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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글황교익 선생의 엠팍 비판에 대한 저의 소회


안녕하세요. 본의 아니게 요며칠 자꾸 좌우측 담장을 심심찮게 점령하게 되는 kia_허영택입니다. 어제 저 한 사람 때문에 황선생으로부터 불펜 전체가 악취나는 쓰레기장이라고 폄하되어, 불페너 여러분의 명예를 실추시킨 점을 사죄드립니다. 어제는 그냥 일도 있고 해서 헛웃음으로 웃고 넘겼지만, 공개적으로 황선생이 제 글에 여러 가지 의견을 표했으므로, 저도 그분의 의견에 대한 제 입장을 표명하려고 합니다.

  

  

황선생 블로그의 댓글에 몇몇분께서 제가 어제 쓴 글을 링크해서 답변을 요구하자, 황선생이 다음과 같은 답변을 달았습니다.

 

장황하게 자료를 가져다 붙였는데, 결론은 제 주장에 동의할 뿐이네요. 위 글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맥적은 적족의 음식이고, 적족은 중국 북쪽의 소수 민족이다." 그 적족이 한민족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은 그도 하지 않았네요. 제 주장을 확장해서 반복하며 제 주장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글은 사람들이 속기가 쉽지요. 여러 자료를 붙이고 장황하게 쓰면 뭔가 그럴 듯해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나 잘 쓴 글은 짧고 단순하지요. 주제에 집중할 수 있는 자료만 남기고 함축적으로 글을 써야 하지요. 글쓰기를 더 배워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의도를 가지고 글을 쓰는 버릇도 고쳐야 합니다. 자신의 무덤을 팔 뿐입니다.

[출처] "불고기라는 이름은 야끼니꾸에서 왔다"는 말을 하면 친일인가|작성자 푸디

    

 

위의 글에 대해 제 나름의 생각을 펼쳐보려고 합니다.

장황하게 자료를 붙인 것은 인정합니다. 황선생의 글에 반박하려면 제 머릿속 생각이 아니고, 검증된 학자들의 글을 옮겨야 했으므로 장황하게 설명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 글을 읽은 것인지 “맥적은 적족의 음식이고, 적족은 중국 북쪽의 소수 민족이다.”라는 엉뚱한 결론을 내리셨네요.

    

 

일단 저는 저 ‘적족’이라는 표현이 사실 썩 깔끔한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고전서CD-Rom을 돌려봤습니다.

 

먼저 번거롭지만 ‘사고전서’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사고전서는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성했던 시절인 18세기에 청조의 황제 건륭제가 자기 개인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중국 전역에 있던 모든 책을 수집하여 만든 총서를 말합니다. 이 총서를 만들기 위해 10여 년간 중국 전역의 지방관원들은 장서가들에게 책을 빌려오거나 여러 고서점과 책방에서 희귀본을 모두 구해 북경으로 보냈습니다. 안타깝게도 구해온 책들을 검토하고 필사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정부비판적인 내용이 담긴 많은 책들이 소각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은 책이 1만 종에 달합니다. 건륭제는 이 1만 종의 책에 대한 ‘해제’, 요즘말로 하자면 저자 소개와 책의 내용 요약과 판본 등을 해설한 리뷰목록집을 작성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중 소장 가치가 있는 책 3600종을 경전, 역사책, 제자백가서, 개인문집 등 4종류로 구분하여 필사한 다음 인쇄하여 완성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고(四庫), 즉 네 개의 개인서고에 나눠 보관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총서를 ‘사고전서’라고 부르는 것이죠. 3600종의 책은 권수로만 7만여 권이고요. 글자수로는 9억9천700만자에 달한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원문 글자수 4964만6667자라고 하니, 조선왕조실록보다 분량이 무려 20여 배에 달하는 방대한 양입니다. 이 총서를 ‘사고전서’라고 합니다. 이 사업에 동원된 연인원만 수천 명이었고, 걸린 시간은 약 10여 년입니다. 그래서 이 총서를 인류역사상 세계 최대의 출판사업이라고들 합니다.

    

 

이 사고전서에는 어지간한 한문 고전들이 거의 다 망라되어 있는데요. 요즘은 이 사고전서가 디지털화되어서 한문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다들 검색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디지털화되기 전에는 워낙 방대한 분량이므로 무슨 내용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는데, 지금은 검색을 할 수 있어 아주 유용하죠. 마치 우리가 손쉽게 조선왕조실록을 활용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 이 사고전서로 검색을 해봤습니다.

