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 해방정국 ~ 한국전쟁 무렵까지의 인물들 중에 유명하다고 하면 유명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유재흥이라는 장군 입니다.
무슨 김구, 이승만, 여운형, 박헌영 처럼 교과서에도 이름이 실릴 법한 인사였다거나, 혹은 김두한 마냥 관련 창작물로 알려져 있다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혼란스런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별로 사람들에게 이름이 친숙할 이유가 없는 인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재흥이라는 인물이 유명한 건 인터넷 상에서 퍼진 전체적인 행적,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일관적인 병.신' 이라는 이미지 때문이었습니다. 인터넷 상에서 웹사이트나 블로그 등에서는 그런 식의 시각으로 쓰여진 글들이 수없이 많은데, 그냥 게중에 하나만 옮기면 대략 이런 식입니다.
일본군 아들로 일본 땅에서 태어난 친일파에, 민간인 상대로 학살을 하고, 한국전쟁에서는 자기가 먼저 도망을 쳐서 대패 당하는 졸전을 거듭하고, 미군 장교에게 굴욕을 당하고, 그러면서 이후 잘먹고 잘살다가 나중에 현충원에 묻혔다 --- 그냥 이렇게만 봐도 말 그대로 블랙 코미디 스러운 이력이라고 할법합니다. 때문에 여러 웹사이트 등에서 주기적으로 올라와서 욕 먹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인터넷 상에서 볼 수 있는 유재흥에 대한 여러 악평들은, '친일파다 → 친일파니까 나쁜 놈이다 → 나쁜 놈이니까 민간인도 학살 했을것이다 → 친일경력 있는 나쁜 놈이니 전장에서도 멍청한 녀석이었다 → 친일파에 민간인 학살하고 전장에서도 멍청한 짓이다 했던 오물 같은 인간이다' 일종의 이어붙이기 요소가 상당한 편입니다.
유재흥이 일본군 대위 활동으로 친일 경력이 있는것은 맞습니다. 이건 분명한 일입니다.
다만, 유재흥 본인의 최대 오점으로 욕 먹는 '현리 전투' 관련된 부분은, 과거에 디시 밀갤이나 밀군카, 당시만 해도 관련 커뮤니티에서 영향력이 상당했던 '이글루스' 등에서 각종 괴담 및 일화로 묶여지면서 널리 퍼졌는데, 이 부분은 이후로 상당히 많은 역사/밀리터리 동호인들 사이에서 재평가가 일어난 바 있습니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유재흥 도망설' 은 '상당히 악의적인 날조' 고, '상황 자체가 애초에 굉장히 힘들었으며' 무엇보다 "너 병사 어딨냐" 며 큰소리친 미군도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이 본래 준비된 국군 부대까지 철수 시키며 오판 하다가 당하는등 '미군도 잘한게 없고 오히려 패전에 책임이 막중하다' 등등의 부분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전의 악명 및 유언비어와는 상반되는 팩트 체크가 꽤 되서 "유재흥이 병/신이라길래 한번 신나게 까보려고 연재글을 썼는데 조사하면 할수록 그냥 재수 더럽게 없게 걸린, 당시의 평범한 한국군 장교의 능력 정도로 보여서 쓰다가 내가 더 재미가 없더라." 라는 이야기도 본 적이 있습니다.
밀리터리 관련된 논쟁은 제껴두고,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할말이 없지 않습니다. 바로 어제가 4월 3일이었죠. 이 글을 쓴 이유도 4.3 사건 관련해서 유재흥이 갑자기 생각났기 때문인데
4.3사건은 남로당원들이 봉기를 하고, 이를 진압하면서, 이 과정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사건입니다. 무장대가 날뛰고 군경 토벌대가 이를 토벌하는데, 무장대 토벌한다는 군경이 엄한 주민들만 학살하고 겁을 주며 달아나게 해서 전부 다 황폐하게 해서 초토화 시키고 막상 제주도의 혼란은 한참동안 전혀 잦아들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소위 말하는 '초토화작전' 으로 애꿏은 사람들만 죽이고 했다는 것이 문제인데...
인터넷 상에서 별로 어렵지도 않게 찾을 수 있는 '제주도 학살마 유재흥' 이라는 글들에 대한 편린들.
역사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는 그전부터 알음알음 이야기가 나오다가 대략 13~14년 정도를 기점으로 유재흥이라는 인물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났고, - 무슨 사실 알고보니 엄청난 사람이었다는 게 아니라, 천하의 때려죽일 악마도 정박아 수준의 졸장도 아닌 그냥 평범하고 일반적인 개인이었다는 식 - 이런저런 영향 탓인지 최근의 게시물일수록 다소 황당한 수준의 글들은 꽤 많이 사라진 편이긴 합니다. 제 기억으로 13년 정도 무렵에만 해도 포탈에 "유재흥 제주도" "유재흥 4.3사건' 으로 검색만 해도 저런식의 글이 바로 첫페이지에 한 5개는 보이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런데 유재흥이 다른 건 몰라도 제주 4.3 사건의 학살마로 욕 먹는건 굉장히 황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재흥은 그야말로 수 많은 사람들이 광기와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고 끝없이 뒷맛이 씁쓸한 사건 전재 과정 중, 거의 드물게 상식적인 면모, 양심적인 면모를 보여주며 관계자들 모두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 극히 드문 몇명 중에 한 명이기 때문입니다.
송요찬
유재흥이 파견되기 전까지 제주도에 대한 군사 작전의 개요란 그야말로 무지막지 했는데, 당시 계엄사령관인 송요찬은 "해안선 5km 이외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 라는 포고문을 내리고, 문자 그대로 '초토화 작전' 을 펼쳤습니다. 이 당시 송요찬이 이끌던 부대는 9연대였는데, 당시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9연대는 중 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조직적인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4.3사건 관련 유혈극 중 많은 부분이 이 9연대의 활동기간 중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9연대의 활동은 1948년 하반기 내내 이어집니다.
