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평전투 후 진나라의 백기가 조나라 병사 40만의 포로를 생매장한 사건
전투는 끝났다. 그러나 결말은 아직 나지 않았다. 한꺼번에 40만이라는 엄청난 포로를 받게 된 진나라는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많은 포로를 먹일 군량이 진나라에는 없었다. 결국 백기는 끔찍한 선택을 했다. 백기는 조나라 군사들이 조를 나누어 구덩이를 파게 한 후, 그곳에 군사들을 묻어버렸으며, 전투 후에 취한 조나라 군사들의 수급을 모아 영루(營壘)에 쌓게 하였다. 백기는 이 산을 두로산(頭顱山)이라 부르고, 이 산 꼭대기에 지은 누각을 백기대(白起臺)라 불렀다. 훗날 한 시인이 이 참담한 장면을 다음의 시로 지었다 전한다.
“ 高臺八尺盡頭顱
何止區區萬骨枯
矢石無情緣鬪勝
可憐降卒有何辜
팔 척 백기대 모두가 두골이니,
장수가 공 이루려면 일만의 뼈가 뒹군다는 것은 옛말이라네,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니 화살과 돌에는 사정이 없다하나,
항복한 군사에게는 무슨 죄가 있을까"
이러한 행동으로 얻게 된 효과는 상당했다. 당시 다른 5국에 경고하는 의미(진나라에 대항하는 자는 죽음 뿐이다)도 있었으며, 조나라에게는 항전의 의욕을 완전히 꺾어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농사를 지을 남자들이 거의 남지 않게 된 조나라는 이후 완전히 몰락해 버리고 말았다. 다시는 예전의 힘을 회복하지 못한 조나라는 결국 약 30년 후인 기원전 228년 멸망한다.
40만이 진짜냐에 대해 논란이 많네요 답글 몇개 가져왔는데
비교적 최근에는 천안문 민주화운동..
8964
장평 이후에 조나라가 어떤꼴이 됐는지 나와있는데
진짜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해봤습니다. 또한 사서에는 장평당시 포로들을 죽이고 묻었다고 되어있죠.
피가 강기 되었다는데 실제 40만이면 그럴수 있을것 같네요...
전투중 사망이 아니라 비교전의 상황에서 한번에 집단적으로 한 학살의 행위에서 장평대전이 1위라는 거죠??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사건 이후에도 계곡에서 핏물이 흘렀다고 합니다.
이승만 개객기
대충 4,000명으로 퉁칩시다.
40만... 저시대에 저만한 인구를 군대로 부릴수 있는 국가가 있었을까?? 기원전인데
킹덤은 전설이다..
40만 가능하다고 봅니다. 전국시대 말기의 전쟁규모는 상상이상이었던건. 국가의 존망을 걸고 총력전을 하던 시기라..
백기의 저 만행이 결국 진나라가 통일후에도 중국 통합을 이루지 못하게한 큰 원인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걸 또 항우가 반복해서 초나라가 망하고..
중국 전국시대에 인구가 저렇게 많았을까?
40만 충분히 가능합니다
진나라에서 독립한 이후의 조나라 인구가 약 500만 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는 거의 둔전제를 시행했었으니 40만은 충분히 가능하죠
100만대군이 저때 당시에는 불가능한 숫자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기원전 저때당시 초나라의 인구가 2천만정도 였고 실제 병력이 100만정도 됬다고 합니다
절마들은 머리수는 많으니 충분히 가능은 합니다
총 전쟁이 최대 3만에 일개 전투면 4~5천 으로 보는게 합당합니다.
삼국지가 시작되기 바로전.. 중국 인구가 4천만 이었다고 읽었는데.. 200년이 지난 인구조사엔 2천만으로 줄었다고 하더군요.. 삼국지에서 100만 대군 이야기 하면.. 10만명 생각하면 된다고 했는데.. 40만명이면 4만명도 안됄듯 합니다..
그래도 원탑은 마오쩌둥 아닙니까? 직.간접적으로...
쬬쬬의 서주대학살도 그렇고... 더 길게보면 기록되지 않은 역사에서는 더 셀 수 없는 학살로 지금의 인류가 있는것...
마오쩌둥의 참새 대학살로 굶어죽은 사람이 4 천만명이라는데 … ㅎㅎ 요런건 아마 숫자 줄였겠죠.
우한 코로나 사망자 숫자 줄이듯이 ~
40만 안되요
지금에야 의학이 발달해서 그렇지
풍토병 전염병 대처법 없고
종이도 발명되지 않은 기원전이었으니
저당시 나이 40이면 오래산다 했을 시기예요
최대한 대규모로 전투해도 3만에서 4만정도일꺼예요
나라가 전쟁으로 가려면 생산이 중요하고
한참 안정되고 난 시기를 보면
오히려 한나라 말기 조조 100만이라해도
12만정도에서 뻥튀겨 말할 가능성은 있죠
저 사람들이 영겁의 세월을 저주해서 지금 중국이 그 모양인 것인가.
저는 마오쪄뚱이 참새잡으라고해서
그해 메뚝이떼 때문에 극심한기근에시달려서
2000천만이 아사해죽은 사건인줄..
그 나이 때 남자들을 다 끌어와서 농사고 경제활동이고 다 포기했다고 치면 그 자체만으로도 나라는 망하는 길로 가는거다
40만을 먹고 입히고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
40만명이면 지금 구미나 경기도 광주 정도 인구를 묻는다는것도 보통 일은 아닐거다
과장이 된것 같다
잘 살았다는 송나라때(북송) 인구가 1억명이고 군사가 100만 가까이 됐는데 그 때 병폐가 엄청났다고 한다
비잔틴 황제인가? 전쟁에서 포로 잡은뒤 풀어주는데.
열명중 아홉명은 두 눈을 뽑고 한명은 한눈만 뽑아서 풀어주었다더군요. 그 한명더러 인솔해서 가라고.
귀향해도 일 못하고 먹여살리다 더 폭망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원래 장평에는 염파가 버티고 있었죠
백기와 맞먹는 전국의명장 염파를 뚫을수 없다고
판단해서 간계를 써서 조나라로 하여금 조괄로
사령관을 바꾸게하고.. 뭐 결과는..
그리고 조나라 마지막 보루였던 이목도 간계로
제거. 곽개 클라스 .
내부의적이 이렇게 무서운거임
중국은 차츰 차츰 인간들을 다 죽이고, 지금의 짐승들만 남았나 봅니다.
황하 홍수도 있었죠. 적을 막기 위해서 라지만 결과가... 홍수로 인한 사망자 90만명, 이는 허난 대기근으로 이어지며 300만명이 아사
오오오~ 스크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