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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로 살면서 경험한 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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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야기를 담은 만큼 읽기전용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동의없는 퍼나르기에 대해선 강력 대응하겠습니다.


현재는 대학병원을 떠나 병원에서 근무중입니다.


어제까지 휴가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마침 섬 이야기를 쓰고 있었는데 섬에서 잘 쉬고 왔습니다.


심기일전해서 다시 한번 써보겠습니다.


(+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졌던 그환자는 몇달간 병원에 입원했다가 겨울쯤 언젠가 진료실로 걸어들어오더니 고맙다고 인사를 하시더군요. 그때 상황을 브리핑 해달라고 하는통에 당황은 했지만 어쨌든 기분좋은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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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웠던 그날밤


그녀가 섬으로 놀러온 5월엔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따뜻함을 기억하는 이유가 그녀때문만은 아니었다. 섬 주위를 돌 때 보이는 들꽃들과 푸르러지는 들판. 그곳에 섰을때는 확실히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이름모를 노랗고 보랗빛의 들꽃이었다. 그 꽃들이 필때마다 나는 문자로 그녀에게 사진을 보내줬다. 수수한 사진에 웃으며 좋아해주던 여자친구의 모습에 나는 점심동안 밥도 먹지않고 새로운 꽃을 찾아다녔다. 


(중략)....


ㅈㅅㅇ와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왔다. 미처 풀지 못한 캐리어와 그녀의 선물이 방중간에 놓여있었다. 여전히 당직근무중이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편하게 갈아입고 쉬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진료실로 내려왔다. 우리가 들어오는걸 발견한 간호사쌤이 내게 웃으며 물었다


"선생님 여자친구에요?"

"네 맞습니다"

"아이구 역시 선생님은 이쁜 여자친구 만날줄 알았어요"


이쁜 여자친구 만날줄 알았다는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그때 물어볼걸 그랬다. 지금 글을 쓰다보니 굉장히 궁금해졌다.

생각해보니 여자친구를 누군가에게 보인적은 처음이었다. 병원생활동안 관계를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섬마을 간호사가 제일 먼저 알게 되었다. 

나는 이따금 한둘씩 오는 환자들을 봐주고 올라왔다. 여자친구는 침대의 한쪽에 누워 쉬고 있었다. 편하게 갈아입은 옷이 굉장히 귀여웠다. 5월의 어느날이었지만 섬의 밤은 추웠다. 내 방은 20여년전 지어진 전기 판넬방이었다. 외풍이 심해서 방 공기가 차가웠다. 여러번 고쳐달라고 민원을 넣었지만 섬까지 들어올리 없었다. 그렇게 20여년동안 고쳐진적 없이 왔던것이었다. 


"많이 춥지?"

"응 파도바람이 좀 센거 같아" 

"내 수면양말 줄까?"

"응!!"


다행히 네족의 수면양말이 있었고 우리는 처음으로 커플룩을 해봤다. 나란히 앉아 발가락 장난을 쳤다. 아무말없이 웃으며 치는 발장난에 시간가는줄 몰랐다. 두꺼운 수면양말속으로 그녀의 앙칼진 엄지발가락이 느껴졌다. 엄지발가락을 제압하려다 이내 훅하고 안아버렸다.


우리는 식당에서 소주한병을 나눠마셔 취기가 있었다. 술은 그녀에겐 둔감함을 나에겐 과감함을 준다. 우리 커플에겐 그랬다. 그녀의 둔감함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한달만이었다. 그녀의 따스함이 그리웠다. 꼭 안고있는것만으로도 너무 좋았지만 좀더 꽉 안고 있고 싶었다.


신고있던 수면양말을 다시 벗겼다. 수면양말을 오래신고 있으면 발에 땀이 차서 불편하니까 내가 벗겨줬다. 그속에서 그녀의 앙칼진 발가락이 드러났다. 그녀는 민망한지 연신 웃고 있었다. 그녀의 해맑은 웃음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판넬로 만들어진 5개방은 콘크리트 벽이 없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여자친구를 발견한 간호사도 5개방중 한곳에서 쉬고 있었다. 갑자기 자다가 소리라도 지르면 이따금 놀랄만큼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곳이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TV 볼륨소리를 키웠다. 여자친구는 추워서인지 계속 소리를 냈다. TV볼륨이 그것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추운데도 땀이 나기 시작했다. 간호사가 걱정됐지만 계속 지속하고 싶었다. 그순간만큼은 모든게 귀찮아졌다. 그저 집중하고 싶었다. 땀범벅이 된 우리는 서로가 걱정됐는지 연신 쓰다듬었다. 덕분에 우리는 추운밤이 참 따뜻했다.

나는 다시 수면양말을 신겨주었다.





