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세계 1차대전이 끝나고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
[피지배민족(식민지나 점령지역)에게 자유롭고 공평하고 동등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자결권(自決權)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패전국에게만 적용되는 민족자결주의.
당시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은 해당사항 없음.
하지만 시작된 만세운동.
1919년 일본 유학생들로 부터 시작된 2.8 독립선언.
그리고 고종의 인사날(장례식)
1919. 03. 01.
3.1 만세운동.
많은 사망자(제암리 사건)도 있었지만 당시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강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국외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에 큰 자극을 받게된다.
[일반 시민들이 독립을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데 배운사람들, 뜻있는 사람들이면 더 크게 운동해야하지 않겠냐!]
1919년 만들어진 단체만
러시아 블라드보스토크
3월 '노인동맹단'
중국 상하이.
4.10.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구성
4.11.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6월 구국모험단
만주
11월 의열단
국내
평양 - 대한애국부인회
서울 - 천도교 중심의 소년회
외교와 실력양성 무력투쟁을 모두 쟁취하고 실질적인 중심역할을 하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강도 일본이 우리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요건을 박탈하였다."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殺罰)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강도 정치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나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하노라."
"우리는 , 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 집적형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
-신채호-
선언서에 적혀있기를
[이제 폭력 -- 암살 , 파괴, 폭동 --의 목적물을 열거하건대,]
1.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2. 일본천황 및 각 관공리
3. 정탐꾼, 매국적
4. 적의 일체 시설물
일본 강도정치의 기계가 되어 조선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선봉이 되어 있은 즉 우리의 폭력으로 쫓아낼지니라.
이는 의열단의 거사가 현 시점에서 무작위 시민들을 습격하거나 희생시켜 공포감을 조성시키는 테러와는 명백히 다름을 보여준다.
박재혁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1895. 5. 17. ~ 1921. 5. 27. 순국]
- 당시 독립운동가들을 고문, 투옥시키던 부산경찰서 서장 암살계획 참여
- 1920. 9. 14. 부산 경찰서 폭파 의거
-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 폭사
최수봉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1894. 3. 3. ~ 1921. 7. 8. 순국]
-1920. 12. 27 밀양 경찰서에 폭탄 투척
- 첫번째 폭탄은 불발
- 두번째 폭탄 폭음은 내였으나 1명 타박상
- 이후 자결 시도하였으나 체포되어 사형선고
김익상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
[1895 ~ (미상)]
- 1921. 9. 12 조선총독부 투탄(불발)
- 1922. 3. 28. 황푸탄 저격(실패)
- 수감 이후 생몰년 미상
김상옥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1890. 1. 5. ~ 1923. 1. 22. 순국]
- 1923. 1. 12. 종로경찰서 폭탄 투탄
- 종로경찰서 형사부장 다무라 사살
- 가옥의 옥상을 뛰어다니며 쌍권총을 들고 총격전
- 왜경 16명 사살, 구리다 경부 사살
- 사후 11발 총상확인, 이중 1발 자결에 사용된 총상.
김지섭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
[1884. 7. 21. ~ 1928. 2. 20 순국]
- 1924. 1. 5 일본 천황 궁성 앞 이중교(니주바시) 폭탄투척(불발)
- 이후 사형선고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 옥사
암살, 폭탄투척 같은 경우에 폭탄이 터지지 않는 경우도 많고
자체적인 무력 투쟁의 전문화를 꾀하면서
황포군관학교에 당시 대장이었던 김원봉이 들어가며 조금 뜸해짐.
나석주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
[1892. 2. 4. ~ 1926. 12. 28.]
- 1926. 12. 28 조선식산은행 폭탄 투척(불발)
- 직후 동양척식회사(은행 건너편)들어가 총으로 사살 시작.
- 도주 실패 후 경찰과 총격전, 경찰에게 잡힘
의열단의 대표적인 투쟁은
여기까지넹.
의열단 이후에도 사실 꾸준히 의거는 있었음
그리고
진짜 판도를 뒤집어버리는 의거가 1932년에 2건이 일어나면서 독립운동의 큰 전환점이 됨.
일단 오늘은 요기까지.
올해가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거든.
유게하면서 둑립운동가에 대한 지식 얻을수 있었으면 좋겠어서 글써봐.
그렇죠, 다만 광복군 부사령관까지 가는길이 썩 순탄치만은 않았다는게 쵸큼 슬퍼요 ㅠ
어느 토왜는 김원봉을 독립운동가라고 하는건 좌빨의 짓이라면서 폄훼하던데 ㄴㅁ 시발 그렇게 지들이 물고빠는 뉴라이트 건국절을 만든 런승만이 친일 순사들을 다시 기용하니 빡이쳐서 북으로 간걸 어쩌라고
어느 토왜는 김원봉을 독립운동가라고 하는건 좌빨의 짓이라면서 폄훼하던데 ㄴㅁ 시발 그렇게 지들이 물고빠는 뉴라이트 건국절을 만든 런승만이 친일 순사들을 다시 기용하니 빡이쳐서 북으로 간걸 어쩌라고
차라리 그 정도였으면 덜 빡치지.
독립운동 ㅈ빠지게 하고 꿈에 그리던 고향 돌아왔는데,
돌아오자마자 노덕술이라는 친일파 새끼가 끌고 가서 온갖 고문과 모욕을 당하고 나서 김구 선생한테 서러움 폭발 한 번 한 다음 월북하심....
노덕술 시발럼
나중에는 개인적 활동만으로는 한계를 느껴서
황푸 군관학교에 입교해서 좀 더 군사적으로 갈려고 하죠. 김원봉도 이후에는 조선 의용군, 한국 광복군 부사령관이 되기도 하고.
그렇죠, 다만 광복군 부사령관까지 가는길이 썩 순탄치만은 않았다는게 쵸큼 슬퍼요 ㅠ
아. 위에 잘못 적은거 있네요. 조선 의용군이 아니라 조선 의용대때 대장이었어요. 김원봉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