함병선
12월 말 진압부대는 9연대에서 함병선 연대장의 2연대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학살 기조는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이전부터 이어지던 기조가 이 무렵 절정을 찍었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습니다. 49년 1월 무렵에 있었던 이른바 '북촌리 학살사건' 에서는, 2연대가 무장대의 공격을 받아 2명이 죽자 북촌리에 찾아간 2연대가 전체 1,000명 가량의 주민들 중 무려 300명에서 400명을 학살하는 4.3사건 당시 단일 규모로는 최대의 학살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사살‧포로자 숫자에 비해 노획한 무기가 너무 적다는 점은 함병선 연대장이 주도한 3월 한 달 동안의 이른바 ‘섬멸전’의 성격을 말해 준다. 사살‧포로자 중에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피난해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를 견디며 숨어 지내던 비무장 민간인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 한 미군 보고서는 한국정부의 발표를 인용해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의 토벌대의 전과를 ‘반도(rebel) 사살 1,075명, 반도 체포 3,509명, 반도 투항 2,065명’이라고 보고하면서 “이 보고서에서 언급된 대부분의 ‘반도(rebel)’는 토벌대가 섬 안쪽 산악지역의 모든 주민들을 자동적으로 반도(rebel)라고 분류할 때 비로소 성립될 수 있다”는 논평을 했다.6) 중산간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일단 ‘반도’라고 전제해 놓고 사살‧체포한 후 이를 ‘전과’로 보고한 것이다.
이같은 작전은 큰 인명피해를 초래했다. 한 미군 보고서는 1949년 3월말까지의 제주 상황에 대해 “지난 한 해 동안 1만 4,000명~1만 5,000명의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가 토벌대에 의해 살해됐다. 섬에 있는 주택 중 약 1/3이 파괴됐고, 주민 30만 명 중 약 1/4이 자신들의 마을이 파괴당한 채 해안으로 소개당했다”고 기록했다.7)
─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中
주민학살의 대부분은 1948년 12월까지의 9연대의 점령기간 동안에 자행됐다. 그러한 계획은 외형상 주효한 듯이 보여 1948년의 최근 2개월 동안 제주도에서의 반도 활동은 상대적으로 거의 없었다. 그러나 사실상 9연대의 무차별 진압작전은 새로운 형태의 반란으로 전환케 했다. 12월에 9연대가 2연대에 의해 대치됐을때 새로운 흐름의 게릴라 테러가 닻을 올렸다.
함병선대령이 지휘하는 2연대는 처음에 해변의 부락에 숙소를 정했다. 함대령은 섬사람들에 대한 계도 선전계획과 함께 반도들의 하산을 호소했다. .... 2연대는 다소 공격적이 됐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주로 반란군을 도와준 혐의를 받고 있는 해안부락민들에 대한 보복에 한정됐으며 종종 부락민들을 재판의 혜택도 없이 즉석에서 대규모로 처형하기도 했다.
* 유 대령의 도착
반도들에 대한 작전은 통합부대장인 유재흥 대령이 제주도에 파견된 3월 2일 이후에야 실제로 성공하기 시작한다...
─ 미군 비밀문서 『4·3 종합보고서』中
당시 상황을 묘사한 미군의 보고서에서도 그렇고, 이런저런 자료를 수집해서 발표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서도 함병선이 주도하던 1949년 3월 까지의 정세에 대해서 "섬멸전을 펼침" "민간인을 일단 죽이고 반도라고 보고함" "재판도 없이 대규모로 즉결 처형함" "1만 5천명 정도는 죽었고 섬 내 주택의 80%는 소멸 되었고 30만 명의 전체 제주도민 중 무려 4분의 1이 본래 마을을 잃어버림" 등등의 글로 가득차 있습니다. 실제 무장단을 억제하는 효과는 전혀 없이, 그냥 사람만 죽이는 과정이었는데...
1949년 3월 유재흥은 제주도 지구 전투사령관으로서 제주도에 도착합니다. 본래 3월 2일 이 자리에 임명 되었지만 실제로 제주도에 온 것은 3월 마지막 주였고, 여태까지는 함병선의 지휘 아래 초토화 작전이 계속 이어지던 중이었습니다. 당시 미군 보고서에서는, "유재흥이 제주도에 온 다음에서야 (아무 의미없는 학살 말고) 좀 제대로 된 작전이 시행되었다." 고 평가했습니다.
일단 제주도에 온 유재흥은 경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를 한바퀴 쭉 둘러봤습니다. 한라산 주변을 정찰한 결과 중산간 지대는 모두 불타버린게 보였는데, 그런데 한라산 곳곳에 수많은 피난민들이 있는 것이 눈에 띄였습니다.
또 당시 제주도의 인적 배치 상황을 보면, 해안가 지방은 경찰들과 군인들이 쫙 꽐려서 머물고 있었고, 산쪽에는 이런 군경의 공격이 무서운 주민들이 도망가서 피난민으로서 있었으며, 그런 사이사이에 진짜 무장단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제대로 된 무장단 토벌이 될 리도 없고, 아무 상관 없는 주민들을 몰아넣으면서 무장단 속에 섞이게 만들어버리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제주도를 '해안가' 와 '산 속' 으로 분단 해버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아직 산으로 올라가지 않고 있는, 해안가 부근에 남아 있는 일반 주민들이 눈에 불을 키고 돌아다니는 군경에게 위협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 했을테고 말입니다.
떄문에 유재흥은 이런 문제를 파악하고, '일단 토벌군은 해안가에서 놀고 있지 말고 산으로 들어가라.' 며 진짜 무장단이 있을법한 산속 깊은 곳으로 올려 보냈습니다.
"제주도에 가보니까 산중에 피난민 2만 명 정도가 있었어. 그리고 바닷가에는 경찰 군인이, 산쪽에는 공비하고 피난민이 있는 등 서로 갈라져 있으면서 밤이 되면 욕하고 싸우는 상황이었어. 그래서 나는 ‘군인은 무조건 산으로 올라가라, 공비토벌 해야 한다’며 3개 대대와 1개의 유격대대 등 4개 대대를 한라산 중복지역으로 이동시켰어. 처음에는 각기 전투지역이 있으니까 각 대대가 다니면서 소탕을 했고, 마지막에는 내가 4개 대대를 기동시키면서 작전을 했지."
