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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



 우리 외가는 제주에서도 시내와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공항에 내린 뒤 택시를 불러 한참 돌아돌아 가야하는 곳에 있었고, 어느정도냐 하면 어린시절 엄마 무릎에서 꾸벅거리며 졸다 기사아저씨가 섬에 이렇게 멀리 들어가는데가 있는줄 몰랐다고 투덜거렸던게 기억날 정도다.

 외가 집은 산과 산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에 있었는데, 동네에 집일랑 몇채 없었고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외지나 뭍에 나가 마을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나 아저씨 아줌마 뿐이었다.

 집들도 전형적인 시골집으로 넓은 마당에 돌로 쌓은 담을 두르고 대문도 없이 나무막대기 몇개가 걸려있던 기억이 난다. 다만 집은 초가가 아니라 시멘트와 벽돌로 지어진 일반 주택이었지만.

 외가에 도착하면 어른들은 곧바로 귤밭이나 감자밭에 나가 일하기 바빴지만 심심했던 기억은 없다. 도시에서 살던 나에게 시골은 신기한것들로 한가득인 곳이었고, 외가에서 기르던 백구 지슬이랑 동네 한바퀴만 돌고와도 점심때가 다 되었으니까.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그 지역에 오래 산 사람들인데다가 어찌됐건 외가와 피가 섞인 부분이 있어서 다들 나를 예뻐해주었고, 엄마도 외할머니도 다 삼춘이니까 그렇게 부르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좋아한 사람은 뒷집 감나무집 아저씨로 지금도 이름은 모르지만 당시엔 꼬마삼춘이라고 부르며 쫓아다녔다.

 꼬마삼춘은 말그대로 키가 작고 어리게 생겼었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30은 넘었던거 같고, 아내는 없었다. 그 동네에 남아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어린축에 속하는 꼬마삼춘은 내가 오면 언제나 우리 물래기라며 반겨주었고, 밭일을 마치면 내손을 잡고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놀아주었다.

 마을을 둘러싼 산이 오름이라고 알려준것도 꼬마삼춘이었다. 마을 입구를 기준으로 왼쪽에 있는 오름은 지꺼정오름, 오른쪽에서 좀 아래로 치우친 오름은 부애오름이라고 했다. 이 중 내가 가도 되는 곳은 지꺼정오름뿐이고, 부애오름은 가면 안된다고 했다. 실제로 마을에서 지꺼정오름쪽은 자주 올라다니는 편이라 길이 마련되어있었지만 부애오름쪽으로는 길은 커녕 사람 지나간 흔적조차 없었다. 실제로 마을 사람들은 웃자란 억새가 가득한 부애오름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내가 왜 가면 안되냐고 물어보자 꼬마삼춘은 꽝이 있어서 안된다고 했다. 꽝이 뭐냐고 물어보자 어물어물하더니 괴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유치원생 꼬마애한테는 하면 안되는 소리였다. 괴물이라니. 나는 눈을 빛내며 삼춘에게 꽝에 대해 물어보았고, 삼춘은 꽝에 대해 과장된 이야기를 늘어놨다. 눈이 자동차 불빛보다 번쩍번쩍하고 송곳니가 흡혈귀만큼이나 길고 입이 솥뚜껑만하고 몸엔 비늘이 가득하고... 나는 삼춘이 해주는 꽝 이야기를 너무 좋아했고, 계속 알려달라고 졸라댔다.

 꽝이 보고싶어서 부애오름에도 가보고 싶었지만 어떻게 가야할지 몰라서 엄마에게 물었다가 혼나기도 했다. 엄마도 꽝이 있어서 안된다고 했고, 외할머니가 들으면 어마어마하게 혼날테니 앞으로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빠가 덩달아 궁금해하자 엄마는 나이먹어서 애들처럼 굴지 말라며 등짝을 때렸고, 아빠는 엄마가 없을때 나에게만 살짝 꽝에 대해 물었다.