 

동이(東夷): 1840건 이족(夷族) : 156건

남만(南蠻): 1928건 만족(蠻族): 53건,

서융(西戎): 3326건 융족(戎族): 51건

북적(北狄): 1297건 적족(狄族): 2건, 적족(翟族): 0건

    

 

제가 제일 처음 황선생의 불고기-맥적 글을 봤을 때 가장 어색하게 느꼈던 것이 ‘적족’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나름대로 한문 관련 공부를 꾸준히 한 편인데, ‘적족’이라는 표현을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사실 현대인의 입장에서 중국고대의 민족을 구분하여 편의상 예족, 맥족, 융족, 만주족, 거란족 이렇게 부르는 것이지, 당시의 ‘族’ 개념을 현대의 민족과 동일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당시의 ‘족’은 오늘날의 민족이라기보다 일종의 군락, 취락 형태로 집단적으로 모여살던 지역집단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입니다. 17세기에 조직화된 만주족도 자기들을 ‘만주’라고 했지, ‘만주족’이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적’은 특정한 단일집단도 아니고 북방의 여러 소수민족을 총칭하는 단어인데, 거기에 ‘족’이라는 글자를 붙여서 부른 예를 거의 듣지 못했거든요. 보시다시피 사고전서의 검색 결과를 보면, 적족(狄族)은 2건뿐이고, 적족(翟族)이라는 단어는 아예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 점만 봐도 적(翟)이 특정한 단일집단, 단일민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융적(戎翟)’으로 검색하면 346건이 나오네요. 과거에는 동이, 남만, 서융, 북적 이런 식으로 많이 불렀던 것 같고, ‘족(族)’이라는 글자를 잘 붙이지 않았습니다. ‘맥족(貊族)’으로 검색하면 아예 한 건도 뜨질 않을 정도입니다.

    

 

따라서 황선생이 자꾸 ‘적족’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현대 중국어 번역본에서 ‘翟’을 그냥 무신경하게 ‘翟族’이라고 번역해 놓은 것을 한국어로 그대로 ‘적족’이라고 옮기는 바람에 황선생이 어설픈 번역본을 인용하면서 오류가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적(狄)’과 ‘적(翟)’은 확실히 중국의 진한왕조 이후에는 특정한 개별 민족이 아니라, 북방의 여러 소수민족을 총칭하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전에는 ‘적(狄)’과 ‘적(翟)’이 같은 뜻이라고 했지만, 제 느낌으로는 ‘적(翟)'자가 뉘앙스상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청대의 저명한 음운학자이자 고증학자인 손이양도 “翟者, 蠻夷閩貉戎狄之泛稱”라고 밝혀놓고 있습니다. 역시 청말의 저명한 고증학자이자 혁명투사였던 장병린(章炳麟)은 손이양을 두고 “지난 300년 동안 출생했던 학자 중 그를 능가할 사람은 없다.”라고 극찬할 정도로 천재 학자였습니다.

    

 

그런데 한문 문장 구조의 특성상, 동이, 서융, 남만, 북적 등이 명확하게 방향에 따른 구분으로 불리지는 않습니다. 한문의 어려움이 바로 이런 점에 있는데요. 이를 테면, 이(夷)는 중국 동부에 살았던 소수민족을 뜻하는 말인데, 사마천은 ‘서남이(西南夷)’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습니다. 서남이는 중국 서남부의 소수민족, 구체적으로는 감숙성 남부, 사천성 서부와 남부와 운남성 귀주성 일대의 소수민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실 중국인들은 ‘夷’라는 한 글자만으로 한족이 아닌 모든 민족을 지칭합니다. 우리도 그랬죠. 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우면서 양이(洋夷)를 몰아내자고 했었는데, 사실 중국 기준으로 양이는 서쪽의 오랑캐니 ‘융이’라고 해야 맞지 않습니까? 사전을 찾아보니, 중국인들은 ‘양이’라고는 안 불렀나 봅니다.



중국인들은 여러 오랑캐를 총칭할 때는 보통 두 글자씩 붙여서 불렀습니다. 잘 알려진 이적(夷狄)을 비롯해 융이(戎夷), 융만(戎蠻), 융적(戎狄), 융적(戎翟), 만적(蠻狄), 이만(夷蠻)이 모두 소수민족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다시 [수신기]의 기록을 인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胡床, 貊槃, 翟之器也; 羌煮、貊炙, 翟之食也。自太始以來, 中國尙之。貴人富室, 必畜其器, 吉享嘉賓, 皆以爲先。戎翟侵中國之前兆也。

    

 

그래서 어제 제가 인용한 [수신기]에서 ‘翟之器’, ‘翟之食’이라고 한 것은 어쩌면 ‘융적지기, 융적지식’의 줄임말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인용한 구절의 뒷부분에 ‘융적’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으로 봐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고전서를 검색해보니, 당나라 때 우세남(虞世南)이라는 학자가 쓴 [북당서초]에서 [수신기]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수신기]의 기록을 아래와 같이 요약했습니다.

