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성 첨철제사 정발
교과서나 사극에선 준비조차 제대로 안하고 놀고먹고 있었던걸로 알려져 있는데
실상은 준비할거 다 하고다닌 인물중 한사람 큰 기록은 없지만 북방에서 동년 7월 30일 국경을 넘어 염탐하던
여진족을 활로 쏴 죽였다는 얘기도있는거 보면 나름대로 유능한 장수가 아니였나 싶음
임진왜란 발발하기전 왜관에 있던 일본인들이 급히 피신하는걸 보고 수상하게 여겨
부산 앞바다 절영도에 주둔하여 군사훈련과 사냥을 실시함
어떻게 보면 개인취미로 사냥하는걸로 보일지는 모르는데 현실적으로는 유해조수 구제및
민심 안정의 일환이였다고 함 주로 멧돼지나 호랑이같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동물 위주로 사냥했다고함
당시 사냥은 기동훈련겸으로 취급하고 있었는데 오늘날 치면 완전군장으로 고속행군한거랑 비슷한셈
드라마 징비록에서 보면 사냥끝나고 술파티 하는 장면 나오는데
하루 일과 마치고 했다면 딱히 큰 문제로 볼만한 사항은 아니였을 것으로 보임
당시 방위병력이 500~800정도로 추정되는데 반면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는 왜군 선봉대만 1만6천700명으로 기록되어 있음
10배이상 숫적 열세인 상황속에서도 불구하고 4시간동안 버틴거면 오히려 더 대단할 정도
다대포첨사 윤흥신
중종시절 을사사화로 양반 신분에서 노비 신분으로 떨어졌다가
훗날 선조에 의해 양반으로 다시 복권된 장군
노비로 살다보니 글공부를 하나도 못해서 몸을 단련해 무과에서 급제했는데
교육을 제대로 받아보질 못해서 양반 주류사회에 편입되지 못하였고, 문자해독을 못한다고
파직되는 수난을 겪음
당시 다대포 첨사로 발령났는데 하필 임진왜란이 터져버림
부산진 전투 직후 일본군 일부는 동래성으로 향했고, 일부는 다대포와 서평포로 공격해왔는데
800의 급조된 병력만으로 2만에 가까운 왜군에 맞서싸움
1차전에선 어떻게든 막아냈지만 이후 탈영병과 전사자수가 너무많아 2차전에서 점령당함
주의에선 1차전 막고나서 후퇴하고 후일을 도모하자고 했지만 윤흥신은 이를 거부했다고함
결국 자기 이복동생 윤흥제와 같이 전사했지만 여기서 놀라운점은 하루 넘게 버텼다는점임
조선에서도 사실상 기록이 없다싶이했고, 교과서에선 아에 설명조차 거의 없을 정도 수준
참고로 정조때 일본사 읽고나서 진상파악하기 시작했다고함
동래부사 송상현
정발과 다르게 원래는 문관 출신이며, 외교관 경력도 있음 한마디로 엘리트 출신
동래성에 부임오자마자 한 일은 성벽과 성문 보수였으며, 전쟁준비를 계속 해왔음
의외로 군역에 대한 반발이 없었던거 보면 인망이 두터웠지 않았나 싶음
고니시와 맞붙을때 가장 유명한 말이 있으니 전즉전의 부전즉가도와 전사이 가도난이다
전즉전의 부전즉가도는 싸우겠다면 싸울것이로되,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
전사이 가도난은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인데
오늘날로 해석하자면 이렇게 된다
고니시 : 저기 부산성 보이지? 비켜라 살려는 드릴게
송상현 : 죶↗까↘
생각외로 준비를 철저히 해왔기에 초기에는 어느정도 막아냈지만 결국 머릿수 앞에서 무너지고 패배함
위 정발 처럼 쉽게 점령당했다는 식으로 인식이 박혀있는데 진주성처럼 지형빨 받는 성도 아니고
머릿수가 있었던 것도 아니였다는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오래 버텼다고 봐야함
애시당초 왜군도 전면에서 수차례 박살나서 병력 쪼개고 양동작전으로 점령했음
일설에선 고니시가 송상현을 엄청 대우해줬다곤 하나 동래성이 격렬하게 저항했다는 이유로
동래성 주민들을 학살했기로 유명함 실제로 동래성 부근에서 수 많은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함
그리고 이 인물들은 부산을 지킨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음
무엇보다 이 3개 전투들 공통적인 부분이 있는데
흔히 알고있는 인식과 다르게 왜군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다는점
부산진전투는 조선군 527명에 왜군 18,100여명 정도
동래성 전투는 3000여명에 18000여명 정도
부산진전투는 조선군 527명에 왜군 18,100여명 정도
동래성 전투는 3000여명에 18000여명 정도
포위섬멸진 각?
원균 도망감
원균이 초반만 멘탈 잡았어도 뒤집어졌을텐데.
아니 원균이 죽고 쟤들이 살았으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