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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을 결심한 이유

나는 소위 말하는 한국형 엘리트였다.

 그럭저럭 좋은 머리 덕분에 학교 수업시간 못 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초등학생 때부터 전교 1등을 도 맡아 하던 학생이었다.

 중학교부터는 조금 힘들었지만, 사교육의 도움을 받아 그렇게 전교 1등의 명예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리고 비평준화 지역이던 지방에서 나는 특이한 선택을 한다. 시내에 컷트라인이 가장 높은 국립고등학교가 아니라, 좀 멍청하다는 친구들이 모여있는 사립고등학교를 선택했다. 첫 번째는 좋은 내신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내신 1등급을 유지하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내 졸업 내신은 3학년 평균이 1.12등급이었다. 두 번째는 선생님의 사랑과 관심이었다. 공부 잘 하는 학생이 적으니, 선생님들의 노력과 관심이 집중되어 S대에 진학하기 수월하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가장 순수해야 했던 내 10대는 엘리트 의식에 지배당한 검은 날들이었다. 공부 못 하는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난 한번도 교과서 내용을 이해해 보지 못 한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면서도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추운 날 추운 곳에서 일하고, 더운 날 더운 곳에서 일한다는 가르침을 받았고,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수능에서 1등급을 받지 못 하는 건 패배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 스스로를 한국형 주입식 교육의 가장 큰 수혜자라고 여겼다. 난 단 한번도 왜 공부해야 하지?라는 고민을 단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다. 그렇기에 대학 원서를 작성하며 진로를 고민하는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 했다. 가장 높은 학교, 가장 높은 과가 내 목표였다. 다른 목표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어떤 공부를 하든, 어떤 일을 시키든 그럭저럭 잘 해냈기 때문에 뭐든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있었기 때문에 적성도 꿈도 아무 상관 없었다. 하지만 이건 내가 엘리트이기 때문이 아니라,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에 너무나도 익숙해져서 뭐가 잘 못 됐는지도 모르는 노예 근성이었다. 그냥 이렇게 공부하면 더 좋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고, 고등학생 때는 당연히 참고 견뎌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이야 말로 바로 책임감이라고 생각했다. 미래를 위해서 매 순간순간 최선을 다 해야만 한다고. 그렇게 나는 노예로 자랐다. 금으로 된 족쇄를 차고 구리로 된 족쇄를 비웃고 있었다.

 S대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학교에 입학했다. 원래부터 요령이 좋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학업에 못을 맨 것도 아니고, 봉사활동, 아르바이트, 공모전 등등 스펙을 쌓으면서도 학점을 그럭저럭 유지하는 것이 별로 힘들지 않았다. 스트레스도 안 받았다. 세상 만사 잘 굴러가는 것 같았다. 나는 뭐든지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고, 선택 받은 소수라는 생각이 굳어져 갔다.

 취업을 시작하면서 내 인생 최소의 멘붕이 시작된다. 한 번도 스스로 새로운 일을 해본 적이 없다. 그나마 학교 다니면서 했던 활동들이 창의적이었을까? 그래도 그나마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은 있었다. 하지만 취업은 전혀 달랐다. 그 어떤 가이드라인도 없이 오롯이 내 자신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 취업이었다. 그래도 그럭저럭 할만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성차별을 겪었다. 처음으로 내가 원하던 엘리트층에 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회피했다. 이 문제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려 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나는, 내가 원하는 엘리트인 나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문제, 내가 감당해야 할 문제, 어쩌면 내가 전면에 나서서 바꿔야 할 문제를 나는 모른 척 했다. 그리고 그렇게 또 그럭저럭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노예생활을 시작했다.

나의 두 번째 멘붕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을까 근본적인 질문이 밀려들어왔다. 선배들은 원래 신입사원은 그런 생각 많이 한단다. 1, 2년만 버티면 괜찮아진다고 한다. 세상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고, 그럭저럭 괜찮은 월급이면 참고 다녀야 한다고 한다. 이 때 처음으로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중, , 대학생 때 놀고 싶고, 게임하고 싶었던 마음을 다 참았던 것은 취업 후에는 반드시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 행복하지 않았다. 하루하루 죽어간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만큼 무기력감과 우울감이 찾아왔다.

그렇게 나는 회사를 그만뒀다. 내가 엘리트도 뭣도 아닌 평범한 노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성차별을 받았을 때 회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번은 회피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우리나라 주입식 교육 최대의 피해자다. 내 꿈을 20대 후반이 돼서야 찾고 있다.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나의 10대를 낭비했다. 그렇기에 나는 회사를 그만 두고 내 꿈을 다시 찾아야 했다. 고등학교 상담선생님을 하는 친구를 찾아가 내 꿈을 찾아달라고 했다. 내 진로 탐색을 해달라고 했다. 친구는 비웃었지만 난 진지했다. 고등학교에 진로탐색이라는 교과목이 있단다. 우리 때도 있었단다. 나는 당연히 기억나지 않는다. 내신 성적에 안 들어가는 과목이었을 테니.

