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많이 바빴습니다.
아빠는 내가 정말 교직에 관심이 있다면, 재단인수를 검토하겠다고 했습니다. 엄마는 전망이 없어도 사회 환원에서의 목적이라면 나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만, 전 반대했어요.
“과소비에요.”
“투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니.”
“취미생활 쯤으로 보일 거예요. 아무리 깨끗하게 접근하더라도 문제가 될 수 있어요.”
“경영에 참여하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거다.”
“여태 계속 그래왔기에 견제 받지 않았겠지만, 손대는 곳이 많아지면 의심하는 사람도 많아질 거예요.”
“그래. 그럼 네가 왜 여태 교사를 하고 있는지 설명해 봐라.”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었으니까요.”
“그렇다면, 나도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다는 이유로 그럴 수 있겠구나.”
학교에 사표를 냈습니다.
부모님의 요구로 교사를 그만두게 되었어요. 우리 부모가 제게 원하는 게 거의 없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걸 얻으려 할 때 어쩌는지 잘 아니까요.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교직에 미련이 남지도 않았습니다.
“한 선생. 그러지 말고 힘든 일이 있으면 휴직을 하는 게 어때?”
“아뇨. 그러면 더 힘들어 질 것 같아요.”
“내가 담임을 맡으라고 해서 그런 건 아니지?”
“학교에 작은 선물을 하고 싶어요.”
“한수진 선생이 계속 있어주는 게 선물이야.”
“편집실을 리모델링 해주고 싶어요. 조건은 제가 한 게 아니라, 졸업한 유성현과 민효정의 이름으로 기부하고 싶어요.”
“꽤 큰돈이 들어갈 텐데, 어디 재벌한테 시집이라도 가?”
그런 건 우리 부모님이 원하지 않을 걸요, 그러지 않더라도 집안의 부는 잘 유지될 거예요. 집안의 부는 어차피 외가에서 외가로 이어져오는 방식이라 제가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되레 어중간한 재벌과 이어졌다가 귀찮고 위험한 일이 생길 수 있을 거예요.
이 집안의 부가 언제부터 이어져왔는지 가늠이 되지도 않아요. 대강 고려 말에서부터라고 추측하는 편인데, 딱히 집안의 내력을 공개할 생각은 없습니다. 조선후기를 버티고 일제 강점기에는 광복군을 지원하면서 동시에 친일을 했던 것으로 보여요. 그 기나긴 시간동안 절대로 남들의 입에 오르지 않아왔습니다.
필요에 의한 은닉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스스로를 잘 감출 줄 아는 게 집안의 내력이에요. 그런 집안이었으니, 최근 제가 벌인 일들은 조금 문제가 되었습니다.
교사는 그만두고 잠시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 볼 수 없는 유럽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어요. 비행기에 올라 구름 속에 나를 담기로 했습니다. 낯선 하늘과 만나기로 했어요.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긴 여행의 잠에 빠지기 전에, 창밖에 구름이 스치는 모습을 잠시 바라볼 생각이었어요. 이 거대한 강철 덩어리가 나를 태우고 하늘에 오른다는 걸 느끼려는데, 옆 자리의 남자가 말을 걸었습니다.
흔히 겪었던 일이니까. 무심히 인사하고 귀찮다는 티를 내면 됩니다. 약간 한숨을 내쉬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기면, 보통은 이해해주는 편입니다.
간혹 끈질긴 남자들이 있긴 했지만, 대개는 지금 이 남자처럼 포기해 줍니다.
비행기가 이제 지루한 구름 위를 날기 시작했어요. 저는 이제 의자에 몸을 담아 잠들 시간입니다. 깊은 잠을 자려했어요.
“12시간 동안 잘 수 있어요?”
“.......”
끈질긴 남자였나 봅니다. 이 비행기가 최소 12시간 이상 날아간다는 걸 알고 있으니,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네요. 담요를 덮으려는 제게 다시 말을 걸었습니다. 이번엔 확실히 귀찮다는 의사표현을 하기로 했어요. 대답 없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습니다.
