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 이도(李祹)
--------------------주요 업적--------------------
-농업-
○농지결수: 고려말 60~70만 결→조선 세종대 170만 결
○토지 1결당 미곡 생산력: 고려말 300두→조선 세종대 1,200두
: 고려말에 비해 10배에 가깝거나 상회하는 성장세... ㄷㄷㄷ
대표자료) 농사직설(1429)
-인쇄, 출판 사업의 발전-
○금속활자의 계량, 개발(경자자, 갑인자, 병진자)을 통한 인쇄, 출판업의 발전
-복지-
○노비 복지
여종의 출산휴가로 100일 부여, 그 남편에게도 한달의 출산휴가 부여
○장애인 복지
*장애인의 자립을 위해 악공, 점복사, 독경사 등 전문직 일자리 창출
*장애인을 잘 보살핀 사람은 포상, 반면 학대하는 자에게는 엄벌...(+장애인이 무고하게 살해되면 해당 고을의 읍호를 강등)
*시각장애인 집단에 노비와 쌀 적극 지원
○노인복지
*신분에 관계없이 80세 이상의 노인이라면 양로연에 참석 가능토록 함
*90세 이상의 천인에게 쌀 2석(288kg) 하사
*100세가 된 천인에게는 천민을 면하고 관직과 봉작을 내림
○의료,보건
*향약집성방(1433), 의방유취(1445) 편찬→의학의 발달
*제성원에서 관비를 교육하여 의녀를 확대
○아동 복지
*아이들에게는 겨울철에 먹을 것을 넉넉히 주고, 제생원에서 항상 관찰토록 하라: 『세종실록』 1435년 6월 22일자 기사...
*버려진 아이들의 입양을 자유로이 허락, 아이를 버린 자를 찾아 신고하면 포상
○양민의 결혼 지원
*형편이 어려운 자들에게는 관가와 일가 친척들이 도울 수 있게 함
-천문학의 발달-
혼천의, 소간의, 대간의 등의 천문관측기기와 조선만의 독자적 역법 칠정산(1444) 제작
*중국과 아랍에 이어 세계사적으로 조선은 일식을 3번째로 예측한 나라가 됨
-형법-
○사형죄에 해당되는 사안은 세 차례에 걸쳐 조사하는 '삼부제' 시행
*졸속한 형벌 집행으로 억울한 죽음을 맞는 사람을 줄이고자
○노인과 어린이에게 '자자형' 금지
*자자형: 얼굴이나 몸에 죄목을 새기는 형벌
-음악-
○박연 등용을 통한 궁중연회, 의례악기의 자체생산 활성화
○세종 본인이 스스로 '정간보' 창안: 정간보는 서양의 오선보와 더불어 세계 2대 유량악보
*유량악보:음의 높낮이와 길이를 표기할 수 있는 악보
○세종 본인이 스스로 '여민락'과 종묘제례악곡 여러 수를 작곡
*중국 아악의 형식을 벗어난 독자적인 악곡 형식 구성의 한 시도로 평가
"중국의 경(磬)은 과연 화하고 합하지 아니하며, 지금 만든 경(磬)이 옳게 된 것 같다. 경석(磬石)을 얻는 것이 이미 하나의 다행인데, 지금 소리를 들으니 또한 매우 맑고 아름다우며, 율(律)을 만들어 음(音)을 비교한 것은 뜻하지 아니한 데서 나왔으니, 내가 매우 기뻐하노라. 다만 이칙(夷則) 1매(枚)의 그 소리가 약간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연이 즉시 살펴보고 아뢰기를, "가늠한 먹이 아직 남아 있으니 다 갈지 아니한 것입니다."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1월 1일 자 기사-
▶▶위의 사례에서 보듯 세종은 절대음감의 능력자 이기도 하다...
