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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12분간의 불안한 대화

" 세상 참, 별것이 다 유행하는군요? "
" 예? 아 예..뭐 그렇네요. "

옆자리의 낯선 사내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하긴, 이 간이 우주선에 그와 나 둘뿐이니 잠깐 대화를 나누는 것도 어색하지 않으리라.

" 선생의 아내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 아내는 정말 유행이라면 사족을 못 씁니다. 결혼식도 유행 따라 우주 공간에서 했다니까요? 헬멧 때문에 결혼식 키스도 못 했단 말입니다. "
" 하하 "

남 말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내 아내도 유행이라면 우주 기생충도 키울 사람이니까.

" 나와 같이 탄 걸 보아하니, 선생도 6살 차이가 나나 보군요? "
" 예에..뭐 그렇습니다. "

그의 말대로 나와 아내의 나이 차이는 6살이었다. 그래서 그와 내가 지금, 이 행성에서의 12분을 보내는 중이고 말이다.
잘은 모르지만, 블랙홀의 중력장이니 뭐니 하는 이유로, 이 행성에서의 시간이 밖에서의 시간보다 더 느리게 흐른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12분을 보내고 나가게 되면, 6년이 지난 밖에서 아내와 동갑이 된다.

" 그래도 설마, 이런 것까지 유행할 줄은 몰랐습니다. 참나! "
" 하하.. "

그의 말에 실로 동감했다. 이런 것까지 유행할 줄이야? 
뭐든지 사업으로 이용해 먹으려는 대기업의 빌어먹을 마케팅이 성공한 것이다.

[ 사랑하는 이와 죽음까지도 함께! 로맨틱! ]

이게 말이야 방귀야?? 한데, 그따위 로맨틱이 먹혀들었다는 게 문제다.
현재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허락된 수명은 150년. 만약 동갑이라면, 영화 주인공들처럼 같은 날에 함께 눈을 감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이야 우연히 동갑이면 같은 날 죽는 것이지, 그것을 로맨틱 마케팅이랍시고 이렇게 이용해 먹을 줄이야? 대기업의 돈벌이 수단은 정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 근데...선생은 불안하지 않습니까...? "
" ? "

갑작스럽게 떨리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그의 얼굴이 정말로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의아하여 물었다.

" 무엇이 말입니까? "
" 뭐든지요! "

뭐든지?

" 구체적으로...무엇이요? "

내 물음에 그는 잠깐 말을 멈추고, 불안한 얼굴로 벽의 타이머를 바라보았다. 4분. 우리가 내려온 지 4분이 지나 있었다.
곧, 그는 타이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 가령, 정확한 12분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미세한 차이만으로도 시간은 크게 차이 날 것이고, 애써 큰돈만 날리게 될지도 모르잖습니까? "
" 음... "

그의 말대로, 여기에 들인 돈만 해도 몇 달치 월급에다가 세월이 몇년인데...실패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그래도 나는 그 부분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 하지만, 기계가 하는 일이 틀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지금이 22세기도 아니고. "

내 말에도 그는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 그럼, 기계가 계산해내지 못할 자연재해는 어떻습니까? 이 간이 우주선이 그런 특이에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
" 그건... "

확실히, 대응하지 못하겠지. 한눈에 보아도 비용절감이 들어간 우주선이다. 빌어먹을 대기업 놈들!
그는 좀 더 불안해진 얼굴로, 불안한 말을 떠들었다.

" 만약...뜻밖의 자연재해로 단 10분이라도 지체된다면? "
" ... "
" 이곳에서 10분이면 밖에서의 5년입니다. 지체가 1시간이라면? 2시간이라면? 하루라면? 두렵지 않습니까? "
" 으음... "

나는 그의 불안감을 조금은 이해했다. 모든 일은 만약을 생각하면, 확실히 두렵다.
내 시선은 나도 모르게 벽의 타이머에 고정되었다.

" 그럴 일은...없겠지요. 괜한 걱정하지 맙시다. "

나는 그에게 하는 말인지, 내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했다.
묵묵한 그는, 타이머가 7분이 되었을 때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럼, 아내의 외도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 ... "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외도?

