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천국 코하비닷컴
https://cohabe.com/sisa/4810359

의병 항쟁중 '3년상 치르러 런했다'에 대한 낭설 팩트체크 (사료/논문 편)

https://m.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71582593


이 글에 사료, 논문, 학술지 출처를 적어달라해서 정리해옴




의병 항쟁중 '3년상 치르러 런했다'에 대한 낭설 팩트체크 (사료/논문 편)_1.png




1. 한국 독립운동인명사전 

이인영은 의병장들이 양주에 집결하고 긴밀한 협의를 거쳐 13도창의대진소를 성립시킨 후, 의병장들의 총의로 13도창의대장에 추대되었다. 대장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의병장으로서 정통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각지 의병을 양주로 집결시키는 데 성공한 점, 을미의병운동 때 공정하게 행동하여 타인의 신뢰를 얻은 점, 양주에 집결한 여러 의병장들 중 신분과 문벌이 가장 높은 점 등이 다각도로 고려된 결과였다.

1만여 명이 양주에 모여 전국적인 연합의병 부대가 성립되자 13도창의군의 직임을 배정했다. 1907년 말에 부대 편제를 전국적 의병조직에 맞게 재편했지만,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느라 상경하여 합류하지 못하는 의병부대가 생김에 따라 1908년 1월경에 다시 부대 편제를 재편했다.

이때 다시 13도창의대장에 올랐고, 군사장에 허위, 관동창의대장에 민긍호, 호서창의대장에 이강년, 교남창의대장에 박정빈, 진동창의대장에 권중희(權重熙), 관서창의대장에 방인관, 관북창의대장에 정봉준 등이 임명되었다. 이는 영·호남 지역에서 활동 중인 문태수·신돌석을 빼고 조만간 상경이 가능한 충청도의 이강년을 그대로 두고, 경기도를 맡은 진동창의대장 허위를 군사장(참모장)으로 승급시킨 재편이었다.

13도창의대진의 서울진공작전 기본구상은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모여 대오를 정비한 후 1908년 1월을 기해 서울에 입성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일제 통감부를 타격하여 항복을 받고 신협약(정미7조약) 등 망국조약들을 파기하는 것이었다. 또 한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인정한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제1조의 내용대로 한국의 독립과 황실의 안전을 꾀하는 것이었다.

이 복안에 따라 허위로 하여금 300명의 선봉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격토록 하였다. 그러나 허위의 선봉대는 무기와 화력의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1908년 1월 15일경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패퇴하고 말았다.

허위를 응원하기 위해 약 2천의 휘하 병력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당도했으나 선봉대의 패배로 인해 의병의 사기가 꺾인 상태였다. 곧이어 1월 28일 부친의 부음을 접하고 “나라에 불충함은 부모에 불효함이고 부모에 불효함은 나라에 불충함이다. 그 도(道)는 하나며 둘이 아니다. 국풍(國風)을 지켜 3년상을 치르고 효도를 마친 후 재기하겠다”며 후사를 군사장 허위에게 당부하고 문경의 본가로 내려갔다. 귀향하면서 활동을 중지하라는 통문을 각 진에 배부했기 때문에 모든 의병부대는 서울진격작전을 중지했다.

3년상을 마치면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당시 일제의 헌병과 경찰이 13도창의대군 주요 인사들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때 유인석으로부터 외국으로 피신하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일본군의 수색이 날로 심해지자 이름을 ‘시영(時榮)’으로 바꾸고 숨어 지냈다. 검문을 피해 노모와 두 아들을 데리고 충북 황간군 금계동에 이거했다. 그러나 끝내 부친의 3년상을 마치지 못하고 1909년 6월 7일 문경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2천의 휘하병력으로 300을 이끌던 허위와 연합해 선봉진을 이끌었으나 패퇴, 이후 3년상을 치르고 재기하겠다고 약속후 해산)







한국근대사료 DB (2) [暴徒巨魁 李麟榮 調書 보고 건]

문 너에게 의거를 권유한 자는 전혀 따로 없는가?

답 따로 아무도 없습니다.

문 네 아버지가 사망하였다는 통지는 언제 어디서 들었는가?

답 편지가 온 재작년 丁未年 음력 12월 25일 京畿道 楊州郡 내에서이며 지명은 잊었습니다.

