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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시인 기형도 30주기를 맞아 // 詩 조치원

 

故 기형도 (1960. 2. 16. ~ 1989. 3. 7.)





鳥致院
 
 
1.
 
사내가 달걀을 하나 건넨다.
일기 예보에 의하면 1시쯤에
열차는 대전에서 진눈깨비를 만날 것이다.
스팀 장치가 엉망인 까닭에
마스크를 낀 승객 몇몇이 젖은 담배 필터 같은
기침 몇 개를 뱉아 내고
쉽게 잠이 오지 않는 축축한 의식 속으로
실내등의 어두운 불빛들은 잠깐씩 꺼지곤 하였다.
2.
 
서울에서 아주 떠나는 기분 이해합니까?
고향으로 가시는 길인가 보죠.
이번엔, 진짜, 낙향입니다.
달걀 껍질을 벗기다가 손끝을 다친 듯
사내는 잠시 말이 없다.
조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죠. 서울 생활이란
내 삶에 있어서 하찮은 문장 위에 찍힌
방점과도 같은 것이었어요.
조치원도 꽤 큰 도회지 아닙니까?
서울은 내 둥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지방 사람들이 더욱 난폭한 것은 당연하죠.
3.
 
어두운 차창 밖에는 공중에 뜬 생선 가시처럼
놀란 듯 새하얗게 서 있는 겨울 나무들.
한때 새들을 날려 보냈던 기억의 가지들을 위하여
어느 계절까지 힘겹게 손을 들고 있는가.
간이역에서 속도를 늦추는 열차의 작은 진동에도
소스라쳐 깨어나는 사람들. 소지품마냥 펼쳐 보이는
의심 많은 눈빛이 다시 감기고
좀 더 편안한 생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투리처럼 몸을 뒤척이는 남자들.
발밑에는 몹쓸 꿈들이 빵 봉지 몇 개로 뒹굴곤 하였다.
4.
 
그러나 서울은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 주니까요. 덕분에 저는
도둑질 말고는 다 해보았답니다.
조치원까지 사내는 말이 없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마지막 귀향은
이것이 몇 번째일까. 나는 고개를 흔든다.
나의 졸음은 질 나쁜 성냥처럼 금방 꺼져 버린다.
설령 사내를 며칠 후 서울 어느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한들 어떠랴.
누구에게나 겨울을 위하여 한 개쯤의 외투는 갖고 있는 것.
5.
 
사내는 작은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견고한 지퍼의 모습으로


그의 입은 가지런한 이빨을
단 한 번 열어 보인다.
플랫폼 쪽으로 걸어가던 사내가
마주 걸어오던 몇몇 청년들과 부딪친다.
어떤 결의를 애써 감출 때 그렇듯이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
조치원이라 쓴 네온 간판 밑을 사내가 통과하고 있다.
나는 그때 크고 검은 한 마리 새를 본다. 틀림없이
사내는 땅 위를 천천히 날고 있다. 시간은 0시.
눈이 내린다.



댓글
  • 이판사판 2019/03/07 00:52

    저도 좋아하는 시인데 반갑네요. 쓸쓸한 풍경이 마음속을 선명하게 두드리는 느낌. 이런 묘사에 빠져서 맨날 습작하는 시절이 있었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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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estworld 2019/03/07 01:00

    도대체 이 짧은 시 한편에 최고의 메타포가 몇개나 출현하는지. 정말 천재라고 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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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융기운동 2019/03/07 14:30

    누구에게나 겨울을 위하여 한 개쯤의 외투는 갖고 있는 것.
    자기방어적 허위의식을 조금이라도 품은 사람들에게는 이 대목이 되게 멋진 변명인데, 저는 이 표현을 보고 오히려 찔려서 많이 울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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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Justice 2019/03/07 15:28

    하이고 스물 아홉에 뇌졸중이라니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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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쿤킴 2019/03/07 15:31

    분명히 먼 곳에서 먼 곳을 보며 넋두리처럼 말하는데도 매스처럼 날카롭게 현실을 인지하는 그런 시... 흔한 재주는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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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NARNA 2019/03/07 15:42

    기형도의 시를 보면 프랭크 오하라의 시가 떠오르네요.
    기형도가 그를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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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땅콩매니아 2019/03/07 16:05

    님의 글보고, 입속의 검은잎을 다시 꺼내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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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꽃 2019/03/07 17:05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너무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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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가가생명 2019/03/07 18:19

    80년대 초반 분위기가 물씬 나네요. 좋은 소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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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름나무 2019/03/07 18:20

    입속의 검은 잎..참 좋아하던 시집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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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대문구장 2019/03/07 19:47

    그 당시는 옆에 앉은 사람하고 대화하지 많으면 어색하던 시절이죠.
    요즘은 스마트 폰에 머리 쳐박고 아무 대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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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hiteCrow 2019/03/07 21:02

    기가 막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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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流水不爭先 2019/03/07 23:00

    각박하고 고단한 인간 군상들의 심연이 축축한 겨울밤의 시상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차라리 눈이라도 내렸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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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덕TG 2019/03/07 23:12

    빈 집 쓰러 왔는데 이미 쓰신 분 계시네요. 좋은 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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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etheny 2019/03/07 23:13

    제가 중학교 때 어느 작은 서점에 갔다가 친구가 책을 훔치는 것을 보고 따라 훔친 시집....그게 바로 기형도 시집이었습니다.. ㅠ.ㅠ 그것도 1판 1쇄.. 그 서점에서 카운터 보시던 어여쁜 누님(?)께 아직도 죄송스럽네요.. 근데, 그때 훔친 기형도 시집이 중딩때 부터 제 인생의 시집이 되어버렸죠.. 중딩때는 멋모르고 읽었고, 고딩때는 기형도의 글쓰기를 배우고 싶은 마음으로... 그분이 지금도 살아 있다면 아마도 한명의 걸출한 꼰대가 되어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형이 그 푸르고 아름다운 피를 흘리며 낸 시집 한 서너권만 더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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