당시 제주도민들
일단 군대를 산 위로 올려보내면서, 동시에 탄압이 무서워서 산 위에 올라가 있는 주민들을 내려오게 만드는 일도 중요했습니다. 나중에 작전이 종료 된 후 서울로 돌아왔을때 유재흥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여간 해안선에서 위로는 다 태워버려 없어진 상태였고, 산중에는 피난민 2만명 가량과 무장공비 230명 가량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폭도 중에 진짜 공산당이라는 것은 극히 적고 무지로 휩쓸리어 들어간 자가 많았다. 우리는 이들을 귀순시켜 피를 흘리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이렇게 선무공작(宣撫工作)이 실시 되었습니다. 이 당시 부대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군 임무' 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주민들이 내려왔을때 발생되는 민간의 행정적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령부 내에 민사처가 설치 되었고, 주민들을 위로하기 위한 군악대도 내지에서 따로 파견 되었습니다.
─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中
일전까지의 무분별한 살육 작전을 중지시키고, 일단 구금한뒤에 조사해보는 작전을 쓰며 삐라 뿌리기를 시행한 유재흥
당시 미군보고서에 따르면, '일단 죽여놓고 보기' 라는 기존 에서 벗어나 체포한뒤 심문을 한 유재흥의 이런 행보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고 합니다.
"지휘권을 잡은 즉시 유 대령은 전임자 함병선의 가혹한 작전(이 작전은 신분이나 무기의 소지여부를 가리지 않고 폭도 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것을 포함한다)을 바꾸어 즉각적으로 사면계획을 시작하였다. 가능한 한 포로들을 붙잡아서 유 대령 자신이 직접 심문하였다. 포로들은 양심의 가책을 나타냈으며 만일 그들이 게릴라 전투요원으로 가담한 자가 아니면 음식과 담배 등을 주어서 석방하였다. 현재까지 이러한 방법의 결과는 만족스럽다. 왜냐하면 석방된 포로들은 유대령의 부대를 무기 은닉처로 안내할 것이며 그들의 동료들에게 항복하면 모두 사살당하지 않고 공정하게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말을 퍼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유 대령은 자신의 사면계획 하에서 석방된 포로들마다 최소한 6명씩을 데리고 왔다고 추산하고 있다."
유재흥은 잡혀온 포로들을 자신이 직접 나서서 심문 하면서 조사했고, 고문하거나 무섭게 협박하기보다는 은근히 타이르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리하여 진짜 주도적으로 나서서 전투를 한 요원, 한마디로 '진짜 무장공비' 가 아닌 한, 어쩌다보니 그들에게 지원 해주는 식량이나 머물 곳을 지원해주게 된 간접 지원자들(그리고 거의 대다수들)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오히려 음식이나 담배를 받고 석방되었습니다.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생각보다 좋은 환대를 받고 풀려난 이들은 당연히 춥고 배고픔에 떨고 있는 동료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했고, 대다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항복하기 위해 내려오는 탓에, 아무 의미도 없이 사람 수백 수천명을 죽이고도 남아있던 무장단은 거의 괴멸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미군 비밀문서를 보면 이에 대한 묘사가 좀 더 나옵니다.
그는 자신의 부대를 해변에서 밀어올려 게릴라들과 대치중인 산으로 보냈다. 그는 사면계획을 채택해 중산간 주민에 대한 무분별한 사살을 중지토록 요구했다.
현재의 정책은 작전중 잡혔든 자발적으로 항복했든 간에 산에서 내려온 모든 사람을 구금하는 것이다. 여자·어린이·노인은 대부분 피난민으로 분류되고 있는 반면, 전투가능 연령의 남자들은 피난민 지위가 부여되기 전에 철저히 검색되고 교육되어진다.
유대령 도착이후 300명의 반도들과 그 동조자가 사살당했고 1,500명이 수감됐으며, 소총 22정과 권총 1정이 회수됐다. 무장반도들은 은신처를 이곳저곳으로 옮기느라 고통받고 있다. 3월 9일에는 軍 1개 소대의 매복을 피해가기도 했는데 이제는 정면공격이나 마을 기습 역시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 미군『4·3 종합보고서』
부대를 해변에 머물게 하는 대신 산으로 보내고, 산 속 깊은 곳에 해변가의 중간 부분인 중산간 지대에 집중적으로 모여있는 피난민들에 대해서 발포를 중지하는 대신 이들을 일단 구금하고, 여자나 어린이와 노인은 대체로 피난민으로 분류해서 쉽게 풀어주지만 전투 가능한 연령대의 남자들만 좀 더 집중적으로 조사하는 방식.
또한 당시 제주도민들에 대해 가장 행패가 큰 무리들이자, 제주도민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서북청년단' 이었습니다. 유재흥은 이들이 활개치는 것을 막으면서 제주도민들의 두려움을 덜게 해주었습니다.
“제주도 사람들이 싫어하는 서북청년들의 횡포를 막으면서 ‘과거 일은 불문에 부칠테니 안심하고 내려오라’고 선무했고 또 실제로 몇 군데 그렇게 한 결과 소문이 나서 매일 몇 천명씩 내려오니까 2만 명이 금방 내려오게 되었다.”
이런 결과 끝에, 유재흥이 파견된지 얼마 되지도 않는 3월 한달에만 1,500명이 귀순했고, 다시 3월 25일에서 4월 12일 무렵에는 3,600명이, 6월 초까지는 6,000명 이상이 귀순해 왔습니다. 당시 보고서에 따르면 6월 초 시점에서 6000명 중 1,800명 가량은 아직 구금 되어 조사중이만, 나머지 4,000명은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두달 사이에 제주도를 빠르게 안정화 시킨 유재흥은 5.10 재선거가 무사히 치뤄지는 것을 확인한 후 며칠 뒤에 제주도를 떠났습니다. 이와 거의 비슷한 시점에서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도 공식 폐지되었고, 악명 높은 서북 청년단도 사령부와 함께 본토로 돌아갔습니다.
근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할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정치적 시각에 따른 왜곡, 날조 문제 입니다.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유재흥 이 놈에 대해서 너무 금칠이 심한거 아니냐" "미화가 좀 심하네" 등등등...