문 大田에서 네가 진술한 바에 따르면, 작년 정월 폭도와 관계를 끊고 귀향하였다고 하는데 어떤가?

답 음력 정월에 향리에 歸着하였습니다.

(1907년 음력 12월 25일 (평달)은 양력 1908년 1월 28일. 독립운동인명의 기록과 일치) 


(중략)


문 너는 적어도 대장으로 뭇사람을 이끌고 있는 자가 편지를 받고 그날로 귀향하는 데 대해서는 달리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는가?

답 제가 출발할 때 뒷일은 許蔿에게 맡기고 떠났습니다. 그 사람은 제 참모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 당시 주창한 명칭은 무엇인가?

답 關東倡義大將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문 그 당시 너 이하 인원은 어느 정도 있었는가?

답 약 1만 명이었습니다.

문 뒷일을 許蔿에게 맡겼다고 하였는데 이미 倡義의 생각을 접은 것인가, 아니면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은 얼굴을 보기 위해 귀향하였다가 다시 돌아올 의사였는가, 어떤가?

답 돌아가신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르는 것은 한국의 관습이기 때문에 그 뜻을 許蔿에게 남기고 귀향하였습니다.

문 許蔿에게만 남겼는가?

답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義를 그만둔다는 것을 通文으로써 각 陣에 배부·통지하게 하였습니다.

문 그때 부하 중에 너의 귀향을 만류한 자는 없었는가?

답 별로 만류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중략)

문 과연 너의 倡義의 목적이 네가 말하는 바와 같다면 어째서 아버지의 부고를 접하고 만사를 내던져버리고 귀향하였는가? 孟子의 이른바 大義滅親, 너는 儒者인데 동양도덕과 너의 행위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답 大義滅親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단 돌아가신 뒤에는 재회할 수 없지만 임금은 다시 만날 수도 있습니다. 또 의병은 다른 사람이 지휘할 수 있고 한국의 풍속으로는 부친 사망 후에 상을 치르는 것은 하나의 규칙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를 행하지 않는 것은 불효에 해당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지 않는 자는 금수와 같으며 금수는 폐하의 신하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몹시 불충에 해당합니다.

문 너는 국가의 일과 一家의 內事와의 경중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답 국가의 대사와 一家의 內事는 깊이 연구하면 동일한 데로 귀착됩니다.

문 네가 倡義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사망소식을 접하고 이를 실행한 것이 아닌가?

답 결코 그런 적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결행할 정신이었습니다.


(중략)

문 내가 듣기로는 李麟榮은 그 후 군자금을 모집하러 돌아다니고 몰래 폭도를 지휘하였다고 하는데, 네가 옮겨 다니며 산 것은 그 때문이 아닌가?

답 전혀 그런 사실은 없습니다. 실제 상황은 大田 헌병이 양지하고 있는 바입니다. 또 군자금을 모집하였다는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정말로 자택에 있었고 어버이의 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또 처자를 데리고 있었습니다.

문 柳麟鍚은 어디에 있는가?

답 乙未年에 헤어진 이후 소식이 없어서 모릅니다.

문 너는 乙未年의 變 후 柳麟鍚과 함께 遼東으로 도망쳤다고 들었다. 그런가?

답 柳麟鍚은 遼東으로 도주하였지만 저는 자택에 있었습니다. 당시 황제로부터 해산하라는 조칙이 있었으므로 일동 해산하였습니다.

문 이번에 의병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고 나서 귀순을 청원할 의사는 생기지 않았는가?

답 저는 유생이기 때문에 그런 歸順票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귀순표를 받아들이는 자는 모두 잡배들입니다.

문 다시 義를 일으킬 생각이 있는가?

답 물론 3년상을 마치고 난 뒤 일본이 誠意를 보호하면 몰라도 시세의 변천을 보아 다시 倡義할 생각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습니다.


(3년상을 틈타 군자금을 모으고 병력을 모집한 죄목으로 잡혀왔으니 당연히 이를 부정하면서도 3년상 이후엔 당연히 다시 의병을 일으킬것이었다고 답함, 앞서 표현에서도 이미 사망한 허위 등을 제외한 동지의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음)

(또한 지휘체계를 허위에게 인수인계하고 넘어간것이었기에 반대가 별로 없었다는 본인의 진술을 확인할수있음)






오영섭, 한말 13도창의대장 이인영의 생애와 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19,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연구소, 2002.