" 6년은 깁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아내가 외로움을 견딜 수 있을까요? "
" ...저는 제 아내를 믿습니다. "
" ... "

단호한 내 말에, 그도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 저도 믿습니다. 제 아내를 믿어요. 믿지만...솔직히 두렵습니다. 내가 다시 올라갔을 때, 정거장에 아무도 마중 나와 있지 않을까 봐.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펄쩍 뛰게 두렵습니다. "
" 아니요,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사모님께선 분명 환한 얼굴로 선생님을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렇게 상상하세요. "
" ... "

나는 그 옆에 있을 내 아내의 모습도 함께 상상했다. 고작 10분 전에 헤어졌을 뿐인데, 벌써 보고 싶었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뭘 하며 지낼까? 나를 얼마나 그리워할까? 
그녀는 울보라, 분명 나를 보자마자 울어버릴 것이다. 이런 유행을 따라 한 자신이 멍청했다며 후회할 것이다.
나는 확고한 믿음으로, 아내의 마중을 상상했다. 
한데, 타이머 9분에 그가 꺼낸 말은 내 상상을 흔들리게 했다.

" 실은...저는 재혼입니다. "
" 예? "
" 처음의 결혼은...아내의 바람으로 깨졌습니다. 제가 이곳에 있는 4분 동안에 말이죠. "
" ! "

나는 경악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불안에 떨고 있는 그의 얼굴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 아, 아니 그런데 왜 또 이걸? "
" ...유행이라잖습니까? 자기를 믿지 못해서 그러냐고 그러는데, 거기서 제가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
" 아아... "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 정거장에 마중 대신, 미안하단 편지가 놓여있었습니다.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편지 안에 자기 임신한 사진을 넣어놨더군요... "
" 허... "

이제야 그가 왜 그렇게 불안해했는지 알 것 같았다. 동시에, 그의 불안이 내게도 전염되었다.

긴가? 정말로 6년은 긴가? 아내가 유행에 휘둘리고 가벼운 성격이긴 하지만..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아내가 가볍긴 해도, 착한 심성을 가지고 있다. 외도할 리가 없다.

" ... "

잠깐만...너무 착한가? 맞아 아내는 너무 착해! 거절도 잘 못 하고, 미움받는 걸 싫어하잖아! 
남자 놈들이 막 들이대면 아내가 잘 거절할 수 있을까? 술도 못하는데, 술자리에선 어쩌지?
혹, 모성본능을 자극하면 어쩌지? 아내의 약점인데... 혹, 내가 했던 것처럼 될 때까지 매달리면? 아내가 거절할 수 있을까? 
빌어먹을! 아내는 믿지만, 남자 놈들을 믿을 수가 없잖아!

" 1분 남았군요.. "
" ?! "

그의 말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타이머를 바라보았다.
저 시간이 정확한가? 이대로 안전하게 정거장으로 갈 수 있나? 6년간 무슨 일들이 생기진 않았을까? 아내는? 세상은?

그가 옳았다. 정말, 뭐든지 불안하다.

10초. 9초. 8초. 7초. . .

" 믿읍시다... "
" ...그럽시다. "

그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
.
.

' 끼익-! '

정거장에 도킹한 간이 우주선의 문이 서서히 열렸다.
긴장한 상태로 문 앞에 선 우리는, 열리는 문틈으로 빠르게 시선을 훑었다. 이윽고-,

" 아! "
" 여보! "

있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두 여인이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환하게 웃으며 아내를 향해 달려가 안았다!
그도 기쁨을 숨기지 못한 채로, 그녀를 힘껏 껴안는 듯했다.

" 여보~! 정말 보고 싶었어! "

고작 2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못 봤을 뿐인데도, 정말 6년을 못 본 것처럼 너무나 반가웠다.

