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무동주-월화몽소-오욕내강의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본문은 많은 부분이 작성자의 뇌피셜 해석이며 공식설정과 다를 수 있습니다
1. 용무동주 - '류우게 키사키'는 없다. '현룡문주'만이 있을뿐.
산해경 스토리에서 등장하는 키사키의 첫인상은 굉장히 강한 1인 권력자에 가깝다. 거대한 옥좌, 화려한 부실, 그리고 항상 졸졸 따라다니면서 문주님이 행차하신다 문주님이 명령하신다 복창하고 시키는 건 뭐든지 따르는 정장부대까지 보면 이게 학생회인지 일인군주 마피아 집단인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다. 뭐 실제로 제작진의 의도나 모티브는 그쪽이 맞겠지만서도. 아무튼 키보토스의 다른 학생회들과 비교해봐도 한 학교의 리더로서 키사키가 누리는 권위, 의전, 구성원들의 충성은 높은 편이다.
하지만 산해경이 키사키를 정말 '류우게 키사키' 그 자체로 애호하고 충성하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미나처럼 키사키 개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케이스도 있는 것 같지만, 그보다는 키사키가 '현룡문주'이기 때문에, 현룡문의 의지를 대변하고 전통 가치를 수호하는 직위에 있기 때문에 충성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아래에서 다시 얘기하겠지만 키사키의 의지와 현룡문의 전통이 아주 조금이라도 충돌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많은 학생들은 키사키를 공격하는 입장으로 돌변했다.
얼핏 '직위'와 그 직위에 앉아있는 '인간'은 동일시되기 쉽다. 그러나 직위에 부여된 사명과 그 직위에 앉은 인간의 의지가 항상 동일하라는 법은 사실 또 없다. 이번 산해경 3부작의 서사는 바로 그 차이에 대한 이야기였다.
명령 한 마디면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정장부대 사이의 키사키는 얼핏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철권 독재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명령이 어디까지나 현룡문의 가치 기준을 벗어나지 않을 때의 이야기다. 실제로 키사키 본인은 자신의 권력과 자신의 의사가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며 '문주는 현룡문 전체의 뜻과 방향을 멋대로 바꿀 수 없다'는 한계를 직시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니,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현룡문을 대표하기 위해 키사키의 개인적인 의견과 도덕이 억눌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용무동주 스토리에서 발생한 사건 당시 키사키는 현무상회와 루미를 압박하며 만년삼 불법 유통 문제에 대한 진상 조사를 명령한다. 동시에 이 사건을 빌미로 현무상회를 해체시키거나, 설령 결백하다 해도 누명을 씌워서 정치적 이득을 챙길 수 있다는 계산을 다 내려둔 상태였다.
현무상회가 진범이다? 현룡문으로서는 이득이다. 현무상회가 결백했다? 현룡문에 이득이 되게 만들 것이다. '현룡문주'라는 정치적 입장으로서는 뭘 골라도 이득뿐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막대한 정치적 이득뿐인 결과를.
하지만 '현룡문주'라는 직위를 잠시 내려놓고, 개인 '류우게 키사키'가 생각하는 사건의 진상은 또 다르다.
키사키는 사실 루미가 결백하다는 사실을 안다. 정황을 봐도, 친분 덕에 잘 알고 있는 루미의 성격으로 봐도 이 사건의 진범은 따로 있다. 만약 키사키가 제삼자의 입장이었다면 그런 루미의 무고를 증언하거나, 진범을 잡기 위해 수사에 적극 협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류우게 키사키' 개인의 의견이다. 키사키는 제삼자가 아니다. 그녀는 '현룡문주'로서 진실과 도덕을 배제하고 현룡문의 이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따라서 키사키는 루미의 결백을 주장하지 않았다. 혹은 주장할 수 없었다. 현룡문주가 현룡문이 아니라 현무상회의 입장을 대변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악의적이라고 해도. 그것이 현룡문주가 져야 하는 정치적 책임이다.
그리고 키사키가 이런 일련의 사실들을 솔직하게 밝히는 건, 선생의 등 뒤로 돌아가 업혀있을 때였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누군가와 마주보고 있을 때, 그 사람이 누구라고 해도 류우게 키사키가 현룡문주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러므로 키사키가 현룡문주의 입장을 잠시라도 내려놓고 진심을 밝히려면 자기자신조차 없어야 한다.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곳, 어른의 등 뒤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는 자기 부재의 상황만이 류우게 키사키가 정치적 입장 대신 개인의 진심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다. 이 정도로 키사키의 자아는 '현룡문주'에게 잠식당해 희박한 상태였다.