잠시 멋쩍어 하는 것 같았는데, 곧바로 웃어 보이며 다시 말했어요.
“영화 싫어하세요?”
“아니요.”
부정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니까, 대답을 했습니다. 영화를 싫어하진 않지만, 당신이 귀찮게 하는 건 싫다는 의사표현이었어요.
꽤나 자신만만한 남자인 모양이네요. 내 대답이 이상하다는 표정이었거든요. 여자들을 상대로 별로 실패해 본 경험이 없나봅니다. 제가 그에게 실패를 선물해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가 머릴 긁적이며 말했습니다.
“한국 영화는 싫어하시나 봐요?”
“아니요. 아.”
그의 태도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남자 영화배우였네요. 이 남자가 나온 영화도 몇 편이나 봤는데, 영화에서보다 많이 늙었네요.
이제야 제가 알아보는 것 같으니까, 그가 기쁜 표정이 되었다가 곧바로 다시 멋쩍어 합니다. 그가 기죽기 전에 내가 먼저 얘기해줬어요.
“영화배우라는 걸 알아요.”
“아. 알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배우가 먼저 말을 걸어줄 것이라는 생각을 평소에 하고 살긴 어렵잖아요.”
“전혀 놀란 것 같진 않은데요.”
“놀라운 인연들에 꽤 지쳤거든요.”
“지쳐서 여행 가시는 건가요?”
“네.”
“.......아 저도 비슷해요.”
“네.”
내가 당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태도가 그를 실망시킨 모양이네요. 별 관심도 없어 보이는 잡지를 꺼내며 제게 좋은 여행되시라고 했습니다.
저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잠에 들기로 했어요. 그가 더 방해하진 않을 것 같았습니다. 중간에 별로 깨지도 않았습니다. 전 식사도 하지 않고 잠만 잤어요. 이렇게 길게 잠든 건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중간에 잠깐 깼을 때, 승무원이 제게 괜찮으냐고 물을 정도였어요.
도착할 때가 되었지만, 하늘은 여전히 똑같아 보였습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까 그 영화배우가 다시 말을 걸었어요.
“12시간을 잘 수 있군요?”
“.......그러네요.”
“배고프지 않아요?”
“괜찮아요.”
이제야 그가 포기한 모양입니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도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더군요. 혹시 누가 알아볼 수 있을지 몰라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잘 도착했네요.
낯선 풍경과 다른 공기가 나를 반겼습니다. 차 창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호텔로 향했어요. 비행기에서 그렇게 오래 잤는데도 호텔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니까, 다시 잠이 오더군요. 그날은 밤이 될 때까지 또 잤습니다.
깼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비 내리는 파리 시내의 야경을 바라보다 외투를 걸쳐 입고 우산을 받아 나왔어요. 택시를 타고 나서야 내가 불어를 못한다는 걸 떠올렸습니다만, 다행히 영어를 알아듣더군요.
유명하다는 식당에 들러 음식을 주문하는 일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제게 친절했어요. 혼자냐고 몇 번이나 물어보는 남자들이 귀찮을 정도로 친절했습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중에도 몇몇 남자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어요.
딱히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괜찮았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 먼 곳을 응시하며 무시해줬어요. 좋은 식당이라 그런지 다들 신사적으로 굴어야 한다는 게 불편해 보일 지경이었습니다.
이제 식사를 하려는데, 또 누군가 다가오더군요.
“괜찮아요?”
“아. 영화배우.”
“제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귀찮아 보이더군요.”
“혼자 오셨나요?”
“네.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이미 합석하셨잖아요.”
그가 웃으며 직원을 불러 와인을 주문했습니다. 그가 합석 해준 게 나쁘지 않았어요. 대화도 어려운 외국인들보다 영화배우가 조금 낫겠네요. 내가 그를 무시하고 음식을 먹기 시작하니까 그가 말했어요.
“와인 마셔요?”
“여기 한국 사람들도 많이 오는 식당이라던데, 괜찮아요?”
“저야 당연히 괜찮아요. 그쪽은~ 아. 성함이?”
“한수진.”
