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비보(童仇非堡)는 조선 시기 함경도에 존재하던 조선의 방위군진중 하나이다. 위치는 삼서군 삼서면이다. 다른 함경도의 군진과 비슷하게 지역의 토병과 지방에서 올라온 부방군이 함께 근무하는 소규모의 보루로서 역사상에서 큰 비중은 없는 존재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 넉글자가 알려져 있는 것은 충무공 이순신이 이 곳의 권관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충무공전서』의 연표와 이분의 『행록』, 이식의 시장에 의하면 이순신은 1576년 2월 식년 무과에서 병과로 합격한 뒤 권지훈련원 봉사가 되었다가 그 해 겨울(12월)에 동구비보의 권관이 되었다. 그리고 1579년 2월, 35세의 나이에 권관의 임기를 끝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와 훈련원봉사가 되었다.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있었을 당시의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이후백(李後白)의 감사에 대하여 두터운 대우를 받고 직언을 올린 것이 유명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의 성품과 앞서 설명한 이후백과의 일화를 통해 그가 이 시기에도 본인의 직무를 잘 수행했다고 유추할 뿐이다.
동구비보에서 이순신이 떠난 뒤, 그 곳은 어찌 되었을까. 동구비보의 상황에 대한 기록 자체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있으나, 그가 전임되고 얼마 뒤 김성일(金誠一)이 함경도 순무 어사로서 변장들의 근무 실태와 진보 상황을 파악한 바가 존재했다.1 이 때의 일이 김성일에 의해 『북정일록』이라는 이름으로 기술되어 『학봉전집』에 묶여 있는데,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전략) 동구비보는 강 언덕에 있는데 나무를 얽어 만들었다. 토병 5, 6명과 남군(南軍, 부방군) 30명이 입방하고 있으나, 모두 활을 쏠 줄도 모르니, 오랑캐가 쳐들어온다면 한 성채의 사람들이 다 죽고 말 것이다.]2
김성일은 함경도 순무 어사로서 동구비보를 방문하였을 때에 동구비보의 방비 수준에 대해서 비판했다. 성보의 수준에 대해서는 큰 이야기 없이 그저 나무를 이용해 만들었다고만 서술하나 이어서 동구비보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의 훈련 태세에 대해서는 '활을 제대로 쏠 줄 모른다'고 지칭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진이 쳐들어 온다면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언급하며 불안함을 감추지 않는다. 이로부터 4년 뒤인 1583년에 니탕개의 난이 발생하였음을 생각해 보자면, 비록 난에 동구비보가 휘말리진 않았다 하더라도 김성일의 염려 자체는 타당했다고 할 수 있다.
보의 책임자였던 권관 이순신이 떠난 지 8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동구비보의 병사들의 역량 상황은 김성일이 평가키에 매우 좋지 않았다. 물론, 이것이 이순신의 잘못은 아니다. 역량 미달의 지휘관 아래에서의 몇 개월의 방만과 태업으로도 병사들의 질적 요건은 빠르게 하락할 뿐더러, 당시 동구비보의 병사들 대부분은 남쪽에서 국경 방어를 위해 부방 온 부방군이었기 때문에 이전의 권관이었던 이순신의 지휘를 직접적으로 받았던 병사들이었을 가능성이 조각된다. 따라서 1579년 10월 무렵 동구비보에 입방한 병사들의 역량 실태는 당해 2월에 권관서 교체된 이순신의 잘못이라고 할 수가 없다.
삽화 출처 : 칼부림
해당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은 이순신의 뒤를 잇는 신임 권관의 역량의 부족과 부방군 체제의 근본적 한계, 동구비보의 지리적 여건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리게 된 탓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애초에 동구비보는 병사들의 훈련 수준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동구비보는 방어적 측면에서 여러 문제가 다수 존재했다. 우선 성보를 이루고 있는 방어시설이 목책에 불과했고, 입보 병력 역시 고작해야 35명 정도였다. 지리적 위치로 인해 '방어와 토병 생업의 확보가 요긴치 않다'는 문제 역시 존재했다. 여기에 병사들의 역량 하락이라는 문제 역시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동구비보의 실황을 비판했던 당사자인 김성일은 동일 일자의 일기에서 군민들의 말대로 동구비보 동북쪽 10여리 위치에 존재하는 자작구비로 보를 옮기는 것이 지역 방어와 토병들의 생업 유지에 합당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해당 지역은 지세가 동구비보보다 험했는데, 그에 반대로 땅의 지력도 상대적으로 좋았다. 당시 김성일로서는 동구비보의 방어 역량 강화를 위한 대안으로 동구비보의 위치를 해당 지역으로 옮기는 것이 묘안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이후 동구비보는 더 이상 사료상에서 언급이 되지 않으며, 대신에 김성일이 지목했던 자작구비 지역에 자작보 내지는 자작구비보가 새롭게 살펴진다.3자작보 내지 자작구비보는 동구비보가 언급되던 시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보루이며, 과연 설치 초기 시기에도 석축이었을지는 알 수 없으나 『만기요람』에 기술된 바로는 석축 요새이기도 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동구비보는 순무어사였던 김성일의 대안대로 폐쇄되고, 대신 그가 지목한 자작구비 지역에 새롭게 자작구비보가 설치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1.『선조실록』 선조 13년 윤 4월 3일.
2.김성일, 「북정일록」 기묘년 10월 16일, 『학봉전집』 학봉일고 권3.
3.『선조실록』 선조 27년 4월 4일. 『인조실록』 인조 2년 9월 28일 등 ;박정민, 「조선 중기 武將 최호의 북방 활동」, 『백산학보』 105호, 백산학회, 2016, 96쪽.
옛날 보루에 35명이면 감적초소 수준이군...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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