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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방심리학의 기념비적 실험을 통해 보는 인간의 기억력.txt

 



1. 인간의 기억이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보통은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의 2분법으로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장기기억(long-term memory)은 우리가 시각, 청각 등 각종 감각을 통해 두뇌로 받아들인 기억들이 묻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의 내용, 초등학교 선생님의 이름 등등 평소에는 인식하지 못 하고 있지만 두뇌 속 어딘가에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단기기억(short-term memory)은 흔히 '작업기억(working memory)' 이라고도 하는데, 장기기억에 묻혀 있던 지식을 현재 내가 인식할 수 있는 수준으로 불러낸 것을 말합니다.


 (주의 : 학자에 따라서 단기기억과 작업기억을 구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게 논점이 아니므로 생략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초등학교 역사 시간에 아이들은 선생님으로부터 '한글을 발명한 사람은 세종대왕이다' 라는 지식을 습득합니다. 아이들은 이 내용을 암송하고, 손으로 써 보기도 하고, 선생님의 강의도 들으면서 장기기억으로 저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역사수업 1주일 뒤에 선생님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전에 배웠던 내용을 떠올려 보는 구술 테스트를 진행합니다.



"자, 한글을 발명한 사람은 누구죠?" 



아이들은 장기기억에 저장된 내용을 떠올리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중 철수의 머리 속에 마침내 "세종대왕"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장기기억에서 단기기억으로 기억이 인출(retrieval)된 것입니다. 그러나 수줍음이 많은 철수는 크게 대답하지 못하고 그냥 조용히 앉아 있습니다.


선생님은 끙끙대고 있는 아이들에게 힌트를 줍니다. "자, 한글의 발명자 이름은 '세'로 시작해요'" 그러자 수많은 아이들이 세종대왕을 인출하는 데 성공하고 저마다 "세종대왕이요!" 라고 떠들어 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선생님이 준 힌트를 인출 단서(retrieval cue) 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인간의 기억 구조에 대한 간략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5지선다 객관식 시험보다 백지에 쓰는 서술형 주관식 시험이 어려운지 알 수 있습니다. 주어진 지문 5개 가운데 맞거나 틀린 것 하나를 고르는 수동적인객관식 시험은, 문제와 각 보기에 주어진 내용들이 강력한 인출 단서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에 관해 이번 학기에 배운 내용을 10가지 이상 쓰시오"라는 문제에는 인출 단서가 거의 없습니다. 학생이 스스로 학습하면서 만들어두었던 인출 단서를 통해 직접 장기기억에서 단기기억으로 기억을 인출해 답을 써내려 가야 하는 것입니다.




2. 이처럼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인간의 감각 및 행동과 직접 연관되는 단기기억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한다고 합시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니 놀랍게도 10년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이에 따라 나도 손을 내밀어 악수에 호응합니다.



우리의 장기 기억 속에는 이 사람의 얼굴이 나의 고등학교 시절 동창이라는 지식, 그리고 상대방이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미는 것은 인사 행위이므로 나도 손을 내밀어 악수에 화답하는 것이 예의라는 지식이 들어 있었습니다. 


친구가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미는 순간, 이러한 지식들이 우리 두뇌 속 단기기억으로 인출되면서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악수에 응하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단기기억을 관장하는 두뇌의 전전두엽 피질(prefrontal cortex)에 문제가 생겨 단기기억을 정상적으로 활용하지 못 하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상대방이 나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는지, 나에게 손을 내미는 행위가 인사를 하는 행동인지 단기기억으로 인출할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상대방을 나를 해치려는 사람으로, 손을 내미는 행위를 나에게 주먹을 날리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에 따라 위협에 맞서 젓가락을 상대방의 머리에 찍어버리는 행동을 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유도하는 병을 '조현병(schizophrenia)' 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주의 : 이것은 최근 조현병의 원인에 대해 설득력을 얻고 있는 하나의 학설입니다. 조현병이라는 병 자체가 아직 뚜렷하게 실체가 확립된 것이 아니어서 조현병의 원인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 만큼 여기서는 그냥 가볍게 읽고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3. 인간의 기억에 관해 체계적 시험을 거의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은 19세기 독일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입니다. 에빙하우스는 스스로 아무 의미도 없는 단어 조합을 다수 만들어 이를 암기하고 시험을 치면서 자신을 직접 실험 상대로 삼아 인간의 기억 능력에 대한 테스르를 실시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의 인출능력은 떨어지지만, 중간중간에 주기적인 복습을 통해 기억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결론을 발표합니다. 이것을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이라고 부릅니다. 


