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주철도주식회사, 줄여서 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합니다.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말미암아 일본은 러시아가 남만주에 부설한 철도의 경영권을 획득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남만주철도주식회사라는 기업을 설립합니다.
정말 흥미로운 기업인데요, 아마 동아시아 최초의 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만철 본사, 중국 대련
만철은 화물과 승객을 운송하는 철도여객사업에 안주하지 않고 후쉰과 옌타이에서 광산을 직접 운영하였고 안동, 잉커우의 항만을 운영하는 등 사업 확장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화물을 보관하는 창고, 여행자를 위한 숙박사업, 그리고 학교와 병원도 운영했습니다. 그리고 정유, 유리생산, 설탕정제, 그리고 강철생산에도 개입하여 정말 (동아시아에 한정해서) 문어발식 사업확장의 원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철은 정말 이윤이 많이 남는(profitable) 기업이었습니다. 기업의 자산가치는 1908년에 1억 6천만 엔이었는데 1930년에는 10억 엔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윤율은 20~30%에 달했다고 합니다. 규모로 따지면 일본의 가장 거대한 회사였으며 이윤측면에서도 가장 수익성 좋은 기업이었습니다.
1920년대 만철의 수익은 연간 2억180만 엔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 정부 연간 세입의 1/4에 달하는 규모였습니다.
만철은 일본인들에게 도전과 모험의 상징이자 동시에 사회적 지위를 높여주는 수단이었습니다. 1930년, 만철에 근무했던 일본인은 21,824명에 달했고 그들은 대부분 화이트 컬러 전문직, 관리자였습니다. 만철에서 그들은 괜찮은 보수를 받으며 만주 현지에서 귀족처럼 지낼 수 있었고 중국인 하인을 부릴 수 있었습니다. 일본 본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삶의 질을 누렸습니다.
만철은 영국의 를 모델로 했다고 합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처럼 하나의 거대한 국가 같은 기능(행정, 군사, 외교 등)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가장 큰 목적은 '이윤'인 그러한 존재로 거듭나길 원했죠. 이런 맥락에서 만철은 이윤을 추구하는 사기업이면서 의 '창'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만철이 운송, 철강, 숙식, 의료, 광산 등의 산업에 진출하면서도 굉장히 신경 썼던 것은 바로 입니다. 민간기업이면서 독자적인 싱크탱크를 설립하여 '지배'에 필요한 '지식'을 배양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왜냐하면 만주는 본국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있었으며 러시아, 중국 등과 조우한 상태에 놓여있는 상당히 위험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죠. 이 싱크탱크의 이름은 였습니다.
따라서 만철은 자원탐사, 산업개발, 경제, 안보 등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두뇌집단이 필요했고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합니다. 만철은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연구자들을 대거 채용했는데, 만철은 중국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구자들은 중국의 사회경제적 상황으로 미루어봤을 때 중국 공산당의 발흥이 필연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일례로 오가미 스에히로 등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도 에 일하게 되었고 만철은 괴뢰 만주국을 실험장으로 삼아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경제정책을 추진하고자 합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인물이 만주국에서 일했던 기시 노부스케 (후일 일본의 수상)가 있었고 마찬가지로 만주국 장교로 복무했던 박정희입니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야 하는데, 영어로 Manchuria Railway Company Research Department라고 불리는 이 조직은 정말 동아시아 싱크탱크로서는 정말 어마무시한 규모였기 때문입니다.
이 싱크탱크는 일본의 수많은 신진 학자들을 끌어들였고 중국과 동아시아에 대한 연구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조사부의 본부는 만철의 본사가 있던 대련에 있었지만 나중에는 선양, 하얼빈, 상하이, 난징, 뉴욕 그리고 파리에도 지부를 두게 됩니다. 그리고 6200건에 달하는 분석 보고서를 생산해냅니다.
