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몇 해 전의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휴대폰도 없었고, 위성사진이란 것이 있는 줄도 모를 때였습니다.
동쪽 바닷가에 살고 있었으니 일출 사진을 찍는다고 문무대왕릉 근처에 자주 나갔고,
사진 분야의 전국구 고수님들을 여러 분 알게 되었습니다.
경주의 잘 알던 김사장,
대구의 한모씨, 김모씨, 이모씨......
대전에 사시던 신모씨 같은 분은 사진전의 심사위원으로도 자주 나가던 분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분들이 새벽마다 전화를 해서 부탁 아닌 부탁을 합니다.
바다 날씨 상태를 알려 달라는 겁니다.
겨울철이라서, 전화는 새벽 4시 쯤부터 다섯 시, 여섯 시까지 연속으로 울려댑니다.
고향집이 언덕 위에 있었으니 마당에서 바다가 보였습니다.
새벽에 마당에 나가 바다를 보고 구름이 낀 것인지 맑은 지 여부를 알려 달라는 것이지요.
집 거실의 전화벨 소리에 선잠을 깬 집사람의 성화는 당연했고,
자다가 추운데 마당에 나가서 바다 쪽을 살펴봐야 하는 것도 고역인데,
내 말을 믿고 대구에서 2시간 이상을, 대전에서 3시간 이상을 달려왔는데 날씨 상태가 시원찮으면 괜히 미안하기조차 했습니다.
하여튼, 그 때 처음으로 일본 사진 잡지에서나 보던 미사일만한 대포(?)를 실물로 볼 수 있었고(600mm FD렌즈였습니다), 300mm F4 렌즈조차 귀했고, 가격이 선뜻 사기 어려울 정도였으니, 그저 부러울 뿐이었습니다.
내가 나가던 포항 지역의 사진 클럽에 소속된 사업가 분 중에서 캐논 구형 1200mm 렌즈를 갖고 계신 분이 있었는데,
장망원렌즈만 있으면 걸작을 찍을 것처럼 안달을 내면서, 장망원렌즈 노래를 부르던 제가 불쌍했는지,
저에게 2주쯤 빌려 주신다고 하셔서,
당시에 저는 니콘 필카 두 대 밖에 없었으니
경주의 아는 김사장께 사정하여 캐논 바디도 며칠 빌렸습니다.
그러나 장비를 빌려두고나니 며칠째 날씨가 시원찮아서 속이 빠짝빠작 탔습니다.
바야흐로 오여사 영접 빈도가 잦아 일출 시즌이라는 2월 어느 날,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평소에 눈여겨 봐둔 정치망(일본 말로는 오세기) 어장이 있는 곳 근처 바닷가 자갈밭에 내려가서 장비를 꺼냈습니다.
말이 1200mm이지 진짜 박격포보다 컸고, 쇳덩어리로 된 렌즈인지라 무게 또한 엄청났습니다.
이걸 꺼내서 맨프로트 055 삼각대 위에 얹어보니 새 다리 같이 가는 삼각대라서 간당간당하여 위태로웠습니다.
추위에 떨면서 해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만을 기다리는데,
근처 초소에서 초병 둘이 앞에 총 자세로 다가와서는,
"손들어!"합니다.
깜짝 놀라서 두 손을 위로 치켜 들었지요.
초소에서 한참을 살펴보다가 말 그대로 대포로 오인한 것이지요.
속된 말로 지랄지랄 합디다.
당시만해도 안보라는 말에 입도 뻥긋할 수 없던 세상이라서 군의 서슬이 시퍼럴 때인지라,
일출 이후와 일몰 전까지만 바닷가 출입이 허용되었는데,
그걸 어겼다고 온갖 욕을 다 먹었습니다.
속으로 욕이 치올라왔지만 참았습니다.
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사이에 해는 올라왔지만 사진을 제대로 찍을 정신이 없었습니다.
어선 두 대가 선수(뱃머리)를 맞대고 그물을 건져 올리는 뒤로 둥근 해가 올라왔으니 구도는 멋졌습니다.
꼭 찍어보고 싶은 장면이었는데, 벼르고 별러서 그 상황까지 갔는데......
나중에 필름을 인화해보니, 구도는 끝내주던데, 모든 사진이 살짝 흔들렸더군요.
엄청나던 카메라와 렌즈 무게에 비해서 삼각대가 약했고,
더구나 삼각대 설치 장소가 자갈밭이었고,
필름은 감도 50짜리 벨비아였는데, 렌즈 최대 밝기가 F11이었으니, 셔터 속도가 겨우 1/15나 1/30쯤 나왔었나, 무리였지요.
요즘도 일출 사진을 찍으러 바닷가에 나갑니다만,
이제 정치망 어선들도 사람들이 마주 보며 그물을 당겨 올리는 것이 아니라, 배에 설치된 크레인으로 그물을 건져 올리니 대부분 배 한 척이 단독으로 작업을 합니다.
디지털 시대이니 감도도 충분히 올릴 수 있고, 수 십 킬로의 무게도 무난히 견디는 최고급 카본 삼각대도 있고, 그런 장망원렌즈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이 실루엣으로 쭈욱 이어 서서 햇살에 반짝이는 젖은 그물을 당겨 올리는 구도,
다시는 그런 장면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지난 이야기를 주절거려 봅니다.
https://cohabe.com/sisa/239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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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옛날 이야기네요,
저도 연식이 좀 되다보니 전국 출사지 에피소드에 추억에 잠겨봅니다.
그럴 겁니다.
그 시절은 사진을 찍는 것이 무슨 특별한 기술처럼 자랑스럽던 때 였으니까요.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확인하는 정보가 없을 때였으니 입 소문으로 전국을 다녔지만 대신에 사람 사태는 겪지 않을 때여서 그래도 행복했지요.
진짜 옛날 이야기네요. 저도 연식이 있어서 공감이 가네요.ㅎㄷㄷ
고맙습니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가벼워지는 마음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 시절에는 촬영지에 가면 마지막 필름 두 서너 컷은 남겨두라는, 그래야 마지막 결정적인 장면을 만났을 때 아쉬움이 없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구전으로 전해 들을 때 였으니까요.
햐 ㅎㅎㅎㅎ 왜 이렇게 정감이 느껴지고 씨익 웃음이 지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ㅎㅎㅎㅎ 선생님 이야기 정말 재밌어요! 다음에도 또 써주세요!
세태가 빠른 변화를 따르고 있고, 지난 시절 사진을 찍던 우리 이야기는 말 그대로 전설로 남아 있지요. 포토샵도 모르고, 라이트룸도 모르는 우리들이 상큼한 화장빨 사진을 따라 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순간 순간은 행복했기에 지금도 미련을 버리지 못 하고 무거운 장비를 둘러메고 나가지요, 우리는.
필력이 정말 ...장문의 글을 시선 한 번 못 돌리고 읽었네요
자주자주 써주세요 : )
나이를 먹으니 대단치도 않는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는 향수병 환자입니다.
사진을 찍는 기술자들인 찍사들이 넘치는 세상이니 그저 한탄 같지만 그래도 가슴 떨리던 그 추억의 순간들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합니다. 퇴직하고 농사를 짓는 촌로이니 인터넷 접속도 쉽지 않지만 가끔 이곳에 이야기를 올려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