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는 1992년 일본인 연구자를 통해 전쟁범죄의 위상을 갖게 됐습니다. 그 전까지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는 민간에서 일어난 일일 뿐 일본 정부와는 상관없다는 입장이었죠.
그런데 1992년 1월 일본의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중일전쟁 당시 일본 육군성이 중국 전선 부대에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모집을 지시하는 공문서 6점을 발견해 발표함으로써 위안부 문제에 일본군이 관여했음이 밝혀지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91년에 김학순 할머니께서 최초로 위안부 증언을 하시면서 이미 위안부 문제에 대한 강한 환기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당시 노태우 정부도 그에 대해 일본에 강하게 항의를 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러한 때 마침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폭로했던 거죠.
명백한 증거까지 나오자 더 이상 발뺌을 할 수 없었던 일본 정부는 그때부터 위안부 문제에 군이 관여했음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1992년 1월에 방한하여 일본 총리 최초로 우리 국회에서 연설을 한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가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며 ‘참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는 표현을 쓴 것을 시발로 일본 정부는 자체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조사 작업을 진행해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하는 보고서를 93년에 두 차례 발간합니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93년 8월 저 유명한 고노 담화가 발표되죠.
뭐 여기까지는 자민당이 한 일이니 그 진정성을 의심할 만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 무렵 일본에서 중요한 정치 지형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내용이 바로 이 변화에 대한 것입니다. 자민-사회-사키가케가 연립 정부를 이루면서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총리가 되는, 사회당 정권이 출범한 것입니다.
우리로 치면 자민당이 버티고 있는 연합정부지만 어쨌든 대통령이 김대중으로 바뀌는 일이 일어난 셈이죠. 아시다시피 무라야마 총리는 사회당 소속답게 94년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범죄에 대해 역사상 가장 적극적인 인정과 사과를 담은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고노담화의 후속조치로 아시아의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보상을 담당할 재단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아시아 여성기금)’을 만들었습니다. 초대 이사장을 무라야마 총리가 직접 맡았죠.
아시아 여성기금을 만들고 운영에 참여한 사람들은 산케이 서울 지국장 같은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친한파 진보 지식인으로 널리 알려진 와다 하루키 교수 같은 지식인들과 우스키 게이코 같은 활동가들이었어요.
우스키 게이코가 누구냐면 1990년부터 ‘일본의 전후 책임을 분명히 하는 모임’을 만들어 대표를 맡으면서 일본내에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 등을 널리 알려온 사람입니다.
우리로 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시아 여성기금은 위안부 문제는 없다고 핏대 세우는 우익에 맞서 싸우며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일본의 책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노력해온 유시민, 홍세화 같은 지식인들과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김대중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재단이었다구요.
그렇게 만들어진 아시아 여성기금의 활동내용은 이랬습니다. 1.보상금 2.총리 편지 3.의료복지 지원 사업 4.역사의 교훈으로 하는 사업 5.현대적 여성 문제에 대한 대처.
저기서 두 번째 항목인 총리 편지는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보상금과 함께 ‘일본 내각 총리대신’의 사과를 담은 편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와다 하루키 교수가 제안하고 무라야마 총리가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죠.
세 번째 항목인 의료복지 지원 사업은 7억엔 규모의 정부 자금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주택 개선, 의료 및 의약품 보조 등의 사업을 실시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전달될 보상금은 어떻게 마련되느냐.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사죄의 마음을 담아’ 돈을 냄으로써 충당하기로 했습니다. 국민성금 모금액이 부족할 경우엔 ‘국가가 책임을 지는 것’으로 했죠. 재단에서 필요한 모든 경비는 정부가 지원을 하기로 했고 보상금 외 다른 부분에 국민성금이 쓰이는 일은 없도록 했습니다.
보상금을 국민성금으로 충당하게 된 이유는 당시 일본 정부가 사회당 독자 정부가 아니라 자민-사회-사키가케 연립정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회당과 사키가케는 전부가 안 되면 최소한 보상금의 반이라도 국가가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자민당이 반대를 한 거죠. 자민당 입장은 ‘보상’은 이미 한일협정으로 포괄적으로 이루어졌으니 정부가 출자를 하더라도 ‘보상금’의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정부가 돈을 내는 것까진 괜찮지만 거기에 ‘보상금’이라는 타이틀을 절대 달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아시아 여성기금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사회당 정권이었던 만큼 그런 자민당을 설득하기 위해 놀랍게도 당시 관방장관이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고 합니다. 여야의 여성의원들도 나름 노력했으나 자민당의 완강함을 꺾을 수는 없었다고 하죠.
