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이야기를 담은 만큼 읽기전용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동의없는 퍼나르기에 대해서 강력대응 하겠습니다.
현재는 대학병원을 떠나 병원에서 근무중입니다.
----------------------
1. 로제파스타와 떡볶이
광주는 첫 방문이었다. 편의점도 없는 곳에서 살다보니 휘황찬란한 광주시내가 뉴욕 같았다. 아쉬운 마음에 친구를 3차까지 끌고 갔다. 나쁜 친구는 사귀지 말라 그랬다. 신혼 1년차, 남편을 병원에서 잃어버린 새댁은 한달에 한번 있는 오프날을 남편 친구에게 뺏기고 말았다. 그녀는 그뒤로 한달을 더 잃어버렸다. 미안했다. 누구라도 결혼할땐 섬에서 일하는 친구가 없는지 확인해야한다.
나는 다음날 아침 전화소리에 깼다. 늦잠자고 싶은날엔 꼭 일찍 깬다. 아침 9시부터 부재중 통화가 3개나 있었다. 둘중 하나일것이다. 응급환자 전화던지 민원전화던지. 섬에서는 하루도 밤새 푹 잔 적이 없었다. 응급전화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새벽 6시부터 문을 언제여나? 주사는 맞을수 있나? 보건증 발급에 신분증이 필요하니마니 하는 민원 전화가 걸려온다. 지자체는 응급환자를 볼모로 의사인 나에게 모든 전화 업무를 전가시켰다. 전화를 안받으면 어떻게 되냐고? 경위서를 쓴다. 왜 안받았는지? 그리고 도청에서 감사가 나온다. 대개 감사가 나오면 최소 경고이상의 징계가 떨어진다. 참 가족같은 사이다. 무안에서 가족같은 나를 보기위해 차를 타고 배를타고 다시 차를 타고 보건소까지... 얼마나 극진히 생각했으면... 참 고마웠다.
어쨌든 모텔에서 습관처럼 일어나 왜 샀는지 모를 삼각김밥과 사이다로 아침을 먹었다. 누워서 뭉그적거리다 숙취에 또 잠들었다. 갑작스런 모텔 전화소리에 깨어나 부랴부랴 옷을 입었다.
오늘은 ㅂㅎㅇ을 보기로 했다. 한때는 ㅂㅎㅇ이 너무 보고싶어 인턴 숙소 한켠에서 펑펑 울기도 했다. 동기들은 교수한테 까이고와서 우나 생각했겠지만 나는 정말 서럽게 울었다. 보러가고 싶어도 탈출 할 수 없었기에 더욱 슬펐다. 그때 심정이라면 몇번이고 술취해 전화하거나 집앞에 찾아가고 싶었겠지만 병원 지옥은 그런 몹쓸짓을 자연스레 막아주었다. 그 덕분인지 ㅂㅎㅇ은 내게 1년만에 연락을 해왔다. 달라진것이 있다면 더이상 그녀가 보고 싶지 않았다는것. 그러나 보기로 했던것은 현재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위해서였다. 추억을 들먹이며 밤이고 낮이고 연락하는 ㅂㅎㅇ 때문에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보기로 했다.
그녀의 직장근처 카페에 도착했다. 나는 연신 머릿속으로 해야할 말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잘보이고 싶었다. 너때문에 망가지지 않았고 오히려 잘살고 있다는걸 보여주고 싶었다. 섬에서도 여러 할머니가 음식을 가져다 주는 덕분에 살도 포동포동하게 쪘다. 할거라곤 운동밖에 없어서 웨이트를 2시간씩 했다. 당당한척 이런저런 생각을 반복했다.
두려운 강아지가 먼저 짖는법이다. 그러나 무서운 주인을 만나면 당당함은 저리가고 주눅이 든다. 나도 그랬다. 당당한척 하려했으나 그녀를 만나고 무장해제 되었다.
"오빠 빨리왔네"
"응.............."
"오랜만에 보니까 보기 좋다. 잘지냈지?"
"그래 너는 광주에서 살만하니?"