-국방-
○북방개척을 통한 4군(최윤덕)과 6진(김종서, 이징옥)의 설치로 조선의 국경선 확정
○총통과 화약무기, 관련 전술의 계량과 개발
: 일발다전법 완성, 사수와 장전수를 분리해 운영하는 사격술 개혁 시도
*세계 최초로 화약무기를 규격화, 일반화
*사격술과 부대 편성에 있어서 화약무기를 운영하는 부대를 수립
*화약무기 운영 부대의 운영 방법을 법제화
▶사실상 포병이라는 병종을 탄생시킨...
(그리고 이렇게 잘 정비된 조선의 화약무기체계는 140여 년 후 한 전설적인 영웅에 의해 그 절정을 보여준다.)
대표자료) 삼총통, 잘전총통, 사전총통, 사전장총통 등의 소형화기와 총통등록 등(1448)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은 태종의 업적이라 생각하여 제외
-공공사업-
○자격루, 앙부일구 등의 시보장치 설비
○측우기와 수표의 설치로 강우량 측정기 설비
*측우기는 세자 향(珦-후일 문종)의 발명품
○금화도감 설치로 화재를 예방(1426)
-여론반영에 따른 세제개혁-
*전분6등법,연분 9등법: 토지의 질에 따라(전분 6등법), 농작의 풍흉에 따라(연분 9등법) 세액에 차등을 두어 조세를 납부하는 제도. 이 제도가 실행되기까지 먼저 1430년, 5개월간의 대국민 여론조사를 거쳤는데 찬성표는 96,000여 표,반대표는 73,000여 표가 나왔다. 찬성표가 더 많으니 바로 시행해도 되겠지만 세종대왕은 급격한 제도의 실시로 피해를 입을 백성들도 있다고 생각,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공정한 세법기준을 더 마련한 뒤 실천해 나가기로 한다. 그리하여 10년후 여론이 좋았던 삼남지방(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부터 시범실시를 하였고 점차 그 시행범위를 늘려 나갔다.
-대명(明) 인삼로비-
세종의 즉위초, 당시 명은 성조 영락제의 팽창정책으로 인한 수차례 대외원정을 감행, 자연히 수많은 군마와 자금을 필요로 하여 조선에게 만필 이상의 군마와 그 운반비용, 상당수의 세폐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명의 칙사와 관료들에게 은밀히 로비를 해 인삼의 효용성을 선전하고, 조공품목이던 말, 금, 은을 인삼으로 바꾸게 하였다. 그리하여 훗날 조선은 그렇게 하여 지킨 군마와 자금을 훗날의 북방개척에 이용할 수 있었다.
-훈민정음 창제-
설명생략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
『세종실록』 5년(1423) 7월 3일자 기사
생몰:1397~1450
재위:1418~1450
사직을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김상경 드라마 재미떠
동피님 글 왜케 오랜만에 보는 거 같나요?
반갑고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때는 유명한 대신들도 많았죠... 아니면 세종대왕님이 보는 눈이 좋았던건가
일반적인 조선왕의 10명이상의 업적을 하신 성군
음....농업 생산량이 폭증해서 우리 선조님들이 음식을 그렇게 많이들 드셨던건가봉가 ㅇㅅㅇ?ㅋ
실제로 상당한 식사량때문에 조선 중기 후기엔 식량난이 생기는 주요 원인중 하나로 월등한 식사량이라는 말도 있던뎀 ㄷㄷ
세종이 셋째아들이라 태종 이방원이 공부못하게 여러 취미거리를 주었죠.
똑똑한 동생이 있으면 왕이 될 첫째에게 부담이 될까봐, 공부잘하는 세종에게 다른 취미를 가지라고 했는데...
나중에 세종이 왕이 된 다음에, 자신의 취미들을 업적으로 만들어버림
워크홀릭의 왕
대신 신하들은 죽어 났지... 맘대로 사표도 못내고....
나라를 망쳐먹는걸 보면 대부분 왕 보다 주위에 기득권 새끼들이 더 심함 ...
지금 현재 우리나라도 그럼
저 때 조선왕조상 유일하게 설문조사도 했었죠
토지 관련해서 전국적으로 국민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절대군주제 시절에 여론조사를 실시했다는 건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세종 후기의 업적은 아들 문종과 함께 이룩한것..
몇백년을 앞서가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