 그렇게 나는 꿈을 찾았다. 공부하고 싶다. 학점을 받고, 학위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분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 한국에서도 좋은 학교가 있지만, 새로 태어나는 마음으로,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유학을 결심했다. 학위를 받아도 한국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내 자식을 한국에서 키우고싶지 않다. 날 닮아 나와 똑같은 길을 걷고 나중에서야 눈물흘리며 후회하는 인생을 살게하고 싶지 않다. 노예로 자라 자신의 족쇄에 만족하는 사람으로 키우지 않을 것이다. 성공적으로 일자리를 찾고 정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난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확신이 든 적이 없다.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고작 명문대라는 허황된 꿈에도 목숨을 걸었던 나였다. 하지만 이제 정말로 소중한 내 꿈이 생겼다. 목숨이 아니라 영혼도 걸 수 있다.

 사실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에겐 남편도 자식도 없다. 언니에게는 미안한 일지만, 혼자 계신 어머니는 언니와 형부가 모시고 있다. 잃을 건 아무 것도 없다. 조금 늦었지만 나는 사춘기 때 못해본 반항을 할 것이다. 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일 전부 다 해볼 것이다. 인생은 짧으니깐

댓글
  • 1001MD 2017/03/02 00:47

    20대, 인생의 변환점을 설정하기에 결코 늦지 않은 나이입니다.
    지금 각오 잊지 마시고, 긴 안목으로 계획 잘 세우셔서 "나"의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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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들우낀다 2017/03/02 01:39

    역시  사람은 하고 싶은것 하면서ㅜ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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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깡총아빠 2017/03/02 01:52

    잘 해내실 겁니다. 글쓴이의 고민 여정을 다 알기에는 짧은 글이었지만, 정말 확고하게 결심했다는 게 전달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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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아더버디즈 2017/03/02 10:36

    저도 거지가 되도 선진국거지가 되자라는 마인드로 살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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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꼬트.뒤.론 2017/03/02 10:37

    마치 제 20대를 보는것 같네요.
    여건이 허락하는 한 여행을 많이 다녀보세요. 혼자서. 당연히 혼자 여행을 간다고 뭔가 깨달음을 얻어 오거나 그런거 없습니다. 다만 혼자서 여행을 다니다 보면 자신이 어떤 매커니즘으로 움직이는 인간이라는걸 알 수 있죠. 한국에선 일상의 그물들과 '아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맨얼굴과 날것 그대로의 행동양식을 알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어떤 것들에 의해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게되면, 여행 다닐때가 아니라,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자신도 모르게 별다른 고민없이 하나의 트랙 위에 안착해서 별 혼란없이 달리는 자신을 보게 될 겁니다. (물론 그래도 환경이 바뀌니 가끔 멘붕이 오긴 하죠 ㅎㅎ 네, 제 얘깁니다. 잘 달리고 있었는데 회사가 인수합병 된다거나 ㅋ)
    뭐, 그냥 비슷한 과정을 겪어온 노친네가 보기엔 이럴수도 있다는 얘기일 뿐이었습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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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qing香 2017/03/02 10:49

    30, 40대가 되어도 자기가 하고 싶은게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20대에 찾았다면 빠른 편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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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밑줄긋는여자 2017/03/02 11:18

    멋있네요!!
    담대한 선택과 앞으로 걸어갈 길으로의 도전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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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oGreen 2017/03/02 12:08

    님은 주입식 교육의 최대 피해자가 절대 아닙니다.
    최고가 되려는 의지는 좋으나
    상황판단은 스스로를 좀 더 객관화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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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어컨틀어줘 2017/03/02 16:44

    멋있어요.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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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원군 2017/03/02 17:07

    저는 30대초 남성입니다.
    저랑 비슷하시네요.
    저도 돈 괜찮게 벌리던 학원 정리하고 벤쿠버로 떠납니다.
    언제가 뵐지도 모르겠네요.
    서로 힘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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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코스릴러 2017/03/02 17:12

    악ㅠㅠㅠㅠ 이게 베오베에 있네요.... 어제 엄마랑 태어나서 처음으로 싸우고 질질 울면서 쓴 글이라....다시 읽으니 오타도 많고 비문도 많네용 악 부끄러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응원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ㅠㅠ 저는 올해 27살인데요 저도 제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지 않았었거든요. 근데 엄마가 "그 나이 먹고 무슨 유학이야! 니 나이면 이제 자리 잡고 결혼해야지!!"라고 말씀하셔서 내가 늙었나? 나이가 많나? 고민했었어요. 그래도 아직 앞자리가 3이 되려면 3년이나 남았어요! 저는 젊어요!!!!!!
    제가 다시 공부하고 싶은 분야는 예체능입니다. 그런데 저는 무려 공대를 졸업했어요. ㅎㅎㅎㅎ 취업이 잘 되고 학교이름이 좋으니까요. 제 적성에 맞지 않았지만 저를 꾸역꾸역 우겨넣었어요. 할 수 있다, 불가능한 일은 없다면서요. 맞아요 불가능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불행했어요.
    저를 더 슬프게 만들었던 사실은요, 중,고등학교 통틀어서 단 한번도 예체능으로 나갈 생각을 안했어요. 주변에서 말린 사람도 없는데 스스로 접었어요!  '공부를 잘해서 좋은 직장에 가면 예체능은 취미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라는 말에 너무나도 공감했기 때문이었어요. 내 적성이 뭔지도 모르는채 귀막고 입 틀어막고 경주마처럼 공부만 했어요. 스스로 꿈을 져버리고 저 멀리 묻어버렸으니.... 스스로가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에 다 적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름 혜택받으며 자란편이라 다른 분들께는 별로 안 불행해보 일수도 있겠네용 ㅎㅎㅎ
    아무튼 생판 모르는 저를 응원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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