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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에게서 톡이 왔다. 알바 잘 마치고 들어가느냐는 메시지였다. 나는 술 적당히 마시라는 톡을 보냈고, 선배가 자기 술 잘 못 마시는 거 알지 않느냐고 답장을 보내왔다. 그러니까 조금만 마시라는 톡을 보내려다 생각이 났다.
술을 잘 못 마시는 걸 내가 알았던가. 아니, 선배의 취미는 알고 있나? 집이 어딘지도 잘 모른다. 좋아하는 음식은 어떤 거였더라. 분명히 그런 종류의 대화를 나눈 기억은 있는데, 선배에 대한 그 어떤 것들도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굵지는 않지만 길다는 것만 알겠다.
성현이가 어디에서 보겠냐고 하기에 네 방으로 가겠다고 했다. 유성현이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밖에서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불편하겠다고 했다.
학교에서 마을버스로 세 정거장 거리에 성현이가 살고 있다. 걸어서도 갈 수 있다는 얘기지만, 밤이 늦어 마을버스를 탔다. 마을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편의점 옆길로 들어서면, 세탁소와 작은 술집 사이에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골목이 있다.
전신주 아래에는 쓰레기봉투가 쌓여있고, 낮은 담 위에는 누군가의 화분이 있는 골목에 제각각 다른 모양의 대문들이 이어졌다. 그 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골목이 비좁아 보이는 단풍나무가 있고, 그 오른편의 주택 옥탑 방에 유성현이 살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잠긴 적이 없을 것 같은 허름한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왼편에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2층 위에 유성현의 옥탑 방이 있다.
창살이 달린 유리창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문을 두드리거나 유성현을 부르는 대신 옥탑방의 드넓은 테라스에서 도심의 야경을 감상했다. 내가 예전에 엄마랑 같이 살던 곳보다는 괜찮아 보였다........뭐 비슷했다.
이런 수준의 거주공간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어쨌든 빌딩들의 스카이라인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점은 꽤나 좋았다. 여기도 재개발을 위한 조합이 구성되고 있다는 전단을 봤었다. 언젠가 세상의 모든 옥탑 방들이 사라지겠지.
유성현과 따로 만나지는 않았어도 유성현의 집에는 와봤다. 지금 내려다보고 있는 야경도 잘 기억하고 있다. 저 멀리 보이는 빌딩의 꼭대기에 반짝이는 불빛도, 듬성듬성 보이는 붉은 십자가들도, 주택들 사이의 골목에 스며드는 가로등불빛들도 이미 잘 알고 있다.
휴대폰이 울렸다. 유성현에게 톡이 왔다. 답장을 하는 대신 돌아서 문을 두드렸다.
“어? 민효정? 어떻게 잘 찾아왔네? 전화하지~ 내가 마중 나가려고 했는데”
“이 골목에 단풍나무는 저거 하나더라.”
“워~ 그래도 이런 골목에서 집 찾는 게 쉬운 게 아닌데~ 눈썰미 좋네.”
“이런 골목에 살았으니까.”
이 방에는 처음 들어와 보는데, 어쩐지 자주 드나들었던 것처럼 익숙했다. 유성현이 치킨을 준비해 뒀다. 가방을 대강 내려놓고 내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성현이가 냉장고문을 열며 말했다.
“맥주? 소주?”
“배부를 거 같아. 소주”
유성현이 소주잔이 없다며 컵을 가져왔다. 유리잔도 아니고 머그컵이었다. 머그컵에 소주를 콸콸 따르고는 서로 알아서 마시자고 했다. 머그컵 두 잔에 소주를 나눠 따르니까, 각자 반병씩 따르게 되었다.
소주 반병이 담긴 머그잔을 잠시 바라보다 들어 마셨다. 금방 목구멍이 긁히는 기분이 들며 소름이 돋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숨을 참고 소주 반병을 마셔버렸다. 취기가 오르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기 전에 치킨 무가 담긴 그릇을 들어 국물을 마셨다.
성현이 그런 나를 바라보며 머그잔을 내려놓기에 내가 말했다.
“너도 마셔”
“........”
유성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부의사를 보였다. 그런 유성현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유성현도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다시 마시라는 말을 하려다 그만뒀다.
일어나려다 조금 휘청거렸다. 소주 반병 정도는 문제없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한 번에 마시는 건 무리였다. 내가 문 앞에 서서 신발을 신을 때까지도 유성현이 날 잡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유성현이 날 불렀다.
“야! 민효정! 왜 그러는데!”
“너는! 넌 왜!”
유성현이 대답하지 않았다. 나가려는데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짜증이 났다. 화도 났다. 유성현이 내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진 않았다. 이를 악물고 유성현을 바라봤다.
다시 신발을 벗고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유성현도 다시 자리에 앉아 머그잔의 소주를 마셨다. 마시다 말고 한숨을 내쉰 유성현이 다시 마셔 잔을 비운 것 같다. 유성현도 나처럼 치킨 무 국물을 마시고 말했다.
