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플라톤의 긴 삶의 마지막은 상당히 행복했을 것이다. 그의 제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성공을 거두고 어디에서나 그를 기렸다. 그는 자신의 아카데메이아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공부하는 제자들 집단을 찾아다니며 연구할 문제와 숙제를 내주었고, 다시 찾아가 보고와 답을 들었다. 라로슈푸코는 늙는 법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라고 말했지만, 플라톤은 알았다. 솔론처럼 배우고 소크라테스처럼 가르치며, 의욕에 찬 젊은이들은 인도하고, 동지들의 지적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가 제자들을 사랑하듯이 제자들도 그를 사랑했다. 그는 그들의 철학자이자 안내자일 뿐 아니라 친구이기도 했다.
그의 제자 한 사람이 결혼이라는 거대한 심연을 앞에 두고 스승을 혼인 잔치에 초대했다. 플라톤은 여든의 고령임에도 초대에 응하여 하객들과 즐겁게 어울렸다. 사람들이 몇 시간째 웃고 떠들자 늙은 철학자는 조용한 구석으로 물러나 의자에 앉아 잠깐 눈을 붙였다. 아침에 잔치를 끝내고 지친 하객들이 플라톤을 깨우러 갔다. 그러나 그들은 밤사이에 그가 아무런 소란도 없이, 짧은 잠에서 영원한 잠으로 고요히 건너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테네 사람들 모두가 무덤까지 그를 배웅했다.
아리스토텔레스
그러다 갑자기 알렉산드로스가 죽었다. 아테네는 애국적 기쁨에 들떠 열광했다. 마케도니아파는 무너지고, 아테네는 독립을 선언했다.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친한 친구인 안티파트로스가 반란을 일으킨 도시로 진군했다. 마케도니아파는 대부분 달아났다. 대사제였던 에우리메돈은 기도와 제사가 소용없다고 가르쳤다는 혐의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기소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를 살해한 배심원이나 군중보다 훨씬 적대적인 사람들이 자신을 재판에 넘길 수도 있는 상황임을 알았다. 그는 지혜롭게도 아테네가 철학에 두 번 죄를 지을 기회를 주지 않겠다고 말하며 도시를 떠났다. 이것은 비겁함이 아니었다. 아테네에서 고발당한 사람은 언제나 망명을 택할 권리가 있었다.
칼키스에 도착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병이 들었다. 디오게네스의 말에 따르면, 모든 일이 자신에게 좋지 않게 돌아가는 것에 완전히 실망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독약을 마시고 자살을 기도했다고 한다. 어떻게 생긴 병이든 그의 병은 치명적이었다. 아테네를 떠나고 나서 불과 몇 달 뒤 그는 외롭게 죽었다.
같은 해에 예순두 살로 아리스토텔레스와 나이가 같았던, 알렉산드로스의 최대 적, 데모스테네스도 독을 마셨다. 열두 달 사이에 그리스는 최고의 통치자, 최고의 웅변가, 최고의 철학자를 모두 잃은 셈이다. 세월이 흘러 로마의 태양이 동트면서 그리스의 영광은 희미해졌다. 로마의 위엄은 사상의 빛보다는 힘의 과시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유럽에는 1000년 동안 어둠이 드리워졌다. 온 세상이 철학의 부활을 기다렸다.
베이컨
베이컨은 말을 타고 가면서 고기를 눈으로 덮어놓으면 부패를 얼마나 막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시험해보기로 했다. 그는 어느 오두막에 들러 닭을 사서 죽인 다음, 뱃속에 눈을 채웠다. 그 작업을 하는 동안 몸이 떨리고 기운이 빠졌다. 그는 너무 아파서 말을 타고 시내까지 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근처에 있는 애런들 경의 집까지 데려다달라고 한 뒤 그곳에서 침대에 누웠다. 그는 아직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명랑한 목소리로 "실험은...... 아주 멋지게 성공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파란만장한 삶이 이따금씩 찾아온 열병처럼 그의 몸을 완전히 소모해버렸던 것이다. 그는 이제 완전히 타버린 초와 같아, 천천히 심장으로 기어오르는 병과 싸울 힘이 없었고, 결국 1626년 4월 9일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이제 겨우 마흔네 살이었지만, 친구들은 그에게 남은 시간이 몇 해 없음을 알았다. 그의 집안에는 폐병 내력이 있었던 데다가, 그가 작업을 하는 먼지 많은 환경과 그가 사는 상대적으로 비좁은 집도 타고나게 약했던 몸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의 민감한 폐는 해마다 약해졌다. 그는 빨리 찾아온 죽음을 받아들였으며, 다만 생전에 감히 출판할 수 없었던 책이 죽은 뒤에 사라지거나 파괴될까 걱정했다. 원고를 작은 책상 서랍에 넣고 잠근 다음 열쇠를 주인에게 주면서, 죽게되면 책상과 열쇠를 암스테르담의 출판업자인 류베르츠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2월 20일 일요일, 주인 가족은 평소보다 심하게 아프지는 않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믿고 교회에 갔다. 의사만이 스피노자와 함께 있었다. 주인 가족이 돌아왔을 때 철학자는 죽어서 친구의 품에 안겨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애도했다. 소박한 이웃들은 그의 친절함을 사랑했고, 학식 있는 사람들은 그의 지혜를 존경했다. 철학자와 행정관들이 민중과 섞여 그의 마지막 안식처까지 따라갔다. 그의 무덤에서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니체는 어디에선가 마지막 기독교인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썻다. 그러나 그는 스피노자를 잊고 있었다.
