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지도자든 공과가 있습니다만
과를 침소봉대한다고 해서 공이 가려질 순 없습니다.
이승만의 과는 그 성격이 대부분 나무에 비유할 수 있는 것들이라면
업적은 숲에 비유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군이라 평가하는 세종대왕도
한편으로는 노비종모법을 확립시켜 이후 수백년 동안 국민의 대다수를 노비로 전락시켜
양반들의 착취와 압제에 시달리게 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런 세종대왕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이승만이 뭘 잘못했는지는 배웠지만
뭘 잘했는지를 배운 적이 없는 분들을 위해 이 글을 씁니다.
긴 글이지만 평소 이승만에 대해 반감만 가졌던 분들도 차분하게 한 번 읽어보셨음 합니다.
물론 온 세계가 공산주의 광풍에 휩쓸리고 있던 상황에서
반도 남쪽이나마 공산화로부터 지켜내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로 나라를 세운 것이야말로 가장 큰 업적이죠.
그런데 그러한 체제가 꽃피우기 위해선 필수적인 조건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토지의 소유와 배분에 관한 문제입니다.
많은 분들은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실감하지 못하실 겁니다.
만일 이승만 때 토지개혁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박정희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산업화에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노비제도의 법적 폐지는 1894년 갑오개혁때 이루어져서
그 이후 법적으론 노비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현실에선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너 이제부터 노비하기 싫으면 내 집에서 나가" 라고 하면
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가면 굶어 죽으니까요.
대부분의 토지가 양반지주들 것이기에 농사를 붙여 먹을 땅이 없기 때문인데
그러니 여전히 노비로 살거나 소작농으로 사는 방법외엔 없었습니다.
따라서 현실에선 노비와 같은 삶과 그에 따른 착취는 계속되었다는 얘기죠.
1947년 조사에서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는 자작농의 비율이 16%에 불과했습니다.
1년 수확량의 50~70%를 지주에게 소작료로 지불하였죠.
뿐만 아니라 일제가 북한은 공업지역, 남한은 농업지역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분단으로 전력, 비료 공급까지 끊기는 최악의 상황이었죠.
이런 상황에서 정부를 수립하면 토지개혁을 하겠다고 공언한 이승만은 제헌헌법 제 86조에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 라고 못을 박습니다.
1948년 12월 4일 이승만의 ‘토지개혁문제’라는 제목의 라디오 연설을 한 번 보시죠.
"원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적에 양반과 상놈을 구별하거나
부자와 빈민을 인(印)쳐서 낸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동등으로 천연적 복리를 누리게 한 것인데,
그중에서 지혜도 있고 능력도 있는 사람들이 모든 재원을 욕심껏 점령하여 사유물을 만들어
자자손손이 유전해서 필경은 몇몇 사람의 소유물로 인정을 받게 된 고로,
인군 된 이는 그 나라가 다 자기 사유물이라 하였으며
세가(勢家)와 부자들은 광전옥토(廣田沃土)를 다 자기들의 물건으로 만들었으므로,
대다수 민중은 남의 세상에 부쳐서 남을 위하여 사는 것으로 알게 되었나니,
그 결과를 보면 실상 그 나라 주인 되는 대중인민은 거의 소유권을 다 잃어버리고
몇몇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 복리를 독점하게 된 것입니다.
이 중에서 몇천 년을 지내오고 보니 이것이 자연 법이 되고 습관이 되어서
천지에 떳떳한 이치로 알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대대로 부자요 양반은 대대로 양반으로 지냈으니,
이와 같이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일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장하는 민주정체의 주의는 반상(班常)이라 귀천이라 하는 등분이 다 없고
모든 인민이 평등 자유로 천연한 복리를 다 같이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 주장을 세우기 위하여 그 근본적 병통을 먼저 교정하여야만
모든 폐단이 차서로 바로잡힐 것이므로,
토지개혁법이 유일한 근본적 해결책이라는 것입니다.”
당시로선 과히 혁명적인 시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농지개혁의 방식과 내용을 놓고
농림부안, 기획처안(정부안), 산업위원회안(국회안)의 세 가지 안이 마련되고 많은 논의를 한 결과,
세 안을 절충한 내용인 농지분배대금은 1년 수확량의 150%를 5년 분할로 상환하면 되는 것으로 확정됩니다.
이는 농민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만큼 지주들의 반발이 심했습니다.
지주출신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한국민주당은 심의조차 거부하며 시간 지연작전 펼쳤는데,
지주계급의 핵심인 인촌 김성수가
대승적인 차원에서 한민당이 찬성을 해야 대한민국이 근대화로 나갈 수 있다고
본인이 앞장서서 토지를 내어놓으며 설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승만은 서둘러서 대통령 명령으로
시행령이 만들어지기도 전인 1950년 4월 15일에 전격 분배를 하게 됩니다.
즉, 6.25 남침 직전에 농민들이 내 땅을 소유할 수 있게 된 거죠.
그렇게 농지개혁은 성공하게 되고 그 결과,
농민이 내 땅을 소유하게 됨으로써
농민들이 전쟁 와중에서도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걸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됩니다.