(의병들은) 이인영을 13도 창의대진소의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각 부서를 편성하여 서울 공략을 준비하였다. 이후 서울로 공략하면서도 전투를 계속해서 벌였다. 이 과정에서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했으나, 후발 의병부대가 도착하지 않아 집중적인 일본군의 포화에 후퇴를 하게 된다. 이때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게 된다. 1907년 12월 25일(음력)이었다. 이에 이인영은 대장직을 허위에게 맡기고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문경으로 돌아갔다.


(동대문 30리 밖까지 전진 후 패퇴, 이후 부친상으로 지휘권 승계. '전투 전/혹은 전투 중 삼년상런은 낭설)








운강학술대회 고종의 거의밀지(擧義密旨)와 국민전쟁
- 대한제국 국군에서 대한민국 국군까지- 김종욱 

이인영은 1907년 9월 고종의 밀칙을 바탕으로 ‘관동창의대장’의 명의로 창의해 10월 약 1만 대군의 의병부대를 결성했고, 11월 양주(의정부)에서 ‘원수부 13도 총대장’으로 추대되어 서울진공에 착수한다. 이인영 의병부대는 12월 춘천과 양구 사이에서 최대의 격전을 벌이는 등 30여회의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그는 허망하게도 1908년 1월 28일 부친상 소식을 접하자 문경 집으로 돌아가 부친상을 치렀다. 


(주의 : 이 학술지의 내용은 고종에 호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음, 서술 자체는 이인영에 대해 부정적이나 '교전 이후' 낙향했음을 명시하여 기록함)






윤병석, 『의병과 독립군』 1977

이인영은 대장에 추대되어, 기일을 정해 동대문 밖에 모여서 서울을 공략할 작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민긍호 부대와 이강년 부대가 일본군과의 전투 때문에 미쳐 양주에 진입하지 못했다. 허위가 이끄는 부대만이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여 분전하였다.(위 사료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이인영이 허위와 함께 전투중이었음) 그런데 이 중대한 시기에 이인영에게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는데, 그는 (음력)12월 25일 문경으로 돌아갔다. 그 뒤 의병들이 찾아가 재기할 것을 권유했으나, 아버지의 3년 상을 마친 뒤 다시 13도 창의군을 일으켜 일제를 소탕하겠다며 거절하였다. 그는 노모를 모시고 충청북도 황간군 금계동에서 은거하다가 1909년 6월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경성지법에서 8월 13일 ‘내란수범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9월 20일에 순국하였다. 


(오래된 학술지의 내용인데, 여기서도 이인영은 부정적으로 묘사되었음에도 '전투 이후' 돌아갔음이 확인됨)




『대한매일신보』, 1909년 7월 30일 

이인영은 십삽도 의병 총대장이 되고 허위는 군사장이 되어 전투 계획 수립을 맡았으며, 각 군의 대장과 대호를 정하니 관동창의대장은 민긍호, 호서창의대장은 이강년, 교남창의대장은 박정빈, 경기·황해 양도진동창의대장은 권의희, 관서창의대장은 방인관, 관북창의대장은 정봉준이 맡았다. 그리하여 군사의 사기가 고동하여 경성으로 향하는 명령을 내리니 그 목적은 경성에 들어가서 통감부를 타격하고 굴욕적인 항복을 이끌어내며 종래의 소위 신협약 등을 파기하는 대대적인 활약을 기도하였다. 

우선 심복을 보내서 경성에 잠입해서 각국 영사관을 방문하고 통문 한 장씩을 전달하였으니, 그 내용에는 개략적으로 일본의 불의를 성토하고 한국의 마주한 현실을 상세히 설명하고 또 의병은 순연한 애국령단이니 열강도 이를 국제공법상의 전쟁단체로 인식하며 또 정의인도를 주장하는 나라를 돕기를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군사장은 이미 군비를 신속하게 정돈해서 한 방울의 물이 새는 틈도 없게 하였다. 이에 전군에 명령을 내려서 일제히 진군을 재촉해서 동대문 밖으로 접근하자, 대군은 장사진의 형태로 천천히 나아가고 300명의 병사를 인솔해서 선두에 서서 동대문 바깥 30리까지 이르러서는 전군이 모이기를 기다린 후에야 경성으로 쳐들어가기로 계획하였으나 전군이 집합하기로 정한 때가 어긋나고 일본군이 엄습하였다. 몇 시간을 지극히 맹렬하게 싸웠지만 후방의 부대가 오지 않았기에 퇴진하였다.