 

羌煮戎狄之食也, 自太始以來中國尚之.

강자는 융적의 음식인데, 태시연간부터 중국사람들이 그 음식을 숭상했다.


 

우세남은 [수신기]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翟’을 ‘戎狄’으로 살짝 바꿨습니다. 따라서 翟=戎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의 수신기에서 그냥 '翟'이라고 표현하여 ‘적’이 북방의 오랑캐만 뜻하는 것으로 오인할까봐 '융적'이라고 바꾸어 기록했습니다. '융적' 역시 보편적인 소수민족의 총칭입니다.



 

사료 해석의 오류에 대해서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황선생은 또 제게 “글쓰기를 더 배워야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하셨는데요. 저도 그 부분에는 공감합니다. 언젠가는 황선생처럼 함축적이고 선언적인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수준은 공부가 훨씬 깊어저야 가능한 경지겠죠. 다만 “의도를 갖고 글을 쓰는 버릇”도 버려야 한다고 하셨네요. 저 언급을 보니, 황선생이 그간 제 글을 쭉 보셨나 봅니다. 제 글의 쿠세까지 파악하고 계시네요. 그런데 과연 의도 없는 글쓰기가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황선생이 페이스북이나 블로그에 올리는 글도 다분히 의도성이 강하게 보이던데 말이죠.


 

마지막으로 황선생이 자꾸 [수신기]라는 책의 가치를 폄하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황선생은 이렇게 추가로 댓글을 올리셨습니다.



무엇보다, 라는 책은 설화집입니다. 제목 자체가 "귀신 쫓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말로 다시 풀어 제목을 붙이면 정도 됩니다. 사료적 가치가 없습니다.

 


황선생이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인데요. 정말 저 부분은 볼 때마다 화가 납니다. 제가 황선생의 글에 분노를 느끼고 문제제기를 한 것도 그 시작은 저 문장 때문이었을 겁니다. 황선생한테 여쭙고 싶습니다. 그럼 [삼국유사]는 사료적 가치가 있습니까? 4세기에 기록된 [수신기]는 13세기의 기록인 [삼국유사]보다 무려 900년이나 앞선 기록입니다. 귀신 쫓는 이야기라고 폄하하시는데, [삼국유사]에도 황당한 얘기가 만만찮게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귀신 얘기도 수두룩하고요. 그런데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특히 고대사 연구자들은 [삼국유사]의 모든 구절을 달달 외우듯이 철저하게 살핍니다. 당시의 기록 중에 남은 것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완성된 해가 1145년입니다. [수신기]는 그 작성연대로만 봐도 굉장한 사료적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중국에서도 저자를 알 수 없는 경전과 제자백가서를 제외하면, 개인의 저작으로서 [수신기]보다 앞선 기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럼 정말로 [수신기]는 사료적 가치가 없는 책일까요?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사료 한 구절이 아쉬운 사람들입니다. 비문에 남은 대여섯 글자 갖고 수십년 간 논쟁이 벌어지는 곳입니다. 중국에서도 워낙 사료가 부족하니, 고고학 발굴 자료만 나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연구자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따라서 [수신기]의 기록은 글자 하나 구절 하나도 고대사 연구자에게는 굉장히 소중한 기록입니다. 만약에 [수신기]의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는 ‘맥적’이라는 요리 자체를 몰랐을 것입니다. 사고전서에서 ‘맥적’이라는 단어로 검색해 봤습니다. 총21건이 뜨네요. 대충 훑어보니 대부분 [수신기]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했거나, [수신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리라이팅된 내용입니다. 황선생이 그렇게 무시하는 [수신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맥적’이라는 요리가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사료적 가치가 엄청난 책 아닐까요?

    

 

제가 이번에 구입한 [수신기]의 서문에 실린 저자 간보(干寶)의 글을 한 대목 인용해 보겠습니다.