농지개혁의 성공으로 지주제가 사라지고 전 경작지의 95.7%가 자작지로 변했고
소작농들은 모두 자작농이 되어 실질적인 자유인이 됩니다.
신분제도의 실질적인 종말과 사유재산의 기초가 마련된 대한민국이 출범하게 된 거죠.
이것이야말로 실질적인 한국판 노예해방이자 봉건제의 진정한 종말입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농지개혁의 성공사례입니다.
중앙일보가 2004년 8월 당시 잘 나가던 브라질 룰라 대통령과 인터뷰를 했는데
“브라질처럼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에 어째서 5,000만 명이 넘는 절대빈곤층이 존재하는 것입니까?” 라고 물었더니
“한국은 과거 50년대에 농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했고, 아직도 그것이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라고 룰라가 대답했다고 합니다.
https://cohabe.com/sisa/508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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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줄 요약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약점을 부각시키거나 해석을 달리하여 선동하는 부분도 있고
그리하여 비판적인 부분을 계속 강조하는거임.
이글 읽어보니 이승만 빨갱이가 확실하네
중국공산당 초기 민심을 얻기위해 내건 토지무상분배 슬로건을 그대로 따라했구만 ㅋㅋㅋ
저기 무상분배했다고 어디 적혀 있어요?
소작농에게 유리하게 법을 만드니 지주들이 땅을
어느 정도만 가지고 판거겠지
중국공산당을 따라한 게 아니라
종전 후 미국은 토지개혁이야말로 공산주의를 막는 첩경이라고 생각한 라데진스키의 주도하에
미국의 점령지들에서 토지개혁을 추진했습니다.
물론 한국과 대만, 일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아시아지역에선 성공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이승만이 기득권을 옹호한 수구세력인 것처럼 오해하지만
당시 봉건적 사회에선 급진적이라 할 만큼 개혁주의자였죠.
인용한 토지개혁 연설을 봐도 세상을 한 번 리셋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인식을 보이고 있죠.
옵알단이 새벽에 설친다더니..
from SLRoid
내용이나 읽어보시고 내용에대해 반론을 달던지 하세요.
농지개혁은 이승만정부의 공이라기 보다는 제헌국회의 공일텐데요.
국회소속의 산업위원회 안은 가장 농민에게 불리한 안이었습니다.
대부분이 지주였던 국회의원들이 좋아할 수가 없는 게 농지개혁이죠.
그냥 X발놈이지 업적은
이 글 당신이 시대 당시 과거에 존재햇던건 아니지???
어디서 존재 하는 과거 자료 가지고 당신의 사상이 예측에서 확신으로 변한거라면 존내 이기주의인데 ㅋㅋ
http://blog.daum.net/kor0301/389 뭐 이글 나도 어디서 퍼온거라 사실인지 모르지만
제발 글싸지를때 그랬다 이랬다 단정짓지좀 마쇼
글 보면 그때 태어나서 그 일들 다 겪고 실제로 본 사람처럼 말하네
진짜 이런게 이런게 선동질인데
이런건 신고 처먹어야해
이승만 잘했죠. 자본주의를 이땅에 세우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했죠
ㅎㅎㅎ
애쓰네요
내가 읽은 내용은 그 토지를 분배해서 10년 분활 상환으로
팔아 먹은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정작 중요한건 다 빼먹고 쓴글이네요?
결과적으로 이승만 ㄱ ㅅ ㄲ 입니다.
이승만이 씹쓰레기란 글을 왤케 길게 써요
이주장은 뉴데일리의 입장임을 밝힙니다
한편 북한의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라고 주장하지만
강제로 빼앗은 토지를 무상으로 나눠준 게 아니라
매매, 소작, 저당이 불가한 토지이용권만 주고
고율의 현물세를 공산당에 소작료로 납부하게 함으로써
실상은 토지의 주인이 지주에서 국가로 바뀐 것에 불과한 것이고
토지에 사람을 묶어버리는 현대판 농노제에 다름없게 된 것입니다.
그 마저도 전쟁 후 집단농장으로 전환하여
이후 90년대 고난의 행군으로 수백만이 굶어죽는 결과를 가져왔죠.
공짜로 준거 아닌데 그 이야기는 왜 쏙 뺐지??????????????????
○1945년경 전체 경작면적의 63%가 소작지.
○미군정의 군정법령 제2호(1945.9.25)
●국공유 재산, 일본인의 재산을 접수, 관리하고 지방인민위원회가 일본인 소유지와 동양척식주식
회사의 토지등을 장악하는 것을 방지
○미군정의 군정법령 제9호(1945.10.5) - 최고소작료 결정의 건
●소작료가 총 수확물의 3분의 1을 초과할 수 없게 함.