  나는 꼬마삼춘에게 들은 이야기를 아빠에게 했고, 아빠도 굉장히 궁금해했다. 그리고 동네 어른들끼리 모여 바다로 조개나 미역을 주우러 가는 날, 나랑 같이 집을 보겠다고 남아 나에게 같이 부애오름에 가자고 했다.

 나는 굉장히 들떴다. 꽝을 보면 어쩌지? 하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즐거움 중 하나였다. 아빠 손을 잡고 걸어가며 꽝이 어디있을지, 어떻게 생겼을지를 떠들었다. 만약 꽝이 쫓아오면 던져주고 잽싸게 도망가자며 주먹밥도 만들어 들고갔다.

 마을에서 부애오름까지는 억새풀이 가득하기 때문에 바로 가지 못하고, 마을 입구쪽으로 나간뒤 낮은 수풀을 밟아가며 전진했다. 아빠가 길을 만들고 내가 뒤를 따라갔다. 아무리 한번 밟아서 죽여놨다지만 잡초로 가득한 길을 유치원생이 걷기는 힘들었을텐데 나는 신나서 그런것도 몰랐다. 아빠의 뒤를 따라 걸어가자 부애오름이 점점 가까워졌고, 아래 도착해서 본 부애오름은 잡초와 관목이 가득한 작은 동산이었다.

 ...거기서 돌아가야 했는데.

 중간까지는 제법 견딜만 했다. 하지만 결국 못견디고 아빠에게 업혀서 올라가게 됐다. 기운차게 업어주며 큰소리로 이야기하던 아빠의 숨이 점점 거칠어지고 땀이 목이며 등을따라 흥건하게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아빠에게 많이 미안해졌다. 내린다고 했지만 아빠는 위험하니 안된다고 말하며 나를 계속 업고 올라갔다.

 한참이 지나 오름 꼭대기에 도착했다. 비교적 평탄한 꼭대기에 도달하자 아빠는 나를 내려놓고 바닥에 주저앉았고, 나는 가까워진 하늘이나 주변 풍경에 푹 빠져서 주변을 돌아다녔다. 위험하니 멀리가지 말라는 아빠 말을 건성으로 듣고 여기저기 살피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나즈막한 나무 아래쪽 그늘에 엎드려 있었다. 검고 커다란 눈동자가 나를 쳐다봤다. 긴 머리에 검고 긴 옷을 입었고 사람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이라면 그렇게 긴 혀가 있을리가 없잖은가. 본능적으로 '저게' 꽝이라고 느꼈다.

그것은 스믈스믈 이쪽을 향해 기어왔다. 팔은 없었다. 다리는 긴 옷과 그림자에 가려져 있는지 없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기어왔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주먹밥을 던져준다는 생각은 할 수 조차 없었다. 본능적으로 머리가 새하얗게 질려 꼼짝조차 하지 못했다. 저쪽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부르질 못하고 속으로 아빠만 부르며 눈을 꿈뻑거렸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진 꽝과의 거리는 어느새 한걸음 정도로 좁혀져있었다. 저게 이곳까지 오면 잡아먹힐거란 걸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굶주려있었다.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먹음직한 먹이가 제 발로 자신을 찾아와 준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무표정했던 얼굴이 가까이 오면 올수록 크게 벌어져 지금은 그 입이 눈밑까지 찢어져 웃고있다. 꽝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나를 향해 기어왔다. 나는 견디지 못하고 오줌을 지렸지만 그것에 꽝은 더 크게 즐거워했다. 그리고 마침내 꽝이 내 발 바로 앞까지 도착했을 때,

 강한 힘이 나를 낚아채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아빠는 나를 짊어진 채 산을 뛰어내려갔고 나는 아빠 어깨에 매달린 채 꽝이 입을 크게 벌리고 분노에 찬 모습으로 이쪽을 향해 날듯이 기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뱀이었다. 검고 거대하고 꿈틀거리며 미쳐있는 뱀귀신이었다. 따라오는 꽝을 보며 나는 비명을 지르며 울었고, 아빠는 단 한걸음도 멈추지 않고 달음박질 쳐 산을 내려갔다. 비명을 지르다 어느새 기절한 내가 눈을 떴을때, 그곳은 외갓집 안방이었다.