그런데 이 글에 다룬 내용의 출전에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게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 인데, 이 보고서는 2003년 '4.3특별법' 을 통해 구성된 위원회를 통해 발간 되었고, 노무현 정부 시절에 만들어지고 서문 쓴 사람은 당시 국무총리 고건이고 작성기획단장을 맡았던 인물은 지금 서울시 시장인 박원순 입니다. 노무현 고건 박원순이 하는 말이 다 옳다는 건 아니어도, 최소한 여기서 설명한 유재흥의 면모가 정치권의 양대 구분에서 자기쪽편 얼굴 금칠해주기 같은 식으로 나온 묘사는 아니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오히려 '박원순이가 쓴 4.3사건 보고서는 다 거짓부렁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유재흥에 대한 묘사도 금칠해주는 구라라고 하게 되는) 라는 주장은 검색해보면 주로 조갑제 닷컴 이런데서 글이 보이는데.... 아무튼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행적의 출전에 대한 정치적 시각과 성향에 따른 왜곡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될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제주 4.3사건 관련해서 조사나 신경도 많이 쓸 수 밖에 없는 입장인 제민일보(제주지방 일간지) 같은 언론에서도,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만난 당시 관련이 있던 많은 군 관계자들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습에 비해서, 유재흥은 인터뷰 등에도 적극 협조하며 진솔하게 당시 사건 이야기를 해주고 협력해줬다는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모습을 봐도, 유재흥은 간혹 몇몇 유언비어가 말하는 것처럼 4.3사건에서 무슨 수천명에서 수만명을 학살한 살인마긴 커녕,
오히려 폭력이 극에 달한 시점에서 아주 상식적인 시각으로 문제에 접근해서 짦은 2개월 정도의 시간 속에서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고, 최소 수천명에서 최대 2만명의 목숨을 구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당초에 유재흥 장군은 귀순한 사람들에 대해 죄를 묻지 않겠다고 했는데, 5월 초에 떠났을 무렵 아직 감옥에 있어서 석방되지 못했던 1,600명 정도의 사람들은, 진상보고서에 따르면 무죄 방면 되지 못하고 전국 각지의 보고서로 흩어지거나, 심할 경우 처결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유재흥이 떠난 이후에는 함병선이 좀 더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제민일보 인터뷰 등을 통해 보면 "내가 제주도를 떠난 뒤의 상황은 잘 알지 못한다." 고 유재흥은 이야기 하더군요. 그 문제만 뺴면, 48~49년 겨울 동안 산속에서 굶주리며 아사 직전이었던 수 많은 사람들을 살린 공적이 있다 할법 합니다.
한국전때 운이 나쁘다고 하기엔 그냥 무능했던게 맞아요. 4.3은 전임자들과 달리 유화책으로 했던 게 맞구요.
또한 대한민국 해방과 건국을 막은 친일파도 맞구요.
저 송요찬이 4.19때 이승만 하야 공신 중 하나라는것도 생각해보면 역사의 아이러니인듯
6.25 일화 저도 본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이군요. 와 흥미로운 글입니다.
[리플수정]Hanami/뭐 무능했다고 할 수는 있는데 그 무능의 정도가 그냥 당시 좀 수준 떨어지던 한국 장성들 평균 수준의 무능 이었는가, 혹은 일전에 소위 조롱감으로 말해지던 것처럼 작전 중 도주하고 그러는 '원균의 환생 수준의 무능' 인가에 대해서는 말이 나올 수 있고,
과거에는 그냥 후자의 의미로 조롱으로 쓰였다면 최근에는 그 정도의 평가는 안 받더군요. 최소한 유재흥이 먹는 욕 지분 중 상당수는 에드워드 알몬드도 먹어야 한다는 쪽인듯.
오 여기서 제민일보 특별취재반이 작성한
제주 4.3이야기가 언급되네요
4.3에 대해. 알려면
제민일보 특별취재반이 쓴거봐야
현충원에서 꺼내야 합니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유재흥 도망설' 은 '상당히 악의적인 날조' 고,
=> 날조라고 볼 수 없습니다...하다못해 같은 일본군 출신인 백선엽 장군의 저서를 통해서도 유재흥의 변명은 신빙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은 자신의 저서 에서 “이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507882.html#csidx3a3b0df42a9c3db98a03138ab7d7d14
개인적으로 진행중인 역사를 제외하고 말그대로 지난 역사에서 누군가를 평가할 때
그 사람 혹은 사건의 공적과 과오를 모두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제주에서 공로를 세웠어도
애초에 첫 단추가 친일이고 한국전쟁에서의 삽질만으로도 충분히 그가 세운 공은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세에 헛소리하고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북한의 남침과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일제시대 엘리트들과
일본군 장교 출신 우리 선조들이 막아냈습니다
일제시대와 대한민국 건국 등 우리 역사에 지금 친일파라고 말해버리는
그 사람들 빼고 얘기를 할수가 없는데
뭔 여기도 저기도 친일파거리는지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은 없고 북한빨갱이들은 영웅 만들수 있어도
대한민국 공산화를 막아낸 사람들은 무조건 친일파니 매도하고
죽일놈이라고 생각해버리니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이 참 웃기게 흘러왔네요
해방이후 공산주의가 발호했고 4 3도 공산주의 때문에 생긴 민족의 비극인데
김일성이 밑에서 한번 살아봤어야 정신차렸을래나요
우리나라는 일제시대 역사를 너무 과도한 민족주의로 왜곡하고 거부하고 있고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너무 감성적인 친공산주의 친북 교육을 하고 있어요
공산주의가 우리역사에 남긴 피해와 상처가 제일 크고 지금도 현재진형행입니다
그 중심에 주사파 민주당 및 전교조 종북좌파들이 있어요
이런 극단적인 반일친북민족주의는 좌파들의 정치적 산물이죠
지들만 선이고 모든건 친일파요 악이으로 우리 선조들을 다 매도하고
몰아내야 된다고 만들고 수십년 써먹고 세뇌시켜왔죠
오랜 정치적 소수파라 지들이 기득권이 되기 위해 반일을 부여잡고 엄청 부풀리고 이용해왔죠 ㅉ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분도 친일파프레임에 많이 조작되어 있겠네요
ecsiion// 글을보니 한심해서 말이.... 느그 거시기는 뭐하시노?
.
매우 흥미있게 글을 읽다가 댓글 하나가 참...
어떤 글에서는 유재흥이 한국말을 할 줄 몰랐다는 내용도 있더군요.
다분히 재미로 왜곡되었거나 진영논리에 파묻혀 오도했거나.
이런 사례는 많고도 많은 듯 합니다.