기금 관계자들은 민관 합동의 기금 조성 방법을 차선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무리 사회당 정권이라 해도 자민당을 설득할 수는 없다는 것, 보상금을 국가가 담당할 경우 특별입법을 해야 하므로 통과될지 말지 미지수이고 그 사이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간다는 것, 위안부 피해자들이 고령이므로 하루라도 빨리 사과와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사회당 정권이 끝나면 ‘의료복지’라는 명분으로라도 정부 자금이 출자될 가능성도 희박해진다는 점, 다시말해 지금이 아니면 위안부에 대한 속죄의 기회는 사라질 수 있다는 절박함이 그 배경으로 작용했던 거였습니다.
그리고는 기금이 조성되자 사정이 제일 안 좋은 필리핀의 위안부 피해자들을 첫 번째 대상으로 하여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기금 측이 한국에도 연락을 하자 1997년에 일부 할머니들께서 수령의 뜻을 밝히셨고 98년 1월에 기금 전달식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흔히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이 주는 돈을 어떻게 받아?’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때 전달식에 참여했던 할머니들 소회를 들으면 그런 우리의 관념이 아프게 부셔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전달식에서 일본 총리의 사과 편지가 낭독되자 할머니들께서는 이런 소회가 드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 사정을 들어주고 우리 존재를 알아주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리고 눈물이 났습니다.
전달식 마지막에는 할머니들께서 서로 부둥켜 안고 우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정대협이 끼어들어 다른 할머니들이 기금을 받지 못하게 했던 겁니다. 이유는 아시아 여성기금이 일본 정부의 책임을 피해가려는 기만적인 술수이자 야비한 해결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죠. 총리의 사과 편지도 총리 개인의 의견일 뿐 일본 정부의 입장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정대협 핵심 멤버였던 윤정옥은 당시 한 세미나에서 기금을 수령하신 할머니들을 향해 “죄를 인정하지 않는 동정금을 받으면 피해자는 자원해나간 공창이 된다”고까지 했습니다. 간단히 풀어쓰면, 기금을 수령하신 할머니들이 공창이라는 말입니다. 과연 저게 위안부 피해 당사자들께 처할 말인가 싶지만 정대협은 아시아 여성기금이 흡사 도조 히데키 내각이 산케이 지국장 같은 인사들을 내세워 만든 술책이나 되는 것처럼 맹비난하며 무력화를 시도했습니다.
기금 측이 지속적으로 정대협에 연락을 시도했지만 정대협은 계속 거절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정말 믿기지 않는 조치까지 견인해냈습니다. 앞서 얘기한, ‘일본의 전후 책임을 분명히 하는 모임’의 대표로서 우익과 싸워가며 자국민들에게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를 알리기 위해 노력해온 우스키 게이코가 아시아 여성기금 관계자라는 이유로 한국 입국금지를 당한 것입니다.
그 후 일본 우익이 그런 우스키 게이코를 어떻게 취급했으며 ‘일본의 전후 책임을 분명히’ 하려는 그녀의 노력이 어떤 현실과 직면해야 했을지는 안봐도 블루레이겠습니다.
그러면서 정대협은 ‘강제연행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연대’를 결성해 모금을 진행했는데 그렇게 모금된 돈을 전달할 때 일본의 기금을 받으신 할머니들은 제외하죠.
또한 김대중 정부에 압력을 넣어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한국 정부의 위로금을 지급케 했는데 그 위로금을 받는 할머니들께 일본의 기금은 받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강요하여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위안부 문제는 할머니들 뜻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대협의 뜻이 알파요 오메가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2015년 위안부 합의 때도 윤미향이 정부로부터 미리 합의에 대해 전해 듣고도 할머니들께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죠? 정부 인사까지도 행차하게 할 만큼 참 대단한 권력이고 그 대단한 권력이 할머니들 덕분에 나왔음에도 할머니들은 철저히 소외시킨 참 대단한 단체입니다.