"응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잘지내고 있어"
"그래 다행이다"
이후로도 의미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3년동안 나눈 정때문인지 말을 할수록 하고 싶은 말이 생겨났다. 궁금했다. 궁금한게 생겨났다. 왜 헤어지자고 했니... 묻지 말았어야할 질문이었다. 가려운 딱지를 기어코 긁어서 피를 보고 마는 인간의 본능이었다. 그녀 나름의 이유가 머릿속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녀를 위로해 주지 못했던 내가 미안했다. 힘든 인턴생활이 그녀마저도 힘들게 했었다. 두마디만 하고 떠나려했던 내 계획이 틀어지고 말았다. 그때라도 정신차렸어야 하는데 어느새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사이 여자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광주를 떠나 집에 도착했냐는 문자에 도착해서 잠시 친구를 만나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알았다는 말과 보고싶다는 메시지에 차마 미안해서 답할수 없었다.
처음부터 ㅂㅎㅇ와 카페에서 만났던건 저녁도 먹지 않겠다는 메세지였지만 무장해제된 나는 그녀와 저녁을 먹게 되었다.
우리는 연애시절 떡볶이를 좋아했다. 그녀는 내가 좋아할것 같다며 아는 떡볶이집으로 데려갔다. ㅈㅅㅇ을 만나고 나서 내 최고의 음식은 로제파스타였다. 로제파스타. 그 음식이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며 되뇌었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떡볶이였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가 편하진 않았지만 떡볶이를 먹다보니 예전 생각이 많이 났다. 정말 많이 났다. 왜그랬는지 모르지만 힘들었던 본과시절 그녀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러면 안되는데.. 추억은 그렇게 무서웠다.
오랜만에 맛있는 떡볶이를 먹었다. 깻잎이 들어간 떡볶이는 ㅂㅎㅇ와 먹고 처음이었다. 맛있게 먹고나서 뭔가 당해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서서히 내 약점을 공략하고 있었다.
나는 결국 그녀에게 하려고 했던 말을 하지 못했다. 연락하지마. 연락하지마 라고 했어야했는데 하지 못했다.
로제파스타와 떡볶이중에 지금은 단지 떡볶이가 좋았을 뿐이다. 그렇다. 그저 오랜만에 깻잎 떡볶이를 먹어서 좋았을 뿐이었다.
내가 사랑하는건 ㅈㅅㅇ이다. 그건 변함이 없는 사실이니까.
(중략).....
2. 진상 환자 1
섬으로 다시 들어왔다. 다른날과 다름없이 근무중이었다. 섬사람들은 육지사람들보다 자격지심이 강하다. 단순히 돈이 없어서 부자에게 느끼는 열등감이 아니다. 섬사람들은 고립되어있다. 오후 3시가 넘으면 밖으로 나갈수 없다. 밖에선 쉽게 할수 있는 행동도 섬에선 특별하다. 하고 싶은걸 제때 하지 못하는 고립이 그들에게 자격지심을 준다. 섬사람들을 위해 파견된 외부인들도 그들에겐 육지사람일 뿐이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그들만의 한을 표출했다. 덕분에 상처도 많이 받았다.
한 할머니가 들어왔다. 자세히보니 전날 본 환자였다. 무슨일인가 하여 "오늘 또 오셨네요"라고 말을 붙이는 순간
오른손에 들려 있던 약봉지가 내 얼굴로 날아왔다.
"아파죽겠는데 왜 약을 하루치밖에 주지 않는거야?"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하여 자리를 벅차고 일어났다. 세수를 하고 와도 할머니는 씩씩대고 있었다. 직원들은 할머니를 안정시키고 있었고 바닥에는 약봉지가 나뒹굴고 있었다. 내 자존감은 바닥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할머니가 대상포진인것 같아 당일 육지 병원진료를 본다하여 충분히 3일치 처방을 했는데 병원이 당일 휴무여서 못나갔다는 것이었다.
육지병원에서 중복처방이 되면 환자 부담금이 커지기 때문에 그걸 고려하여 긴 기간 처방을 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해 설명까지 했지만) 아파서 미치겠는데 왜 조금밖에 안주냐며 화를 벅벅 내고 있었다.
공무원들은 내게 사과하라고 했다. 나는 무엇을 사과해야할지 몰랐다. 도리어 환자를 생각한 내가 사과를 받아야할 판이었다. 그들은 민원 만들기를 싫어하니 지속적으로 사과를 요구했다. 사과했다. 내 자존감은 저 밖 바다까지 흘러갔다.
3. 진상 환자 2
바로 이틀뒤였다. 섬에는 쓸데없이 주사처방을 원하는 사람이 많았다. 진통제일뿐인데 마치 영양제처럼 맞으러 오는사람, 면사무소 온김에 맞으러 오는사람.. 별의별사람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진통주사를 주는건 위해를 가하는짓이었지만 전임자들은 민원을 걱정해 아무렇지 않은듯 주고 있었다.