이건 구분해서 봐야 할 문제죠. 친일 행위는 분명 과오지만 친일파들이 무슨 뼛속부터 사악함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걸 인식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친일파들은 그저 타협한 사람들이었을 뿐이에요. 히틀러는 분명 최악의 인간이지만 그의 삶을 분석할 때 주변인들에게까지 언제나 사악하게 굴었다고 볼 수는 없는거죠
[리플수정]악은 생각보다는 '평범'합니다. 역사속의 악인들을 모든면에서 악하고, 우리와는 다르다는 식의 프레임으로 보다보면 자칫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역사를 괴리시킬 우려가 있어요
일제시대에 잘 나갔으면 전부 친일파고 악입니까?
일제시대 태어나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출세한 사람들은 전부 친일파인가요?
일제시대에 미개했던 조선왕조에서 노비로 살던시대를 그리워하며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생각하고 살아야만 선인가요?
그게 후대에 만들어진 관점이고
그 시대 사람들을 매도하는겁니다
일제시대에 조선사람들도 능력있으면 출세하던 시대이고요
친일과 반일이 모든 있던 시대입니다
오히려 반일이 소수였고
대부분의 조선사람들도 일본제국의 국민으로 일상을 살고 열심히 살던 시절입니다
일제시대는 무조건 나쁘고
일제시대 잘나간 사람이면 친일파고 악이다는 하는건
후대에 만들어낸 반일광기입니다
더구나 공산주의가 정말로 더 나쁜겁니다
공산주의를 막은 사람들을 친일파라고 악의 딱지를 붙이고
친일이라서 더 나쁘다고 매도하다니요
한국은 일제시대와 공산주의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게 주사파와 종북좌파들 사관이고 그들 때문입니다
조선시대도 하나도 잘못한거 없고 우리는 전부 노예고
무조건 남탓 일본탓이고 남탓만 하면 되고 일본만 죽일놈이고
공산주의는 별로 위험한거 아니고 좋지만 실패한 사상이고
극단적인 민족주의사관 반일친북역사관이요
그게 국익적으로 뭘 얻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좌파들의 정치적 도구일뿐이죠 ㅉ
신불해님 글에 매국노 옹호론자가 하나 붙었네요.
guitarplayer/백선엽 자서전에 유재흥이 도망갔다고 나온다, 이게 전형적인 과거 이글루스 발 날조 입니다.
백선엽은 21일 날 있었던 회의에 유재흥이 참가하지 않았다, 라고 적어놓았을 뿐이고, 실제 유재흥이 현리에서 지시를 내리고 비행기 타고 사령부로 돌아간건 17일로 4일이나 차이가 납니다.
본질적으로 별 관련 없는 기록을 억지로 엮어서 도주설로 만들었고, 때문에 이게 굉장히 악의적이라는거죠.
http://m.blog.daum.net/af185/11751722
관련 커뮤니티나 역사/밀리터리 동호인들 사이에선 유재흥 도주설은 한참 전에 검증이 끝나서 그냥 괴담 정도 수준의 이야기 정도로 밖에 안 여겨집니다.
Advr// 댓글에 마음속으로 추천박고 갑니다. 악은 평범함속에 있는거죠. 그래서 '사람'을 평가하기보다 '행위'를 평가해야 하는 거겠죠.
만쭈리류 역사가(?)들의 폐해가 참 심하죠
guitarplayer/백선엽 자서전에 유재흥이 도망갔다고 나온다, 이게 전형적인 과거 이글루스 발 날조 입니다.
백선엽은 21일 날 있었던 회의에 유재흥이 참가하지 않았다, 라고 적어놓았을 뿐이고, 실제 유재흥이 현리에서 지시를 내리고 비행기 타고 사령부로 돌아간건 17일로 4일이나 차이가 납니다
=> 백선엽 자서전에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라는 내용이 나오는 이유는 유재흥이 회의가 있었기 때문에 작전 지시를 내리고 비행기 타고 회의 참석 하기 위해 간 것이라고 변명했기 때문입니다...
유재흥이 아무 지시도 없이 도망갔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히 거짓말이지만, 유재흥은 오마치 고개를 재점령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자신은 회의 참석해야 한다라고 하고 가버렸다라는 겁니다...
님께서 언급하신 블로그에는 유재흥장군이 작전회의를 주재하고 하진부리로 돌아갔다라고 나오는데, 백선엽이 말하는 작전회의는 유재흥 정도가 주재하는 작전회의가 아닙니다...3군단 전체가 포위되어 있는데, 유재흥이 후방에서 누구랑 작전회의를 했다라는 건가요???...그것도 유재흥이 주재했다면, 자기 부하들이잖아요...자기 군단 전체가 포위된 상태인데, 딴데서 뭔 회의를 주재해요???...그것도 부군단장에게 지휘권을 위임하고, 작전회의를 주재했다라는 것이 앞뒤가 맞나요???...그것도 비행기를 타고 다른데 가서 말이죠...
즉, 여기서 말하는 작전회의는 유재흥이 주재하는 3군단 회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유재흥이 그냥 변명한 것에 대해서 백선엽이 '웃기네' 한 것이고, 그냥 그렇게 이해하면 됩니다...애초에 그냥 인터넷에서 떠돈 괴담 같은 것이었으면, 백선엽이 굳이 자신의 저서에 해당 내용을 기술할 이유도 없습니다...
아무 지시도 없이 도주했다라는 말은 오버가 많이 첨가된, 악의적인 말이라는 것에는 동의합니다만, 유재흥이 당시에 비행기를 타고 떠나 버린 것은 그닥 이해가 안 되는 행위였어요...그러다 보니 이말 저말들이 오고 가고 백선엽도 언급했다라고 이해해야지요...
정리하면,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에게 점령이 되었고, 유재흥은 오마치 고개를 재점령하고 지시를 내립니다...
그리고, 자신은 작전회의에 참석한다라고 하고 비행기 타고 떠나죠...
그런데, 실제 작전회의는 유재흥이 떠난 17일이 아니고 21일에 있었습니다...21일에 있을 회의를 위해서 17일에 떠날 이유도 없었고, 자신의 군단 전체가 포위된 상황에서 부군단장에게 지휘권도 위임한 상태로 회의가 급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21일날 회의에도 유재흥은 참석 하지 않았습니다...그리고, 3군단은 연대급의 오마치 공격이 실패로 끝난 이후에 사단장까지 사복으로 갈아 입고, 도망가기 시작합니다...군단 전체가 와해되어 버린 거죠...
