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장에서 권도엽 전 국토해양부장관의 강연
10월 18일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사저인 이화장에서 서울차인회의 강연이 있었다.
서울차인회는 차 문화를 통해 바른 세상과 따뜻한 사회를 지향하는 문화 모임이다.
각계각층의 정재계 인사들이 모여 차를 마시며 명사의 강연을 들으며
인문학적 교양을 함양하고 교류하는 것에 취지를 두고 있다.
이화장에 들어서니 몇 채의 기와집과 잔잔한 뜰의 분위기는 고즈넉했고
역사를 견뎌온 뭔지 모를 침묵이 느껴진다.
위쪽으로 바위 언덕이 있었고 그 옆으로 초대내각의 국무회의를 했다는 조각당이 있다.
이화장은 현재 이승만 대통령의 며느리 조혜자 여사가 지키고 있다.
안채 앞에 차상이 차려져 있다.
오늘의 차는 연꽃차, 보이차, 말차, 홍삼차를 내었고,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쁜 한과가 정갈하게 담겨 나왔다.

오늘의 강연자는 권도엽 전 국토부장관으로 주제는‘지식인과 차 문화’이다.
차담회에는 우리 사회에서 당연시하는 대화의 매개인 술이 없다.
서울차담회 손수일회장은 이 술 문화를 차 문화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창한다.
강연자인 권도엽 전 장관은 차에 대한 식견은 없지만
생활 속에서 늘 차를 즐기고 있기에 이 강연을 수락했다고 한다.
술을 마실 때보다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면
대화의 내용과 토론의 수준이 높아진다며 차 예찬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차 문화가 확산되어 대한민국의 K컬처의 하나로 세계적으로 뻗어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사실 일본의 차 문화가 국제적으로 인식을 넓혀가고 있지만
차 문화의 역사와 전통은 우리나라가 훨씬 깊이가 있고 은은하다.
권도엽 전 장관은 국토교통부 전신인 국토해양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국토교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택과 교통 문제인데
오늘은 이 주택과 자동차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며 강연을 시작하였다.

