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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사랑없는 사람들의 사랑이야기. (97)

 


  3



 이제 애들이 나를 보고 수군거리는 일은 많이 줄었다. 아직도 몇몇 여자애들은 나를 힐끗거리기를 멈추지 않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는 애들은 별로 없었다. 


 나와 같은 반이었던 애들은 그래도 나를 인정하고 무시해주는 편이었는데, 다른 반 애들이나 남자애들은 그러지 않았다. 아직도 끈질기게 내게 말을 걸어보려는 애들도 있었고, 한 녀석이 건넨 연애편지를 받아 서랍에 넣는 중에, 다른 녀석이 다가와 연애편지를 건네기도 했다.


 원하지 않는 동아리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수업은 죄다 남녀가 따로 듣게 하면서, 동아리는 남녀가 함께 해야 했다. 아무런 동아리 활동도 원하지 않았던 나는, 나 같은 애들이 흔히 모이는 영화감상동아리에 들어갔다. 물론 내가 가입신청서 따윌 쓰진 않았다. 아무런 동아리에도 가입신청서를 내지 않았더니, 내 앞에 영화감상동아리의 가입신청서가 놓여있었다. 꽤 곤란한 표정의 반장이 와서 사인을 하라기에 했을 뿐이다. 


 내가 일학년 때 처음 가입했었던 영화감상동아리는 무척 조용했다. 영화감상이 가능한 교실에 모여 커튼을 치고, 빔 프로젝터로 영화를 틀어줬다. 영화를 감상하고 다음 동아리시간까지 감상문을 제출하면 됐다. 


 몇몇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이 연애편지를 건네기도 하고, 선배들이 다가와 말을 걸기도 했지만, 조금만 견디면 되는 일이었다. 영화가 시작하면 충분히 쉴 수 있었다.


 2학기에는 영화감상동아리의 인원이 두 배로 늘었고, 내가 2학년에도 영화감상동아리를 유지했더니.......



 “이제 영화감상동아리는 소강당에서 모입니다.”


 “거긴 댄스동아리가 사용하지 않나요?”


 “이 인원을 수용하려면 어쩔 수 없어요. 댄스동아리가 일반교실을 치우고 사용할 거예요. 누구 때문인지는 알죠? 양심 있는 남학생들은 댄스동아리회장에게 가서 사과하세요.”



 모두의 시선이 내게 향했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난 그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나를 향산 시선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마주했다. 그러면 다들 내 시선을 피했다. 난 다수의 시선이 내게 향하는 건 두렵지 않았다. 한두 명이 나를 보는 게 되레 걱정되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연애편지 한두 통을 받는 건 일상이었다. 쉬는 시간에도 또 받았다. 누가 줬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부끄러움 많은 아이들은, 영화를 감상하는 중에 몰래 주고 사라지기도 했다. 


 보통은 몇 번 그러다 포기하는 편이었지만, 간혹 끈질긴 애들도 있었다.



 “저기요. 누나. 편지들 놓고 가셨는데요?”


 “아.”



 일학년 남자애가 나를 불렀다. 가방에 담고 남은 연애편지들을 의자 밑에 그냥 두고 일어난 모양이다. 그 중에 녀석이 건넨 편지도 있었겠지. 나는 연애편지들을 주워 가방에 쑤셔 넣었다. 


 기숙학교라서 큰 가방은 필요 없을 줄 알았는데, 좀 더 큰 가방이 필요하겠다. 나를 불렀던 아이가 내게 종이가방을 내밀며 말했다.



 “여기에 담으세요.”


 “아. 고마워.”


 “누나. 이거 다 읽어요?”


 “그럴 수 있겠니.”


 “그럼 왜 받아요?”


 “보는 앞에서 찢어버릴 수는 없잖아. 그래도 괜찮을까.”



 녀석이 내가 흘린 연애편지들을 주워 종이가방에 담아줬다. 내 가방을 빠져나오려는 연애편지들도 종이가방에 담고 가려는데, 남자애가 다시 말을 걸었다.



 “제가 몇 번이나 편지를 줬는지 아세요?”


 “알겠니.”


 “오늘이 열 번째에요.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다는 말은 틀린 것 같네요.”


 “도끼가 허공을 열 번 가르는데 나무가 쓰러질 수는 없잖아.”


 “......그럼 지금이 첫 번째 도끼질이 되겠네요. 저 누나 좋아해요.”


 “왜? 예뻐서?”



 녀석이 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 나이 남자애들은, 아니 그 이후로도 많은 남자들은 결국 그냥 예쁜 여자를 선택할 뿐이다. 내 인성이 어떤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나를 알 방법도 없었다. 


 그런 것들이 사람의 사랑을 비참하게 만든다. 뭔가 의미를 담아보고 특별한 감상을 포함시키려 해봤자, 눈에 예쁜 사람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런 주제에 까였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당신이 내가 예뻐서 좋아할 수 있다면, 난 당신이 못생겨서 싫어할 수 있다. 


