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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공무원 그만두고 여행 중인 30대의 성찰기, 슬로바키아편(1)

 



나는 철저히 계획하는 삶을 좋아했다.


계획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해 주고,


심리적 불안감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준다.


성과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직장생활은 그야말로 계획의 홍수였다.


대통령, 총리, 장관, 국회 등 주요기관 대상 업무계획,


주간, 월간, 분기별, 반기별 업무계획,


각종 정책, 사업, 행사 추진계획까지.


계획을 가지고 회의하고, 진행하고, 평가했다. 


아마 정부청사에서 만들어지는 각종 계획은


하루에도 수백 건이 넘을 것이다.



여행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행의 방식은 삶의 방식과도 닮아있기 때문이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가이드북을 보면서


꼭 가봐야 한다는 핵심 관광지들을 체크했다.


하루하루의 계획을 시간 단위로 정리한 표를 만들고


이를 충실히 따르면서 성취감을 느꼈다.









하지만 우리가 슬로바키아에서 한 달간 머물렀던 


사진 속 프레쇼프라는 작은 도시는 


관광이나 여행을 위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한 곳이었다.


어쩔 수 없이 여행 계획을 세울 때


많은 부분을 여백으로 남겨 놓아야 했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여행의 성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이제라도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블라티슬라바나,


기아차 공장이 있어서 한국인이 많이 산다는


질리나 같은 도시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프레쇼프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 덕분에 우연히 방문하게 된 많은 장소들은


우리의 여행을 오히려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내 계획 속에만 갇혀 있었다면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순간들을 감사히 겪었다.



계획이라는 것은,


사실은 내가 가진 극히 한정된 지식과 경험의 범주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


철저한 계획이 나를 더 성장시킬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내가 나를 통제하는 굴레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여전히 계획하는 것을 좀 더 좋아한다.


하지만 슬로바키아는


계획만이 정답이 아님을 알려준 고마운 곳이다.









프레쇼프는 슬로바키아에서 세 번째 규모의 도시다.


세 번째라고는 해도, 


10만 명 정도밖에 살고 있지 않은 작은 곳이다.



관광지는 더더욱 아니어서 외지인이 거의 없다.


그 흔한 중국인들도 거의 볼 수 없었다.


우리가 숙소 근처 버스 정류장에 처음 내렸을 때,


우리에게 고정된 수많은 시선들을 잊을 수가 없다.


프레쇼프와 우리의 첫 만남은 낯설고 긴장됐다.



그런 우리의 적응을 도와준 사람은 


에어비앤비 숙소 주인인 야로 아저씨였다.


집 마당에 예쁜 정원을 갖고 있는 아저씨는


여행책자에는 나오지 않는


슬로바키아의 역사, 명소, 음악, 언어를


우리에게 아낌없이 알려주셨다.



마당 흔들 그네에 아내와 함께 앉아


아저씨의 정원에서 갓 따온 민트로 우려낸 


차를 마시는 것은 즐거운 일상이었다.


찻물에 떠 있는 작은 벌레들만 잘 건져내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기농 민트차가 된다.









집주인 아저씨의 취미는 버섯 캐기였다.


아저씨의 제안으로 우리도 몇 번


소쿠리와 작은 칼을 들고 따라 나섰다.


집주인 아저씨의 강아지 아스카도 


늘 있는 일처럼 익숙하게 숲으로 향한다.



아마도 현지인들만 방문할 법한


연둣빛 울창한 숲으로 발걸음을 내딛었을 때,


우리를 보고 깜짝 놀란 커다란 사슴 한 마리가


재빨리 우리를 가로질러 뛰어 가는 모습은


사실 아직까지도 비현실적인 장면이다.



어리버리한 우리와는 달리


잠시 숲을 한 바퀴 돌고 온 아저씨는


바구니 하나 가득 버섯을 채워 오셨다.


집에 돌아와 아저씨가 바로 해주신 버섯볶음은


우리만의 슬로바키아 대표 음식이 되었다.



지금도 마트 어딘가에서 버섯만 보이면


슬로바키아와 집주인 아저씨가 생각난다.









슬로바키아의 두나예츠 강은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폴란드와의 국경에 위치해 있는데,


절반은 폴란드가, 절반은 슬로바키아가


사이좋게 나눠 갖고 있는 인상적인 강이다.


그 곳에서 탈 수 있는 전통뗏목은 꽤 유명해서


국내 언론에도 몇 번 소개된 적이 있다.



문제는 교통편이었다.


프레쇼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강까지 가는 대중교통편을 찾을 수 없었다.


슬로바키아의 관광 인프라는 열악한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손때가 덜 묻어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찾아가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난감한 것이 사실이다.



여러 방면을 알아보던 와중에


집주인 아저씨가 흔쾌히 두나예츠 강으로


함께 소풍을 가자고 제안하셨다.


우리는 너무나도 감사하게 아저씨의 차를 타고


두나예츠 강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슬로바키아의 전통뗏목 위에서 신선놀음을 했다.









