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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류 갑.jpg

띠용?!
댓글
  • 개념탑재해라 2018/01/27 22:34

    실험실 빌려줘서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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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레미스 2018/01/27 22:39

    ㅋㅋㅋㅋ실험실 빌려줘서 상타다니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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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슨닉무슨닉 2018/01/27 22:56

    과학발전엔 후원가의 역할도 중요한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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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愛Loveyou 2018/01/27 22:57

    일명 프로빌림러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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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명한 2018/01/27 23:04

    역시 갓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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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싼타스틱4 2018/01/27 23:58

    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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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유좋아 2018/01/28 01:28

    이 정도면 조수도 끼워줘야하는거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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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빨강뷍기 2018/01/28 04:54

    오바마랑 누가더 쉽게 득템 한걸까요?
    난 오바마. 걍 평화에 기여해 달라고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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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업치료학과 2018/01/28 08:40

    됐됬됐됬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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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회인생 2018/01/28 09:06

    그 실험실 안빌려줬으면 인슐린 정제가 불가했으므로 받는게 맞다고보이네요. 저런것이 선례가 되어야 과학발전을 위해 후원이 활성화될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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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gdha 2018/01/28 11:50

    레더릭 그랜트 밴팅은 캐나다의 가장 재표적인 의학자이자 의사. 캐나다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며 2004년 캐나다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역대 가장 위대한 캐나다 인물은 누구인가?" 설문 조사에서 4위에 오름.
    인슐린을 발견한 공로로 존 제임스 리카드 매클라우드와 함께 1923년 노벨 의학상 수상. 노벨상을 받을 때 나이가 32세였는데, 이건 의학 부분 최연소 수상 기록이며 이 기록은 아직도 때지지 않고 있음. 노벨상 수상시 자신의 조수이자 동료인 찰스 베스트가 수상자 명단에 없자 수상을 거부하기도 했음. 결국 받은 상금의 절반을 그에게 나누어 줌.
    생전에 인슐린을 약품으로 개발해 특허를 신청했으면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으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다는 것은 모든 의학 발전을 인류가 무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며 거부 (만약 이걸 특허매겼으면 수많은 당뇨환자가 지금 맞고 있는 인슐린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을 것임) 특허를 신청하지는 않았으나 인슐린 발견을 공로로 많은 상금과 작위까지 받아서 편안한 생활이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차세계대전에 지원, 그러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함. 비행기 잔해는 추락지점에 그대로 두어 그를 기념하고 있으며, WHO는 그의 생일인 11월 14일을 '세계 당노병의 날'로 지정
    그리고 이 글에 보면 매클라우드가 연구실만 빌려주고 노벨상 같이 탄 양아치 같이 나오는데 매클라우드도 기여한 사실이 분명히 있음.
    원래 밴팅은 친한 친구인 죠가 당뇨병으로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당뇨병 치료제를 개발하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의 생화학 연구실에서 밀러 교수 밑에서 조교로 인슐린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이게 심상치 않은 발견이라고 생각되자 밀러 교수가 소개를 해 줘서 당시 탄수화물 신진대사의 권위자였던 매클라우드 교수의 연구소를 찾게 됨.
    근데 여기서 이야기가 갈리는데... 매클라우드가 처음부터 밴팅의 연구를 지원했다는 설과, 처음에는 등한시하다가 나중에야 지원했다는 설로 나뉨.