 여드름이 좀 남아있긴 했어도 이 아이가 못생기지는 않았다. 키는 나보다 커도 그럭저럭 귀엽게 생긴 아이였다. 그러나 이 아이가 나를 모르는 것처럼, 나도 이 아이를 전혀 모른다. 이 아이는 연애편지에 뭐라고 썼을까. 어쩌다 나를 보고 좋아하게 됐는지, 그런 상황들을 그럴듯하게 묘사하느라 노력했겠지. 나를 전혀 모르니, 자기 이야기를 잔뜩 써 놨을지도 모른다. 



 “너 이름이 뭐니”


 “네?”


 “아니. 됐다. 네가 준 편지가 어떤 거니.”



 그 아이가 종이가방에서 자기 편지를 찾았다. 하늘색 봉투였다. 녀석이 건넨 편지를 받아 들고, 내 가방에 담겨있던 편지들을 모두 꺼내 종이가방에 담았다. 그런 내 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던 그 아이에게 종이가방을 건네며 말했다.



 “네가 이걸 처리해.”


 “네?”


 “그럴 수 있겠니”


 “네!”


 “괜찮을까.”



 꽤 많은 숫자의 남자애들이 나와 그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그 아이의 편지를 들고 나머지 편지들이 담긴 종이봉투를 녀석에게 건네는 것도 보고 있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아이가 당황하는 것 같았다. 


 난 모두들 보란 듯이 그 아이의 파란색 편지만 들고 소강당을 나왔다.


 

 다음 주 동아리시간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아이들이 많았다. 몇몇 노골적인 녀석들은 내가 그 녀석을 선택한 것이냐는 질문을 했고, 몇몇 생각 없는 녀석들은 그 녀석의 뭐가 마음에 들었냐는 말도 했다. 효과가 나쁘진 않았다. 연애편지가 대폭 줄었다. 쓰레기 버릴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영화감상동아리의 인원이 아닌 애들도 소강당 주변에 모여 있었다. 이미 전교에 소문이 난 모양이다. 분명히 나와 그 아이를 보고 싶어서 모였으면서, 내게 시선도 맞추지 못하는 녀석들이 한심했다. 


 그 아이는....... 상태가 많이 나쁘진 않았다. 


 눈가에 멍이 있었고 입술이 조금 터진 것 같았어도, 어디 부러지거나 하진 않은 모양이다. 내가 일찍 도착하면 소란이 생길까봐, 일부러 조금 늦게 도착했지만 별로 소용은 없었다. 동아리담당교사가 복도에 모인 아이들을 쫓아내야했고, 아이들이 웅성거리는 걸 나무랐다.



 “조용! 나도 소문은 들었다. 길었던 전쟁이 끝나가고 있다는 소식이냐? 아니면 진짜 전쟁이 이제 시작하다는 거냐?”



 애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몇몇 아이들과 선생님의 시선이 잠깐 내게 머물렀지만, 난 상관없다는 듯 천장을 보고 있었다.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에는 나만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모든 시선들이 그 아이에게 향했다.


 그 아이가 내게 다가오기 시작할 때는, 우릴 보는 눈동자들이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아이가 앉아있는 내 곁에 섰다. 말이 없기에 내가 먼저 말했다.



 “어떻게 했어?”


 “편지들이요?”


 “그래.”


 “분리수거장에 가져다 버렸어요.”


 “그럼. 그건 분리수거장에서 생긴 거니.”



 내가 올려다보며 말하니까, 그 아이가 멋쩍게 멍든 눈가를 만지다가 말했다. 



 “네. 이건 그랬고, 입술은 오늘 아침에요.”


 “그 정도였니.”


 “물 풍선도 맞았고요. 제 노트를 누가 찢어버리기도 했고요. 체육복에 구멍이 생겼어요. 2학년 교실에 불려가서 밟히기도 했고요.”


 “그랬구나.”


 “울면서 너는 아니라고 말한 선배도 있었어요. 약간의 협박들도 있었고.......”


 “알았어. 지금은 어떤 거 같니. 내가 좋아?”


 “네.”


 “다음 주말에 너도 집에 다녀오지?”


 “네.”


 “그때 만나자. 아. 좀 더 수고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 아이는 남은 영화감상을 마칠 수 없었다. 몇몇 남학생들에게 끌려 나갔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걸로 보상이 될지 모르겠다.


 일요일 낮에 만났다. 상처가 늘지 않았다고 하니까, 얼굴을 잘 가렸단다. 예매가 되는 아무 영화나 예매해서 그 아이와 함께 봤다. 캄캄한 영화관에서 그 아이의 손을 잡았더니, 조금 떨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 영화관을 나와서는 한적한 장소를 찾고 싶었지만, 그런 곳은 없었다. 어딜 가도 사람이 많았고, 우린 그냥 별 말없이 걷다가 아이스크림가게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 아이가 꽤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랑 사귀는 건가요?”


 “아니. 우린 서로를 잘 모르잖아.”


 “그런데 말이 너무 없으시네요.”


 “별로 할 말이 없으니까. 왜 싫어?”


 “아뇨. 저도 이러는 건 처음이라.”


 “뭘 하려고 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무서워요.”


 “뭐가?”


