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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좋아했던 정치인 노회찬을 떠나보내며

유난히 업무가 많은 월요일, 손에 잡히지 않는 일들을 어찌 어찌 해결해가며 하루를 마감했습니다. 하루 종일 먹먹해진 마음속에 침전한 생각과 감정들을 글로 정리해보고 싶은데, 정의당원도 아니고 SNS나 블로그도 안 하는 제가 글을 쓸 곳은 여기 불펜밖에 없네요. 일기 같은 글이지만 몇 자 써보려고 합니다.

 

한국사회에서 진보정당이 안 된다는 것은 잘 압니다. 진보정당이 성공한 유럽의 역사나 사회제도를 우리와 비교해보면, 진보정당은 안 된다는 결론을 확신에 차서 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에서 누군가가 열매를 거둔다면 누군가는 거름을 대는 역할을 해야 함도 사실입니다. 그람시가 그랬던가요. “사람들은 누구나 역사의 경작자가 되고 싶어 하지, 거름이 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라고요. 역사에서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하물며 그것이 복지국가나 평등사회 같은, 한국현대사의 기본 경로와는 백만광년쯤 떨어져 있는 목표라면 더욱 그렇지요.

 

저는 2000년대 초의 진보정당 실험을 그런 ‘역사의 거름’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식이 이렇게 형성된 대학교 3학년, 자연스럽게 민주노동당의 당원이 되었습니다. ‘진보정당, 또는 그에 가장 가까운 정치세력 지지’라는 평생의 정치방침도 이 때 확립했죠. 그러니까 제게 정치란 ‘어떤 가치를 실현할 세력’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지, 누가 당선되느냐의 문제는 아니었던 겁니다. 조직된 정당이 아닌 개인 중심의 사고방식은 후진적인 정치의식이라고 지인들에게 참 많이도 강조하고 다녔죠.

 

노회찬은 그 ‘세력’ 안에서 만났던 정치인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지지하고 좋아하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세력이지, 인물이 아니다라는 제 생각을 조금이나마 바꾼 것도 노회찬이었던 듯 합니다. 노회찬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가 가진 현실감각, 또는 대중친화성 때문이었습니다. 그 무렵 진보정당은 말로는 대중정당을 지향한다면서도, 일반인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논쟁들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예컨대 진보정당은 계급정당이어야 하느냐 국민정당이어야 하느냐, 사회민주주의가 옳으냐 민주적 사회주의가 옳으냐, 뭐 이런 것들이었죠. 물론 이런 논쟁이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당의 기본에는 ‘인민의 먹고 사는 문제 해결’이 깔려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던 거죠. 그러니 한 때 호의를 보여주었던 대중과, 그것을 자신들의 이념에 대한 지지로 오해한 당은 괴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노회찬만큼은 달랐습니다. 노회찬은 당의 이념을 유권자들에게 쉽게 이해시키는 능력이 있었고, 민중의 현실에 근거해서 대안정책의 실마리를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신자유주의나 사회주의라는 말을 안 쓰면 어떤 내용도 설명하지 못했던 당의 관료들 달리, 노회찬은 그런 거 없이도 진보정당의 지향을 유권자들에게 명확히 제시했습니다. 특히 복지국가의 정의를 이렇게 설명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소고기 먹던 사람들에게 삼겹살을 먹게 하는 대신, 굶어죽는 사람들에게는 라면이라도 먹이자는 것” 노회찬하면 해학과 유머가 담긴 어록들이 유명하지만, 그는 단순히 말을 재미있게 하는 정치인은 아니었습니다. 좌파의 핵심을 집약하여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전달한, 보기 드문 진보정치 커뮤니케이터였던 것입니다. 또 민주노동당에서 거의 유일하게 생산적인 일을 하는 집단이었던 경제민주화운동본부를 지원하여, 상가임대차보호법, 주택임대차보호법, 이자제한법 등의 민생정책들을 입안한 것도 기억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물론 노회찬의 모든 것을 지지했던 것은 아닙니다. 특히 진보신당 시절, 당원들의 결정을 깨고 통합진보당에 합류한 것은 절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 때 이후로는 노회찬과 한번도 같은 당적을 갖지 않았습니다. 제게 노회찬이 ‘확고하게 지지하는 정치인’에서, 그저 ‘좋아하는 정치인’으로 미묘하게 바뀌게 된 게 그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정치인으로서 어쩔 수 없었다는 것도 지금은 뭐 이해합니다. 그래서 끝내 당원이 될 수 없었던 정의당이지만, 노회찬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선거 때마다 투표해왔구요.