 엄마는 울면서 아빠를 때리고 있었고, 외할아버지는 한숨만 내쉬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방 밖에서는 징과 북과 방울소리와 함께 고함같은 소리가 울렸고, 나는 가물가물하게 주변을 바라보다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내가 눈을 뜨지 못한 사이 우리 식구는 뭍으로 돌아와 있었고, 그 뒤 두 번 다시 제주도에 가는 일은 없었다. 내가 외가 얘기를 꺼내면 엄마는 굳은 얼굴로 이야기도 하지 말라고 했고, 아버지도 입을 다물었다. 초등학교 수학여행도, 중학교 수학여행도 제주도라는 이유로 가지 못했고, 중학교때 왜 그러냐고 따졌다가 엄마가 울며 고함을 지른 이후로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 외할아버지, 할머니도 돌아가시면서 우리 식구와 제주도와의 연관도 끊겨버렸다. 두 분의 장례식도 부모님은 갔지만 나는 참석하지 못했고, 무덤조차 방문하지 못했다. 넌지시 흘러가는 이야기로 지꺼정오름 근처에 무덤을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



 그렇게 그 일로부터 십 수년 후.

 내가 성인이 되어 아버지와 단 둘이 첫 술자리를 하게됐을 때, 참고 참았던 질문을 터트렸다.


 그때 아버지는 뭘 보고 날 끌어 안아 오름을 내려온 건지,

 오름을 내려온 이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왜 그 이후 우리는 제주도에 가지 못한건지.


 내 질문을 들은 아버지는 말없이 술잔을 비운 뒤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엄마한테 혼날거라고 했지만 이럴때 아니면 언제 피우냐며 한숨을 푹 내쉰 아버지는 담배 한대를 다 태우고 술을 한 잔 더 마신 뒤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그때 아버지는 오름아래서 올려 보면서 올라가기 싫으셨다고 한다. 사실 멀리서도 꽤 음침한 느낌의 오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산 아래에서는 그야말로 소름끼치는 느낌이었다는 말에 나는 놀랐다. 나는 그 오름을 보며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너무 신나하는데다가 같이 가보자고 해놓고서 돌아갈 수도 없어 억지로 신나는 척 하며 걸어갔지만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소름돋는 느낌에 돌아가고 싶어졌다고 한다. 내가 업혀서 본 아버지의 땀은 절반은 식은땀으로, 그렇게 더운 날이었음에도 오한과 함께 식은땀이 멈추지 않았단다. 게다가 묘하게 어디선가 누군가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들어 신경이 곤두섰지만 그래도 이미 올라온거 정상은 찍고 가자는 생각에 계속 갔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미 그때 홀려있었던 것 같다고.

 정상에 올라온 아버지는 나를 내려놓고 앉아 평범하기 그지없는 풍경에 간신히 한숨 돌렸다. 올라오는 내내 느껴지던 시선도 사라지고, 아무래도 역시 착각이었나 싶어 주먹밥이나 먹고 돌아가자고 나를 찾았는데 내가 보이질 않더란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저 멀리 서있는 내가 보이는데, 내가 굉장히 이상한 움직임으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고 한다.