 “지금 이렇게 누나랑 있는 게 너무 좋은데, 이게 언젠가 끝날 거라는 게 무서워요.”


 “흠. 이리 와봐.”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던 그 아이를 내 옆자리로 불렀다. 아이스크림 가게에는 적잖은 사람들이 있었고, 나를 힐끗거리는 남자어른들도 있었다. 내 옆에 앉아 멀뚱거리는 그 아이에게 말했다.



 “눈 감아”



 그 아이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췄다. 그냥 댔다가 떼진 않았다. 조금 오래 머물렀다. 훔쳐보던 몇몇 사람들이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있었다. 그 아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눈 뜨고 네 자리로 돌아가.”



 난 다시 아이스크림을 떠먹었다. 그 아이가 뭔가 질문하려 입을 뻐끔거리는 걸 막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 아이스크림 먹어.”



 뭔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키스를 하는 것보다 부끄러운 대화를 하게 될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와서도 우린 별로 말이 없었지만, 이제 그 아이에게 별로 불만이 없어 보였다. 


 이제 막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내가 집에 가겠다고 했더니, 데려다준단다.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지만, 지하철을 타고 가기로 했다. 이 구간의 지하철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벼서 잘 이용하지 않았었다. 


 이 아이와 바짝 붙어 서게 되었다. 생각보다 승객이 적어서 떨어지려고 마음먹으면 공간을 만들 수도 있겠는데, 그냥 가까이 섰다. 이 아이의 얼굴이 빨개지는 게 귀여웠다. 다음 정거장에서 사람들이 많이 타면서, 고의가 아니라 정말로 바짝 붙어 서게 되었다.



 “죄송해요.”


 “뭐가? 아.”



 아래서 다른 감촉이 내 배에 닿는 걸 느꼈다. 이 아이가 허릴 빼려고 했지만, 내가 이 아이의 허릴 잡았다. 놀랜 아이가 빨개진 얼굴로 나를 보기에 나도 빤히 녀석을 바라봤다. 녀석이 시선을 돌렸다. 난 뒤꿈치를 들어 이 아이의 것이 내 얇은 바지의 그 근처에 닿게 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당연히 말이 없었다. 우리 집 근처로 향하다가, 한적한 골목을 찾아 들어갔다. 


 내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이 아이가 먼저 눈을 감기에 입술을 맞췄다. 이 아이는 여전히 입술을 벌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 이 아이가 먼저 입술을 뗐다.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니 말했다. 



 “누나 가슴 만져도 돼요?”



 모든 걸 가르칠 필요는 없는 모양이다.






 계속.




댓글
  • 밴프필리아 2019/02/25 13:11

    1빠 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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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rthWind 2019/02/25 13:15

    밴프필리아//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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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Justice 2019/02/25 13:18

    “물 풍선도 맞았고요. 제 노트를 누가 찢어버리기도 했고요. 체육복에 구멍이 생겼어요. 2학년 교실에 불려가서 밟히기도 했고요.”
    아니 저 학교에 불페너가 몇 명이나 다니는거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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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Justice 2019/02/25 13:18

    불펜하이스쿨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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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rthWind 2019/02/25 13:21

    불페너는 어디에나 있을 겁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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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아킴 2019/02/25 13:25

    불페너 형님들 무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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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란제리 2019/02/25 13:34

    얼마나 이쁘면 저럴까요? 거의 모든 남자들이 저럴정도면~ 후배넘은 평생 자랑거리가 생겼지만 이후 만나는 모든 여자들이 시시해 보이겠네요
    저 정도는 아니지만 적당하게 이쁜애가 있었는데 걔도 누구를 먼저 좋아해 본 적이 없데요. 항상 남자들이 자기를 좋아했었고 고백한 여러명 중 그중 제일 나아보이는 얘랑 사귀고 깨지면 또 같은 패턴.. 자기는 누굴 먼저 사랑해 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수진이도 누군갈 사랑해 본 적은 없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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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불러용 2019/02/25 13:41

    한수진 얼굴은 김태희 급인가보네요.
    김태희가 학창시절 학원 다닐 때 선생님이 인터뷰에서 그랬죠.
    너무 예뻐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고.
    눈 마주치며 집중해서 쳐다보는데 심장이 벌렁벌렁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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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rthWind 2019/02/25 14:01

    한수진을 떠올릴 때. 전성기 이영애와 고현정의 장점을 겸손히 섞어 상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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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치갈매기 2019/02/25 14:59

    울면서 너는 아니라고 고함치는건 머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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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살 2019/02/25 16:06

    잼있네요~ ㅎㅎ 고등학교때 아주 예뻤던 동아리 후배 생각도 나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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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승가자 2019/02/26 10:22

    낙오병의 공주납치는 후속편 안나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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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잔존사념 2019/02/26 12:33

    잘 읽었습니다. 바빠서 이제 읽네요 ㅠ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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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rthWind 2019/02/26 13:23

    항상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낙오병의 공주납치는 그냥 연습이었습니다. 추천 100개 쯤 달리면 본격 연재할 계획이었으나 ㅎㅎㅎㅎ 농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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