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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툰] 개성상인들은 어떻게 부자가 되었을까?(feat.반도체)

 



























#1. 부의 흐름을 바꾼 전략의 천재, 개성상인



개성상인은 행상에서부터 출발했다. 


조선이 건국되자, 망국의 후예였던 개성 사람들은 벼슬길이 막혔다. 


은나라 사람들처럼 상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전국 팔도를 떠돌며 주단이나 포목을 파는 행상을 했고, 


송방(松房)이라는 유통의 거점도 만들었다.


조선 후기 들어 역관 무역이 쇠퇴하자,


개성상인 같은 도고(독점) 사상들이 조선 경제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막강한 자본력을 무기로, 각지의 상인들과 결탁해 매점매석을 하고 


시세를 조종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벌어들이는 이익은 


국제 무역에서 얻는 것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였다.



 

#2. 이미 정해져서 돈이 되는 산업, 대중국 무역


 

조선 말, 호남의 선 씨 부자는 우뭇-가사리를 청나라에 팔아서 일약 거부가 된다. 


전라도 해안가에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던 우뭇-가사리는 


청나라에서는 귀한 대접을 받는 고가 상품이었다.


석회를 벽에 바를 때, 풀의 용도로써 각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이걸 어떻게 파는지 몰랐다. 


각 나라가 잘 만드는 상품을 교환하면 더 풍요롭고, 


부유한 세상이 된다는 리카르도의 이론을 우리 조상들은 알 리가 없다.


선 씨 부자는 서해안을 오고 가던 청상(淸商)으로부터 우뭇-가사리가 


청나라에서 고가에 팔린다는 정보를 얻는다.


그는 바닷가 마을로 가서 우뭇-가사리를 거의 공짜로 매입하고, 


청상에게 수백 배에 달하는 가격에 팔아넘겼다.


이 과정에서 선 씨가 막대한 이득을 보건 당연지사다.


이렇듯, 조선 시대 내내 중국과의 대외무역은 돈이 되는 산업이었다. 


여기에 참여하면 누구나 돈을 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중국과의 밀무역은 엄격히 금지되어 


공적인 사행을 통해서만 대외무역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경쟁자가 진입하기 어려워서 황금알을 낳는 산업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물건은 중국에서 고가로 매입되었고, 


중국 물건은 우리나라에서는 고가로 팔려 나갔기 때문에 


그 사이에 있던 조선의 중개인들은 막대한 이익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익을 얻는 자들은 대부분 역관과 의주 상인이었다.


   


#3. 배가 아픈 개성상인



개성상인들은 배가 아팠다. 


본인들은 평생 장돌뱅이 행상을 하다가 돈이 모이면 상점을 연다. 


동향의 개성 장돌뱅이에게 물건을 판매하고, 


상점이 잘 되어 현금이 모이면 늘그막에서야 땅을 사고, 


고리대금업자로서 성공해 부자가 되는데


인생의 황혼기에 부자가 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대중국 무역에 참여하던 역관들이나 의주 상인들은 


단 한 번의 거래로 수만금의 벼락부자가 되니, 배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무역에 참여한다고 해도, 의주 상인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수하의 장돌뱅이에게 구매 대행하는 거라 큰 이익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전략적인 사고 없이, 무턱대고 장돌뱅이에게 


근면과 성실만을 외쳐대던 개성상인들이 바보였다.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4. 홍삼을 만들어 진입장벽을 치고, 교섭력을 높이다. 

   


18세기 들어 조선에는 산삼이 고갈된다. 


주인 없는 산림이 민둥산 되듯이, 


깊은 산속의 산삼이 무분별한 채취로 인해 거의 사라진 것이다. 


산삼은 은과 더불어 무역에 통용되는 결제 화폐였기 때문에


조선 정부는 무조건 많이 채취해 다른 나라로 수출하고, 


은을 가져와 국고를 튼튼히 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기도 했다.


삼이 고갈되자, 집에서 기르는 가삼이 그 자리를 대신했지만 가삼은 잘 부패했다.


개성상인들은 특유의 장신 정신을 발휘해서 


가삼을 찌고 말리는 방식으로 홍삼을 대량으로 만들어냈다. 


홍삼이 가져다주는 수익률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연금술과 같았다.


150배의 수익률을 달성해주었으니, 황금도 이런 황금도 없었다. 


홍삼 제조기술은 개성 상인만이 보유하고 있었고 


외부 유출을 엄격히 차단했다. 


독점을 위해 진입장벽을 쳐버린 것이다.


서울의 경강에 위치했던 홍삼 제조장인 증포소(烝包所)도


1810년부터 인삼 산지인 개성으로 옮겨왔다. 


이를 계기로 소규모에 머물렀던 개성에서의 홍삼 생산은


19세기 중반 대량생산체제로 전환하였다. 


18세기 후반의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삼포경영과 홍삼제조가 증가하였다.


1888년의 경우 개성지방에서는 165명의 삼포주가 200좌의 삼포를 경영하고 있으며, 


총 채굴간수(採掘間數)는 154,055간에 달하고 있었다.


개성상인이 조선후기 대표적인 사상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삼포경영과 홍삼제조와 함께 국제무역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댓글
  • 펭귄 2019/11/16 15:32

    장수찬 님 글에 오랜만에 댓글을 다네요!
    중간에 철용이 형도 나오시고ㅋㅋㅋㅋ
    홍삼 얘기를 보면, 확실히 위기에 대처하여 기회로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ㅎㅎ
    쌀쌀한 나이에 건강 유의하시구요!

    (M3nRv1)

  • 장수찬 2019/11/16 15:33

    펭귄// 항상 고맙습니다!

    (M3nRv1)

  • 드록신경배 2019/11/16 15:36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원천기술의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했군요

    (M3nRv1)

  • 장수찬 2019/11/16 15:40

    드록신경배// 넵, 원천기술이 황금알이죠. 신약개발에 목매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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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채원 2019/11/16 16:04

    잘 읽었습니다. 추천 ㄱ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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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수찬 2019/11/16 16:10

    장채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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