 

돌이켜보면 늘 좋아하는 정치인의 첫 손에 꼽았던 노회찬이지만, 그를 위해 투표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당원으로 참여했던 2007년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경선이 유일한 경험이었네요. 노회찬도 여러 번 선거에 나갔지만, 그 때마다 지역이 저와 달랐기에 그에게 투표할 기회가 사실상 없었습니다. 그래도 진보정치를 대표하는 양반이니 언젠가 대선에 출마할 거고, 그 때 투표하면 되겠지 했는데 이제 그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네요. 2002년 인생 처음의 대선 이후 4명의 대통령 후보에게 투표해봤지만, 100%의 마음으로 찍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다른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또 어떤 때는 정책과 공약 다 마음에 안 들지만 우리 당 후보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투표했었지요. 그러면서 ‘노회찬이 출마한다면 기분 좋게, 후련하게 찍을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민주당에서도 진보적인 정치인이 집권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곧 노회찬도 유력한 후보가 되어 대선에 출마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실현될 줄 알았던 그 바람이, 영원히 바람으로만 남게 되어서 가슴이 많이 아픕니다.

 

제가 좋아했던 정치인, 노회찬의 명복을 빕니다. 다음 세상이 있다면, 역사의 거름이니 진보정치니 하는 것들과는 상관없이, 그저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정치하느라 읽고 쓰는 것을 못하셨으니 작가도 좋을 것 같고, 어릴 적 배우다 말았다던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가가 되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생에는 부디, 혼자 짊어졌던 역사의 책임은 내려놓고, 평범한 삶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진심으로 빌겠습니다.

댓글
  • 빠나나 2018/07/24 02:48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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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스테이데어 2018/07/24 02:51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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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B이상범 2018/07/24 02:51

    추천했습니다 괜시리 마음이 먹먹했는데 더먹먹해졌으니 책임지세요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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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스테이데어 2018/07/24 02:57

    [리플수정]글을 읽고 잠시 스쳐가는 생각인데...... 지금도 (정의당은 아닐지언정) 당적을 가지고 계시거나, 당원으로서 구체적으로 활동하고 계신가요? 혹시 불편하시다면, 굳이 답변 안 해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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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대승 2018/07/24 03:06

    저랑 비슷한 정치적 선택을 해왔던 분이군요.
    저는 정당을 가입할 정도는 아니지만, 저역시 노회찬이라는 정치인을 트윈스키드님처럼 바라봤고, 그래서 어제 내내 우울했습니다.
    또 누구를 이렇게 좋아할 수 있을지, 또 누구를 이렇게 떠나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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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윈스키드 2018/07/24 03:08

    유스테이데어// 리플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은 어떤 당적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노동당이 마지막이었는데, 거기서도 당원들의 의사결정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것을 보고 미련없이 당적을 정리했습니다. 또 직업적으로도 당적을 계속 유지하기가 좀 부담스러운 이유도 있었구요. 앞으로 정말 마음에 쏙 드는 정당이 나타나지 않는 한, 당적을 갖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남들이 볼 때야 뭐 별 거 아닌 일입니다만, 제게는 그것도 상처라면 상처여서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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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윈스키드 2018/07/24 03:13

    DB이상범// 추천 및 리플 감사합니다. 저도 참 먹먹한 하루입니다. 평소같으면 1시면 골아떨어지는 월요일 밤인데, 오늘은 정말 쉽게 잠들지 못할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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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스테이데어 2018/07/24 03:14

    [리플수정]트윈스키드// 아...... 어떤 의미인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상념이 스쳤던 날이라서 그런지, 문득 그 결에서 사소한 질문이 툭 떠올랐네요...... 세심하게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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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윈스키드 2018/07/24 03:15

    대대승// 저와 비슷한 선택을 해왔던 분이시라니 반갑습니다. 누구를 또 이렇게 좋아할 수 있을지, 또 누구를 이렇게 떠나보내야 할 지도 모른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저도 대대승님과 같은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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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윈스키드 2018/07/24 03:18

    유스테이데어// 아닙니다. 사실 진보정당에 우호적이지 않은 불펜에서는 혹시나 오해살까봐 하지 못하는 이야기였는데, 유스테이데어님께서 물어봐주셔서 저도 후련하게 답한 것 같습니다. 세심한 리플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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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ㅊsk 2018/07/24 03:35

    키드님, 글 기다렸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저도 따로 표현을 한 바는 없었으나 가장 좋아한 정치인이였기에 뭐라 말을 적으려고 해봤는데 몇번을 썻다 지웠다 하다가 접었습니다.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아서요. 이제서야 실감이 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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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emonseye 2018/07/24 04:52

    잘 봤습니다. 이런 소회 밝혀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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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윈스키드 2018/07/24 09:54

    ㅇㅊsk// 리플 감사합니다. 노회찬을 지지했건 안 했건 안타까운 마음들은 다들 비슷한 것 같습니다. 빈소에 가볼까 싶은데, 그 현장을 마주하기가 뭐랄까 참 용기가 나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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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윈스키드 2018/07/24 09:54

    Demonseye// 일기 같은 잡문에 칭찬의 리플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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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몰츠용수 2018/07/24 10:00

    애석하고 애석하고 또 애석합니다.
    이리 가볍게 떠나면 인되는 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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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yno 2018/07/25 12:48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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