2. 월화몽소 - 학생회장에게는! 쿠데타를 진압하고! 학교를 이끌 권리가 있다!
용무동주의 사건은 의외의 결말로 끝났다. 선생과 함께한 루미와 미나의 수사는 현무상회의 결백을 밝혀냈고, 진범이 오히려 현룡문 소속임이 드러나며 모든 책임은 현룡문의 것이 되었다. 키사키는 정식으로 관련자들에게 사죄하는데, 이건 키사키에게 굴욕이 아니라 새로운 변수이자 기회였다. 현룡문이 언제나 어느 때나 지고하고 정의로운 존재는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이 입증되었기에, 또 현무상회와 외부인의 존재가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을 주었기에 얻어낸 기회.
키사키는 산해경의 변화를 원한다. '현룡문'이 환영하지 않을 방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현룡문주'의 이름으로 외부와의 교류를 추진한다. 현룡문과 현룡문주의 지향이 충돌할 소지가 드러날 수도 있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추진하겠다는 키사키의 개인적인 의지의 반영이다.
동일시되는 게 당연했던 현룡문, 현룡문주, 류우게 키사키가 분리되려는 조짐을 보인다. 현룡문 내부에서는 동요가 퍼진다. 현룡문주가 현룡문의 전통을 수호할 의지가 없다면, 그럼에도 그는 현룡문의 문주로 대우받아야 옳은가? 현룡문과 현룡문주가 동일한 게 당연했고, 현룡문주와 류우게 키사키가 동일한 게 당연했던 산해경으로서는 신선한 충격이다. 충격은 균열을 만들고, 균열은 쿠데타로 표면화된다.
키사키는 딱히 저항하거나 자기변호를 시도하지 않는다. 쿠데타를 있는 그대로 덤덤히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산해경과는 아무 관련 없는 제삼자가, 키사키가 불러들였던 변화의 바람의 일부인 웬 꼬맹이가 빡쳐서 쿠데타의 근간이자 명분인 산해경의 동일성을 거세게 공격한다.
현룡문은 현룡문의 것이며 현룡문주는 그 입장을 대변해야만 한다, 그것은 키사키 본인부터가 의심하지 않았던 산해경의 제1원칙이었다. 즉 산해경은 균열을 용납하지 않는다. 한 집단이 한 사람인 것처럼 항상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곳을 지향하며 같은 행동을 해야만 정상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 동일성, 또는 동일성에 대한 강박은 정상이 아니라는 체리노의 일갈은 인상적이다.
사실 체리노도 키사키랑 비슷한 1인 권력자긴 하다. 하지만 붉은겨울과 산해경의 가장 큰 차이점은 구성원들의 동일성에 대한 강박이 없다는 것이다. 체리노는 붉은겨울의 모두가 자신과 똑같은 길을 따라와야만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물론 그러길 아예 안 바라는 건 아닌 거 같지만, 아무튼 자신의 길이 맘에 들지 않으면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도 그들의 권리로 존중한다. 그리고 학생회장에게는 그런 쿠데타를 진압하고 자기 뜻대로 학교를 이끌어갈 권리도 있다.
하필 키워드가 쿠데타라서 비유가 좀 과격하긴 하지만, 결국 핵심은 한 집단의 사상적 동일성에 대한 부정이자 개개인의 주관 및 권리에 대한 긍정이다. 집단의 모든 구성원이 똑같은 가치를 똑같이 지지해야만 한다는 강박은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고, 도덕적으로 딱히 훌륭한 일도 아니다. 산해경에서 그것이 가능했던 것처럼 보였던 건 어디까지나 문주인 키사키가 자신의 자아를 죽이고 현룡문의 입장만을 우선시하는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허상이었다. 역으로 그것은 정말 올바른 현상일까?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억압당하는 개인은, 그것이 비록 당사자가 원한 바라고 해도 과연 정당할까?
3. 오욕내강(1) - 미지와 무기력의 바다.
정치, 동요, 균열, 쿠데타를 넘어 마지막으로 도달한 키사키의 갈등은 원죄였다.