군단장인 유재흥의 책임이 당연히 떠오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고, 유재흥은 뭘 했냐라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회의 참석이니 뭐니 하는 것은 부차적인 이야기일 뿐이에요...유재흥이 자신의 3군단이 포위된 상태에서 뭘 했냐가 중요한 겁니다...회의참석이니 뭐니는 유재흥의 우스꽝스러움을 드러내는 장치일 뿐입니다...
그리고, 유재흥의 작전회의 핑계로 비행기 타고 떠난 것은 인터넷이 있기도 전부터 회자되던 겁니다...무슨 이글루스 발 날조 이런 것 이전, 인터넷이란 것이 존재하기 전부터 말이죠...
이글루스는 2003년에 생긴 것이고, 백선엽의 자서전은 인터넷이 있기도 전에 나온 겁니다...20세기의 백선엽 장군이 21세기의 이글루스 글을 읽고 작전회의 참석 안 했다라고 적었다라고 보면 희안할 거에요...
2003년
6월 17일 : 이글루스 1.0 베타 오픈
6월 26일 : 이글루스 1.0 정식 오픈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8%80%EB%A3%A8%EC%8A%A4
백 장군이 펴낸 한국전쟁 회고록 ‘군과 나’(시대정신)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군과 나’는 매년 유월이면 팔려나가는 책이다. 10년 주기로 언론에 회자되는 책이다. 이 책의 출발점은 한국전쟁 발발 40주년을 앞둔 1989년이었다. 한 일간신문에 연재했던 내용을 묶어 단행본으로 펴냈다. 10년이 흐른 1999년 재출간했지만, 출판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책을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가 없었다.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611011009#csidx216a08ae745139a859c9482ab994e66
그러나 그는 작전중 도주한 것에 대해서는 “후일 나는 현리에 남아 직접 양 사단을 지휘했더라면 이런 사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고 자성해보기도 했다”면서도 “그러나 대대 내지는 연대 공격 목표에 불과한 오마치(오미재) 고개 하나를 놓고 사단장, 군단장 등 별 셋이 달라붙어 지휘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고 변명을 했다.
그는 이어 “더욱이 1개 대대의 예비대도 수중에 없는 군단장인 나로서는 도리어 (작전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생각과 최 사단장(최석 9사단장)의 장담을 믿고 돌아가기로 했던 것”이라며 사단장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최 사단장에 대해 “부임 전 실전보다 행정에 능통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행정병과에서 하루아침에 실전 지휘관이 되면 사태 처리에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라고 깎아내렸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507882.html#csidxffb01da7793fd6892a4d63b2ac3adc5
더구나 유 장군은 “작전회의에 참석한다”며 작전 중 경비행기를 이용해 작전지역에서 도주하고 사단장 등 최석 9사단장 등 군지휘관들도 허둥지둥 탈주하는 군기문란을 저질러 병사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그러나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은 자신의 저서 에서 “이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507882.html#csidxbc781bd1acb8ee792fdab7334769f80
일단 친일파에 민족반역자라는 전제 하에...
개전 초기에 쓸렸던 것은 전임 사단장이 방어 준비를 하나도 안 해놓은 탓이 큽니다. 부임 후 1주일만에 한국전이 터진 걸로 기억하는데, 준비를 하기는 어렵죠. 거기에 당시 병력 편성 관계로 휘하에는 2개 연대만이 있었습니다. 무리한 공격명령에도 불구하고 작은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고는 합니다만...
이후 낙동강 철수에서의 지연전을 훌륭하게 성공시켰고, 51년 1월에는 박살난 3군단을 3주만에 재편성해서 북한 2군단을 포위섬멸로 박살내버리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능력을 평가하자면 운이 더럽게 없던 평균적인 장군 내지는 평균에서 약간 못 미치는 장군 정도가 적절할 듯 합니다.
그리고 문제의 현리인데... 당시 오마치 고개는 3군단의 생명줄인 중요한 보급선이었던 지라 9사단 29연대 2대대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알몬드가 자신의 관할구역에 말없이 병력을 보냈다며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갈등이 심해지다보니 미8군에서 중재를 해서 2대대가 철수했는데... 문제는 알몬드가 2대대 철수 이후 오마치 고개를 방치했다는 겁니다. 이건 정일권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이고...
더욱 더 심각한 문제는, 알몬드의 10군단과 10군단 예하 국군 7사단에서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사실을 3군단에게 통보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7사단이야 혼자서 중공군 예비 포격에 6개사단의 집중공격에 완전 마비 상태로 쓸려간 사정이 있었다고야 하지만서도...
거기에 8군에서의 방어명령도 너무 늦게 내려와서, 대공세에서 불과 2~3일 전에야 방어 명령을 받았을 정도입니다.
물론 전반적으로 당시 한국군이 개도국 군대답게 여러 준비나 장교진의 숙련도가 부족한 탓도 있었습니다만,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누군가에게 모든 책임을 씌우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덧붙이면, 미 10군단이 조기에 2개 사단을 철수해서 9사단 후방이 노출된 문제도 있겠군요. 그리고 앞에 분이 자기 휘하 사단이 포위되어 있는데 무슨 후방의 군단 지휘소에서 지휘하냐, 도망친 거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유재흥의 당시 직책은 군단장이고, 군단장이 제대로 업무를 수행하려면 야전보다는 후방 지휘소가 더 적합하다는 건 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당시 3군단의 주요 보급로가 10군단 관할 하에 있는 상황이었으니, 조율 작업은 더욱 절실했을 겁니다.
그리고 당시 포위망 안에는-사실 그 당시 미군이나 국군이나 포위섬멸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사단장이 둘이나 있었고, 그중에 하나는 그 유명한 김종오였습니다. 유재흥이 보기에 사단장이 둘이나 있고, 적 병력도 아직 적은 것 같으니 이들에게 맡겨도 충분히 해내겠지, 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굳이 잘못을 지적하자면 상급자를 정하지 않았다, 정도가 되려나요.