 마치 사람모양 인형을 세워놓고 손으로 조금씩 툭, 툭, 밀어 앞으로 보내듯이. 게다가 내가 향하는 곳은 어떤 나무 아래였는데 그 아래 말로는 표현 못하겠지만 너무 기분나쁜 느낌이 가득해서 나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런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빠에게서 도망가려는 듯 움직임이 빨라졌는데 그 모양새가 정상적이 아닌데다, 가까이 가서 보자 눈동자가 나무 그림자에 고정되어 깜빡이지도 않고 입을 벌린 채 이상하게 웃고있는게 너무 소름끼치는 데다 본능적으로 위험하다고 느껴 그림자 직전까지 간 나를 그대로 낚아 채 집으로 달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순간 뒤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묘사한 대로면 마치 종이가 찢어지는 것 같은 찌이이익 하는 소리인데도 아버지 귀에는 비명소리, 그것도 굉장히 크고 구역질나고 미친것 같은 소리처럼 들렸고 뭔가가 쫓아오는 느낌을 받았다. 이대로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에 아버지는 필사적으로 오름을 달려 내려갔고 어느정도 내려가자 어깨에 매달린 내가 울부짖으며 아버지를 때렸다고 한다. 눈이 전부 새까매져서는 '놔! 놔! 되싸질 놈! 느 놈의 야개기를 끊어부코 가달을 데우데겨버려 몰맹진 게엄지동 카지 되갈리징게!'라며 악을 쓰는데 그 목소리도 어투도 전부 나와 다르고 내용도 제주말이라곤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내가 한 말일 수 없기에 아버지는 이를 악물고 나를 끌어안고 오름을 내려왔다고 한다.

 그 뒤 집으로 달려가자 바다에 다녀온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아버지와 나의 모습에 놀라 이게 어찌된건지 묻고는 부애오름에 올랐다는 말에 마을이 발칵 뒤집어졌다. 총각인 꼬마삼춘은 집에 갇히고, 외할머니가 당골을 부르러 간 사이 마을 전체가 제사준비에 나섰다고 한다. 다들 제사 준비를 하는 동안 우리식구와 할아버지는 안방에 들어가 금줄로 입구와 창을 다 막았고, 급하게 불러온 당골이 치성을 드리는 사이 아버지는 외할아버지에게서 부애오름과 지꺼정오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아주 먼 옛날, 한 알에서 두마리 뱀이 태어났다고 한다. 같은 알에서 태어나 같이 자란 두 뱀은 용이 되기 위해 수련을 하기로 하고 나란히 붙은 두 오름에 자리잡았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수련을 쌓아도 용이 되지 못했는데 알고보니 한 알에서 태어난 두 뱀이기 때문에 기가 갈라져서 하나의 용이 되지 못한다는 것 아닌가. 용이 되려면 둘 중 하나만이 될 수 있는데 그 자리를 놓고 두 이무기는 계속 싸웠다고 한다.

 당시에도 두 오름 사이에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에는 아주 영특한 아이 하나가 살고 있었다. 그 아이는 두 이무기의 싸움으로 날씨가 망가져 수확이 엉망이 되는 것을 보고 감히 두 이무기 사이를 중재하러 나서게 된다. 아이는 두 이무기 앞에 나아가 옛날부터 이무기가 승천하려면 사람의 인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며 자신이 둘 중 한 이무기를 골라 용이 되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둘 중 하나를 용, 다른 쪽을 꽝이라고 하면 꽝이 된 쪽의 기가 용이 될 쪽으로 옮겨가니 힘들여 상대를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두 이무기는 혹했다. 그리고 자신을 용으로 골라달리며 아이에게 조건을 제시했다.

 한 쪽은 금은보화를 이야기했다. 자신이 용이 된다면 도력으로 자신이 사는 오름의 돌들을 금은 보화로 바꿔주겠다고.

 다른 한쪽은 풍작을 이야기했다. 자신이 용이 된다면 도력으로 폭풍이 닥쳐도 마을과 그 인근을 지켜주고 언제나 일정하게 풍성한 작황이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그리고 더불어 다른 한쪽이 보복해오는 것을 막아주겠다고도 했다.

 그 말에 소년은 마음을 정하고, 길일을 정해 두 이무기를 불렀다. 그리고 풍작과 수호를 약속한 이무기를 용으로, 금은보화를 약속한 이무기를 꽝으로 불렀다. 그 직후 한 이무기는 용이 되어 승천했으며, 다른 이무기는 타락해 꽝이 되었다. 그리고 그 두 존재는 자신이 살던 오름으로 돌아갔는데 용이 살게된 오름이 지꺼정오름, 꽝이 살게된 오름이 부애오름이라는 것이다.