2. 쓸데없는 걱정


아침이 밝았고 그녀는 첫배로 나가기로 했다. 내가 나가는날은 그렇게 결항도 잘되더니 바다가 아주 장판이었다. 우리는 연신 아쉬운 눈빛을 보냈고 나는 더 있다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수 없었다. 그녀는 두시간동안 배를 타고 또 순천까지 2시간넘게 가야했다. 섬에 떨어진 남자친구 때문에 참 고생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포옹을 해주며 그녀를 보내주기로 했다.


"잘가"

"추우니까 빨리 들어가요 사랑해"


아쉬움은 끝이 없다. 더 쳐다본다고 아쉬움이 줄어든다면 배가 없어질때까지 쳐다볼수도 있을것 같았다. 그러나 아쉬움은 그녀가 실루엣으로 보일때까지 커져만 갔다. 문득 전날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실루엣만 보고 달려가 그녀를 안아줬던 순간. 너무나 행복했다. 지금 순간이 그때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만 돌릴수 있다면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뱃머리는 섬이 아닌 바다로 틀었다. 그 큰 배 어딘가에 그녀가 있겠지 하는 마음에 연신 손을 흔들었다. 안녕


돌아온 방에서는 그녀의 체취가 느껴졌다. 남자만 살던 방에서 나는 달콤한 향은 참 좋았다. 그녀가 더 보고 싶어졌다. 남겨진 향수향조차 아쉬움을 크게 만들었다. 나는 그녀를 정말 사랑하고 있었다 정말로


아쉬움을 뒤로한채 샤워를 했다. 진료시간이 30분밖에 남지않았다. 샤워하는동안 아쉬운 마음을 진정시키기로 했다. 

나는 진료를 시작했고 그녀는 무사히 육지에 도착해 순천으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오늘만큼은 우울하지 않게 환자를 잘 볼수 있을것 같았다. 나는 연신 웃으며 환자들에게 필요한 약을 처방해주고 간호사와도 즐겁게 대화했다.

간호사는 아마도 모르는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TV소리와 파도소리가 막아준게 분명했다. 나를 보고 전혀 어색한 웃음을 짓지 않았다.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했었다 하하






3. 첫 휴가


한달에 한번있는 외출이었다. 나는 한달에 4일정도의 휴가를 받고 육지로 나갔다. 원래 이곳엔 두명의 의사가 상주해야하지만 행정상의 착오로 혼자 근무하게 되었다. 무책임한 주무관은 내게 한달만 고생해주면 해결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어렸다. 힘든줄도 모르고 한달동안 봉사했다. 그러고 첫 휴가였던것이다. 휴가 나가는 날 내내 주무관은 혹시 몇주만 더 일해주면 안되냐고 물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었다. 나는 빨리 나가 맥도날드 햄버거가 먹고 싶었다.


차를 몰고 가장 가까운 맥도날드로 갔다. 먹고 싶은 메뉴가 너무 많아 고를수 없었다. 모두 샀다.


Big Mac combo w/ zero coke for Dyslipidemia,

chicken wings and soft icecream due to abdomen discomfort Sx


차에 앉아 햄버거를 베어 먹는데 눈물이 날뻔했다. 나는 한달 내내 햇반과 참치 그리고 스팸으로 연명했다. 내가 일했던 섬에는 그 흔한 편의점이나 치킨집도 없었다.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던 햄버거가 어찌그리 맛있던지.

치킨윙을 집에 가져가서 먹으려고 했는데 운전하는동안 모두 먹어버렸다. 아직도 맥도날드만보면 그때가 생각난다.


그 사이 섬에는 의사가 없었다. 사실 이런일이 있어선 안된다. 응급환자라도 생긴다면 대처할 의사가 없기 떄문이다. 어쩔수 없었다. 나는 규정대로 지급받은 휴가마저 반납하고 일하고 있었다. 무리였다.


이런 걱정을 하는날엔 어김없이 응급이 터졌다. 등산을 온 남자가 갑자기 아찔한 증상과 함께 산아래로 굴렀단다. 간호사 두명이 달려갔지만 그들은 병원업무를 전혀해본적 없는 행정직 공무원이었다. 돌아갈까 말까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어차피 돌아가도 그사이에 환자를 보진 못할것 같았다. 전화로 계속 지시했다. 해경에 부탁해 해경헬기도 불렀다. 한번 본적없는 환자를 위해 나는 휴게소에 차를 멈추고 계속 지시했다. 일시적인 허혈 발작으로 쓰러진 정황이 느껴졌다. 내가 없는사이에 어쨌든 잘 날아 병원에 갔다고 간호사에게 전달 받았다.


5일뒤 섬에 들어왔는데 갑자기 경위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라는 업무통신을 받았다. 무엇인고 하니 내가 근무중에 섬을 이탈하여 그사이 발생한 응급환자를 보지 못했다는것이다. 환자 보호자들이 민원을 넣었고 내게 징계를 내리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억울했지만 침착하게 경위서를 써내려갔다. 의사 한명을 더 파견해주지 않았던 지자체 부탁에 쉬지도 않고 한달 내내 일했지만 이렇게 배신을 당했다. 경위서 뒤에는 징계내용과 함께 도장을 찍으라는 말이 있었다. 도장을 찍지 않고 제출했다. 

