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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컨셉러의 심성

[ 관리자님! 급합니다! ]

대형 커뮤니티의 관리자인 사내는, 한 회원이 보낸 1:1 문의신청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 회원의 아이디만 봐도 어떤 내용일지 예상이 됐던 것이다.

아이디 [ 욕먹으면흥분 ]

" 이 새끼, 병신 컨셉러 아니야? "

그는 커뮤니티 내에서 유명한 병신으로, 일부러 욕먹을 댓글만 쓰고 다니는 어그로 유저였다.
보나 마나 나대다가 먹은 제재를 풀어달라는 요청이겠거니, 생각하며 1:1 문의를 허락하는 사내.

[ 관리자님! 제 댓글에 달린 다른 댓글들 좀 삭제해주세요! 급합니다! ]

" 음? "

예상치 못한 요청에, 사내의 얼굴이 갸웃했다. 남들의 관심을 먹고 사는 관심종자가 자신의 댓글에 달린 대댓글을 삭제해달라고?
사내는 호기심을 느끼며 매뉴얼대로 대답했다.

[ 무슨 일이시죠? 욕설, 광고, 음란성 댓글이 아닌 이상, 유저분의 댓글을 마음대로 삭제해드릴 순 없습니다. ]
[ 아~씨! 그러니까, 일단 이 게시물 확인해보세요! ]

" 뭐야? "

사내는 궁금한 얼굴로 그가 찍어준 주소를 클릭해보았는데, 그것은 고민을 상담하는 한 게시물이었다.


- - - - -
제목 : 고등학교 꼭 가야 합니까?

웹툰 작가가 꿈인 중3입니다.
여름방학 때 만화 그리는 게 재밌어서 그리다 보니, 웹툰 작가가 꿈이 되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제가 공부랑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고, 학교 다니는 시간도 아깝습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만화 연습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거든요? 

그래서 부모님께 그냥 고등학교를 가지 않고, 만화에 전념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난리네요ㅡㅡ
절대 안 된다고, 그럴 거면 차라리 집을 나가라고 화내시는데ㅡㅡ 

제 생각이 잘못된 건가요? 솔직히 웹툰 작가가 돈도 많이 벌고 요즘은 TV도 나오고 대센데, 어릴 때부터 미리 연습하면 더 경쟁력 있는 거 아닌가요? 
너무 답답하네요. 
자식의 꿈을 지원해주지는 못할망정, 왜 앞길을 막는지...
부모님이 학교에도 말해가지고 선생님들이 매일 혼내고, 친구들도 놀리고ㅡㅡ 진짜 짜증 나요.

진짜 고등학교 가기 싫은데.. 그냥 만화만 그리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등학교 꼭 가야 하나요? 
그러다 제가 웹툰 작가 못되면 나중에 원망할 텐데, 부모님은 무슨 생각이죠 정말ㅡㅡ

- - - - -


" 허~ 참! "

사내는 게시물 내용을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글 하나로 모든 사정을 판단할 수 있겠느냐만은, 그의 눈에는 한없이 철없게만 보였다.
아래에 달린 댓글들도 다 사내의 심정과 똑같았다.

re. 세상에; 고등학교는 가야죠; 요즘 웹툰 작가들 학력이 얼마나 좋은데; 
re. 최종학력 중졸로 뭘 하려고요? 나중에 100% 후회합니다. 오히려 그때 왜 안 말렸냐며 부모님 원망할 걸요? 
re. 님 솔직히, 여름방학 때 시작한 거면 만화 그리기 시작한 것도 몇 달 안 되잖아요? 나중에 꿈 바뀌면 어떡할래요? 
re. 친구들 다 고등학교 가는데, 혼자 집구석에 처박혀서 만화ㅋㅋㅋ나중에 나이 먹고 사회 나가면 중졸을 누가 상대해줌ㅋㅋㅋ
re. 님 솔직히 제 동생이었으면 쥐어팼음... 

글 작성자의 철없음에 대해 우려하고, 조언하고, 혹은 조롱하는 댓글들이 정말로 많았다. 그런 댓글들에 간간이 나타나는 작성자의 반응은, 사내의 혀를 차게 만들었다.

re. 집에서 만화만 그릴 거 아니거든요 ㅡㅡ 만화 학원도 다니면서 배울 거거든요ㅡㅡ
re. 중졸이 뭐 어때서요? 전 남들 시선 신경 안 쓰거든요? ㅡㅡ
re. 제 그림 실력 보셨어요? 뭔데 맘대로 궁예질이세요? ㅡㅡ
re. 여기 사이트는 원래 이런가 보죠? ㅡㅡ

" 쯧쯧... "

사내는 자신이 관리자만 아니었어도, 철없는 중3에게 정신 차리라는 댓글을 하나 남겨주고 싶었다.
그때, '욕먹으면흥분'의 1:1 문의 창에 채팅이 올라왔다.

