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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의 물건 — 라이카 M10

작년 말에 쓴 글인데, 라이카 포럼에 공유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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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의 물건 — 라이카 M10
스무 살 때 처음 디지털카메라를 샀다. 주먹보다 작은 200만 화소짜리 니콘 Nikon 쿨픽스 Coolpix 775였다. 성능은 그때 기준으로도 미달이었지만, 사람이란 때로는 논리적으로 무언가 소비하지 않는다. 단종된 카메라를 남대문 지하 수입상가에서 거의 제 돈 주고 산 후 참 많은 추억을 남겼다. 처음 간 일본 여행부터 아르바이트로 시작해서 훗날 블로그까지 만든 서울의 거리 패션 사진 같은 것들. 컴퓨터가 고장 나고 동해 어느 바닷가에서 모래가 들어간 후 카메라까지 말을 듣지 않으면서 사진은 거의 다 사라졌다. 카메라는 심심풀이로 분해해서 버렸다.
​언제 처음 라이카 Leica 카메라를 샀는지는 어렴풋이 기억한다. '당신의 소년기, yourboyhood.com' 블로그에 올린 사진을 찍으면서 파나소닉 Panasonic 루믹스 Lumix LX3를 처음 샀고, 초기 마이크로포서즈 명기로 추앙(?)받은 GF1으로 갈아탄 후, 매거진을 만들 때 세계 최초의 '풀 프레임 컴팩트 디지털카메라'로 잠시 업계(?)를 뒤흔든 소니 Sony RX1을 샀다. 한창 같이 돌아다니며 몇 년이고 서울 사람들을 담아낸 - 재환이가 바꾼 - 카메라에 눈길이 갔다. 파나소닉과 성능이 같다고 알려진 디룩스 D-lux 다섯 번째 모델이었을 것이다. 꽤 많이 고민하다가 후속기기로 나온 D-Lux Typ 109를 샀다. 이후 라이카 Q를 덜컥 구매했을 때는 당분간 카메라 여정은 끝이 났다고 믿었다. 그리고 M까지 왔다. 전혀, 필요 없다고 굳게 마음먹었다가, 1년인가 지난 후 M10을 샀다. 매장에서 만져본 것은 어쩌면 실수였고 어쩌면 자연스럽게 될 일이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라이카의 레인지파인더 rangefinder 카메라에 관해 말한다. 수동으로 초점을 맞추는 이중 합치 방식의 불편함이라든지, 브랜드 자체에 깃든 명성과 남들이 볼 때 느끼는 허세라든지,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라이카 M'이라서 사진이 더 잘 찍히는 일은 전혀 없다. 마케팅 문구로 나오는 '본질' 같은 단어도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에 올리는 사진에 쓰기에는 조금 머쓱하다.
​확실한 점은 - 어느 브랜드가 되었든지 간에 -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지 않고 매일 '카메라'를 쓰는 이에게 라이카 M10은 '찍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접사도 안 되는(일반적으로 M 렌즈의 최소 초점 거리는 70cm이다) 라이카 브랜드의 렌즈는 그 영롱한 크기와 만듦새만큼 비싸지만 천천히 툭, 어느 때나 휙, 거리와 풍경과 순간을 담고 지나가는 맛이 있다. 묵직한 벽돌처럼 느껴지는 단단한 몸통과 과거 모델보다 얇아져서 기어코 라이카 M 시리즈의 필름 기기들에 가까워졌다는 미사여구도 없는 것보다 나쁘지 않다. 여행이나 출장에서 라이카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배회하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힐끗 내가 든 카메라를 보며 말을 걸어오는 경험도 즐겁다. M10이 나온 후 정확히 1년이 지났을 무렵, 이 카메라를 반드시 사야겠노라고 달아올랐을 때는 M10-P 모델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하나 문제가 있다면 이 벽돌처럼 단단한 카메라의 새빨간 로고였다. 작고 아담한 디룩스 Typ109와 달리 때로는 사치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내 M10에는 개퍼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서울과 뉴욕에서도, 쿠알라룸푸르와 도쿄에서도 사람들은 이 카메라가 '필름 카메라'냐고 물었다.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찍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항상 라이카에서 최신 디지털카메라치고는 모자랐던 성능은 웬만한 브랜드의 플래그십 문턱 정도는 되었다. 그 정도면 족했다. 정교한 상업 작업을 하지 않으니까. 누군가는 그렇게도 잘 쓰겠지마는.
​짙은 남색 끈을 달고,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도 어떤 브랜드보다 작은 35mm 렌즈를 장착한 M10을 들고 이곳저곳을 다닌다. 기계식 셔터의 찰칵 소리는 DSLR보다 조용하지만 웬만한 요즘 카메라처럼 디지털의 수혜로 없앨 수 없다. 그래서 이 카메라를 손에 쥐면 사진을, 찍는다는 느낌에 충실하다. 사는 기록을 소소하게 담고 그중 몇 장은 건졌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필름 카메라만큼 영속하지 않은 카메라를 무턱대고 찬양할 이유와 필요는 없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신기하게도, 이보다 더 편리한 모든 카메라보다 작은 동료 혹은 친구 같은 감정이 '기계'에 깃든다. 무수하게 소비한 물건과 장신구와 옷가지와 생활용품 안에서 '2018년의 물건' 중 하나로 고르기에 손색이 없다.
댓글
  • brazilfl에이브이ored 2019/09/04 08:43

    진솔한 사용기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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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NSTINCT.J 2019/09/04 08:46

    잘 읽었습니다. 찍는재미에 공감되네요. 개인적으로도 라이카를 쓰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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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p 2019/09/04 08:51

    라이카는 폼으로 하는거죠..^^ (농담입니다)
    적당한크기에 상대방이 부담스러워 하지않는 디자인
    (핫셀로 들이됐을땐 심히 부담스러워 하더라고요)
    그것만으로 저는 선택하기 충분한거 같아요
    저도 빨간딱지는 검정종이테이프로 붙인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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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oonyoung 2019/09/04 08:55

    사진을, 찍는다는 느낌에 충실하다. 사는 기록을 담긴다.. 와닿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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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aunah 2019/09/04 08:58

    전투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카메라군요.
    묘한 압도감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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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eoul drawings 2019/09/04 09:19

    또 어느날 보니 개퍼 테이프가 너무 더러워(?)보여서 지금은 로고만 가리고 대부분 떼어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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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노숙자 2019/09/04 09:13

    일단 피사체가 의식을 잘안한다는게 dslr에 비해 가장 이점이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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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깔끄미야 2019/09/04 09:54

    대단하십니다. 저라면 테이프 못 붙일 듯...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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