결국 아시아 여성기금은 정대협에 의해 무력화가 됐고 사회당 정권이라는, 다시는 안 올지 모르는 기회를 활용해 아시아 여성기금으로 위안부 피해자 한분 한분께 사과와 보상을 하려던 일본의 유시민, 홍세화들과 참여연대 활동가 같은 사람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뒤 정대협과 함께 하는 할머니들의 증언은 점점 과격해졌고 자발적 지원자 외에 정말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할머니들의 이미지는 처음의 취업사기, 인신매매, 가족에 의한 팔려감에서 어느날 갑자기 노예사냥처럼 사냥돼 끌려간 ‘강제연행된 성노예(저는 위안부에 대해 성노예라는 용어를 들을 때마다 할머니들께서 과연 저 용어를 좋아하실지 의문이 들곤 합니다)’로 고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일례로 양아버지와 살다가 양아버지가 어느날 집으로 찾아온 군복을 입은 사람을 따라가면 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 해서 따라갔다가 위안부가 됐다고 증언하셨던, 그래서 일본군보다 양아버지가 더 미웠다고 하셨던 할머니 역시 시나브로 ‘강제동원된 000할머니’로 회자되는 식이었죠.
아무튼 아시아 여성기금이 무력화된 후에는 소녀상 건립이 이루어지면서 위안부 문제로 인한 한일 양국의 갈등은 더 심해졌고 위안부 문제로 인해 한일관계는 늘, 언제나 삐걱거리게 됐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위안부 문제가 아니라 정대협 때문에 한일관계는 늘 늪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정말 의문이 일본 총리의 사과 편지를 들으며 마음이 편해지고 눈물이 났다는 할머니들이 정대협에는 어떤 의미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할머니들에게 동정금을 받았으니 공창이라는 소리를 퍼부은 윤정옥은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어떤 해결책을 원하는 것인지도 미스터리입니다.
산케이 지국장이 아니라 일본의 유시민, 홍세화들과 참여연대 활동가들이 주도하고 아베가 아니라 무라야마 총리가 당시 일본 정부가 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최대한으로 지원한 아시아 여성기금을 받아들였다면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아시아 여성기금을 수령하신 할머니들 중 한분께서 일본 전체가 보상금을 준다 한들 우리가 죽으면 무슨 소용이냐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 기금을 받아들였다면 당장 할머니들 한분한분이 생전에 ‘일본 내각 총리대신’의 사과를 들으며 마음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고 일본 국민들이 사죄의 마음을 담아 전달하는 보상금을 받아 생계에 보태고 일본 정부가 지원하는 복지 혜택을 누리면서 여생을 조금이라도 더 편안하게 사실 수 있었을 겁니다. 2000년대에 들어선 뒤에도 일본 정부는 지속적으로 기금을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피력했으니 할머니들에 대한 복지지원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을 겁니다.
또한 무엇보다 저 기금을 받아들였다면 기금이 표방하는 무라야마 총리 시절의 일본 정부의 입장을 일본에서 보편적 상식으로 자리잡게 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피해자인 우리가 고노담화의 실체적 이행인 아시아 여성기금으로 표방된 사과를 받아들였다면 위안부 문제에 군이 관여했다는 사실은 일본 우익들도 건드릴 수 없는 역사적 팩트로 자리잡게 됩니다. 진정성 있게 그걸 인정해서 우리가 사과를 받아들인 것이니까요. 그랬다면 고노담화의 입지는 견고해졌을 겁니다.
하지만 사회당 정권 아래서 와다 하루키와 우스키 게이코 같은 사람들이 주도한 아시아 여성기금마저 거부함으로써 한국은 애당초 사과를 받아들일 생각은 없이 그냥 일본을 나쁜놈으로 만들려는 의도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나라, 따라서 자학사관만 심어주는 고노담화 따위는 폐기해야 한다는 선전선동이 힘을 얻게 돼버렸습니다. 중간에 미국이 껴있으니까 고노담화 폐기까지는 함부로 하지 못했을 뿐이죠.