 

비록 책을 통해 옛사람의 기록을 살펴보거나 당시 떠돌던 이야기를 모을 수 있다고 해도 이는 대체로 한 사람이 직접 듣고 본 바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 어찌 사실과 같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겠는가! 위나라 삭이 나라를 잃은 일을 두고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기록이 전한다. 강태공이 주나라를 섬긴 일을 두고는 사마천이 두 가지 설을 남겼다. 이런 상황은 곳곳에 존재한다. 이로써 보건대, 듣고 본 바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무척 어렵다. 그 유래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입으로 직접 전한 말을 적거나 나라의 역사에 근거한 책조차 이와 같을진대, 하물며 천년 전의 일을 기록하고, 서로 다른 풍속을 모으며, 흩어지고 빠진 이야기에서 조각을 묶어내고, 옛사람에게서 전해진 경험을 두고 사실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거나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중에 이를 믿는 자들에 의해 이런 이야기가 역사가 되는 병폐 또한 있었다. 그러나 나라는 이런 기록을 남긴 사관에게 그 일을 그만두게 하지 않았고, 선비들도 그런 이야기를 보고 읽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중략)....이제 내가 이 책을 엮으니 만약 그 가운데 옛사람의 책 속에 있는 오류를 이어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만일 내가 수집한 최근의 일 가운데 거짓과 잘못이 있다면, 옛 선현이나 유생과 더불어 세간의 질책을 나누어 받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이야기는 신기한 일이 허황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말해준다. 수많은 책을 일일이 볼 수 없었고, 듣고 본 일 또한 모두 적을 수 없었기에 이제 그중 일부를 뽑아 거칠게나마 기록했다....(하략)....

    

 

제가 밑줄을 그은 부분은 저자의 역사학자로서의 소양을 엿볼 수 있는 대목들입니다. 사실 저 책의 저자인 간보라는 사람은 귀신 이야기를 좋아한 몽상가가 아니라, 역사학자였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역사저작으로 [진기(晉紀)]가 있습니다. 이 책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상당 부분이 정사인 [진서]에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남은 기록에 의하면 간보는 [진기]의 저술로 당시 사람들에게 훌륭한 역사가로 칭송받았다고 합니다. [수신기]의 짧은 서문에서 간보는 역사가 사마천이 같은 사안에 대해 두 가지 다른 내용의 기록을 후대에 남겼다는 점을 언급했고, 자신이 전하는 기록에 오류가 많겠지만, 그 책임을 지더라도 당시의 생활상을 후대에 전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무려 1700전의 혼란기에 저런 위대한 포부를 품었던 대문장가의 혜안에 소름이 돋을 정도입니다. 황선생은 글쟁이로서의 숭고한 삶과 바람직한 글쟁이의 자세에 대해서 유달리 여러 차례 언급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종이도 귀한 그 옛날에 저런 소중한 기록을 남긴 간보의 입장도 헤아려주셨으면 합니다.


 

황선생의 말대로 [수신기]가 그런 형편없는 책인지 펼쳐보았습니다. 첫 장이 중국의 전설 속의 인물인 신농씨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신농씨는 중국인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전설상의 인물입니다. 아마도 당시 중국의 민간에서 전하는 신화적인 인물의 이야기를 옮겨 적었을 것입니다. 간보라는 대역사학자가 저 얘기가 사실이 아님을 모르고 적었을까요?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단군신화를 기록한 것과 뭐가 다른가요? 책을 쭉 훑어보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이야기, 마술사 이야기, 비바람을 불러오거나 그치게 한 사람 이야기, 귀신과 무당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자 담겨 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얘기했네요. “이 책의 이야기는 신기한 일이 허황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말해준다.” 현대사회에도 귀신을 봤다는 사람, 영험한 무당, 죽었다 살아난 사람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옵니다. 역사학자 간보는 공식적이고 엄숙한 역사책도 저술한 능력자였지만, 이런 떠도는 이야기들도 엮어서 후대 사람들에게 당시의 생활상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자신이 전한 기록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이죠.

 

 

