당.
장수찬//아 아예 대놓고 싫어했군요 ㅋ 좋은 내용 알고 갑니다 ㅎㅎ 사실 불교가 조선이 어려울때 앞장서서 큰 역할 한 종교이기도 한데...왜란. 호란때 활약한 승병장들. 호국 불교라는 말이 있듯이
buchanan// 맞습니다! 결정적으로 불교가 조선시대에 살아남은 건 왜란 당시의 공적때문이었죠.
역사 잘 아시는 분들한테 꼭 묻고 싶었던게 있습니다. 신숙주가 세조한테 단종비를 자기 노비로 달라고 떼 썼다는 기록이 실록에 있는데 신숙주가 그 정도의 인간이었나요? 아님 다른 뜻이 있던건지.
빅윅// 야사엔 신숙주가 여색을 굉장히 탐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일본통신사로 갈땐 기생 10명을 데려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단심이라는 기생과의 스캔들도 장난 아니었죠. 일설에는 신숙주가 단종복위에 참여하지 않은 것 역시, 선비의 지조보다 여색을 더 좋아해 현생의 부귀영화를 택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담마// 감사합니다!
[리플수정]감사합니다.공부벌레인줄 알았더니 색마였네요.
調律// 감사합니다!
장수찬//감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