의사를 보내지 않아 두명 분량의 일을 해야했고 휴가도 받지 못해 쉬지도 못했으며 지자체는 내게 당직비조차 주지 않았다. 당직비를 주지 않았다는것은 내가 공식적인 업무를 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며 그러면 내게 징계를 내릴 이유도 없다 라고 썼다. 


도장찍지 않은 내게 내려진 징계는 1차 경고였다. 군복무를 병행하는 내게 1차 경고는 컸다. 외국여행 1년간 제한 및 1년간 업무수당비 금지 (약 1년에 600여만원).

임기제 공무원 하나로 사건을 덮어버린 엄청난 사건이었다. 말단 하나로 무마하는건 아직도 여전해보인다. 나만 특별한건 아니었다.

그날로 나는 주무관의 전화를 차단했다.




4. 물방울이 물웅덩이가 되고



첫휴가를 받고 집을 가는중에 광주에서 하루 머물기로 했다. 광주에서 던트 생활중인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마침 던트친구의 당직 없는 날이었고 이종범의 단골 맛집이라는 육전집에 가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을 먹을생각에 설렜다.

평일임에도 밤 9시에 퇴근하는 그친구. 전날 당직까지해서 30시간 넘게 근무중이었다. 정말 피곤해보였다.

오자마자 막걸리를 따라 마셨다.


"크아 맛있다"


참 맛있었다. 고기를 전으로도 먹는구나 하며 연신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 친구는 벌써 도망갈 생각을 세번이나 했지만 와이프를 보고 참았다고 했다. 집에서 자고 있는 와이프 모습을 보면 그만둘수가 없었단다. 결혼을 하진 않았지만 그마음을 이해한척하며 위로해줬다. 


"나 내일 ㅂㅎㅇ 만나"

"응? 어디서?"

"걔 광주로 발령왔대 너도 볼겸 겸사겸사 만나보려고"

"괜찮겠냐? 너 그렇게 힘들게 했는데....?"

"괜찮겠지 벌써 1년이나 지났잖아. 얼굴도 못보고 끝냈으니 이참에 제대로 끝내려고"



그렇다 나는 전화로 이별통보를 받았다. 지옥같은 인턴 생활동안 큰 트라우마였다. 3년을 넘게 만난 인연이 전화 한통으로 끝이 났다.

사람의 인연이란게 길고 질기다지만 어떨땐 빗방울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쏟아져 내리는 빗물에 연신 온몸이 젖지만 한번 내려버린 빗방울은 찾을수 없다. 땅에 똑하고 떨어지고 흩어지면 끝이다. 찾으려 노력해봐야 물방울은 다른 물방울 사이로 쏙하고 숨어버려 찾을수도 없다. 물방울 하나가 작정하기만 한다면 다른 물방울과 합쳐져 새로운 물방울이 되는건 일도 아니듯이 말이다.


나는 제대로 끝내고 싶었다. 긁고 싶었다. 가려워지는 딱지를 살살 긁었다. 긁으니 시원해졌다. 더 긁었다. 시원해졌다. 피가나왔다.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피가 나오니 시원했다. 나의 트라우마도 같이 지워질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ㅂㅎㅇ을 볼생각에 조금 긴장되긴 했다. ㅈㅅㅇ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조용히 끝내면 모든게 잘 해결될것만 같았다.


조그만 물방울 쯤이야 라고 방심했던게 컸다. 



댓글
  • 인생최고의날 2019/12/31 03:51

    선 댓글 후 정독 합니다 이시간에 깨어 있어서 즐겁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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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료달려 2019/12/31 03:58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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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료달려 2019/12/31 04:00

    여기서만은 댓글로 글 쓰신 분을 힘들게 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저것 요구도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히 읽고 고마움을 표현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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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앙쿤 2019/12/31 04:01

    잘 보고 있습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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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난천재인가봐 2019/12/31 04:01

    선생님! 기다렸습니다. 광주 운천저수지 옆 육전 맛있는데... 거기 다녀오셨나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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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애촌장 2019/12/31 04:02

    정독했습니다.
    배하애,죄송요 중 누가 선택받을지..
    양다리는 아니겠지.
    재미지네요.
    감사하구요.
    새해 복 많이 만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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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렌지포쉐 2019/12/31 04:08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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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DC 2019/12/31 04:13

    진짜 하이틴 로맨스보다 훨씬 더 실감나고 재밌어요. 스토리가 너무 궁금하구요. 어쩜 이리 글을 잘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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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늘그니 2019/12/31 04:35

    감사하게 잘 보고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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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대표 2019/12/31 04:35

    드라마 로 만들어도
    대박 가능성이 있네요.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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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횐곰 2019/12/31 05:23

    재미있는 글 정독 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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