만철의 영향 아래 만주국은 동아시아에서 최첨단, 최신의 정책과 건축기술 도시계획 등을 입안합니다. 흰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쉽듯이 만철은 만주 자체를 자기들의 거대한 실험장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철은 동아시아의 많은 젊은 학자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습니다. 자유주의자, 공산주의자, 좌파, 우파를 가리지 않고 젊고 다양한 시각을 모두 수용하는 유일한 기업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창시한 동주 이용희 교수도 1940년부터 45년까지 만주에 있을 때 큰 지적 성장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는 1943년 중국 대련(만철의 본사가 있는 곳)에서 E.H. Carr의 Twenty Years’Crisis(1939) 와 W. Sharp and G. Kirk, Contemporary International Politics(1940)를 사서 읽고 구미의 국제정치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그는 원래 처음에는 만주국 어용 기구였던 협화회에서 근무했으나, 이내 그만두었고 만주 봉천/하얼빈과 원산(현재 북한)을 잇는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봉천에 있던 만철 도서관을 애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생활도 잠시, 이내 만철조사부에서 근무하면서 원 없이 많은 책을 읽고 식민지 치하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인류학/사회과학/정치학 서적, 그리스-로마 고전 등을 탐독하면서 조선과 국제정치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1948년 무렵 이용희는 미소대립과 냉전과 우발적 전쟁 가능성을 예측하면서, 극동지역에서 미국이 소련에 대한 포위전을 전개하고 소련은 이에 응수하는 방식으로 맞서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또 1949년에 이용희는 미국 입장에서 3가지 선택지가 있는데 1안은 장개석에 대한 지원을 대폭 증가하는 것이요, 2안은 일본을 군사기지화하고 재무장시키는 것이요, 그리고 3안은 신중국(모택동)을 인정하고 이를 이용하여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용희 개인은 3안이 현실적이라고 보았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결국 2안이 현실화되었고, 그리고 3안은 1970년대에 현실화되었습니다.
만철, 비록 일본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탄생한 기업이지만,그 영향은 동북아 전체에 아주 깊은 영향을 끼친, 보다 널리 알려져야 하는 기업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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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으셨으면 많은 사람들 보시라고 추천 부탁 드릴게요~! :D
피쟐러는 어디에도 있다
저때 만주가 약간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서부와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쪽 학자들이나 관료들도 많이 진출하기도 했고, 일종의 많은 행정 경험을 쌓았다는 분석도 있더라구요.
그리고 동주 선생님 식견은 정말 대단하신 듯 합니다. 문명의 충돌 쓴 헌팅턴의 시각을 이미 60년대에 예견하신 분
지식글에는 추천
근데 만주철도대학 나왔거나 만철에 종사했던 한국인들.. 당시 최고 엘리트 들인데 거의다 정원이 일본인 사이에 몇몇 똑똑한 한국인들이라. 그분들은 친일이라고 할만한가요?
정확한소식// 시각에 따라 다르겠죠. 연구원으로만 있었다면 부역자로보기는 좀 그런데 넒은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니. 저 정도는 넘어갔으면 합니다만.
고바야시 히데오의 만철을 읽으면 좀 더 도움이 될까요
예전 어느 책에선가 본 내용인데 저 국공내전 시기에 모택동이 미국에 엄청 기대를 하고 있었다더군요. 내전에서 승기를 잡고 국민당 세력을 거의 남쪽 구석으로 밀어버리던 그 쯤 부터 미국쪽에 이런 저런 루트로 구애(?)를 했는데 미국 쪽의 반응은 싸늘했고 모택동도 짝사랑(?)을 포기했다는... 어쩌면 미국이 본문의 3안에 해당하는 전략을 택했다면(물론 최선은 좀 더 이른 시점에 1안을 선택했어야했다고 보지만...) 김일성이 6.25를 일으키지 못했거나 아님 일으켰더라도 중공군 참전은 없이 그냥 북진통일로 종결됐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