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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인간 평점의 세상

전 세계적으로 쓸데없는 랭킹을 세우던 한 예능 프로가 인기였다. 

별의별 소재를 다 쓰다가 여름 특집으로 무서운 악마에 대한 랭킹을 매긴 어느 날, 스튜디오에 단단히 화가 난 악마가 나타났다.

[ 어이가 없군. 감히 어디서 평가질을 하는 건가? ]

꼴등 악마로 뽑혔던 그 악마는 인간들에게 저주를 내리며 사라졌다.

[ 평가하기 좋아하는 너희 인간에게 똑같이 되돌려주마! ]

방송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것이 연출 같은 것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전 세계에 사람이 죽는 슬픈 현장마다 이상한 제보가 잇따랐다.

" 뭐야 이 숫자는? "
" 그치? 너도 지금 저게 보이지? "

사람이 죽을 때마다 그의 머리 위에 커다란 숫자 하나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그것이 '인간 평점'이란 걸 금방 깨달았다. 훌륭한 사람일수록 숫자가 '10'에 가까웠다.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던 의인이 죽을 때마다 10점이 보였고,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사형당할 때마다 1점이 보였다.

인간 평점의 반향은 컸다. 사람들은 이제 죽음 앞에서 슬픔 이외의 감정도 느끼게 되었다.
강O범의 죽음이 3점이었단 사실이 알려진 후, 죽을 때 5점도 넘기지 못한 인간에 대한 평가는 처참했다. 죽으면서 욕을 먹는 상황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 김부장 아버지 얘기 들었어? 4점이었대! 어쩐지 김부장 성격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
' 긴급 뉴스를 알려드립니다. 봄날 기업 두석규 회장이 사망하였습니다. 두 회장의 점수가 고작 2점이었단 사실이 밝혀지며 회사 경영의 투명성에 의문이 나타나고 있는데요, '
' 아니 어떻게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이란 사람이 고작 4점일 수가 있어? 애들이 무슨 영향을 받았을지 쯧쯧 '
' 이번에 보근 빌딩 추락사고 말이야. 그 사람 1점짜리라던데, 1점이 되려면 도대체 얼마나 쓰레기처럼 산 거야? 솔직히 어떤 놈인지 몰라도 죽어도 싸지 않냐? '

낮은 점수를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었다. 숫자에 대한 거짓말은 입에서 나오질 않았고, 죽은 사람의 사진 위에도 숫자가 보였다.

당장 장례식장의 풍경이 바뀌었다. 높은 평가가 나온 집안에서는 자랑스럽게 사진을 공개했다. 9점만 되어도 극찬을 들을 수 있었다. 반면 사진 없이 장례식을 치르거나, 아예 장례식을 열지 않는 곳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집안의 어른들은 죽어서 불명예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점검했다. 평소 행실을 신경 쓰고, 조금이라도 모범적인 쪽으로 행동하려 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모두 알게 모르게 행동을 달리했다. 

사소하게는 횡단보도 무단횡단이나 쓰레기 무단투기 같은 것들이 줄어들었고, 인터넷 악플도 눈에 띄게 줄었다. 들키지 않는다해서 부당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도 줄었다. 
사람들은 보다 더 친절하고 멋있어졌다. 
스스로를 점검하여 찔리는 사람들의 기부와 같은 선행도 많이 늘어났다.

이런 현상을 보고 누군가는 말했다. 어차피 내가 죽으면 다 끝인데 무슨 상관이냐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 뒤의 평점을 두려워했다. 부정적으로 잊히기는 싫었다. 먼 훗날 누군가 자신을 기억할 때, '아~ 그 친구 평점 8점이었어! 사진 볼래? 참 멋진 녀석이었지.'라며 기억되고 싶었다. 최소한 자식들이 지갑에 사진을 넣어놓고 다니며 당당하게 보여줄 수 있는 부모로 죽고 싶었다.

세상은 꼴등 악마의 저주 이후, 겉으로는 확실히 더 좋아졌다. 그 꼴이 꼴등 악마에게는 정말 어이없었다.

[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인간을 괴롭게 하려고 평가질을 했는데, 왜 더 좋아지는 거지? ]

꼴등 악마는 짜증을 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등 악마가 혀를 차며 말했다.