류우게 키사키는 신타니 카이의 악행을 규탄하고 제지할 자격이 없다. 현룡문주로서 절차를 준수하지 않고 카이를 퇴학시킨 것은 키사키 자신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무시당한 교칙의 희생자인 카이는 그것을 지키지 않은 키사키를 규탄할 자격이 있다. 키사키를 증오할 자격이 있다. 키사키에게 복수할 자격이 있다. 키사키는 이 모든 사태의 근원이자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카이가 지적한 것처럼, 또 키사키 본인이 인정하는 것처럼 키사키는 문주로서 산해경의 모든 책임을 떠안을 의무가 있다.
따라서 키사키는 카이를 이길 수 없다. 무력이나 지력의 문제를 넘어 키사키 자신이 행한 일의 결과로 탄생한 카이의 복수심은 키사키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현룡문주로서의 권한으로 행한 일들의 결과와 파장을 키사키 자신도 아직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변화로 동요하는 현룡문 부원들의 마음을 어찌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카구야의 쿠데타를 덤덤히 받아들이려고 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키사키 자신이 스스로의 정당함을 확신하지도 못하고 있다.
류우게 키사키는,
비정상적 절차로 문주에 옹립되어 카이를 즉결추방한 과거를 돌이킬 수 없다.
변혁이 불러올 산해경의 미래가 낙관적이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자신의 재능과 능력 바깥에서 타인의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옳은 것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카이가 키사키에게 선사하는 원죄와 비관, 증오와 불신의 파노라마는 블루아카의 이전 메인스토리들과 오버랩된다.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으며 과거 속에 묻힌 진실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미래가 희망적인지 절망적인지를 알 수 없다.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이 올바른지를 알 수 없다.
각각 스케일과 방향성의 차이는 있지만, 류우게 키사키가 마주한 딜레마는 근본적으로 같다. 자신의 능력 바깥에 있는 문제, 신이 아닌 인간인 이상 죽었다 깨어나도 해결할 수 없는 이 부조리한 딜레마의 끝은 결국 미지와 무기력으로 끝이 난다. 우리의 뒤(과거)와 앞(미래), 우리의 밖(타인)과 안(자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다에 빠져버린다. 그렇기에 우리가 알 수 없는 것, 알 수 없기에 해낼 수 없는 것에 대해 어쩌면 체념하고 어쩌면 굴복하고 마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해결하지 못했다고 누군가를 탓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그래서 키사키는 도망친다.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앞에서.
4. 오욕내강(2) - 객관에서 주관으로, 관념에서 실존으로
이번 스토리에서 선생의 비중이나 역할은 의외로 많지 않다. 특히 오욕내강에서 선생은 키사키를 지켜보는 관찰자의 자리에 묶인 느낌이 크다. 산해경의 갈등은 게마트리아나 부패 대기업이나 무명사제 같은 어떤 거대한 악과의 대결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학생들의 대립이기 때문이다. 모든 학생을 믿어주고 도와줘야만 하는 어른으로서 선생은 자신의 힘이나 권능으로 카이를 찍어누르지 않는다. 그래서는 안 된다.
비록 선생, 혹은 선생 안의 플레이어가 심정적으로는 키사키가 옳고 카이는 틀렸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행동으로까지 발전해서는 안 된다. 신타니 카이 또한 선생님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포기해서는 안 되는 한 사람의 학생이기 때문에. 그래서 선생은 위기의 순간에 즉시 카이를 제지하거나 쓰러트리는 것이 아니라, 키사키를 데리고 도망친다는 아주 소극적인 '편들기'를 실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키사키를 데리고 도망친 그 잠깐의 피난처에서, 이전 메인스토리의 다른 학생들과 같은 딜레마에 빠진 키사키에게 선생은 다시 한번 같은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키사키가 왜 신타니 카이에게 이길 수 없다고 했었더라? 산해경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현룡문주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문주는 누구도 탓하거나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키사키 본인조차도 문제의 근원은 자신에게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이 과거의 한 일, 자신으로 인해 바뀔 미래,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타인의 마음, 그리고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자신의 올바름에 관해.
거듭 강조한 것처럼 이건 키사키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옆에서 지켜보는 선생 역시 신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이기 때문에 메인스토리의 모든 한 단락마다 좌절하고 한탄하며 자신의 무력함을 절감해왔다. 그런 선생이 체념하거나 굴복하지 않도록 학생들을 일으켜 세워준 힘은, 말과 형식의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본질적으로는 결국 언제나 같은 트리거였다.
