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 보여준 중요성에 비해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한명있다. 미군도 아니고 유엔군도 아니고 북한군도 아니고 국군 장성이던 그 분의 이름은 김홍일 중장. 국민당군에서 별두개. 국군에서는 별세개를 역임해서 비공식 오성장군으로 알려진 인물이기도함. 이분이 도덕책 무슨일을 하신건지 알아보자.
1950년 6월28일 서울은 개전 3일만에 북한군에게 함락 당했다. 같은 시각 춘천에서는 6사단이 강릉에서는 8사단이 북한군을 성공적으로 저지하고있었고,
동부전선의 북한군이 목표달성에 실패함으로써 갸들이 목표로 했던 국군 주력 포위 섬멸에 실패했다. 그리고 여기서 살아남은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하는데 성공 유엔군이 참전할 시간을 벌수있었음.
기존에 대중에게 알려지기로는 춘천의 6사단이 방어에 성공하면서 북한군이 6월28일 이후에 일주일간 한강에서 미적거렸고 그 시간을 틈타 한강남쪽으로 철수한 국군이 후퇴할 수 있었다고 알려졌는데 가장 큰이유는 6월28일부터 7월 4일까지 7일간 거기서 뭔일이 터졌기 때문이었음.
국군 전사에서는 저 일주일간 일어난 사건을 기적이라고 기록했다.
무슨일이 있었는지 한번 알아보자.
6월27일 서울 함락이 확실시 되자 육군본부에 모여있던 국군 원로들은 참모총장 채병덕에게 한강이남으로의 철수와 방어선 재구축을 건의했음.
채병덕은 "전 반격할건데여?"라면서 거부. 다음날 서울이 함락되고 육군본부는 시흥으로 이동했음. 참모총장인 채병덕은 멘탈이 붕괴해서 반격하라는 소리만 반복하고 있었음.
이걸 지켜보던 김홍일 장군이 직접 나서서 내가 방어지휘할테니까 서부전선의 지휘권 넘기라고 요구. 채병덕은 "전 반격할건데여?"라는 소리만 여전히 반복함.
이에 빡친 김홍일 장군이 직접 부관을 데리고 시흥근교로 나갔고, 후퇴중이던 국군들을 잡아다가 재편성을 시작했음. 이 시점에서 국군의 8개 사단중 5개 사단이 와해된 상태였고 1사단 6사단 8사단 정도만 사단 편제를 유지한 상태였어. 거기에 1사단은 말이 편제를 유지한거지 개별적으로 한강을 도하했고 후퇴하는 길목에 시흥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병사들이 자연스럽게 모인 상황이었음.
백선엽 왈 : 시흥에 도착해보니까 우리 애들이 알아서 모여있더라...
(훗날 김홍일은 서울이 무너질때 1사단보고 빨리 뒤로 빠지라고 했는데 백선엽이가 말을 안들어쳐먹어서 1사단이 날라갈뻔했다고 비판했고, 백선엽은 "김장군덕분에 살았어염 ㄳㄳ"라고 회고함)
김홍일은 그자리에서 병력을 재편성해서 사단을 다시 만들어내고, 장교가 필요하면 그자리에서 진급을 시키는등 필사적으로 병력을 재편성햇어. 거기에 보급물자를 분배해서 병력들에게 나눠주고 그렇게 편성된 병력을 한강 방어선에 재배치했음.
그리고 춘천에서의 패배가 서울의 북한군에게 알려지자 북한군은 한강도하를 시도했고 이렇게 한강 방어선 전투가 시작됨. 채병덕은 뭐했냐고? 여전히 정줄놓고있다가 29일이 되어서야 시흥전투사령부를 창설하고 그 자리에 김홍일 소장을 임명함. 말이 전투 사령부지 직속 전투부대라고는 예비기갑연대 하나뿐인 사령부였음. 나머지 병력은 현지에서 사령관이 직접 만들어냄.
이렇게 만들어낸 병력으로 일주일을 버텨냈고, 그 기간동안 와해됬던 사단들을 재편성하고 낙동강방어선까지 지연전을 펼칠수있는 시간과 병력을 만들어냈어. 무질서하게 후퇴하던 국군은 김홍일이 지휘관이 되자 돌변해버렸고, 당시 북한군에 고문관으로 참전했던 소련 장교 라주바예프는 개전 초기에는 "한국군은 ㅄ들 ㅋㅋㅋ"하는 보고서를 올렸다가 6일뒤인 한강방어선전투중에는 "아... 저색히들 갑자기 존내 잘싸움"이라고 보고서를 올렸음.
이때 전역하고 민간인으로 지내던 김석원이 사령부로 찾아와서 "내가 뭐 도와줄거 없을까?"하자 그자리에서 수도사단장으로 재임명되서 전투를 지휘하는 에피소드를 만들어내기도했어.
결국 국군은 한강에서 일주일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얻어냈고 이때 얻은 일주일이 한국을 구했다. 그리고 이 전투를 국군전사에서는 기적이라고 기록했음.
ps. 김홍일 장군은 9월1일에 예편함. 그 이유는 미군과의 갈등. 미군이 아 저인간 우리말 안듣는데 짤라주셈. 이라고 요구한게 원인이었다고함.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김석원도 같은 이유로 짤렸음.
ps2: 국군은 한강방어선에서 정확히 7일을 버텼는데 7일째에 지원하러 날러온 미공군이 국군의 보급집결지를 날려버리면서 더이상 전선을 지탱할수 없었던게 이유였음.
625라서 오랜만에 재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