프레쇼프 근교에 위치한 스피슈 성은


언덕 위에 우뚝 자리 잡고 있어서 


언뜻 보면 금방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성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성으로 올라가는 교통편을 찾았지만 허사였다.


어쩔 수 없이 재미나게 수다 중인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여쭤 보니


웃으시면서 그냥 쭉쭉 올라가라고 하신다.



무심하게 서 있는 스피슈 성을 바라보며


꽤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든다.


700년 전 헝가리제국 시대 때 지어져 


300년 전에 원인모를 불에 소실되어 버리고,


그 후 그냥 들판에 방치되어 있다가 


최근에서야 조금씩 복원된 성이 쓸쓸해 보인다.



이 성에 존재했던 권력, 물질, 사람 모두


지금은 인적 없이 푸르른 들판 속에서 고요하다.









오팔은 그저 나랑 상관없는 보석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집주인 아저씨 덕분에 프레쇼프에


오팔광산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슬로바키아는 한 때 오팔로 유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호주나 브라질 같은


신흥 오팔 산지들에 밀려서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광산이 문을 닫았다.



폐광은 했지만,


여전히 광산 근처 돌무더기들을 잘 찾아보면


어렵지 않게 오팔조각들이 섞여 있는


돌들을 골라 낼 수 있었다.


우리는 그 반짝이는 광물을 하나라도 더 찾으려고


뙤약볕 아래 오랜 시간을 쪼그려 있었다.



화려했던 세월을 뒤로 하고,


이제 이곳 오팔광산은 투어 용도로만 쓰인다.


우리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해 주고


특별히 광산의 비밀공간들도 보여줬던


청년 가이드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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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

슬로바키아편으로 찾아 뵙습니다.


슬로바키아는 잘 알려져 있는 여행지는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말 순수하고 아름다운 곳입니다.


슬로바키아 여행을 계획 중이시라면,

수도인 블라티슬라바도 좋겠지만

슬로바키아의 다른 도시들을 여행해 보시는 것도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정말 많은 힘이 되고 있습니다. ^^


며칠 후 슬로바키아 2편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댓글
  • 이우민 2018/03/13 11:05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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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뽀로로 2018/03/13 11:32

    슬로바키아라니 반갑네요ㅎㅎ브라티슬라바 질라나도 동양인 보기 힘들죠 다들 쳐다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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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력단 2018/03/13 16:36

    좋은 여행기 계속 기다립니닿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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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그리고나 2018/03/13 16:36

    오늘도 재밌게 읽고 추천 누르고 갑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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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침없이go 2018/03/13 16:55

    책 한 번 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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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iking 2018/03/13 17:06

    나중에 쓰셨던글 전부 모아서 여행기한편 출간해보시는거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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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XYZ1 2018/03/13 17:45

    와 부럽습니다. 근데 혼자댕기시는 건가요? 혼자댕기면 위험하지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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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ormstr 2018/03/13 17:50

    잘 읽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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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세살이 2018/03/13 18:25

    읽어 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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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세살이 2018/03/13 18:26

    XYZ1// 아내와 함께 다니고 있어서 무섭지 않아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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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루미나티 2018/03/13 18:56

    팬입니다~ㅎㅎㅎ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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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테존 2018/03/13 19:28

    진짜 다 필요없고 지금은 저 파란 하늘만 눈에 들어오고.. 그것만 부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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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y아빠 2018/03/13 19:56

    글, 사진...힐링 하고 갑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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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꼬꼬봉봉 2018/03/13 20:07

    업무계획이라는 글자는 읽기만 해도 빡세네요. 저도 복직하면 또 저 생활로 돌아가야 하는데 끔찍합니다. 님이 부럽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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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샤방한 곰! 2018/03/13 21:37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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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팀아델만 2018/03/14 01:24

    복직 가능한 휴직인가요, 복직 안되는 완벽한 퇴직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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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ajra 2018/03/14 06:10

    잘 봤습니다 ^^
    책으로 내 보시는 거 어떠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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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세살이 2018/03/14 06:15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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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세살이 2018/03/14 06:15

    팀아델만// 불가역적인 퇴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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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사과 2018/03/14 07:57

    이번에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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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스펙트 2018/03/14 08:17

    슬로바키아 하면, 영화 호스텔 생각만 나서...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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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격의다저스 2018/03/14 08:23

    예전에 출장으로 블라티슬라바에 두달있었는데 ㅎㅎ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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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받은메일함 2018/03/14 08:25

    도입부의 글이 제 인생관을 담은 것 같네요.
    변수를 좋아하지 않아 예측가능한 범위를 확대하는 것을 대안으로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인생이 주는 변수라는 선물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돌이켜보건데 인생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은 바로 그런 변수들이었더군요.
    여행기는 정말 잘 보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지방공무원이라 감정이입도 잘 되네요 ㅎㅎ
    꼭 끝까지 연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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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팀아델만 2018/03/14 11:55

    불가역적인 퇴직이라니, 용기가 대단하시네요ㅎㅎ 앞으로도 글 잘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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