정대협이 노리는 건 바로 그런 파국이라는 의구심을 제기하려고 해도 정대협이 피해자 할머니들과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대협은 성역이 되고 말았어요. 이 점을 정확히 해야 하는데 위안부 문제는 할머니들이 주체가 아니라 정대협이 주체였습니다. 할머니들 생각이 아니라 윤미향과 그 동료들 생각이 위안부 할머니들 뜻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돼 왔습니다. 할머니들께서는 정작 아시아 여성기금을 받으며 해원을 하는 느낌이었다고 해도 정대협이 그 기금은 더러운 꼼수라고 하면 더러운 꼼수여야 하는 겁니다. 거기에 의구심을 표하면 할머니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자동 치환돼 가차없는 인민재판이 이루어지는 게 그간 정대협이 독점하고 있었던 위안부 문제의 실상이었죠.
피해자 할머니들이라 해도 기금을 받으신 할머니들을 공창이라고 비난했던 것처럼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으면 정대협의 표적이 되곤 했습니다. 오직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할머니들만이 위안부 피해자였던 셈이죠.
정대협, 그러니까 정의기억연대가 추구하는 바는 할머니들 뜻을 우선으로 하는 위안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운동권 출신 먹물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관념적 이상의 충족과 자신들의 안정적 취업이며 그걸 위해 해결이 아닌 끝없는 증오를 부추기는 도구로 할머니들을 이용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관념적 이상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는 통진당 간부 출신이 정대협 실무자로 가있고 남북 합동으로 위안부 피해자 실태를 조사한다며 조총련과 연락이나 취하는 행태를 보면 어렴풋이 짐작가능하기도 하겠죠.
윤미향이 이용수 할머니께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회로 가는 거라고 했다는데 아시아 여성기금 당시 일본 총리의 사죄편지가 총리 개인 편지라서 일본 정부의 입장이라고 볼 수 없다던 윤미향에게 아베가 개인 자격으로 야스쿠니를 참배해도 개인 자격이니까 그냥 넘겨야 하는 건지 되묻고 싶습니다.
참고로 분명히 부족한 점이 있지만 제가 ‘일본은 사과했다’고 생각하는 근거인 아시아 여성기금 조성 당시 모금에 참여하면서 일본 국민들이 남긴 소감 몇 개와 일본 총리의 사죄편지를 소개합니다.(편지는 최초로 기금이 전해진 때가 하시모토 총리 때라서 순차적으로 하시모토, 고이즈미 총리 이름으로 작성됐음)
이 나라 사람인 이상, 이 나라의 과거의 잘못, 역사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군 위안부가 된 여러분께 일본인으로서, 인간으로서 진심으로 사죄합니다.(27세 젊은이)
교과서에서 배웠다. 눈물이 나왔다.(중3)
‘민중 쪽의 전쟁 책임’을 자각하는 표시로 참가합니다.(익명)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죄의 마음이 피해자의 가슴에 가 닿기를 바라며(오사카의 여성)
저희는 국가 보상을 위해 계속 싸워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 사람의 일본인으로서 사죄의 마음을 표시하고 그 마음이 받아들여지도록 노력해나가고 싶습니다. 100년이 걸리건 200년이 걸리건, 자손들에게 전해가야 할 일본인의 책임입니다.(시조의 여성)
일본 민주 국민의 사죄와 보상 의무로서 모금 모집이 발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번 문제를 계기로 일본은 인도적 평화 노선을 관철하고 과거의 반성과 사죄하는 마음을 증명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안되지만 갹출금의 일부를 담당할 수 있다면 기쁘겠습니다.(가고시마현의 여성)
일본 총리의 사죄편지
이번에 정부와 국민이 협력해서 추진하고 있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을 통해, 전 종군위안부 분들에 대한 일본의 국민적인 속죄가 이루어지게 된 데 따라 제 마음을 표명하고 싶습니다.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을 깊이 상처 입힌 문제였습니다. 저는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서 다시, 이른바 종군위안부로서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고 몸과 마음에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입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전합니다.
저희들은 과거의 무게로부터도 미래의 책임으로부터도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로서는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면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발판으로 과거 역사를 직시하고 이를 바르게 후세에 전함으로써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관한 여러 불합리한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임해나가지 않으면 안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의 앞으로의 인생이 편안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