“치킨 먹어”
“너나 먹어”
유성현이 tv를 틀어 채널을 넘겼다. 뮤직비디오가 나오는 채널에 멈추고는 유성현이 치킨조각을 들어 먹기 시작했다. 유성현이 먹는 걸 보니까 나도 배고픈 것 같아 치킨을 먹었다.
치킨 한 조각을 다 먹고 더 먹으려는데, 유성현이 말했다.
“나 기말고사 끝나고 군대 가”
“........”
“미리 신청은 했는데, 이렇게 빨리 영장이 나올 줄은 몰랐어. 잘됐지 뭐. 다녀와서 복학하기도 좋을 거 같아”
“너 바람피우다 차였다며”
“.......사귀긴 했는지 모르겠는데~ 뭐 오해가 있었어.”
“넌 항상 그랬지.”
유성현 잠깐 나를 보다 말고 일어나 냉장고에서 소주를 한 병 꺼내왔다. 나한테 따라주려는 걸 싫다고 했다. 유성현이 자기 잔을 채우는 걸 보며 일어났다. 다시 일어난 나를 올려다보는 유성현에게 말했다.
“할래?”
“뭐?”
“하고 싶어서 만나자고 한 거 아니야? 송민아는 이제 만나기 힘든 모양이지? 하고는 싶은데 편하게 만날 여자애가 없어서 나한테 연락한 거 아니야?”
“.......너 남자친구 있잖아”
“아~ 그게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송민아가 헤어졌을 때마다 만났어? 내가 지금 헤어지면 돼?”
대답대신 유성현이 잔을 들어 소주를 마셨다. 난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이 너무 비좁았다. 옷을 어디에 벗어둬도 물을 튀기지 않고 샤워를 하긴 어려워 보였다. 옷을 벗어 욕실 밖으로 대충 던지고 샤워를 했다.
했다. 유성현은 잘하는 거 같았다. 아침 해가 뜰 때까지 하고 또 했다.
하는 중에 유성현이 뭔가 말하긴 했는데, 별로 들리지 않았다. 내가 안전한 날이라고 했는데도 안에다 하진 않았다. 하게 될 줄 이미 알고 있었어도 막상 하는 건 달랐다.
난 유성현을 잘 안다. 잘 알고 있어서 앞으로 우리가 사귀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안다. 그러나 내 안의 유성현은 몰랐다. 유성현의 몸이 안을 긁고 유성현의 피부가 내 피부와 닿아 미끄러지며 유성현의 혀가 입천장을 스치는 느낌은 알지 못했다.
일 년이 좀 넘는 시간 동안 유성현이 달라졌다. 그날 밤에 하지 못하던 그 유성현이 아니었다. 하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좋았다. 내가 아직 가지고 있는 유성현에 대한 마음 때문이거나 내게 아직 남은 그런 감정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게 축구공을 던져주고, 편집실에서 서로의 어깨를 기대고, 함께 영화를 보다말고 투덜거리던 유성현에 대한 기억들이 더 많은 것들을 느끼게 했다. 학교에서 일부러 유성현이 지나갈 길목을 오가다 반갑게 인사하고, 그날의 일 때문에 어색해하는 유성현에게 더 환하게 웃어 보이려던 추억들이 감각에 더해졌던 모양이다.
옥탑 방이긴 해도 언덕위에 생긴 서향의 주택가에 아침은 갑자기 찾아온다. 어스름한 새벽의 중간에 갑자기 나타난 태양이 세상을 밝혔다.
엎드린 채, 유성현이 휴지를 찾아 내 등위에 쏟아낸 것들을 닦는 걸 기다렸다. 조금 전까지 어두컴컴했던 유성현의 방안이 환해져있었다. 고개를 들려다말고 다시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굉장한 피로가 몰려와 졸리지만, 잠을 잘 수 없다. 의식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이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곁에 누우며 엎드려있는 나를 안아주는 유성현의 품에 안겼다. 유성현의 턱 아래에 입 맞추고 유성현의 배를 쓰다듬었다. 천천히 쓰다듬으며 내려가던 내손가락 끝에 닿은 것들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렸다.
더 내려가 쥐고 쓰다듬으며 손아귀 안에 느껴지는 모든 감촉을 외우듯 만졌다. 내 이마에 유성현의 한숨이 쏟아지며 손 안의 것이 단단해졌다. 유성현의 남은 기운이 한자리에 모인 것 같다. 이번엔 내가 올라가 손에 쥔 걸 넣었다.
너무 환해서 창피했지만, 견딜 수 있었다.
발가벗은 채 잠들어있는 유성현의 몸 위에 이불을 덮어주고 나왔다. 온몸에 유성현의 흔적이 가득한 채로 유성현의 방에서 나왔다. 내게서 유성현의 냄새가 났다.
