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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추천 - 가와바타 야스나리 '명인'. 그리고 민병산 선생

설국으로 유명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명인'이란 소설은

바둑을 좋아하는 애기가들 사이에서는 혹 읽어보지는 못했더라도 유명한 소설인데

제가 살면서 읽은 소설 중에 세 손가락에 꼽지만 그동안 지인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할 수가 없었습니다.

1992년을 끝으로 이미 절판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지난달말에 다른 출판사를 통해 재출판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약간 아쉬운 것은 번역자가 바뀌었다는 것인데 그건 뒤에 말하기로 하고..


이 '명인' 이란 소설의 내용은
불패의 명인으로 불리던 65세의 혼인보 슈사이 명인과 젊은 기타니 七단과의 6개월에 걸친 대국(1938년), 슈사이 명인 은퇴기를 다룬 논픽션입니다.
수백년간 일본바둑에서 명인이란 칭호는 종신이며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최강자, 신인(神人)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청원, 기타니 등의 젊은 천재기사들이 부상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래된 기단 질서를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고
신문사에서 큰 금액을 들여 명인의 은퇴기를 기획한 것입니다.
은퇴기의 상대는 기타니였고 결국 기타니의 흑5집 승으로 은퇴기는 끝납니다.

소설은 여기서 끝나지만 이후
은퇴기 종료 이듬해인 제 1기 본인방전(1939년)이 열려 바둑계 최초로 타이틀전이 시작됩니다.
과거 수백년간 이어졌던 명인이라는 명맥이 소멸하고 새로운 물결로 교체되는 상징적인 단 한판의 대국을

이 소설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바둑애호가로도 유명했는데

실제 마이니치 신문이 주최한 명인 은퇴기의 관전기자로 위촉되어

1938년 64회에 걸쳐 이 대국의 관전기를 신문에 게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관전기를 바탕으로  '명인'이란 소설을 집필하여

1951년부터 한 문예지에 십여차례에 걸쳐 연재한 것을 묶어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이 이 책입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하면 설국이 대표작이고 이즈의무희 정도가 국내에 많이 알려졌지만

생전에 고인이 가장 좋아하는 저작이  '명인'이었다고 전해지며

후대 야스나리의 연구가들에게 '가장 가와바타 야스나리다운 작품'이라 언급되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일본문학에 관심있는 분이라던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좋아하는 분, 그리고 바둑을 좋아하는 분들은

일독을 권합니다.

제가 무슨 전공자도 아니고 뭐라 평하기는 어렵겠지만..

일본 문학 특유의 한 갈래인 논픽션, 전기 문학의 모습을 가와바타 야스나리라는 거장의 문장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고

단순해 보이는 한판의 대국 과정과 명인이란 인물을 특유의 감각적인 표현으로 한없이 서사하는 소설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분량도 길지 않아서 200페이지 남짓 되는 중편 정도라 양의 부담도 많지 않은데

의외로 다 읽고 나면 마치 한편의 대서사 소설을 읽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대서사하면 보통 톨스토이의 전쟁과평화, 안나 까라레나 또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고독 같은 소설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런 대서사 소설들이 인물들의 생애라던가 가문의 역사라던가 하는 긴 시간의 여정을 서사하는 것이라면

 '명인'은 한판의 대국이라는 짧은 시간을 긴 호흡으로 서사하는 색다른 느낌도 얻으실 수 있을거라 믿습니다.



소설에 대한 소개는 그만하고

저는 사실 이 책이 국내에 처음 번역된 그대로 재판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절판된 책의 원번역자인 민병산 선생의 글이 계속 읽혀지기를 바랐고 

소설 뒤에 붙여진 신경림 시인이 쓴 작품 해설이자 추천사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민병산 선생은 재야철학자이자 문학인, 번역가 그리고 전기 연구자였는데

평생 동안 이렇다할 직업을 가지지 않고 간혹 짧은 기고와 일본 서적 번역 등으로 입에 풀칠하며 무소유의 삶을 살다간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대단한 바둑애호가로서 매일같이 종로 관철동 한국기원의 일반회원실에서 하루를 보내며

바둑을 두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바둑을 구경하는 것을 삶의 큰부분으로 지내왔던 분이기도 합니다.


일본 서적을 번역하는 일이 호구지책이었으나 소설을 번역하는 일은 꺼렸던 선생은

타계하기 얼마전 의뢰된 이  '명인'이란 소설만큼은 열의를 가지고 번역에 임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우리에겐 생소한 '전기(傳記) 연구자'였던 선생은

슈사이 명인 은퇴기라는 한판의 대국을 다룬 이 소설을 '슈샤이 명인'의 전기

더 나아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전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합니다.