지금에 와서는 이게 너무나 당연한 얘기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1885년입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발간되기 15년 전입니다. 


그래서 학습심리학자 가운데는 '심리학의 아버지는 프로이트가 아니라 에빙하우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특히 대중의 인식과는 달리 사실상 과학의 영역으로 편입되고 있는 현대 심리학계에서는 과학적 근거가 크게 부족한 프로이트와는 달리 이미 수많은 실험을 통해 확립된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에빙하우스가 더 존재의 의미가 크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






4.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의 2분법 모형이 제시된 이후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였던 조지 A 밀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 일상을 살아가면서 결국 중요한 건 단기기억이구만. 아무리 장기기억에 지식을 밀어넣어봤자 단기기억으로 인출하지 못하면 말짱 꽝이잖아? 그럼 인간의 단기기억은 과연 한계가 없는 것일까?"


이에 따라 일련의 실험을 거친 끝에 1956년에 "마법의 숫자(magic number) 7 과 플러스마이너스 2 : 정보처리에 관한 우리의 능력 한계에 관하여" 라는, 엄청나게 쌈박한 제목의 논문을 발표합니다. 



'마법의 숫자 7'은 우리가 단기기억에 한 번에 인출할 수 있는 개념의 단위가 7개라는 것을, 플러스마이너스 2는 7에서 플러스마이너스 2, 즉, 범위가 5~9개 정도라는 것을 뜻합니다.



제목도 쌈박하고 결론도 명쾌한 이 논문은 심리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논문 중에 하나로 꼽히며 인간의 기억력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논의되는 필수 문헌입니다. 



조지 밀러의 이 논문이 학계 정설로 받아들여지면서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의 행정 관행은 우편번호와 전화번호, 자동차 번호판의 등록번호 등 인간의 일상에서 쉽게 기억해야 하는 번호를 5~9개 단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정하는 암묵적 관행을 낳기에 이릅니다. 여러분의 핸드폰 번호에서 010 뒷자리가 몇 개의 숫자로 이뤄졌는지 다들 아실겁니다.





이 아저씨가 바로 조지 A 밀러.




인간의 기억력 테스트에서 우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기억력 테스트의 핵심은, 이제 이해하셨겠지만 결국 단기기억의 인출 능력을 겨루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수많은 암기 기법을 발명해 냈는데, 그 중에 하나가 5~9개 단위로 패턴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태조 - 정종 - 태종 - 세종 - 문종 - 단종 - 세조' 를 암기하려고 하면 총 14음절이지만, '태정태세문단세'로 묶어서 암기하면 7음절이기 때문에 단기기억에 부담이 훨씬 덜 가게 되는 것이죠.




5. 예전에 가 본 적이 있던 장소에 다시 방문하거나 혹은 예전에 본 경험이 있는 책을 다시 볼 때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으실겁니다. 예를 들어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다가 몇 년 전에 데이트하던 시절 여친과 나란히 걷던 그 장면이 머리 속에서 갑자기 생생히 재생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 받아들인 지식은 두뇌 속에서 '부호화(coding)'의 과정을 통해 저장됩니다. 간첩들이 암호를 통해 메시지를 본국에 전달하는 것처럼, 우리의 두뇌도 "한글을 발명한 사람은 세종대왕"이라는 지식을 나름의 암호로 저장해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호화의 과정에서 당시 인간이 처해 있던 맥락이 함께 저장됩니다. 이것을 '맥락부호화'라고 합니다.