 그 뒤 용은 약속을 지켜 이 마을이 풍작이 되게 함과 동시에 마을 사람들을 지켜주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꽝의 도력이 강해져 마을사람중에서도 어린아이가 꽝에게 홀려 부애오름에 올라 잡아먹히게 되었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부애오름과 마을 사이에 억새밭을 만들어 꽝이 오지 못하게 막는 한편, 지꺼정오름에 치성을 드리며 용의 힘을 빌어 마을을 지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마을에 미혼인 처녀총각이나 어린아이가 없는 것도, 꽝에게 홀려 잡아먹히는 것을 막기 위한 일이었다.


 거기까지 말한 할아버지는 뭍에서 온 손주가 가끔 있는 정도라면 괜찮을 줄 알았다며 눈물지었고 아버지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제사는 밤새 계속 됐고, 마당에 불을 피워놓은 채 북을 두드리고 꽹과리를 치며 당골이 기도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것을 들으며 졸던 아버지는 갑자기 오싹한 느낌에 눈을 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고 한다.

 검은 ja위가 아주 크게 보이도록 눈을 뜬 내가 아버지를 보고 기분나쁘게 히죽거렸다고 한다. 분명 소리없이 웃고 있음에도 내가 어깨를 들썩일때마다 종이찢는 소리가 어디서 들렸고, 아버지는 금줄 밖 아주 가까운곳에 그것이 와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나를 황급히 막아 눌렀는데 그러자 또 내가 비명을 지르며 난동을 부렸고, 그 소리에 일어난 외할아버지가 입에 술을 머금고 내 머리위와 방 네모서리에 뿌린 뒤 식칼을 휘둘러 방 한쪽에 내팽개치듯 던졌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고, 할아버지는 반복해서 칼을 휘두르고 던지고 휘두르고 던지고 한 끝에 한쪽을 노리고 벽에 칼을 던졌다. 그러자 그 칼이 그대로 벽에 꽂힘과 동시에 내가 크게 비명을 지르고 눈을 감았고, 엉엉우는 엄마와 기진맥진한 아버지를 둔 채 할아버지는 땀을 닦으며 이제 괜찮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새벽 첫닭이 울자, 밖에서 금줄을 걷은 외할머니가 미리 싸둔 짐을 주고 이웃집 사람의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 바로 돌아가라고 했다. 집에서 공항에 가는 동안에는 외할머니도 함께했는데, 그동안 외할머니는 제사중에 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당골은 오자마자 기겁을 하며 오색천을 잡아들고 집 곳곳에 술을 뿌리고 다니더니 소리꾼들이 오기도 전에 기도를 시작했다. 꽝이 단단히 나를 움켜쥐고 있다며 예사로 끝날 일이 아니니 제사 다 끝날때까지 집 밖으로 나오면 안된다고 금줄로 방을 둘러싸 꽝이 나를 찾지 못하게 하려 했다. 하지만 애를 써도 꽝이 물러가지 않았으며 자정이 넘어 기운이 강해지자 금줄 주변을 돌아다니며 나를 어떻게든 꾀어내려 노력했고, 집 안에서 외할아버지가 분투하는 사이 외할머니는 용신은 물론이거니와 성주신, 조왕신, 삼신, 터주인 감나무는 물론이거니와 측신에게까지 가서 나를 지켜달라 빌었다고 한다.

 그 기도와 할아버지의 노력이 통했는지 방에서 내 외마디 비명이 있은 이후 당골이 일단은 물러갔다며 한숨 놓았고, 이후 날이 밝자마자 곧바로 섬에서 내보내라는 말에 짐을 싸두셨다고 한다. 그리고 외할머니는 잠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빠와 엄마에게 주의를 주셨다.