[ 게시물 보셨어요? 거기에 제 댓글 있잖아요! ]

" 음? "

사내는 스크롤을 내려 '욕먹으면흥분'의 댓글을 찾아보았다. 역시, 예상대로 유일하게 혼자만 반대되는 댓글을 달고 있었다.


re. 가기 싫으면 가지 말아야지. 저 새끼들 말 듣지 말고, 고등학교 절대절대 가지 마라! 난 응원한다.


" 하~ 이 새끼 참.. "

사내는 역시 병신이라며 인상을 썼다. 그때, 채팅이 다급하게 올라왔다.

[ 그 댓글에 달린 대댓글들 좀 다 지워주시고, 더 못 달게 해주세요! ]

" 다른 댓글들? "

사내가 확인해보니, 

re. 이 컨셉충 새끼 또 이러네 ㅉㅉ
re. ㅅㅂ 나댈 때 안 나댈 때 좀 가리면서 나타나라
re. 이 새끼는 진짜 병신같은 컨셉이네. 
re. 관심종자 먹이 주지 마시고 그냥 비추만~ 

전혀 이상할 게 없는, 평소와 똑같은 반응의 댓글과 비추였다. 평소처럼 욕먹는 걸 즐기면 될 텐데, 왜 지워달라는 걸까?
사내는 의문스러우면서도, 메뉴얼대로 대답했다.

[ 죄송합니다만, 지워드릴 수 없는 댓글들입니다. 왜 지워드려야 하죠? ]
[ 아씨, 저한테 그 중3이 쪽지를 보냈거든요? ]

그는 중3에게 받은 쪽지의 내용을 전달했다. 


내용을 확인한 사내의 얼굴이 묘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채팅-,

[ 정말 저렇게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 몰랐어요. 저는 정말 이런 쪽지 받아 본 것도 처음이고... 근데, 제가 컨셉러인 게 밝혀지면 저 중3이 너무 실망할 것 같아서 그래요... ]

" ... "

[ 일단, 그동안 제가 쓴 컨셉 글이랑 댓글은 쪽지 보자마자 바로 다 삭제했거든요. 근데 저기 댓글에 달린 대댓글들 보면, 제가 병신 컨셉러이고, 거짓 댓글이었다는 걸 걔가 알아챌 것 같아서...그럼 진짜 실망할 텐데... 제발 삭제 좀 해주세요. 다시는 병신 짓 안 할게요. 부탁드립니다! ]

" 허? "

사내는 그를 다시 봤다. 그냥 병신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런 모습이 있었을 줄이야?

고민됐다. 매뉴얼대로라면 관리자가 이유 없이 유저들의 댓글을 삭제할 순 없었다. 
미간을 좁히며 고민하던 사내는, 중3이 그에게 보낸 쪽지를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 ... "

사내는, 처음으로 직권남용을 하기로 했다.

[ 알겠습니다. 삭제 처리하겠습니다. ]
[ 아 감사합니다! ]


그리고, 처음으로 게시물에 댓글을 달았다.


re.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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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복날은간다 2017/03/05 05:57

    공포 게시판이니까~ 한 발짝만 더 나가봤어요 흐하..
    편안하고 행복한 일요일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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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quette 2017/03/05 06:23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는 만고의진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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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급열차 2017/03/05 08:29

    학생은 애니고로 진학하는데...
    나중에 성공해서 인터뷰하는데 ㅋㅋㅋ
    고민글을 중학교때 올렸다
    그런데 다 욕하는데 한명만 응원하더라 ㅋㅋ
    감사 쪽지을 보냈다 답도 왔다
    만화를 배우는 고등학교가 있어서 그리로 가게 되었다
    그럼 좋겠다....
    대학가는 공부만 하는 학교말고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걸 배우는 기초단계인 학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사회의 시선도 좀 바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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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이내린미모 2017/03/05 08:51

    두줄 있는게 더 좋아요!!!! 공게에도 어울립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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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홀로그램인간 2017/03/05 09:45

    실제 중졸인 저에겐 더없이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되는 지 모르겠지만 여러의미로 저에겐 명작이네요! 항상 잘 읽고 있어요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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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닉넴진짜대충 2017/03/05 10:55

    컨셉러의 심성보다 '어떤 컨셉러의 심성'이 더 나은거 같아요 모든 컨셉러가 저런 나쁜심성을 가지고 있다는거 같아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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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컹크맨 2017/03/05 13:47

    으아! 저놈 왠지 저럴 것같던
    인간이 쉽게 변할리가 없는것 가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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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ladin 2017/03/05 14:47

    마지막 2줄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거 같아요. 있으면 훈훈, 없으면 반전으로 장르 자체가 변한다고 봐요.
    물론 없앤다면 그대로 끝내기보다는 조금 더 뒷내용이 있는게 좋을거 같기도 하구요.
    개인적으로는 반전 결말이 더 좋은거 같아요 ㅋㅋ 공게 느낌으로도 그렇지 않나 싶구요.
    앞으로도 잼난 글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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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국수먹고싶어 2017/03/06 00:46

    우웩 (내가 토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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