    1. 매클라우드가 처음부터 밴팅의 연구를 지원했다는 설 :
    매클라우드는 밴팅의 설명을 듣고 이 연구의 중요성을 알아채고 "5개월 정도 연에 집중할 생각이 있으면 다시 연락하라" 라고 말함. 결국 밴팅은 토론토의 매클라우드 교수의 연구실로 옮기게 되고, 매클라우드 교수는 밴팅에게 실험실, 실험장비는 물론 당뇨병에 걸린 개를 실험동물로 제공해 주고, 이 개를 수술하는 법도 가르쳐 줬음. 또한 윗 글에서 언급한 찰스 베스트를 조수로 붙여 준 것도 매클라우드 교수였음. 베스트는 혈당 및 요당 측정에 경험이 있어서 밴팅의 연구에 안성맞춤이었음. 결국 밴팅과 매클라우드는 91마리의 개를 희생시키고 92번째의 개에서 인슐린 추출에 성공함.
    2. 매클라우드가 처음에는 밴팅의 연구를 지원 안해줬다는 설
    매클라우드는 처음 밴팅의 말을 듣고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음. 바로 직전에 자신이 쓴 책에 '췌장으로부터 당대사와 관계되는 호르몬을 추출하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라고 썼는데 "되는데요?" 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매클라우드는 밴팅의 주장을 시골뜨기 의사의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치부했으나 밴팅이 계속 연구실을 쓰게 해 달라고 조르자 자신의 휴가기간동안만, 임상용 개 10마리만 사용할 것으로 조건으로 쓰라고 했다고 함. 조수인 찰스 베스트도 '제비뽑기'로 뽑혀서 도와주게 되었다고 함.
    그러나 밴팅과 베스트의 연구는 8주를 넘었으나 성과를 내지 못함. 다행히 방학중이라 연구실이 한가해서 둘의 연구는 계속될 수 있었고, 결국 인슐린의 추출에 성공함. 휴가를 갔다 온 매클라우드는 처음에는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으나, 결국 둘의 연구를 인정하고 그때부터 연구실의 총력을 동원해서 이들의 연구를 지원했음.
    이런 두가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둘 중 어느게 사실인지는 모름. 아마 늘 그렇듯 사실과 거짓은 혼재되어 있으니 둘 다 사실에 입각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함. 물론 약간의 과장과 생략이 가미되어 있지만... 하여간 당시 밴팅은 외과의사에서 임상의가 된 지 얼마 안되어서 의학 연구분야에서의 경험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고, 매클라우드는 밴팅의 연구주제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연구 초기의 밴팅을 도와 줄 수 있는 기초자료와 연구시설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의 둘의 만남은 큰 시너지 효과를 갖게 되었음.
    이후에 밴팅과 베스트가 발견한 물질에 "인슐린"이라는 이름을 붙이자고 한 것도 매클라우드였고(이건 사실 샤플레리 샤퍼가 그 이전에 명명한 이름을 조금만 바꿔서 명명한 것이긴 함.), 당시 인슐린의 발견에 대한 논문 초록을 쓴 것도 밴팅의 요청을 받은 매클라우드였음.
    무엇보다 매클라우드는 당시 캐나다에서 손꼽히는 생리화학자였으며 당뇨병의 권위자였음. 그의 연구실에서 인슐린의 발견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규모의 추출과 빠른 임상시험이 이루어졌으며, 인슐린의 발견 이후 곧바로 온타리온 주립 밴팅-베스트 연구소가 설립된 것도 매클라우드의 권위에 힘입은 바가 큼. 무엇보다 '인슐린은 경구투입으로는 효과가 없을 것이다. 주사를 통해서만 효과가 있을 것이다.' 라는 힌트를 준 것도 매클라우드였음.(인슐린은 단백질 복합체로 먹으면 소화되어서 아~무 소용 없음)
    이후 추출한 인슐린을 14세 소년 톰슨에게 투여하는 임상실험을 하는 단계에 왔는데, 이게 효과는 분명히 있는데 주사를 놓은 곳에 계속 종기가 생겨서 더이상 주사를 놓을 수가 없는 문제가 발생함. 그래서 매클라우드는 추출물이 완전히 정제되지 않았다라고 판단, 자신의 연구실 소속이던 생화학자인 콜립에게 추출물을 정제해 달라고 요청함.
    결국 콜립이 인슐린을 순수하게 분리해 내는데 성공함. 순수하게 추출한 인슐린은 더이상 부작용이 없었으며, 순수한 인슐린을 맞은 톰슨은 병세가 급격히 호전되고, 이후 이 효과가 알려지자 이들이 있던 토론토 대학병원에 당뇨병 환자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고 그 환자들 중에는 영국 왕 조지 5세와 밴팅이 당뇨병 연구에 매진하는 원인을 제공한 그의 친구 죠도 있었음.
    그러나 마지막으로 1923년 노벨상 위원회가 '논문에 이름이 올라간' 밴팅과 매클라우드에게 노벨의학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는데, 밴팅은 "내 옆에서 내 분신과 같이 같이 연구한 베스트가 상을 못받는게 말이 되냐?" 며 반발하였고 자신이 받은 노벨상 상금의 절반을 베스트에게 주며 "그가 진짜 인슐린 발견자다"라며 공언함. 이 과정에서 매클라우드와도 사이가 나빠졌음.매클라우드는 반대로 내 연구실에서 내가 가르쳐 가면서 내 지원 다 받아가면서 연구에 성공했는데 왜 내가 노벨상 받을 자격이 없냐라는 입장이었음. 또한 "인슐린을 순수하게 정제해서 사람에게 투여할 수 있게 한 콜립도 자격이 있다." 라며 콜립에게도 자신의 상금 50%를 나눠줬음. 참고로 밴팅과 매클라우드 모두 노벨상 수상식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음.
    뭐 하여간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를 따지기 좀 애매하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조수닝 베스트가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윗 글에 있듯 매클라우드가 노벨상을 날로 먹은 것은 절대 아니고, 매클라우드가 없었다면 밴팅의 연구는 성공할 수 없었거나, 아니면 성공하더라도 훨씬 그 시기가 늦춰졌을테니까요. 결과적으로는 그냥 노벨상위원회가 밴팅, 베스트, 맥클라우드, 콜린 네명 다 줬으면 되지 않았으려나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
    ps) 비록 베스트는 노벨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인슐린을 만든 사람은 밴팅과 베스트로 알려져 있음. 베스트는 밴팅이 2차대전에 나가서 사망한 후 밴팅-베스트 연구소의 소장이 되었으며, 이후 저명한 생리학자가 되었음.
    ps1) 그래서 이 이야기의 교훈은 "그래서 논문 저자에 이름 올리는게 되게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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