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지금의 남편과 사귈 때 남편 집에 놀러갔더니 빨래를 실내에서 말리고 있었다.
'금방 걷을게' 라며 재빨리 빨래를 걷는데 그 와중에 팬티가, 이렇게, 팔랑거리며, 입구가 벌어진 내 토트백 안으로 쏘옥하고 들어와버렸다.
그때 바로 '떨어졌어' 라고 하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그게 팬티라는 게 문제.
접어서 주는 게 좋을까, 그런데 어떻게 접으면 될지 전혀 짐작도 안되고, 손으로 너무 주물럭거리는 것도 좀 그런가...그럼 손끝으로 집어서 건네줄까?
라고 생각하다가 그러면 또 더러워하는 느낌이 들잖아? 그럼 양손으로 받치는 듯해서 건네주는게 좋을까? 그럼 또 너무 정중한 것 같고.
애초에 만지지 않고 '앗, 빨래 떨어졌어!' 라고 가방을 가리키는 게 좋지 않나?
그런데 그러면 좀 새침때는 것 같기도 하고?
앉아 있는 사람이 서서 빨래 정리중인 사람에게 건네주는 게 맞지 않나?
어쩌지? 어쩌지? 라고 당황하는 사이에
빨래를 다 걷어버린 남편은 이동을 시작하고 말았다.
완전히 한발 늦은 상태.
팬티 따위로 뭘 쑥스러워 하는 거냐 싶지만 당시에는 아직 서로의 팬티를 보여주는 사이도 아니었고 손조차 잡기 전이었다.
그런 와중에 내 가방 안에는 막 사귀기 시작한 애인의 팬티가 들어 있는 거다.
어딜 봐도 변태. 팬티를 가지고 가려는 변태. 치녀였다.
서른 남짓되어서도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고 얼굴을 마주보고 저와 사귀어주십시오. 라고 하는 멋진 남자였다.
볼 거 다 본 사이니까 나 여친맞지? 같은 그런 거친 세계가 아니었다.
너무나 좋은 남자였다.
그리고 지금 그 사람의 팬티가 가방에 들어 있었다.
게다가 타이밍을 놓쳐서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심스럽게 빨래를 접고있었다.
그때까지 서로 아무말이 없었다. 애초에 대화다운 대화가 없는 건 평소의 일이었지만
지금은 말을 건다는 행위에 대한 허들이 평소보다 더 높아진 상태.
텔레비전 소리만 쓸데없이 울려퍼지는데 내용따윈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방에는 팬티가 들어있었지만.
그냥 들고가버릴까? 하지만 나는 팬티에 발정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오해받는 것도 싫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나는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표정으로 드러내지 말자. 가능한한 냉정하게 행동하자는 마음으로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굉장히 낮았고, 떨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저기'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이란 게 고막에 붙어있었나? 싶을 정도로 크게 두근두근 울렸다.
내 목소리조차 제대로 듣기 힘들 정도여서 이상할 정도로 큰 목소리를 낸 게 아닐까 싶었다.
'방금 팬티가 가방에 떨어졌는데, 이거 선물로 가져가도 될까요?'
끝났다.
내가 이렇게 부끄러운데 그는 더 부끄러울 게 틀림없다.
차라리 웃음거리로 치부하면 될 거다, 그런 생각으로 농담을 섞은 장난스런 말을 고를 생각이었는데 말이 헛나오고 말았다.
이래서야 기념품으로 팬티를 가져가려고 하는 아가씨다.
애초에 치녀다.
애인이 이런 짓을 하면 정이 떨어질 거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내 앞으로 그가 손을 뻗어서 팬티를 집어들었다.
대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언이었다.
무언으로 팬티를 회수당했다.
아무말도 없냐, 싶었지만 그럼 어떤 말을 들으면 괜찮을지 말을 꺼낸 나도 알 수 없었다.
그의 생각에도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그 후 우리는 결혼했다.
남편이 된 그의 팬티를 개면서 그때 어떻게 하면 좋았을지 지금도 생각한다.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다.
그저 지금 내 손에 그의 팬티가 있다.
이게 행복이 아니고 뭘까.
끝.
훌륭한 변태들이 만났구나...
Ireneo
2022/07/22 22:43
훌륭한 변태들이 만났구나...
노답잉여
2022/07/22 22:45
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