아무튼, 결론적으로 현리는 오롯이 유재흥 개인의 잘못은 아니라는 거고, 오히려 그렇게 그의 출신과 더불어 혼자의 잘못으로 모는 것은, 민족주의적 오O가즘은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르나 진정한 교훈을 얻는 것은 방해한다고 봐야 할 겁니다.
이제 진짜 마지막으로.. 유재흥의 잘못을 지적하자면 이후 군단 수습 실패를 지적해야 오롯이 그의 책임이 될 겁니다. 비록 중공군이 무시무시한 야전 기동력으로 철수하는 국군과 동일한, 혹은 앞지르는 속도로 추격해들어왔다고는 하지만, 휘하 부대 병력을 절반 이상 상실한 것은 큰 실책이니까요.
ecsiion// 휴우. 이건 뭐 피장파장에 일반화에 뭐라 말할 수 없는 오류 투성이네요.
소시민들 얘기하는게 아닙니다, 침략군 일제 군부에 투신한 자들 얘기하는데 모두가 다 그랬다 일반화하지 마시고.
반일이 소수였다? 그냥 농사짓고 사시던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무학의 그 분도 일정이라면 치를 떠셨습니다. 일정때 왜놈들이 조선사람들 백의에 먹물 끼얹고 그랬다고.
그리고 나치 시대의 일상사인가 책도 있는데, 폭압에 편승해 비인간성을 모른척 살았던 사람도 암묵적 동조자이고 연루되어 있다는걸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식민지배를 받던 조선에서 부화뇌동하여 2등 일본인이 되려고 했던 작자들에게 무얼 더 말할까요?
역사 상대주의 같은 식의 얘기 하려면 한참 더 지나서 공부하고 얘기하세요.
guitarplayer/ --자기 군단 전체가 포위된 상태인데, 딴데서 뭔 회의를 주재해요???...그것도 부군단장에게 지휘권을 위임하고, 작전회의를 주재했다라는 것이 앞뒤가 맞나요???...그것도 비행기를 타고 다른데 가서 말이죠...--
유재흥은 어디 멀리 다른데 간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3군단 본부가 포위망 바깥인 하진부리에 있었고, 전투 지역에서 수십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본부에서 유재흥이 '군단장' 으로서 현장으로 비행기 타고 와서 작전 회의 한다음, 다시 원래 있던 군단 본부로 돌아간 겁니다. 무슨 본래 있어야 했던 곳이 아니라 다른곳으로 이동한게 아닙니다.
“그러나 대대 내지는 연대 공격 목표에 불과한 오마치(오미재) 고개 하나를 놓고 사단장, 군단장 등 별 셋이 달라붙어 지휘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라는 말도 비슷한 맥락이죠. 유재흥은 단순 장군이 아니라 '군단장' 이고, 군단의 대략적인 작전 정도가 정해지면 세세한 전투 지휘는 사단장 정도 방면에서 치뤄지는게 일반적이고(당시라면 김종오 장군 같은), 하물며 현장에서 작전회의가 펼쳐지고 유재흥이 떠나고 10시간 가까이 되는 무렵까지 현리에 있던 병력은 격렬하게 직접적인 전투 중이라거나, 부대가 와해되고 있던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게 유재흥이 전투가 격렬하게 벌어지거나 부대가 와해 되는 와중에 비행기 타고 날라갔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회의가 벌어지고 유재흥이 떠나던 17일 낮 무렵까지만 해도 별다른 와해 징후가 없었고, 17일 밤에서 18일 무렵에 부대 와해가 일어납니다. 유재흥의 입장에선 떠나는 와중에 아직 부대가 별다른 일이 없으니, 이 부대를 가지고 일선 사단장들이 작전 지시를 이행하겠지 하고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구요.
--- => 백선엽 자서전에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라는 내용이 나오는 이유는 유재흥이 회의가 있었기 때문에 작전 지시를 내리고 비행기 타고 회의 참석 하기 위해 간 것이라고 변명했기 때문입니다...
유재흥이 아무 지시도 없이 도망갔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히 거짓말이지만, 유재흥은 오마치 고개를 재점령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자신은 회의 참석해야 한다라고 하고 가버렸다라는 겁니다...
님께서 언급하신 블로그에는 유재흥장군이 작전회의를 주재하고 하진부리로 돌아갔다라고 나오는데, 백선엽이 말하는 작전회의는 유재흥 정도가 주재하는 작전회의가 아닙니다...3군단 전체가 포위되어 있는데, 유재흥이 후방에서 누구랑 작전회의를 했다라는 건가요???...그것도 유재흥이 주재했다면, 자기 부하들이잖아요...자기 군단 전체가 포위된 상태인데, 딴데서 뭔 회의를 주재해요???...그것도 부군단장에게 지휘권을 위임하고, 작전회의를 주재했다라는 것이 앞뒤가 맞나요???...그것도 비행기를 타고 다른데 가서 말이죠..--
이건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유재흥이 '작전회의를 주재하고 하진부리로 돌아갔다' 는건 말 그대로, 유재흥이 본래 후방에 있던 '3군단 군단 본부' 에서 비행기 타고 현장에 와서 현장에 있는 김종오 등과 작전 회의를 하고 다시 후방에 있는 군단으로 돌아갔다는 걸 의미합니다.
3군단 전체가 포위된게 아니라, 3군단의 군단 본부가 있는 하진부리는 애초에 포위망 바깥이었습니다. 군단장으로서 군단본부에 머물고 있던 유재흥이 현장에 와서 작전 지휘를 했고, 다시 본부로 돌아간겁니다. 원래 있던 본부, 3군단 본부로 돌아간 것이니 "딴데" 가 아닙니다. 혹시 당시 3군단 본부/지휘소까지 포위망 안에 있었다고 잘못 이해하시는게 아닌가 싶네요.
다시 말하지만 비행기 타고 떠났다고 하는 유재흥은 어디 원래 있어야 할곳이 아닌 멀리, 혹은 무슨 따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다른곳으로 간게 아닙니다. 그냥 원래 자기가 있던 군단 본부로 돌아간거죠. 무슨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고 본래 작전 지휘하는 곳을 팽개치고 이상한 곳으로 향한게 아닙니다.