집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그냥 있었다. 샤워는커녕 소변이 마려운 것도 참고 바닥에 누워있었다. 유성현에게 나는 어떤 여자애였을까. 유성현이 몇 번째 겪은 여자였을까. 유성현은 지금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한참을 참았다가 소변을 보니까 어지러웠다. 앉은 채로 빈혈이 왔다. 뒤처리를 하려다 오래 만지작거렸다.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채로 일어나 샤워를 하고 나왔다.
선배에게 톡이 와 있었다.
어쩌면 졸업하기 전에 취직이 될 수도 있겠다고 했다. 비록 인턴과정을 거쳐야겠어도 준 대기업이라며 기뻐하는 메시지였다. 아침 일찍 온 톡이었다. 내가 유성현의 위에 있을 즈음에 왔었다.
휴대폰의 액정화면이 저절로 꺼질 때까지 선배에게서 온 메시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는데, 화면이 다시 켜지며 톡이 왔다. 다시 선배였다.
[아직 학교 안 왔어?]
[지금 가요]
답장을 보내고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오후에만 강의가 있는 날이긴 했어도 난 항상 아침 일찍 학교에 갔다. 조금 늦더라도 도서관에서 선배를 만나 같이 점심을 먹었다. 어느새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버스에서 졸다가 네 정거장이나 지나쳤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학교로 오다가 또 졸았다. 선배는 점심을 먹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알바 하는 곳에서 회식을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어제는 그런 말 없었잖아.”
“선배가 걱정할까봐.”
“에이~ 그래도 그런 얘기는 미리 해줘야지.”
“미안해요. 갑자기 자기들 회식하는데 나도 같이 가자고 해서요”
선배와 점심을 먹고 강의에 들어가서는 내내 잤다. 친구들이 어제 뭘 하고 놀았기에 그렇게 잠만 잤냐고 놀렸고, 짓궂은 어떤 애는 선배가 밤새 괴롭혔냐며 놀렸다. 그랬더니 또 다른 애가 말했다.
“응? 그 선배 어제 졸업한 선배들이랑 같이 있던데? 효정이 너도 거기 있었어?”
“아니. 알바 하는데서 회식이 있어서”
“오~ 이거 양다리네. 효정이 너 알바 하는데도 남자 있지?”
피곤해서 변명하기도 귀찮았다. 유성현의 친구들도 만났는데, 오늘 유성현이 학교에 오지 않았단다.
“그 자식 헤어진 게 생각보다 타격이 컸나본데?”
“뭐야~ 바람피우다 헤어진 거라며~ 그래도 타격이 있나?”
“야~ 이 모태솔로야. 바람피우다 헤어지면 양쪽이랑 모두 헤어지는 거잖아. 그러니까 타격이 두 배 아니겠냐?”
“그런 거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아는 것처럼 떠드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선배를 만나러 도서관에 갔다. 선배는 도서관에서 나를 만나자마자 가방을 싸서 나왔다. 선배가 산책이나 하자며 으슥한 곳으로 나를 데려가기에 말했다.
“선배 나 오늘 많이 피곤해요.”
“그래....... 그럼 잠깐만 어떻게 안 될까?”
“있잖아요. 선배.......”
“.......응”
“저랑 하고 싶어서 만나는 거예요?”
“아....... 미안해.”
“아뇨. 이해는 하는데요. 그래도 선배.......”
선배가 나를 안아주려는데 내가 몸을 빼며 다시 말했다.
“선배. 저 생각 많이 해봤는데요.”
“효정아. 미안해”
“아뇨. 저 만지지 마요. 당분간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은 표정의 선배에게 고개를 꾸벅여 인사했다. 선배가 다시 나를 붙잡으려다 그만두고 잘 들어가라 인사했다.
물론 마지막 인사는 아니겠지만, 이제 끝났다는 걸 선배가 알길 바랐다.
계속.
음....도입부의 갓성현 사는 동네 묘사가 너무나도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군요. 아무래도 효정이는 성현이가 옆에 있어야 편안해 지는 것 같네요 ㅎㅎㅎ 나른한 월요일 오후에 감사합니다
4Justice// 잊지 않아줘서 제가 감사합니다.
지친 월요일 1시 11분 오아시스 같은 글 감사합니다.
항상 글 잘 보고 있습니다.
기다렸습니다!
성현이 군대 가있는 동안의 얘기도 궁금해지는군요~
항상 글 감사합니다. 유성현의 군대 얘기를 어떻게 풀어내실지 궁금하네요
유성현은 잘하는거 같았다..
안돼 이럴리 없어 흐윽 ㅜ.
성현이 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ㅋ
역시 갓성현이네요
이 이야기가 이렇게 길어질 줄도 몰랐지만, 이렇게 길어진 이야기를 계속 읽어주시고 반응해 주시는 분들이 계실 줄도 몰랐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제가 이야기를 계속 할 수 있게 해주시는 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