나는 달랐다. 의학적 판단이 서지 않으면 주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를 모셔온 아들. 어머니가 요즘 힘이 없으니 주사 한대만 놔달라고 했다. 어디 아프시냐고 묻자 아픈곳은 없고 밥맛이 없고 힘이 빠진다고 했다. 이곳에선 검사장비가 없으니 육지 병원에 내원하는게 어떻겠냐고 말씀드렸다.
"전처럼 똑같이 주사주세요" "주사 맞으면 괜찮아져요"
"환자분. 제가 처방을 하려면 병명이 있어야 하고 그에 상응하는 증상이 필요한데, 환자분은 주사 처방할만한 어떤 근거도 갖고 있지 않으십니다"
"어머니 몸은 제가 잘 압니다 주사나 한대주세요"
"더이상 드릴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ㄱㅅㄲ가 한번 말하면 말좀 알아듣지 어디 ㅈㄹ이야 의사면 다야?"
'ㄱㅅㄲ라니' 난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욕을 환자 보호자에게서 들었다. 사실 그날 이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보호자는 어머니를 병원에 데려갈 생각도 하지 않고 끊임없이 진료실로 와서 나를 괴롭혔다. 그들이 내게 복수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밤늦게 전화를 걸어 나를 깨우거나.. 예전처럼 어머니를 모시고와 진료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가는것들이 그러했다.
그날밤 담당 주무관에게 전화가 왔다.
"선생님 잘지내시죠?"
"제가 말하는게 월권처럼 들리시겠지만 양해를 구하고 말씀드릴게요"
"주사 놔달라는 사람들 있으면 웬만하면 놔주시면 안될까요?" "민원들어오면 서로 피곤해지니까요"
나는 안된다는 말과 전화를 끊었다.
그사람은 본인 민원때문에 환자에게 위해를 가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심지어 간호직 공무원이라는 사람이 그랬다.
아프다는 사람은 부탁하지 않아도 집까지 찾아가서 주사를 놔주고 오는 나였다. 약을 처방하고 주사를 놓는것이 자판기 음료수처럼 인식되는것이 싫었다. 의사가 처방하는 약에는 내 책임이 부여된다. 의학적 책임을 져야하는 일엔 의학적 판단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아직도 여전하다.
한주동안 진상 환자 두명을 만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몇십년간 환자를 봐온 선배의사들이 왜 불친절함으로 사람들에게 지적받고 있는가?
나도 이문제에 대해 고민 안해본것도 아니고 본인(나)은 그런 (불친절한) 의사가 되지 않을수 있다고 항상 생각했지만
그렇게 바뀔수 밖에 없었겠단 생각도 들었다.
PS. 현재의 나
현재 나도 불친절한 의사가 되어있을까? 아니다. 의사가 되는 순간부터 잊지않고 기억하는 것이 있다. 친절한 의사가 되자.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는 환자들에겐 누구보다도 친절한 의사/선생님/보호자가 되도록 노력한다.
기본적인 예의도 없이 간호사나 나를 위협하는 사람에겐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건 나의 분노다. 내가 분노하면 그들이 승리한다. 대응을 하지 않으면 화를 못이겨 스스로 나간다. 그들에겐 불친절한 의사가 되어도 좋다. 나는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매번 재밌게 잘 읽고있습니다ㅎ 추천하고 갑니다~
새해 복 많이받으세요
잘 읽었습니다.
ㅂㅎㅇ에게 끝내 이별을 고하지 못한 것은 본질적으로 남자들의 양다리 근성에서 기인한 거겠죠?
추억이란 인질때문에 차마.....
내가 사랑하는건 OO인데 굳이.....라고 둘러대기도 좋구요....ㅎ
존재를 규정하는 건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고, 상황을 규정하는건 다짐을 선언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헤어진 사이에 더 이상 연락하지마~!라고 제대로 선언을 했더라면 곧 다가올 새드엔딩의 운명을 막을 수 있었겠죠.
큰 차를 굴러가지 못하게 막는 것은 의외로 바퀴에 박힌 작은 못 하나거든요.
암튼 저도 남자지만 남자들의 그 ja위적인 안일함... 그게 늘 문제를 잉태하고 있죠.
뭐 저도 그렇고....ㅎ 그게 좀 아쉽네요.
다음 작품 기대합니다~~^^
글 감사합니다~~~
바쁘실텐데 꾸준히 글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본인의 소신을 지켜가며 산다는 것이 참 많이 힘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