“네. 저는~”
“됐어요. 알아요. 20년 전에 오토바이 타고 달리던 모습은 멋졌어요. 당신 이름을 누가 모르겠어요.”
“아까 비행기에서는 못 알아보시기에”
“설마 영화배우가 먼저 말을 걸 줄은 몰랐죠. 자주 이러시나요?”
“네? 아. 설마요. 이젠 저보다 제가 만나는 여성분이 불편해지잖아요. 조심해야죠. 이런 식으로 만나거나 하지는 않아요.”
“저는 불편해져도 괜찮다는 건가요?”
“미안해요.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이미 저질러버렸네요. 이젠 차라리 우리가 자연스러운 게 나을 거예요. 그러는 게 나중에 한수진 씨도 편하실 거예요.”
“그렇겠군요.”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제가 바보처럼 그쪽으로 고갤 돌리진 않았어요.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니, 그가 만족한 듯 웃었습니다. 와인을 조금 마신 그가 다시 말했어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저를 위한 거예요.”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결혼했었나요? 초면에 무례한 질문 죄송해요. 제겐 좀 민감한 거라”
“결혼 했거나 남자친구가 있냐고 묻는 게 아니군요?”
“유부녀이거나 애인이 있는데, 혼자 여기까지 올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으니까요.”
“그런데, 결혼 했었는지는 왜 물어 보시죠?”
“아. 제 과거를 모르시는군요?”
“영화배우의 사생활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아. 제가 가수와 결혼했던 적은 없어요.”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제 20년 전 영화를 보셨어요? 그럴 나이로 보이지는 않는데요.”
“그 영화를 본 건 아니에요. 오토바이를 타는 그 장면이 워낙 유명해서 보게 되었죠.”
“그렇군요. 제가 먼저 이런 질문을 하는 편은 아닌데, 혹시 제 영화 중에 마음에 들었던 영화가 있나요?”
“변견?”
“네? 아~ 네. 그렇군요.”
그는 전혀 톱스타답지 않았습니다. 일부러 그런 태도를 보이려고 노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대하는 방식이 연기라면 평소 연기를 훨씬 더 잘했어야 하는 게 맞겠네요. 나이에 비해 순수해 보이는 태도도 신기했습니다.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어른스러운데, 입으로 꺼내는 말들은 순진한 옆집 청년 같았어요. 저보다 10살도 훨씬 많은 나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편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이 있으니까, 우리가 식당에 오래 머물진 못했어요. 적당히 와인을 마시고 각자의 호텔로 향했습니다. 내가 머무는 호텔을 물어봤어도 가르쳐줬을 것 같은데, 그는 내게 묻지 않았어요.
“수진 씨. 첩보영화 좋아해요?”
“별로 관심 없어요.”
“내일 우리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만날래요?”
“거기에서 우리가 만나자고요?”
“검은 모자에 검은 외투를 입고 있을게요.”
“그 키에 그러고 거기 서 있으면 정말 눈에 안 띄겠네요.”
“아마 전 꽤 구석진 곳이나 으슥한 곳에 있어야 할 거예요.”
“저보고 찾으란 말이군요.”
“재미있지 않을까요?”
“빨간 레인코트를 입은 저를 찾으세요.”
그가 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전혀 첩보영화 같지 않았습니다. 요즘엔 보기 힘든 멜로영화였어요.
우리 부모님이 싫어할 것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계속.
감사합니다.
일등 성공이려나? ^^
어린왕자73// 감사합니다. ㅎㅎ
오랫만에 댓글 다네요.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한수진에게 정우성이라니요 ㅋㅋㅋ
이젠 많은 분들이 떠나셨지만, 여태 버텨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정우성 ㅎㅎㅎ
전 절대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ㅎㅎ
변견정오성ㅠ
왜 다들 한 분만 언급하시는거에요? 창정이형 실망이야 ㅋ
변견 ㅎㅎㅎㅎㅎ
늘 잘 보고 있습니다.
떠나기는요? 잘 보고 있답니다..
오토바이에서 이미 정우성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변견까지 나오지 않더라도 ㅋㅋㅋㅋㅋ
결혼 경력 묻는 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