칸트
1795년 혁명이 반동적인 군대를 누르고 승리한 듯이 보이자 칸트는 이제 유럽 전역에 공화국들이 생겨나고, 노예제와 착취가 없는 민주주의에 기초하여 평화를 서약한 국제 질서가 생길 거라는 희망을 품었다. 정부의 기능은 인간을 이용하고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돕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 자체가 절대적 목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인간을 어떤 외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그가 가진 존엄을 위반하는 범죄다." 이는 종교를 위선적 소극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필수적인 정언적 명령의 핵심이기도 하다. 따라서 칸트는 평등을 요구한다. 능력의 평등이 아니라 능력을 계발하고 적용할 기회의 평등을. 그는 출신과 계급에 따른 모든 특권을 거부하며, 모든 세습 특권이 과거의 폭력적 정부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반 계몽주의와 반동이 활개치고, 혁명을 짓밟으려는 유럽의 군주들이 일치단결하는 상황에서 그는 일흔 살의 고령임에도 물러서지 않고 새로운 질서, 보편적 민주주의, 자유의 확립을 옹호한다. 노년이 이렇게 용감한 젊은 목소리로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도 지쳤다. 최선을 다했고 옳은 싸움을 했다. 천천히 아이 같은 노망으로 시들어갔으며, 마침내 조용한 광기의 상태로 접어들었다. 그의 감성과 지성이 하나하나 그를 떠났다. 그는 1804년 일흔아홉 살의 나이로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처럼 조용히 자연스럽게 죽는다.
헤겔
늙은 헤겔은 급진주의자들을 몽상가라고 비난하며, 초기의 에세이들을 조심스럽게 감추었다. 그는 프로이센 정부가 절대자의 최신 표현 형태라고 축복해주었으며, 정부가 보내준 학문적 호의의 볕을 쬐었다. 그의 적들은 그를 '어용 철학자'라고 불렀다. 헤겔은 자신의 체계를 세계의 자연법칙 가운데 한 부분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자신의 변증법이 그의 사상을 일시적이며 곧 소멸할 운명에 처한 것으로 판결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한 시절에 헤겔은 급속히 늙어갔다. 그는 이야기 책의 천재처럼 멍해지곤 했다. 한번은 구두 한 짝이 진흙탕에 빠진 것도 모르고 한 짝만 신고 강의실에 들어가기도 했다. 1831년 베를린에 콜레라가 퍼졌을 때, 그의 약한 몸은 금세 병에 전염되었다. 그는 불과 하루를 앓고 자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나폴레옹,베토벤,헤겔이 1년 사이에 태어났듯이, 1827년에서 1832년 사이에 독일은 괴테, 헤겔, 베토벤을 잃었다. 독일의 가장 위대한 시대의 마지막 훌륭한 성취가 마무리되면서 한 시대도 끝이 났다.
쇼펜하우어
그는 아무리 늦더라도 자신이 인정받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실제로 그는 천천히 인정을 받았다. 법률가,의사,상인 등 중간계급 사람들이 그에게서, 형이상학적이고 비현실적인 것들에 관해 허세를 부리며 허튼소리를 지껄이는 것 대신에 실생활의 현상들을 알아들을 수 있게 검토하는 철학자를 발견한 것이다. 1848년의 이상과 노력이 실패하여 환멸을 느끼던 유럽은 1815년의 절망을 이야기한 그의 철학을 돌아보며 갈채를 보냈다. 과학의 신학 공격, 사회주의의 가난과 전쟁 고발, 생물학의 생존투쟁 강조 ㅡ이 모든 것이 마침내 쇼펜하우에게 명성을 안겨주는데 기여했다.