우리는 과거를 어찌할 수 없다. 우리는 미래를 어찌할 수 없다. 우리는 타인을 어찌할 수 없다. 우리는 자기자신조차 어찌할 수 없다. 자신의 뒤와 앞, 밖과 안을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부조리한 미지와 무기력의 바다를 떠돌아야 한다. 그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존재하는 영역이란 결국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여기, 이 순간뿐이다. 나는 오직, 바로 지금. 내가 존재하는 현재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야만 함을 믿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모든 가능성의 범위를 차단당한 무력하고 나약한 인간의 발버둥이자 정신승리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결론이다. 하지만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현실과 현상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넘어서, 오직 나 자신의 의지와 믿음으로 완결되는 이런 주관적 진리의 인식은 많은 것을 바꿔놓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실제로 지켜봐온 선생으로서는 공허한 말뿐인 격려가 아니라 확신을 가진 조언으로 해줄 수 있는 말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류우게 키사키는,
이미 지나온 과거를 바꾸거나 돌이킬 순 없지만,
적어도 그 과거가 잘못된 선택으로만 가득차있지는 않다고 믿을 수는 있고,
우리 앞에 놓인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보다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는 있고,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언젠가는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될 거라고 믿을 수는 있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올바른지조차 아직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언젠가는 이 길이 틀리지 않았다고 증명할 것임을 믿을 수는 있다.
키사키는 문주로서 엄수해야만 하는 정치적 판단을 잠시 거두기로 한다. 산해경에서 일어난 모든 악행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도 접어두기로 한다. 신타니 카이의 행동은 분명 키사키 자신으로 악화됐지만, 그것은 카이가 받아야 할 벌까지 키사키가 대신 받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키사키에게는 키사키가 져야 할 책임이 있고, 카이에게는 카이가 져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막았던 '현룡문주'라는 관념을 내려놓고, 이제 '류우게 키사키'는 본인의 자아와 실존을 손에 쥐고 앞으로 나아간다. 바로 이 지점이 키사키가 문주로서 요구받은 기계적 의무를 벗어나 자신의 주관적 진리를 실천하기 시작하는 분기점이다.
나에게 주어진 지금, 현재에 충실하며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
너무나 뻔하고 상투적이고 질릴 만큼 들어본 낡은 격언인 것 같다만 그런 격언이 여전히 반복되고 확대 재생산하며 생명력을 이어가는 이유는 결국 역설적으로 그것이 얼마나 실천하기 어려운지, 또 그럼에도 그것을 실천해나가야 하는 필연성이 있는지에 대한 반증도 된다.
류우게 키사키가 현룡문을, 현룡문주의 이름을 방기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녀는 현룡문을 대표하며, 현룡문주로서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공언한다. 그러나 자신의 견해를 억누르고 오직 현룡문의 정치적 이익만을 우선하며 행동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 키사키는 자신이 스스로 옳다고 믿는 진실과 선의에 대한 믿음을 동반자로 두고 있다.
잘된 일일까? 사실 알 수 없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류우게 키사키의 주관적 진리는 항상 올바르고 선하며 긍정적인 결과만을 낳을 것인가? 그것도 알 수 없는 문제다. 눈치 빠른 독자는 이미 알아챘겠지만, 이에 관한 대답은 다시 앞서 했던 이야기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젠가 찾아올 현재의 몫으로 그 대답을 유보하기로 하자.
5. 오욕내강(3) - 원숭이 손의 역설
사실 키사키의 서사는 다 끝난 이야기지만, 부록으로 키사키의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하도록 하자.
이번 산해경 3부작에서 류우게 키사키의 이야기는 결국 신타니 카이로 끝난다. 주인공과 대립자의 관계라는 게 대체로 그렇지만 키사키와 카이는 많은 면에서 대비되는 안티테제적 존재다. 키사키가 현룡문주로서의 사회적 의무에 충실하며 자아를 억눌러왔다면, 반대로 카이는 선단과 선인이라는 개인적 목표에 매몰되어 연단방의 사회적 기능을 악용해왔다. 키사키가 맹목적인 이타주의자였다면(위에서 얘기했지만 꼭 긍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카이는 지능적인 이기주의자였다. 외형적으로도 반대되는 부분이 많다. 헤일로 색깔도 대비되고, 외투의 색깔도 대비된다. 그리고 몸매도 많이 다른...... 흠.
