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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제가 들깨를 싫어하시는 걸 몰라요

 
 
 
저는 들깨를 별로 안 좋아해요.
들깨 칼국수, 들깨 미역국, 들깨죽, 하여튼 들깨 들어간 건 다 안 먹어요.
어릴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나이 들수록 그 향이 싫더라구요.
 
 
알콜중독 아빠, 지독하게 시집살이 시키는 할머니, 모든 걸 엄마탓으로 돌리는 친척들
엄마가 집을 나갈 이유는 열 두 살짜리 눈에도 충분해보였어요.
그래서 엄마를 한 번도 미워해 본 적 없어요. 8년 내내 그리워했고 사랑했고 엄마도 그랬다는 걸 알아요.
 
 
스무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연달아서 아빠도 온 방안에 피를 토하면서 돌아가시고
끊어질 것 같은 할머니랑 아빠 허리를 졸라매면서 없는 돈까지 털어가던 친척들이 기다렸단 듯 연락을 끊고서야 엄마를 다시 볼 수 있었어요.
엄마는 정말 며칠만 친구집에서 자고 오려던 거였는데, 삼촌이 전화를 해서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했다는 것도 그 때 들었어요.
8년동안 우리가 보고싶을 때면 우리동네로 오는 버스를 탔다가, 버스를 지나쳐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종점으로 돌아가길 반복하면서 울었다던 엄마한테는 남편도 있고, 아들도 있었어요.
언니랑 저를 보자마자 딸, 누나, 그러더라고요. 처음부터 다섯 가족이 살던 집인것처럼요.
그래서 지금 저는 내 인생에 한 번도 불행이 없었던 것 처럼 살아요. 엄마의 빈자리 같은 건 겪어 본 적도 없는 것 처럼요.
 
 
 
그래서 엄마는 제가 들깨를 싫어하는 걸 몰라요.
제가 너무너무 아팠던 날 엄마가 들깨칼국수를 사왔더라구요. 너 이거 잘 먹었잖아, 하면서. 좋아하는 거 많이 먹어야 빨리 나아, 하면서.
나는 들깨를 안 좋아하는데. 음식을 돈 내고 먹기는 커녕 향을 맡는 것도 싫어하는데.
그걸 말하면 엄마가 슬퍼할까봐, 아니 사실 제가 슬퍼질까봐 말을 못 했어요.
엄마가 '없는' 동안 내가 변해버렸다고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우리 사이에 '변할' 만큼의 공백이 있었다는 걸 인정하기 싫더라구요.
 
그래서 엄마는 제가 들깨를 싫어하는 걸 몰라요.
그 칼국수 국물까지 싹싹 긁어 먹었어요. 엄마가 잘 먹는다고 엄마 그릇에서 반이나 덜어줬는데 그것까지 다 먹었어요.
그리고 엄마가 돌아간 뒤에 자취방 변기통을 붙잡고 다 토했어요. 그래도 엄마는 내가 잘 먹은 줄 알고 돌아갔으니까 괜찮아요.
엄마가 나에 대해 뭔가 기억하고 있었다는 게 너무 행복해서 목구멍이 아프지도 않았어요. 엄마의 기억 속에 내가 계속 있었다는 게 좋아서.
 
 
 
오늘 회사 점심 메뉴가 들깨 미역국이네요. 쳐다도 보기 싫어서 나가 먹으려구요.
엄마는 올해 제 생일에도 들깨 미역국을 끓여오실거예요. 그 땐 냄비 바닥에 구멍 나도록 긁어 먹어야겠죠.
 
 
엄마는 제가 들깨를 싫어하는 걸 몰라요.
평생 모른 채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댓글
  • 열라빠른늑대 2017/03/28 11:32

    허.  아침나절부터 눈에서 땀이 줄줄줄.....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뛰듯이 나가야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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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파리1호 2017/03/28 11:35

    너무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글이네요. 코끝이 찡...
    작성자님도, 작성자님이 아끼는 분들도 모두 행복해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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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긍정대답왕 2017/03/28 11:36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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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앤티크로즈 2017/03/28 11:36

    아 물 받으러 왔다가 눈물이 찡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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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pim 2017/03/28 11:37

    이제 천천히 맛있어질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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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워띠 2017/03/28 11:49

    슬프더라도 담담하게 말하세요.
    남의 일처럼 지나가는 일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조용히 말하세요.
    듣다가 서러움에 눈물이 쏟아지더리도 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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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치는삼월 2017/03/28 11:51

    행복하세요. 진심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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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rman 2017/03/28 11:52

    음식에 얽힌 이야기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합니다..허영만 화백의 만화 식객의 한 장면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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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사노-인 2017/03/28 11:53

    하.. 안구에 습기가 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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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흐미흐밍 2017/03/28 11:55

    해장국에 들깨 넣으면 술이 들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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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캬울캬울 2017/03/28 11:55

    "엄마. 지난번에 회사에서 나온 들깨 미역국을 먹었는데 체한 다음부터는 들깨 냄새만 맡아도 싫어졌어. "
    라고 한마디만 하세요.
    그렇게 먹고 토하는거 너무 몸에 정신이도 안좋아요.
    하얀 거짓말이 나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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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캬울캬울 2017/03/28 11:56

    평생 어머니와 함께 한다는건. 서로를 알리고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혼자 그렇게 꾹 꾹 담고만 있음 병들어요. 병드는 걸 어머님도 원하지 않으실거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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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척수접기 2017/03/28 12:02

    식당영양사: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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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덩이 2017/03/28 12:03

    미역국에 넣을수 있는걸로 사다가 같이 드시면서 꾸준히 엄청 좋아한다고 맛있다고 어필해보면 어떨까요?
    이제 어머니랑 몇번 보고 말거 아니고 계속 보실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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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즌라탄 2017/03/28 12:03

    앞으로 쭈욱 무탈하게 남들 즐기는 행복 나 누리면서 사시길 바랍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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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하게될거야 2017/03/28 12:05

    글 다 읽고 코끝이 시큰해지더니 눈물이 고여서 렌즈가 눈안에서 막 돌아다니네요ㅎㅎ
    그동안 함께하지 못했던 몫까지 많이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글쓴님도 어머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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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빛문양 2017/03/28 12:10

    찡하네요 ㅜㅜ
    들깨가 싫다고 직접 말하기 어려우시면..
    엄마~ 나 저번에 정말 맛있게 먹었는데.. 이상하게 체해서 다 토했다. 그 다음부턴 먹기가 싫은데 어떡하지?... 그렇게 살짝 투정도 해보고 그러세요.
    아마 님 어머니 입장에선 그런 투정도 예쁘게만 보이실 거에요.
    앞으로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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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나무이야기 2017/03/28 12:16

    하....
    눈물이 나네요.ㅠㅠ
    8년동안 많이 힘들었죠?
    지금의 작성자님 마음이 엄마를 이해한다지만
    정말 많은 상처와 원망의 시간이 있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두분 다 평생 없어지지는 않을 상처겠지만,그래도 그냥 그렇게 하얗게 덮어두는 것보다는 함께 지난 세월이 바꾼 것들을 이야기하면서 서로 이해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요?
    잘 자라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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