그는 인기를 누리지 못할 만큼 늙은 나이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 관한 모든 기사를 열심히 읽었다. 또 친구들에게 우표 값을 줄테니 활자화된 글이 있으면 눈에 띄는 대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1854년에는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이 위대한 비관주의자는 말년에 거의 낙관주의자가 되었다. 저녁식사 후에는 플루트를 열심히 불었고, 젊음의 불길을 꺼준 시간에 감사했다.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그를 만나러 왔다. 1858년 일흔 살 생일에는 모든 대륙 모든 지역에서 축하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명성이 일찍 찾아왔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제 살날이 2년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1860년 9월 21일 그는 혼자 아침 식탁에 앉았고, 건강해 보였다. 그러나 한 시간 뒤 여주인은 그가 여전히 식탁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죽은 것이다.
니체
1889년 1월 토리노. 니체는 마부의 채찍에 맞는 말을 보고 광장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그는 마부를 밀쳐내고 말의 목을 부둥켜 안고서 울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다. 사실상 온전한 정신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깨어나서는 광기 어린 편지들을 친구들에게 보냈다. 공상적인 편지를 보고 놀란 친구가 니체가 머물던 곳에 도착했을 때, 니체는 두 팔꿈치로 피아노를 두들기며 디오니소스의 환희를 외치듯 노래하고 있었다.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1897년까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는다. 그 후로는 동생의 보살핌을 받는다.
그러나 그가 불행했던 것만은 아니다. 제정신일 때는 누리지 못했던 평화와 고요가 이제 그에게 찾아왔다. 자연은 그를 미치광이로 만들고는 자비를 베풀었다. 한번은 동생이 자신을 보며 우는 모습을 보이자, 그는 왜 우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물었다. "리스벳, 왜 우는거야? 우리 행복하지 않아?" 한번은 주위에서 책 이야기를 하는 소리를 듣고는 그의 창백한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아!" 그가 밝은 모습으로 말했다. "나도 좋은 책을 몇 권 썻는데" 그러고는 정신이 맑은 순간이 끝이 났다. 니체는 1900년에 죽었다. 자신의 천재성에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른 사람도 드물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그의 마지막 책 의 마지막 단평은 4월 27일에 쓰여졌다. 이날은 비트겐슈타인이 죽기 하루 전이었다. 28일 밤 베번 여사(주치의의 부인)와 함께 선술집까지 갔다 오는 산책을 마친 후 그는 심하게 앓았다. 베번 박사로부터 단지 며칠만 살 수 있을거라는 말을 듣고 그는 "좋습니다!"라고 외쳤다. 베번 여사는 28일 밤 그의 곁을 지켰다. 그녀는 영국에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친구들이 내일 방문할 것이라고 말했다. 의식을 잃기 전에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전해주세요. 나는 멋진 삶을 살았다고."
다음 날 아침 장례식은 케임브리지에 있는 성 자일스 교회에서 가톨릭장으로 거행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가톨릭교도가 아니었다. 많은 대화와 글에서 모두 그는 가톨릭이 믿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가톨릭 교의를 실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장례식이 가톨릭장으로 치러진 것은 어느 면에선 타당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독실하게 '종교적인' 삶을 살았으며 이것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추구했던 신에의 귀의란 것은 가톨릭교회를 통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가장 엄격한 심판관으로부터도 살아남을 수 있는 윤리적 진지함과 성실성으로 신에게 귀의하고자 하였다. 가장 엄격한 심판관은 바로 '내 가슴속에 사는 신', 즉 그 자신의 양심이었다.
레이몽크
비트겐슈타인 제외하고 윌 듀란트
예전에 불펜에 올렸다가 모든 글 지우면서 같이 지워졌는데 이 글만 제가 컴퓨터에 저장해놨더군요..
캬 간지의 비트겐슈타인
지금 나가야해서 선추후감 입니다
잘 보고갑니다.
러셀이 비트겐슈타일을 두고 말했죠. 제자로 왔다가 동료가 되었고 스승이 되어 떠나갔다.
저 9명 중에 6명이나 결혼을 안했네요.
역시 철학자는 독신주의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