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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사랑없는 사람들의 사랑이야기. (64)

 


  3



 하루 종일 흐르던 음악은 이미 꺼져있었다. 세면대의 수도꼭지가 잘 잠기지 않았는지, 물 떨어지는 소리가 옅게 들렸다. 밤이 깊어지면 멀리의 소리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건물 앞 큰 도로에 차들이 오고가는 소리들도 들린다. 


 세현 오빠의 숨소리도 들렸다. 


 난 돌아볼 수 없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치마를 내리고 유니폼상의를 들어 벗어버렸다. 이 작은 유니폼을 순식간에 벗어버리고 속옷차림이 되었다. 평소라면 윗도리부터 입었겠지만, 옷걸이에 걸려있던 청바지를 엉성하게 빼다가 바닥에 떨어뜨리고, 다시 주워서 조금 털어 입다가 주춤거렸다. 상의를 입으며 가슴에 걸린 셔츠를 당겨 내렸다. 


 세현 오빠가 보고 있을지 궁금해 미치겠는데, 돌아보는 대신 돌아서 창고를 나갔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미칠 지경이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어도 막상 저지르고 나니까 두려웠다. 세현 오빠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면서 겁도 나고 스스로의 정신 나간 행동이 만족스럽기도 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세현 오빠는 소파와 카운터 위에 등만 남기고 당구장의 등을 모두 껐다. 세현 오빠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터벅터벅 걸어와 내 맞은편에 앉아 말했다.



 “너 여기 있으면 나도 못 가는데?”


 “........제가 문 잠그고 갈까요?”


 “3시간. 아니다 2시간이면 첫차 다니겠다. 뭐 먹을래?”



 세현 오빠가 순댓국을 주문하고 찬장을 좀 뒤적이더니 소주를 꺼내 냉동실에 넣었다. 세현 오빠가 다시 소파에 앉아 말했다.



 “민폐네. 다음부터 너 그냥 일찍 가라”


 “아~ 그.......상욱 오빠랑 유라 언니랑 사귀어요?”


 “.......너 좋은 대학 다닌다며?”


 “.......”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세현 오빠가 tv를 켰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축구중계를 보기 시작했다. 순댓국이 금방 도착했고, 세현 오빠가 냉동실에 넣어뒀던 소주를 꺼내 잔과 함께 가져왔다. 



 “어? 계산 안 해요?”


 “나는 원래 마무리 하고 밥 먹고 가. 계산은 나중에 사장님이 해줘. 소주 마시지?”


 “아. 네.”



 소주를 한잔 마시고 순댓국을 먹었다. 몇 숟갈 먹다말고 내가 소주병을 들어 세현 오빠의 잔에 따르고 내 잔에도 따랐다. 잔을 비운 세현 오빠가 말했다.



 “지금 아마 상욱이 형이랑 유라 누나랑 같이 있겠지.”


 “둘이 사귀는 거 맞나 봐요?”


 “사귄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별로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이 시간에 둘이 같이 있을 거라면서요?”


 “둘이 같이는 있는데~ 에라. 너도 알 거 다 알잖아? 그냥 둘이 그런 사이야”


 “아~ 그런. 아아”



 다시 서로의 잔을 채워 소주를 마셨다. 세현 오빠는 순댓국을 먹으며 tv를 봤다. 떡밥을 던지면 물고기가 알아서 달려들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세상의 많은 일들은 예상과 다르게 흐른다. 예상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예언이 아니라 예상이기 때문이다.


 어느새 국밥을 비운 세현 오빠가 다시 소주잔을 채우며 말했다.



 “너도 상욱이 형 같은 사람이 좋지?”


 “예? 아니 뭐 딱히.......”


 “내가 유라 누나를 좋아했거든.,,,,,,”



 이 정도라면 세상이 예상과 다르게 흐른다고 말하기보다, 세상은 예상 따윌 거부한다고 봐야겠다. 상상도 못한 전개에 내가 말을 잃었다. 세현 오빠는 그런 내 표정을 살피며 피식 웃더니, 잔을 비우고 말했다.



 “뭐 나 같은 사람이 누굴 사귀길 했겠냐? 평소처럼 그냥 혼자 좀 좋아하다 마는 거잖아. 유라 누나도 나한테 잘해주고 그러는 게 좋고~ 그냥 그 뿐인데.......”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자기가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은지 모르겠다며 말했다. 사람들은 다들 자기가 해도 괜찮은지 모르는 말들을 한다. 