●현존 소작권의 유효기간에 대해 지주의 일방적인 소작계약 해지 금지
●3분의 1을 초과하는 소작료 계약은 불법으로 규정
○신한공사 설립(1946.2)
●동양척식회사가 소유했던 재산과 일본의 법인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설립(미군정청 소유로 귀속)
●소작료를 31제로 바꿈(수확물의 3분의 2를 소작농이 차지)
●경작지 27여 정보. 택지 산림 5만여 정보 관리
○1945년 말 전국 농가중 자작농가는 13.8%, 자소작농가는 34.6%, 소작농가는 48.9%
○토지개혁법안 본회의 상정: 1947.12.23
●한민당 의원들의 출석 거부로 회의 자체가 구성되지 못함.
○남조선 과도정부법령 173호(1948.3.10)
●신한공사 해체, 중앙토지행정처 설치(1948.3.22)
○중앙토지행정처의 토지 처리(일본인이 소유했던 토지만 대상)
●소작지 또는 소유지가 2정보 이하인 경우를 대상. 매각되는 토지의 소작인에게 우선권을 줌
●농지의 대가는 당해 토지의 주생산물 연간 생산고의 3배. 지불은 20%씩 15년간 연부로 현물 납입
●분배된 농지의 매매, 임대차, 저당권설정 등은 일정기간 금지
●미군정에 의한 처리는 논과 밭에 한정.
●이승만 정권이 성립되기까지 약 85%가 처리. 대부분 원래의 소작농민에게 매각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안(1949.2.5)
●소작지와 3정보 이상의 자작지 등을 정부가 매수. 소작인, 농업노동자, 영농능력이 있는 선열
유가족, 해외로부터 귀환한 동포 순으로 3정보 이내의 범위에서 유상분배
●농지의 매수가격은 연평균 생산량의 2배. 정부가 3년 거치 10년 균등으로 지주에게 보상.
●농지를 배분받은 농민은 연평균 생산량의 2배인 지가를 10년간 균등 분할 상환.
○통과된 농지개혁법(1949.4.28)
●내용은 대동소이
●농지의 매수가격은 연평균 생산량의 1.5배.
●농지를 배분받은 농민의 상환약은 연평균 생산량의 1.25배. 상환기간은 5년
●정부의 거부, 국회의 재거부. 그대로 공포(1949.6.21)
●지주에 대한 보상액과 농민의 상환액을 1.5배로 하는 개정법 공포(1950.3.25)
●1945년 5월 토지분배예정통고서 발부. 6.25전 대부분 분배
○1945년 소작지 면적은 144만 7천여 정보. 농지개혁으로 분배된 면적은 55만 정보
●농지개혁법이 실시되기 이전 개별적으로 매매했기 때문.
○6.25 전쟁 중 재정난에 빠진 정부는 '임시토지수득세법'을 실시
●수득세+상환액(현물): 수확량의 39%
●전쟁기간 동안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오히려 농민들은 큰 부담을 짊
○미 공법 480호에 의거 미국의 잉여 농산물 대량 국내 유입(1956년)
●농산물가격 지속 하락. 농민의 구매력 하락
●궁핍해진 농민들은 고율(1960년대 고리채 이자율 연 60%)의 고리채를 빌림
●빚을 못 갚은 농민들은 대부분 옛 지주에게 재판매
[참고한 책]
강만길 『고쳐 쓴 한국 현대사』390-398쪽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39-43쪽
박세길 『미래를 여는 한국인史 - 경제편』 16-17쪽
[출처] 미군정과 이승만정부의 농지(토지)개혁 간단 정리|작성자 지킴이
본문은 읽고 댓글 다시는 건가요?
"1년 수확량의 150%를 5년 분할로 상환하면 되는 것으로 확정됩니다."
이게 공짜로 준 걸로 읽히십니까?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유상몰수, 유상분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겁니다.
베트남 패망의 가장 큰 원인은
전국민의 80~90%에 이르는 농민인 소작농이었는데
10%밖에 안되는 가톨릭 계층이 초대 응오딘지엠 대통령의 농지개혁을 결사적으로 막았기 때문에
농민들이 공산주의에 동조하게 된 것입니다.
정책적 성공이 있다고 해서 좋은사람 되는거 아닙니다
역사야 후대에 제편성 되겠지만 불과 90년대 까지는
존경받는 역사에 있으셨겠죠(그땐 불안한 민신안정과 먹고사는문제가 주력이겠지만)지금은 그런시대를 거쳐 옳고 그른 것을 좀더 관찰하는 세대입니다.여튼 지금 기준으로 보면 공보다 실이 많고 사람도 많이 죽게한 사람이고
나쁜사람입니다.끝
살인마가 사람죽이고 지나가는 거지에게 만원 준다고 착한사람 되는거 아님!
과거의 사람을 현재의 시각에서 재단하는것은 나중에 태어난자의 오만이다. - 위르겐 하버마스
글쓴 사람에게 왜 반말에 욕을 하죠? 그렇게 반응해야 이승만이 ㅅㅂ늠 되나요? 민주주의 사회에는 본디 다양한 의견이 있는겁니다. 글쓴 사람이 메너있게 말하면, 그에 맞게 반론을 하면 되는겁니다.
이글은 마치 히틀러도 사실 애국자였다. 라는 그런글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