위에 붙인 이미지는, 바로 말씀하신 백선엽이 저자인 '밴 플리트 장군과 한국군' 에 나오는 21일 날 회의에 대한 묘사 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유재흥은 무슨 회의 참가한다고 작전 본부가 아니라 이상한 곳으로 간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 본부가 있던 곳으로 17일 비행기 타고 갔습니다.
그리고 백선엽이 21일날 했던 회의라는것은 애초에 미군에서 "활주로에서 간단하게 이야기 할테니 거기 나와라." 해서 백선엽이 가서 밴 플리트와 10분 정도 이야기한게 답니다. 무슨 장성들 다 모여서 두세시간 브리핑 하고 그런 회의가 아니었고, 유재흥이 17일날 시점에 며칠 뒤에 있을 미군의 갑작스런 부름까지 초능력으로 예상하고 그걸 핑계로 도주할 이유도, 유재흥이 여기에 굳이 참석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것만 봐도 인용하신 여러 글에서 무슨 유재흥이 21일날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게 엄청난 일인것처럼 묘사하는 게 굉장히 자극적인 왜곡이 들어가 있는걸 알 수 있습니다. 애초에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데 그걸 가지고 이상하게 사람들이 엮은거죠.
사람이 살면서 실패와 성공을 어떻게 겪는지 말해주는게 유재흥인듯 ..
그리고 백선엽이 21일날 했던 회의라는것은 애초에 미군에서 "활주로에서 간단하게 이야기 할테니 거기 나와라." 해서 백선엽이 가서 밴 플리트와 10분 정도 이야기한게 답니다. 무슨 장성들 다 모여서 두세시간 브리핑 하고 그런 회의가 아니었고, 유재흥이 17일날 시점에 며칠 뒤에 있을 미군의 갑작스런 부름까지 초능력으로 예상하고 그걸 핑계로 도주할 이유도, 유재흥이 여기에 굳이 참석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 당연히요...그래서 사람들이 뭐라고 한 겁니다...님 말씀대로 유재흥이 굳이 참석해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을 핑계로 대니 비웃는 거에요...
이건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유재흥이 '작전회의를 주재하고 하진부리로 돌아갔다' 는건 말 그대로, 유재흥이 본래 후방에 있던 '3군단 군단 본부' 에서 비행기 타고 현장에 와서 현장에 있는 김종오 등과 작전 회의를 하고 다시 후방에 있는 군단으로 돌아갔다는 걸 의미합니다.
=>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3군단이 포위된 상황에서 비행기 타고 군단본부로 돌아간 것에 대해서 유재흥 본인이 작전회의가 있어서 가 봐야 했다라고 변명을 했었고, 그에 대해서 그 때 작전회의도 없었을 뿐더러 이후의 작전회의에도 유재흥이 참석을 안 했다라고 백선엽이 깐 거에요...
혼란을 수습해야 할 유재흥 군단장조차 작전회의에 참석한다는 구실을 붙여 정찰기를 타고 전선을 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96809.html#csidx4ed45c17f47896db58a13754d9a98aa
그리고 여기서 재밌는 것 한 가지는 당시 3군단 예하 9사단 참모장으로 박정희가 일하고 있었어요...
박정희는 3군단이 포위되어서 무너지기 직전에 병가를 내고 후방으로 이동해 버립니다...
만약 그 때, 3군단이 포위되었을 때, 박정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역사란 참 재밌죠...
며칠 뒤 박정희는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출근하지 않더니 사단 의무부장으로부터 진단서를 끊어와 대구 집으로 정양을 가겠다고 우겨 9사단을 떠났다. 일촉즉발의 전투부대가 아니라 개그무대의 봉숭아학당이었다.
그로부터 10여일 뒤인 5월 16일 오후 4시 중공군의 총공세가 시작됐다. 오후 5시 30분 소양강을 도하한 중공군 선발대가 오마치(오미재)에 도착하고 대대 병력이 주변을 장악한 것은 17일 새벽 5시였다. 오마치는 상남리, 방내리, 율전, 창촌, 하진부로 이어지는 7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이자 유사시 퇴각로였다.
군단장 유재흥의 주재로 이날 오후에야 열린 작전회의는 간단히 끝났다. 하진부로 ‘퇴각’. 유재흥은 정작 중요한 오마치 탈환 및 철수 작전은 사단장들에게 맡긴 채 급히 경비행기를 타고 하진부로 ‘탈출’했다. 3군단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최석은 오마치 탈환을 포기했다. 모든 중화기와 운송장비 등을 파괴하고 방태산 너머로 퇴각했다. 부득이 3사단도 그 뒤를 따랐다.
다음은 9사단 군수참모 김재춘이 회고한 ‘7군단의 패주 장면’. “최석은 아예 제복도 벗어버리고 앞장서 튀었다. 주변에서 총소리만 나면 꽁지 빠진 닭처럼 혼비백산했다.” 장교들도 계급장을 떼거나 겉옷을 벗어버린 채 도망쳤고 사병들은 공용화기는 물론 개인화기, 무전기까지 버렸다.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828027002&wlog_tag3=daum#csidxf92352ae04bc6e59ae8635685cf012c
유재흥이 17일날 시점에 며칠 뒤에 있을 미군의 갑작스런 부름까지 초능력으로 예상하고 그걸 핑계로 도주할 이유도, 유재흥이 여기에 굳이 참석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 작전회의가 있다라고 핑계를 대고 비행기 타고 본부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에요...백선엽이 그걸 가지고 깐 거구요...참석해네 안 했네 뭐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유재흥이 있지도 않은 작전회의를 핑계로 비행기 타고 떠났고, 3군단은 와해 되어 버리고, 이후에 백선엽이 유재흥의 작전회의 참석 핑계에 대해서 비웃은 거에요...
이 건은 이미 인터넷이 있기도 한참 전 오래전부터 알려진 이야기입니다...그렇기에 불페너들 대부분이 아가였거나 어린이 혹은 청소년 이던 수십년 전에 백선엽이 본인의 자서전에서도 언급을 한 겁니다...유재흥이 작전회의 참석을 핑계로 비행기 타고 떠났는데, 그런 작전회의는 있지도 않았고, 이후의 작전회의에 유재흥은 참석도 안 했다라고 말이죠...그냥 유재흥이 핑계 댄 것에 불과하다는 비웃음인 거에요...
유재흥의 작전회의 얘기는 논거가 더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