2013년 그녀와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면서 나누었던 대화 내용은 덕수궁 돌담길이라는 주변의 맥락과 함께 내 머리 속 장기기억에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2019년 8월 12일, 우연히 지나가다가 다시 한번 들린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순간 당시의 맥락이 인출 단서로 작용해서, 장기 기억 속에 묻혀 있던 그녀와의 데이트 장면이 단기 기억으로 인출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20세기 초반 심리학자들은 어느 정도 인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실험을 어떻게 구성할지에 대한 인식조차 없던 시절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거의 최초의 실험을 시도한 사람들이 당시 영국 스털링대학교 교수있던 고든과 배들리(Godden & Baddeley) 입니다. 이들은 잠수부를 고용해서 단어를 암기시킵니다. 먼저 잠수를 시키고 물 속에서 암기를 시킵니다. 그 다음에 물 속에서 한 번 시험을 보고 다음에는 다시 육지에서 시험을 봅니다. 또 한 번은 육지에서 암기를 시킨 다음에 물 속에 들어가서 시험을 보고 다시 육지에서 시험을 봅니다. 이런 식으로 암기와 시험의 맥락을 바꿔가면서 실험을 한 결과 '맥락과 인출 환경의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도출됩니다. 물에서 암기한 단어는 물에서 더 잘 기억하고, 육지에서 암기한 단어는 육지에서 더 잘 기억한 것입니다. 


이 논문이 1975년에 발표되면서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 다른 수많은 심리학자들이 술, 담배, 마약(합법화 지역에서) 등 온갖 종류의 맥락을 구성해 실험을 재현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논문이 바로 '물과 육지라는 두 가지 자연환경에서 맥락에 의존적인 기억' 입니다. 즉, 장기기억의 인출을 더욱 쉽게 하려면 학습 당시와 비슷한 맥락을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고든과 배들리의 실험결과.





너무 길어져서 오늘은 여기까지.





댓글
  • DoubleA 2019/08/11 01:02

    헐 정독하고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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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골룸 2019/08/11 01:02

    이런 글 더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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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니밀크티 2019/08/11 01:04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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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지환골글 2019/08/11 01:09

    일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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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도스키 2019/08/11 01:10

    드라마인가 끊는 지점을 너무 잘 아시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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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olores 2019/08/11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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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yhak 2019/08/11 01:24

    우와 끝내주네요. 어디가서 아는체 할 수 있는 엄청난 정보들인듯..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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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카고글빨 2019/08/11 13:37

    저도 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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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보식품 2019/08/11 20:50

    싸던 똥을 가위로 끊으시다니.
    다음에 마저 싸게 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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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마을파크 2019/08/11 20:55

    책 읽는 기분이네요.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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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G0 2019/08/11 21:07

    출판하셔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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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hiteCrow 2019/08/11 21:10

    쉽게 써주셔서 무리없이 술술 읽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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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도Ryu 2019/08/11 22:24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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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피치 2019/08/11 22:46

    교양서적 읽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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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냠냠님 2019/08/11 22:52

    너무 잘 읽히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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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K레이더스 2019/08/11 23:11

    학부까진 재밋었는데...
    대학원부턴 이과느낌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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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동엘지 2019/08/11 23:15

    잘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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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괴왕 2019/08/11 23:32

    정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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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수의견 2019/08/11 23:49

    불펜 말머리에 "교양"같은게 있어야 하는데, 이런글이 짤방으로 올라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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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돼모이 2019/08/11 23:58

    구독하고 싶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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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aldrizzt 2019/08/12 00:04

    재밌는 글이네여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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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롤오버 2019/08/12 00:27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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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임 2019/08/12 01:10

    보통 개론에서는 심리학 역사를 이야기할때 심리학의 아버지는 생리심리학 실험실을 최초로 연 분트라고 이야기합니다. 심리학에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이지만,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칭하진 않죠. 기억에 대해 역사와 함께 쉽게 풀어쓰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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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iled 2019/08/12 09:07

    재밌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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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끊어보자 2019/08/12 11:34

    와 재밌게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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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킴연아 2019/08/12 15:37

    정보처리이론에서 시각1초 청각3초를 설명하며 그래서 이성볼때 외모는중요하지않다ㅡ 란 내용이 기억에 가장 잘 남네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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