통일신라 흥덕왕 시기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경주에는 17만호가 있는데 모두 기와집이었다.
땔감으로 나무를 쓰면 연기가 난다고 숯을 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잘 사는 사회였다.
고구려와 백제, 고려시대에도 기와집이 많았다.
조선 말기에 들어서면서 극소수 양반가만 기와집이었고 거의 모든 집은 초가집이었다.
조선 말기 외국인이 본 한양은 “궁궐 안에는 큰 기와집이 있고 궁궐 밖은 갈색의 바다”라고 묘사했다.
조선의 주택은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움막에 가까운 초가집이었다.
고구려가 망하고 당나라에서 천여 석의 수레를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다.
물자 운반의 목적도 있지만 고구려의 수레는 품질이 우수했다.
현대차의 품질을 세계가 인정한 것처럼 고구려의 수레는 당나라까지 알려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경순왕이 왕건에게 귀화할 때 30m 길이까지 수레 행렬이 이어졌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도 수레를 썼고 수레를 위한 전담부서도 있었다.
지금처럼 집집마다 자동차가 있듯이 일반적인 가정에서 수레를 사용했다.
조선초까지 수레를 사용했으나 이후 수레는 거의 사라졌다.
50~60년대까지도 수레보다는 지게를 주로 사용했다.
수레를 사용하려면 도로 정비를 해야 하는데
조선시대는 외적이 쳐들어오기 쉽다는 이유로 길을 넓히지 못하게 했다.
조선은 백성의 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성리학에 몰두했다.
청나라에 다녀온 북학파 학자들이 수레를 쓰자고 건의했으나 정조는 수용하지 않았다.
영조 정조가 탁월한 왕이라고 우리들은 역사 시간에 배웠지만
조선의 왕들은 천민과 귀족이 채색도자기를 같이 쓰면 귀천의 질서가 무너진다고 여겨
채색 도자기도 만들지 못하게 했다.
우리 도공들이 일본에 많이 붙잡혀 갔으나 억류가 아니었음에도 우리나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일본은 장인 대우를 해주는데 우리나라는 대를 이어 천민이었다.
전쟁을 겪고 어려운 상황에서 ‘아는 것이 힘이다’의 기치로
정부는 교육 장려 정책을 펼쳤고 대한민국은 고도성장했다.
1948년 문맹률은 78%였으나 6.25를 겪은 후 1958년의 문맹률은 22%로 떨어졌다.
교과서에 보면 노동자 농민들이 피땀 흘려 고도성장을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옛날에도 같은 DNA를 가진 사람들인데 그 때는 왜 피땀을 흘리지 않았겠는가?
이것은 시스템의 문제다.
열심히 일하면 내게 돌아오는 것이 있다는 여건, 즉 시스템이 있어야 가능하다.
우리나라는 자기들끼리 전쟁을 많이 했다.
고구려가 한때 신라를 도와주고 식민지배 비슷한 경우도 있었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를 멸망시켰음에도
정작 고구려는 연개소문 아들 간의 내분으로 망했다.
고려는 실용적 외교를 했다.
원과의 전쟁 중에 타이밍을 보다가 쿠빌라이에게 가서 항복했다.
막강했던 고구려 장수왕을 기억하던 쿠빌라이는
대단한 나라의 항복을 받고 용기백배해서 원을 통일할 수 있었다.
고려의 왕은 쿠빌라이 딸과 결혼하여 부마국이 되었고
원제국의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하는 멤버로 참여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도 자주정신이 강했다.
기회만 있으면 황제 칭호와 독립적인 연호를 쓰려고 했다.
반면 조선의 국시는 사대였다.
세종은 영락제가 공녀를 요구했을 때 신하들이 대충 보내자고 하면
그럴 수 없다며 좋은 사람들을 차출해서 보냈다.
조선시대는 30~40%가 노비였으며 여성은 사람 대접을 하지 않았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계층이 절반이 넘는 사회가 무슨 역동성이 있겠는가?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에는 외국인의 왕래가 많았다.
개성의 벽란도에는 외국인이 드글드글했다고 한다.
반면 조선은 쇄국을 했다.
송시열은 화양동에 만동묘를 세우고 명나라를 숭상했다.
숙종은 송시열을 따라 궁궐에 대보단을 몰래 만들어 명을 기렸다.
명을 기리는 걸 청나라가 알면 난리가 날 것이기에 몰래 숨겨놓고 숭상했다.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 아닌가?
일본은 1545년에 조총이 들어왔고 조선은 1589년에 대마도를 통해서 들어왔다.
조총을 명나라에서 알면 좋을 것 없다며 창고에 박아놓고 만들지 않았고
조선은 일본군에게 박살이 났다.
우리의 화폐에 조선시대 인물이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인물들이 그렇게 훌륭할까?
노비를 자식에게 많이 물려주려고 법을 바꾸는 과거의 정치인을 화폐에 그려놓으면
그걸 늘 보는 현대의 사람들의 정신이 문제된다.
대한민국은 광복 80주년이 되었다.
기적을 만든 사람, 기초를 만든 사람, 농지개혁, 교육혁명, 과학혁명,
혜안을 가지고 리소스를 위해 미래를 위해 혼신을 다해 헌신한 사람,
이런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안드레이 체르네츠키 주한 벨라루스 대사 내외분

우리나라가 지속적인 비약과 개혁을 해나가려면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의 주제를 가지고
늘 고민하는 진정 수준 높은 차인회가 되길 바란다.
취재 김성화 편집주간
(1면 상)

(8면 상)

(8면 하)

1등 ~ ~ ~
청산님. 오랜만입니다. 반가워요~~~
캄사~ 캄사~~!
술을 못하는 한사람으로서 술 대신 차 좋습니다!
동지를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도 술을 못합니다.
술을 무슨 맛으로 먹는지 당최 이해불가입니다. ㅎㅎㅎ
맥주는 소오줌 같아서 싫고, 소주는 역해서 싫고요.
향이 좋은 비싼 양주 스트레이트 한 잔 정도는 천천히 나눠 마시는 건 가능합니다.
다함께 차차차~~!!
저도 차를 즐깁니다. ㅎ ^^
차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바쁘시겠지만, 좋은 글과 사진,,, 자주 보여주세요^^
소싯적에 양주 스트레이트로 즐기다가,,, 지금은 속이 아파 못 마시는 1人입니다.
아주 조금씩 음미하며 마시는 편입니다.
술을 그렇게 자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딸애가 술을 즐기는 편이라 딸애 오면 양주 꺼냅니다. ㅎㅎㅎ
아. 네.
글 올리는 것도 일종의 습관인 것 같습니다.
사실 글 올리는 시간 내는 게 어려운 건 아닌데 멀어지니 안하게 되네요.
다시 글 올리기 습관을 만들어 볼게요~
저의 글 기다려주신다니 어깨가 으쓱 올라갔습니다. 기분 업~!!!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