(저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왠지 본인의 삶을

슈샤이 명인의 모습을 통해 서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번역하고 얼마 안되어 돌아가셨기 때문에 번역가로서의 유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경림 시인 또한 종로 한국기원의 애기가 문인 멤버 중 1인으로

담담한 작품 해설을 남겼는데요.

번역가와 해설을 쓴 사람 모두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이 번역이 잊혀지는 것이 아쉽기도 합니다.

신경림 시인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대해 생전의 민병산 선생과 나눴던 일담을 해설에 쓴 것을 옮겨보겠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도 어쩌면 바둑 같은 것인지도 모르지. 거기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면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고, 아무 쓰잘데없는 것을 가지고 공연스레 기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재미없는 소설이 있을 수 없고... 하긴 산다는 것 자체가 다 그런 거니까."




어제 서점에서 새로 출판된  '명인' 을 샀습니다.

일본 문학을 전문으로 번역하는 번역자에 의해 새로 옮겨졌더군요.

금방 읽어 보았는데 절판된 전번역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매끄럽고 읽히기 쉽게 번역이 되어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소회로.. 바둑에 관심을 막 가질 어릴 적에 동네마다 헌책방이 있었습니다.

헌책방에서 바둑책을 접하고 사기도 했는데 그 책들은 대부분 일본 바둑책을 그대로 옮겨온

세로로 쓰여진 날림 수준의 번역책들이었습니다.

예를들어 '가토 마사오의 공격의 맥', '사카다의 맥점 해부', '이시다의 끝내기 강좌', '조치훈의 침투와 타개'

뭐 그런 류의 이름을 가진 책들이었는데

절판된 민병산 번역의  '명인'은 왠지 그런 바둑책들에게 풍겨오는 느낌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면

지금의 번역은 옛 인물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이라는 느낌보다는

최근 일본 소설과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어서 좀 이채롭기도 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 한번 읽어보시면 후회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책값이 부담된다면 반나절 서점에서

후딱 읽고 나오기에도 충분한 분량입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절판된 솔출판사의  '명인' 과 새로 출판된  '명인'의 사진을 첨부합니다.





댓글
  • hipros 2019/03/19 04:01

    잘 읽었습니다. 내일 도서관 들를 일이 있는데 검색해보니 추천하신 번역본이 마침 있군요. 빌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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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까끼예비치 2019/03/19 04:03

    [리플수정]hipros/ 개취이지만..예전 번역본이 더 읽는 맛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잘된 일이네요. 덧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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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루질라넥 2019/03/19 04:17

    책을 읽고 싶게 만들게 하는 추천글이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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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까끼예비치 2019/03/19 04:24

    그루질라넥/ 네 기회되면 읽어보시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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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질주베어스 2019/03/19 04:30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명인은 기억이 가물할 정도로 예전에 읽었는데 다시 찾아봐야겠네요.
    다자이 오사무 사양 좋아해서 여러 판본으로 봤는데 제일 마음에 드는것과 새로 출판된 명인의 역자가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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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까끼예비치 2019/03/19 04:37

    질주베어스/오 맞습니다. 신경림 시인이 작품 해설에 언급하고 있는데
    본인의 기억으로 민병산 선생이 번역한 소설은 딱 두 작품이 전부로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과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명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신경림 시인의 기억이므로 물론 더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도 사양을 민병산 번역으로 읽은 기억이 있는데 그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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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까끼예비치 2019/03/19 04:44

    아 제가 덧글 내용을 착각했네요. 새로 출판된 책의 역자와 같다는 말씀이시군요..ㅎㅎ
    유숙자 번역가. 일본 문학을 잘 번역하는 분으로 알려진 분 같네요.
    그런데 제가 착각한 것처럼 명인의 원번역자인 민병산 선생도 생전에 사양과 명인을 번역했다니
    이것도 참 우연한 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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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질주베어스 2019/03/19 04:57

    지금 뒤져보니 민병산 역 사양이 있네요.
    실물로 찾아보려면 품 좀 들여야겠지만... 착각 덕분에 찾아볼 게 더 생겼네요. 정성된 댓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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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까끼예비치 2019/03/19 05:01

    질주베어스/ 네 저도 이참에 유숙자 번역의 사양을 한번 봐야겠네요. 사양은 님이 주신 첫 댓글처럼 기억이 가물할 정도로 예전에 보았는데 다시 생각하게 되니 옛 생각도 나고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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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소카 2019/03/20 03:49

    님 글솜씨 좋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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