 나를 절대 이 섬에 데려와서는 안된다고. 섬 반대쪽에 있고 가운데 설문대 할망이 잠든 산이 있다고 하더라도 땅과 땅은 연결되어있으니 꽝이 눈치챌 수 있다고. 본래 용은 한곳에 잠들어 있는 존재가 아니지만 옛날의 약속때문에 오름에 묶여있는 사이 기운이 약해졌고, 꽝은 그만치 강해져서 섬 반대쪽에서 일이 벌어지면 지꺼정오름의 용은 도와줄수가 없다고. 그러니 두 번 다시 나를 이 섬에 데려와서는 안되며 너희들도 오지 않는게 좋다고.

 그렇게 내가 잠든 사이 엄마와 외할머니는 작별인사를 나눴고,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먼저 비행기를 탔다고 한다. 비행기에서도 양해를 구해 미리 금줄로 내 몸을 의자에 묶어놨고, 다행히 비행기가 뜨고 착륙할때 까지 나는 쿨쿨 잠만 잤다고 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할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 뒤로도 가끔 내가 한밤중에 거실에서 기어다니거나 눈을 크게 뜨고 혀를 낼름거리는 일이 있었고, 부모님이 절이나 무당집에 다니면서 치성을 드리는 사이에 그런 일이 점점 사라졌다고 한다.


 나는 술을 마시는 것조차 잊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내가 그런 일을 한 줄 몰랐다. 아무 기억도 없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가끔 부모님이 뭐하고 있냐고 물어볼 때가 있긴 했지만....

 아버지는 다시 술을 한 잔 비운 뒤 외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집에 갔을 때 다시 그 시선을 느꼈다고 말했다. 꽝이 억새밭 너머 그 오름에서 이쪽으로 쳐다보는게 느껴졌다고. 그러니 너는 앞으로도 가지 말고 갈 생각조차 하지 말란 말에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 너머가 무서워질 것 같단 생각을 하며.


댓글
  • 고려 2017/06/10 07:59

    놔! 놔! 되싸질 놈! 느 놈의 야개기를 끊어부코
    -> 놔! 놔! 되질 놈! 니 놈의 모가지를 끊어버리고
    가달을 데우데겨버려
    -> 가다랑이(가랑이)를 비틀어버려
    몰맹진 게엄지동 카지 되갈리징게
    -> 몰명(沒名,沒明)진
    게엄지 - 개미
    동 - 무슨 조사인지??
    카지 - ?? 카지다는 까지다,깨지다,으깨지다.
    되갈리징게 - 되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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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이엄마 2017/06/10 10:33

    완전 재밌게 봤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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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쏘 2017/06/10 12:48

    다 읽고나니 창작이랭, 하다가 위로 올라가니 창작글이라고 말머리 붙여놨군요.
    부애오름이 어딘지 찾아보기 전에 창작인 걸 알아서 다행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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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놀 2017/06/10 12:52

    오 완전 재밌어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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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eachOolong 2017/06/10 13:07

    와.......엄청 몰입해서 읽었어요........ 님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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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orycube 2017/06/10 15:32

    부애 오름은 아마 '부에난다'는 말에서 따오신 거겠죠. 다만 '지꺼지다'라는 말이 부에랑 반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 설문대 할망은... 아마 우리나라 전국 통틀어도 그렇게 잔인하고 이상한 설화는 없죠.  오름들 이름을 들으면서 어릴 때 뛰놀던 망오름, 붉은오름 생각이 많이 나더군요. 저희는 오름 못 오르게 했던 게 공동묘지 때문이었는데... 4.3 이후로 워낙 몰살당한 곳이 많아서...
    그래도 지네 잡아다가 팔려고 잘도 돌아다녔더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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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로찡 2017/06/10 15:35

    몰입감 엄청나네요 ㅎㄷㄷ
    잼있게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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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denKang 2017/06/10 15:50

    진짜 정말이지.. 실화인줄 알고 읽었어요
    몰입도가 엄청나네요.
    님 좀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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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unabelle 2017/06/10 15:53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어릴적 보던 민속설화가 현대에도 이렇게 다시 태어나네요 사투리가 몰입을 더 끌어준것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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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곤시리즈 2017/06/10 16:08

    와..출처 안봤음 진짜 실화인줄...ㅇᆞ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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