 “그날 좀 늦게까지 손님이 많아서, 정신없이 마무리하고 있었어. 상욱이 형이랑 유라 누나도 도와주고 있었거든. 내가 매장 걸레질을 끝내고 보니까, 두 사람이 없는 거야. 말도 안하고 먼저 간줄 알았거든? 그런데 둘이 화장실에서 같이 나오더라. 참나. 그래서 난 둘이 사귀는 줄 알았어. 아~ 나 몰래 사귀는 구나~ 그랬지. 상욱이 형한테 슬쩍 물어봤거든. 유라 누나랑 사귀냐고~”


 “뭐래요?”


 “내가? 걔랑? 아니? 이러면서 완전 정색하더라고~ 그래서 난 또 내가 오해했나 생각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서 둘이 창고에서 나오더라고~ 유라 누나는 얼굴 벌개져서~ 뭐 알지?”


 “그래서요?”


 “그래서요? 너 이해를 못하냐? 둘이 사귀지도 않으면서 그냥 떡이나 치는 사이라고!”


 “아~ 예.”



 세현 오빠가 조금 언성을 높였지만, 난 뭐 그러냐는 듯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잔을 들었다. 세현 오빠는 처음엔 내가 이해를 못했다는 표정이었는데, 내가 세현 오빠를 빤히 바라보며 소주를 마시니까 미간을 찌푸리며 소주를 마셨다.


 난 이미 결정을 했다. 아니, 이 당구장에 다시 발을 들일 때부터 결정을 한 것이나 다름없긴 했다. 그래도 막상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긴 어려웠다.


 세현도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이어지는 걸 지켜본 건 나와 같았다. 물론 나만큼은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긴 했어도 나를 설득하려면 필요한 양념이었다. 게다가 전에 만났던 휴가 나온 군인처럼 곧 군대를 가야 할 사람이다. 학교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다는 것도 좋은 양념이었고, 서로를 잘 모른다는 것 또한 괜찮았다.



 “서로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럴 수 있잖아요.”


 “뭐?”


 “세현 오빠는 ja위 안 해요?”


 “취했냐?”



 취한 모습을 보여줬으면 나았겠다는 생각을 뒤늦게 했다. 그럼 차라리 덜 창피했겠다. 아니, 이미 늦었다. 이미 홀라당 벗고 물속에 발을 넣은 것과 같았다. 이제와 발만 담그려 했다는 변명은 웃기지도 않을 것이다. 난 어차피 물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도 봤어요. 아까 오후에 창고에서 둘이 있더라고요.”


 “봤다고? 나오는 걸 본 게 아니라 창고에 있는 걸?”


 “아니구나. 소릴 들었어요. 창고 안에서 유라 언니가 내는 소리.......”



 세현 오빠가 자기 잔을 채워 소주를 마셨다. 아직도 이 남자는 눈앞의 나보다 유라 언니를 생각하는 모양이다. 유성현이 송민아와 같이 있던 수많은 장면들이 스쳐 지났다. 세현 오빠를 비웃어 주는 대신 말했다. 



 “꼭 사귀어야 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뭐~ 그렇겠지.”


 “전 아까 짜증나서 둘이 하는 걸 방해했어요. 일부러 상욱 오빠를 불러내고, 입구에 물 양동이도 쏟아 버리고~ 아무리 그래도 제가 있는데 그러는 게 짜증나더라고요”


 “대단하네. 그럼 지금 둘이 아주 달아 있겠네. 아까 유라 누나 표정이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된다.”


 “짜증나는데 우리도 할래요?”


 “뭐?”



 답이 없다. 배를 뒤집어 까고 꼬릴 흔드는 강아지가 되었는데도 세현 오빠는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내가 꺼낸 말에 나도 실망할 만큼 어처구니없고 창피하기도 했다. 내가 꺼낼 말이 아니었다. 


 일부러 과장되게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놀래긴~ 조금만 있으면 첫차 다니겠네요. 저 잠깐만 눈 좀 붙일게요.”



 전혀 걱정되지 않는 인간이다. 세현 오빠는 자기도 좀 자야겠다며 tv를 껐다. 당연히 잠이 오진 않았다. 세현 오빠가 뭐라도 하길 바랐지만, 세현 오빠는 뭔가 하는 대신에 코를 골기 시작했다. 저 남자에게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오길 기도 해주고 싶다. 


 물 밖으로 나왔다.