어쨌든 카이는 많은 면에서 키사키의 대립자이자 가장 큰 적이었다. 키사키가 앓고 있는 모종의 병, 키사키가 지배하는 산해경에 퍼뜨린 어린이병, 키사키에 대한 현룡문의 지지 상실, 마지막으로 키사키의 심리를 교묘히 파고들어 곡해한 책임의식의 문제까지.
그런 카이를 키사키는 '원숭이 손'이라고 칭한다. 스토리상 언급에 따르면 카이는 자신의 약학을 악용해서 사람의 소원을 비틀린 형태로 이루어주고, 그것을 빌미로 피실험자를 노예화하는 악행을 저질러왔다. 즉 키사키의 책임감과 사회적 의무, 억눌린 자아 등을 상징하는 관념이 '현룡문주'였다면, 카이를 상징하는 관념은 '원숭이 손'이다.
그런데 막상 스토리 종반에 이르자 카이는 자신이 벌인 일의 결과가 자신의 결정적 패인으로 작용하는 아이러니에 처한다. 적극적으로 계략을 꾸미고 실현시켰지만 그것이 자신을 몰락시키는 트리거가 된, 말 그대로 원숭이 손 현상. 카이는 마치 자신이 원숭이 손의 관념이 현현한 존재인 것처럼 행동했지만 결국 본인도 미래의 모든 결과와 영향을 의도하거나 예측할 수는 없는, 원숭이 손 관념에 놀아난 한 사람의 인간일뿐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만다. 관념에서 인간으로 돌아왔다는 결과만 보면 키사키와 같지만, 그 과정과 파장은 완전히 정반대기도 하다.
카이는 패배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 패배는 지금 당장의 일일뿐, 카이가 진심으로 자신의 악행을 반성하거나 그만두겠다고 한 것은 아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반복하겠다고 뻔뻔하게 암시하기도 한다.
그런 카이에게 선생은 똑같은 말을 한다. "그렇다고 해도 최선을 다할 거야, 우리에게는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모범생 키사키는 그 말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였지만, 불량학생 카이는 굳이 굳이 한번 더 꼬아서 묻는다. 만약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텐가?
많은 면에서 중의적인 대사다. 선생으로서 학생을 최대한 포기하진 않을 것이라는 의미. 그러나 선생이 학생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선생만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노력 또한 있어야 하니 부탁한다는 의미.
선생은 자신의 의무를 다할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이 카이를 포기하지 않도록 하려면 카이 또한 자신의 책임을 져야만 한다. 키사키에게 주관적 진리의 실천을 조언한 것과 반대로 카이에게는 사회적 책임의 이행을 요구한 것이다. 관념과 실존 사이에서 한 사람은 너무 왼쪽으로, 한 사람은 너무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카이는 (아직은) 나쁜 녀석이지만 똑똑한 학생이다. 선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고, 그렇기 때문에 재밌어한다. 재밌어하기는 하는데 과연 훈계를 잘 따라줄지는 아직 알 수 없는 문제긴 하다. 그러니 키사키 때와 마찬가지로 카이의 마지막 대답 또한 지금은 유보하고, 나중의 몫으로 미뤄두기로 하자. 언젠가 찾아올 이 다음의 현재에게.
좋은 글입니다.
저는 키사키가 대견하면서도 안쓰럽긴 했습니다.
마치 아직 수영할 준비가 안됐는데 마치 풀장에 던져진 느낌.
그러면서도 살기위한 발버둥이 수영으로 발전하는 그런거.
체리노의 말 하나가 3편 내내 되게 중요한 부분을 찔러버린게 흥미진진
좋은 글입니다.
저는 키사키가 대견하면서도 안쓰럽긴 했습니다.
마치 아직 수영할 준비가 안됐는데 마치 풀장에 던져진 느낌.
그러면서도 살기위한 발버둥이 수영으로 발전하는 그런거.
체리노의 말 하나가 3편 내내 되게 중요한 부분을 찔러버린게 흥미진진
잼민이스러워서 그렇지 철학이 확고함.
학생들에게도 권리가 있듯이 리더에게도 권리가 있다는걸.
토모에가 잘한다 잘한다 해줘도 체리노가 학생회장인 이유가 있음
그리고 카구야는 월화몽소땐 개스통할배ts였으면
이번 오욕내강은 진짜 걍 전통을 지키려는 그 자체였음 좋은쪽의 애국보수 느낌
키사키는 윗댓대로 멋대로 위험에 노출되서 어쩔수없이 그 위험를 이겨내고 있는거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