간보가 저술한 이 책을 중국사람들은 ‘지괴류’ 저작의 시초라고 높이 평가합니다. 지괴(志怪)는 괴상한 이야기를 기록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志’는 기록하다는 의미입니다. 중국인들은 이 지괴류 저작을 중국소설의 원형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는 타임슬립이야기, 귀신이야기, 초능력자 이야기 등 모든 소설의 원형이 이 책에 거의 다 담겨 있습니다. 이런 책이 사료적 가치가 없다고요? 몇 년 몇월 며칠에 정치인 누군가가 누구를 만나서 어떤 회담을 했고, 몇 년 몇월 며칠에 A라는 나라가 B라는 나라를 침공하여 사상자가 몇 명이 생겼고 어쩌고 그런 기록만 역사책입니까? 1970년대 드라마를 보고서 당시 사람들의 헤어스타일, 복장, 말투, 생활방식, 사상, 문화 등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제 말이 거짓이 아님을 말하겠습니다. 저 황당한 [수신기]의 기록이 이후 중국의 여러 역사책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사실 지금 간보가 지은 원본 [수신기]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은 후대의 학자들이 그 책을 인용한 다른 책의 기록에서 일일이 뽑아서 엮은 책입니다. 황선생이 오역하고 있는 이 수신기의 '맥적' 부분은 남조 시대 양대(梁代)의 심약(沈約, 441-513)이 쓴 역사책 [송서(宋書)]에서 재인용하고 있습니다. [송서]는 양나라 정부에서 이전 왕조인 남조 송나라의 역사를 공식적으로 편찬한 역사책에 인용된 내용입니다. [송서]는 중국의 24사에 포함되는 정사(正史)입니다. 정사라는 것은 황제의 명을 받아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이전 시대의 역사책을 말합니다. 심약은 양조의 신하로서 양무제의 명을 받아 이전 왕조인 송의 역사를 편찬한 겁니다. 심약이 주로 인용한 1차 자료는 당시 남아 있던 송대 황제의 조서, 당시 신하들의 상소문, 당시 학자들의 서간문 등입니다. 이런 공식 기록에 간보의 [수신기] 기록이 인용된 것입니다. 당시 정부에서 인정하는 A급 역사학자가 유용한 사료라고 인용한 책입니다. 사료적 가치가 없다는 황선생의 말씀은 사료적 가치를 몰라보는 황선생의 몰역사적 수준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황선생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맥적 이야기에서 집중해야 하는 것은 최남선이 왜 저 오랜 중국의 설화집에서 음식 하나를 을 가져와 민족적 자부심을 붙이는 작업을 하였는가 하는 이유를 밝히는 것입니다. 역사는 스토리입니다. 스토리를 만든 자의 의중을 읽어야 그 당시 민중의 삶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국 문헌에 멕적이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국 문헌에 맥적이 존재함을 근거로 민족적 자부심을 강화하는 역사서를 저술한 최남선의 마음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민족주의! 이 이야기를 풀기 위해 지금 이 블로그가 열려 있는 것입니다. 차근차근 하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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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대로 주장하라 하시면 됩니다. 그의 말에 일리가 있으면 확장되는 것이고 일리가 적으면 닫히는 것이지요. 그의 글에 일리가 없음을 제가 일일이 답힐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논의하고자 하는 음식민족주의와도 거리가 있습니다. 하여간, 더 이상 댓글은 없습니다. 이해해주세요.

 

아, 고구려.. 적족에 고구려 민족이 있다는 자료가 없습니다.

[출처] "불고기라는 이름은 야끼니꾸에서 왔다"는 말을 하면 친일인가|작성자 푸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저는 황선생의 사료 해석 오류를 지적한 것이지, 당시의 맥적이 현재 불고기의 원류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음식에 민족적 자부심을 붙이려는 생각도 없습니다. 그 당시 사람도 무언가를 먹고 살았겠지요. 그 당시에 우리 조상들이 먹던 음식을 찾는다고 해서 그게 왜 민족적 자부심까지 연결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100여 년 전에 최남선 선생이 그런 작업을 했다고 해서 지금 오늘날의 황선생이 육당을 비판할 수 있습니까? 역사는 스토리라면서요. 나라를 빼앗긴 지식인의 입장에서 당시 유행하던 민족주의에 경도되었다고 해서 그 점이 비난 받아야 합니까? 당시 세계는 민족주의에 경도된 제국주의 열강 세력의 각축장이었는데요. 

 

 

황선생은 마지막 문장까지도 제 글을 이해 못하셨네요.

 

아, 고구려.. 적족에 고구려 민족이 있다는 자료가 없습니다.

 

적족에 고구려 민족이 있다는 자료가 없다니요. 굳이 말씀드리자면 황선생이 말하는 ‘적족’에 고구려 민족은 있습니다. 황선생이 말하는 ‘적족’은 제가 말하는 당시 한족이 바라본 ‘모든 소수민족’을 뜻하고, 그렇다면 고구려도 적족에 포함됩니다. 저 명제에 굳이 자료가 필요한가요? 한문 문장 자체가 “맥적(고구려식 고기구이)은 오랑캐(소수민족)의 음식”이라고 간보가 선언하고 있는데요.

 

너무 긴 글이 되어서 또 몇몇 분께서 왜 이렇게 내용도 없는 긴 글을 썼냐고 타박할지 모르겠습니다. 길면 그냥 패스해 주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다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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