('3년상을 치르기 위해'가 아니라 '후방부대의 도달이 늦어져서 퇴진'했음이 당시 기록에 적혀있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1권 한말 후기의병 홍영기

(이인영의 부대는) 서울진공작전을 감행하기 이전부터 반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전투가 1907년 11월의 경기도 삼산삼산전투와 마전마전전투이다. 주28)이들이 원주에서 지평으로 이동하여 여러 의병부대가 합류함으로써 약 5천명의 규모로 증가하였다. 이들은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군수품과 군자금을 조달하고 있었는데, 이를 눈치챈 일제는 원주와 서울에 주둔중인 일본군을 동원하여 이들과 이틀 동안이나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허위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가 1907년 11월 지평의 연합의병부대에 합류하여 활동한 김훈김훈 주29)은 당시의 전투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허위 및 이인영과 행동을 같이하던 사이에 일본군과 충돌전투한 일이 수십 회인 바 그중 지평군 삼산에서 전투하였을 때는 의병의 수 약 5천명, 일본군 약 5~6백명으로 다수의 사상자를 낸 대충돌이었다. (주30)『편책』, 「한헌경 을 제404호」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0, 129)


이와 같이 삼산전투는 치열한 혈전을 벌였으나 연합의병측은 200~300명의 사상자가 나올 정도로 큰 피해를 당했다. 한편 마전전투 역시 같은 시기에 발생했는데, 마전읍을 포위한 의병 1천여 명과 일본 군경 사이에 격전을 벌였다. (주31)편책』, 「금비발 제117호」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8, 109~110쪽)

(중략)


비록 위의 인용문이나 『매천야록』의 내용이 사실과는 다른 부분도 없지 않지만 당시의 분위기를 전해준다. 다시 말해 13도창의대진소 지도부는 전국에서 집결한 의병부대들과 연락이나 연합활동이 원활했던 것 같지 않다. 여러 의병부대의 연합작전이 총대장 이인영과 군사장 허위 등의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먼저 공격의 최전선에 투입된 부대는 동대문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했으나, 후발 의병부대가 약속한 기일 안에 도착하지 않아 선발대가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결국 퇴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상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군사장은 이미 군비를 신속히 정돈하여 철통같이 준비하여 한 방울의 물도 샐 틈이 없었다. 이에 모든 의진에 전령하여 일제히 진군을 재촉해서 동대문 외곽으로 나아가니 대군대군은 장사장사의 세세로 천천히 진격하게 하고 씨가 3백 명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진을 치고서 전군의 집결을 기다려 일거에 경성을 공격해 쳐들어가기로 계획하였다. 하지만 전군의 래집내집은 시기를 어기고 일본군이 졸지에 공격하는지라 여러 시간을 격렬히 사격하다가 후원후원이 이르지 않아 퇴진퇴진하고 말았다. 주35)(『대한매일신보』 1909년 7월 30일 「의병총대장 이인영씨의 약사 속」)


13도창의군의 본진은 천천히 서울을 향해 진격하고, 군사장 허위는 선발대 300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으나 후발 의병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격전 끝에 퇴각하였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총대장 이인영은 부친상을 당함으로써 서울진공작전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인영은 1907년 음력 12월 25일1908.1.28부친의 부음을 전해 들었는데, 전통적인 유학자인 그로서는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귀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위에서도 서울진공 이후 패색이 확실해진 이후 부친상을 치르러 감이 명시됨)


댓글
  • 고양이의평균수명은15년입니다 2025/07/24 20:38

    와우.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AoCVzy)

  • 익명-Tk2MDM1 2025/07/24 21:07

    링크글에도 댓글 단 거지만 서울 진공해오는 게 오히려 한번에 일망타진 노리던 일제 의도대로 해주는 거나 다름없어지니 마침 터진 부친상 명분 삼아 각자도생하라고 해산한 거에 가까웠죠.

    (AoCVzy)

(AoCVz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