" 오빠~ "
" 그래그래! 힘들었지? 외로웠지? 얼마나 고생이 많았어~! "

나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내를 품에 안고 토닥였다. 
옆에서도, 기쁘게 들뜬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 정말, 여보는 변한 게 하나도 없네! "

그의 기쁨이 나의 기쁨과 같았다. 12분간 마음고생을 한 그에게, 충분한 위로와 보상이 되길!
나도 사랑스러운 아내의 얼굴을 보며 그와 같이 말했다.

" 당신도 변한 게 하나도 없네! "

한데,

" 오빠 나 아직...36살이야. "
" 뭐?? "

무슨 소리야? 이 시스템이 잘못됐다는 말인가?
그때 옆에서도 그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뭐? 나이를 안 먹었다고? "

그 말에, 나는 정말로 시스템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한데, 곧이어 이어진 아내의 말은, 나를 충격에 빠지게 하였다.

" 아 그게...나 사실, 지난 5년간 '동면'했어. "
" 뭐? "
" 오빠 들어가고 바로, 동면이 '유행'이 됐는데... 오빠 기다리기 외로워서 그냥, 동면해버렸지 뭐야~ 헤헤 "

그와 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말했다.

" 다시 하기엔 돈도 아깝고~, 그냥 이렇게 살자. "
" 그래~! 어차피 나이 맞추는 거, 요즘은 유행 다 지났어~! 아무도 안 해! "
" 하긴! 일부러 떨어져서 시간 날리고 돈 날리고... 그런 게 왜 유행했나 몰라~! "

" ... "
" ... "

그와 나는 할 말을 잃고 그녀들을 보았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 그래도 이게 걱정했던 것보다는...낫습니까? "
" ...그렇군요. "

그는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덧붙이길,

"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유행은 항상 돌고 돈다더군요. "
" ...빌어먹을. "

그는 나에게 또다시 불안감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댓글
  • 복날은간다 2017/02/27 07:14

    사실...
    '그리고 인류는 멸망해 있었다-'
    로 끝내려고 했는데...핵전쟁이 유행해서 흐하하...
    그러면 너무 성의 없어 보일까봐 바꿨는데, 원래대로 멸망이 나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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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ch_W 2017/02/27 07: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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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잡팅 2017/02/27 07:58

    음.. 핵전쟁으로 끝났으면 자칫 복날님글같지 않았을거란 생각이드네요ㅎ.. 저는 오랜만에 되게 가벼우면서도 생각하게만드는 결말이라 맘에들어하면서 스크롤내려왔거든요ㅋㅋ, 그럼에도 어떤결말이든 복날님글에 감탄하면서 내려오긴했을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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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강흑형 2017/02/27 08:39

    유행을 안따르는 저에게는 조금 다른 느낌이 온 글이었어요
    남들 다 하는거 안하는 이상한 괴짜취급 받았던 기억이 나서 ㅋㅋ
    여러가지 주제로 흥미있는 글을 써주셔서 감사해요
    나중에 정리해서 책을 내셔도 될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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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티스 2017/02/27 10:19

    문득 그게 생각나네요. 이블데드3 였던가?
    만일 시간이 좀더 지체되서 인류멸망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갔다면, 거이 이블데드3 결말과 더 비슷했겠어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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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nebwbxksk 2017/02/27 10:54

    동면 결말이 유행이라는 일관성을 맞춰서 더 좋은거 같아요
    생각치 못한 결말이라 이번에도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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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치열 2017/02/27 18:42

    와....일상물 추리물 심리물 반전물 등에 이어 약간의 SF적 요소가 섞인 이런 글도 쓰시다니... 최고입니다. 이번 글은 문체가 특히 좋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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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르미그달 2017/02/28 03:15

    대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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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랑합니다 2017/02/28 03:35

    동면 ㅋㅋ ㅋㅋㅋㅋㅋ ㅋㅋ ㅋ ㅋ넘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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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들린검사 2017/02/28 05:52

    어떻게 써도써도 새로운 얘기가 계속 생기는지 정말 대단 스토리도 전부 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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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rp 2017/02/28 07:32

    하이고 의미없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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