[ 방법이 잘못됐네. 평점을 매기려면 이렇게 했어야지. ]

일등 악마는 꼴등 악마가 인류에게 걸었던 저주를 아주 간단하게 바꿨다. 

그 이후, 인간은 죽을 때 평가받지 않았다. 대신, 태어날 때 평점을 받고 태어났다. 10점짜리 아기, 5점짜리 아기, 1점짜리 아기...

이후로 펼쳐진 인류의 반응은 꼴등 악마를 감탄하게 했다. 확실히 일등 악마가 다르긴 다르구나.
댓글
  • 복날은간다 2017/12/16 23:54

    항상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게 10점인 여러분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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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벨뀨 2017/12/16 23:57

    첫 추천!
    마지막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네요...  점수로 나타나지 않을 뿐. 이미 우리는 자연스레 사람들의 많은 것을 평가하고 재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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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담항설 2017/12/17 00:05

    태어날때 부터 붙는 점수는 무슨 의미의 점수일까요?
    얼마나 사랑받으며 태어났는지...? 역시 일등악마는 다르네요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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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isu[Shield] 2017/12/17 00:19

    블랙미러의 한 에피소드가 생각나는 글이네요
    잘 읽고갑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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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없는닉이있어 2017/12/17 00:40

    항상 감사합니다 오늘도 잠들기전에 읽고 여러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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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스러버 2017/12/17 01:02

    늘 좋은글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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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나히치 2017/12/17 01:24

    재미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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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수자리 2017/12/17 01:45

    10점 만점인 작가님 오늘도 글 잘 보고 갑니다
    막 태어난 갓난애기에게 이것저것 고려해서 1점을 매기는 악마라니...
    역시 1등 악마는 급이 다르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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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리키티 2017/12/17 02:55

    복날님이 쓴 작품들 볼때면..
    예전에~ 1980년대 미드 [환상특급] 생각나요~
    매번 단편단편, 여러 에피소드로 구성되서..
    주요장르가 호러, SF, 미스테리.. 였거든요!
    복날님 각본으로 요런 한드 나오면 넘모 애정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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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어_그릴스 2017/12/17 03:46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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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리야레 2017/12/17 03:58

    일본의 기묘한 이야기 작가도 어째 시작이 이랬을 것 같아요 타고난 이야기꾼.
    그나저나 일등악마 잔인해요 너무함 만약 타고나는 점수에 아무 의미없고 걍 무작위 점수를 얻어 태어나는 거라면 더더 잔인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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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포마이쪙 2017/12/17 06:05

    쓰던 대로 '...'을 쓰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 은 입력하려면 적어도 키를 다섯 번은 눌러야 하니 흐름이 끊길수 있을것 같아서요.
    오유에 올린 글을 그대로 복사해서 책으로 낸다면 '…' 이 더 낫겠지만 그럴 리는 없을것 같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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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닉넴이음슴 2017/12/17 06:16

    막 태어난 아기의 점수가 부모의 사랑이라면 정말로 슬플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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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어 2017/12/17 07:09

    와... 생각지도 못한 일등악마의 반전이네요.
    와..  1점 아기를 낳은 부모는 ..  아이를 기르고 싶지않게 될 가능성도 있겠네요.
    마치 게임에서 망캐릭 나오면 지우고 다시 키우는 경우처럼 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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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일리 2017/12/17 07:35

    많은 생각이 들게 하네요. 요즘 세상에는 정말 태어나면서 평점이 부여되는거 같습니다. 금수저... 흙수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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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긴ㅈ으디 2017/12/17 07:45

    대박 재미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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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왕오이 2017/12/17 08:09

    이런 주제 너무 좋네요..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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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Qwerty123 2017/12/17 08:20

    자식가챠네 느낌왔다 지금돌리면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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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urils 2017/12/17 08:27

    이번건도 최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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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혜 2017/12/17 08:30

    복날님 작품은 읽으면서 결론을 상상해보게 되지만 항상 예측못했던 결론이 나온다는게 매력적이에요
    저는 처음엔 세상이 좋게 변하다가 선의의 행동이 상향평준화되는 결론을 상상해봤어요
    다들 착하게 살다보니 사소한것에도 평점이 깎이게되고 결국은 인간들이 스스로를 더욱 검열하고 옭아매게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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