 새벽공기를 맡으니 정신이 들었다. 내가 하려던 것과 지금의 상황에 헛웃음이 나왔다. 첫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오후에 출근했더니 세현 오빠가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져 있긴 했다. 항상 무뚝뚝하던 태도도 변했다. 내게 좀 친절해지기도 했고, 말투도 전과는 달라졌다. 하지만 다시 스무고개를 시작할 생각은 없었다. 난 제 2의 유성현을 고르는 게 아니다. 휴가 나온 두 번째 군인을 찾고 있었다.


 이미 맛 집으로 인정받은 치킨 집이 근처에 있는데, 내가 닭을 튀길 필요는 없다.


 유라 언니가 쉬는 날에 상욱 오빠에게 술을 사달라고 했다. 상욱 오빠랑 모텔에 가는데 2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상욱 오빠와 하는 도중에 유라 언니랑 관계를 알고 있다고 했다. 



 “뭐야. 그럼 지금 이 상황이 뭐냐?”


 “하으~ 그러게 상관없잖아요?”


 “상관없다고? 민효정. 너 좀 쩌는데?”


 “티내지 마요. 나도 오빠랑 사귈 생각은 없다는 말이니까”



 그렇게 기뻐할 줄은 몰랐다. 남자에게 책임질 일이 없다는 걸 말해주는 일이 그토록 기쁜 일일까. 


 상욱 오빠에게는 유라 언니도 있으면서, 시도 때도 없이 졸/라댔다. 아직 여러 남자를 만나본 건 아니었지만, 상욱 오빠는 잘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수시로 조르는 건 귀찮기도 했고, 세현 오빠의 눈치도 보였다. 


 당구장 아르바이트를 그리 오래 하진 못했다. 자꾸 조르는 상욱 오빠 때문은 아니었다. 한수진 선생님이 학생주임과 함께 당구장에 왔다. 



 처음엔 한수진 선생님인 줄 몰랐다. 짙은 화장에 짧은 치마를 입은 한수진 선생님은 학교에서 전혀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특별히 노출이 심한 건 아니었어도 가슴을 반쯤 드러낸 유니폼을 입은 나보다 남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게다가 그런 한수진 선생님과 함께 있는 인간이 학생주임이었다.


 학생주임은 나를 못 알아 본 게 확실했다. 포켓볼을 치는 일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고, 그냥 짧은 치마를 입은 한수진 선생님이 당구를 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한수진 선생님은 나를 알아봤다. 학생주임이 슬쩍 한수진 선생님의 엉덩이에 손을 올렸을 때,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한수진 선생님이 내게 말을 걸거나 하진 않았다. 여전히 무표정했고, 다시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다음날 출근하지 않았다. 상욱 오빠에게 전화하는 대신 사장님께 전화해서 그만두겠다고 했다. 사장님은 전처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걱정하는 말투였지만, 난 아무런 대답 없이 잠시 기다렸다가 힘없는 목소리로 죄송하다 말하고 끊었다. 


 상욱 오빠에게 전화가 오고 톡도 왔지만 무시했다. 한수진 선생님에게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모르는 여자에게 전화가 왔다. 



 [누구세요?]


 [민효정 씨? 잠깐 시간 있어요? 제가 근처로 갈게요.]


 [저 아세요?]


 [한수진 씨를 알았었죠?]



 한수진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선생님이 받지 않았다. 대신 메시지가 왔다.



 


 


 


 


 



 무슨 얘기인지 몰라서, 한수진 선생님이 보낸 메시지를 한참이나 보고 있었다. 휴대폰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다시 메시지를 확인하고, 다시 물어볼까 고민하다 ‘장사꾼’이라는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여자가 그랬다.



 [나랑 만나서 손해 볼 것은 전혀 없어요]



 어차피 누굴 만나도 내가 손해 볼 게 있지도 않았다.






 계속.




댓글
  • 페타Genie 2019/01/03 14:55

    이런 명작에 무플이라니 오늘도 잘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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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ulersN 2019/01/03 15:12

    뜻밖의 전개군요~ 늘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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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살 2019/01/03 15:23

    또다른 이야기의 시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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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란제리 2019/01/03 16:51

    [리플수정]세현이는 순수하다. 순수하다. 멍청한게 아니다. 멍청한게 아니다. 우린 순수한거다.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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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rthWind 2019/01/03 20:16

    급하게 썼더니 어수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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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아킴 2019/01/03 20:28

    다른 전개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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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Justice 2019/01/04 07:52

    음.....민효정만 보면 너무 안타까움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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