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기본 골자는 링크의 블로그에서 따왔다.
블로그의 원글 작성자와 다르게 소소하게 사견을 넣었다.
몇몇 글은 추가하기도 제외하기도 하였으며 이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글을 조금 쉽게 바꾸기도 했다. 인유에서 모유로 바꾼다던가.
참고로 댓글로 원글 작성자한테 인용 허가를 받았으며
삭제 요청이 있을 시 바로 삭제할 예정이다.
이미지는 추가한것과 삭제한것 변형한것이 있다.
예를들어 모유 수유 장면중에 ㅈㄲㅈ만 모자이크 된 짤이 있는데
혹시 몰라서 짤 바꿨음
이 글 보고 중국은 역시 미개하다고 까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았으면 함.
그렇게 따지면 당시 서양은 식인등이 일상이었고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9366848
https://naeiledu.co.kr/29068
보다시피 중국 관련 포스팅 자주 하시는 분이고
무례할 수 있으니까.
전근대에는 저런일 비스무리한게 흔했음.
우리나라도 80년대 시골에서 희귀병 앓던 사람이 10살 여아 간 빼먹은 사건도 있고
그걸 황실 차원에서 주도한 것이 어이없긴 한데 조선과 다르게 황실 권한이 세고
선대가 한 행동이 관행이 되버려서 그리 된듯
도가의 발상지이자 도교로 변질되어 연단술 등이 발원해서 생긴 문제임
즉 사이비가 생겼고 그것이 황궁(정치권)까지 닿아서 생긴 문제고
중국사에는 모유가 꽤 많이 등장한다.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도 차용된 설화 하나를 보자.
육룡이 나르샤를 보면은 고려의 권문세족이 모유먹인 돼지고기를 즐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진 무제 사마염이 왕무자의 집에 가게 되었다.
왕무자는 연회를 베풀게 되었는데 모두 유리그릇들 이었다.
백 명이 넘는 시녀들은 모두 비단(능라주단)의 옷을 입고
손에는 음식을 들고 있었다. 찐 새끼돼지는 살이 부드럽고 신선하여
보통 돼지고기와는 맛이 달랐다. 진 무제가 이를 신기하게 여기고 어찌 요리했는지 묻자
왕무자가 답하기를
"새끼돼지에게 사람의 젖을 먹인 까닭입니다." 하였다.
진 무제는 몹시 불만스러워 하며 음식을 더 이상 먹지 않고 떠났다.
라는 중국 설화를 차용한 것이다.
지금 나오면 동북공정이나 역사왜곡 등으로 논란 될 수 있을듯
이에 더해, 고대의 중국 의사들은 모유를 특효약으로 보았다.
명의 이시진의 본초강목의 인부, 인유 항목에는
'사람의 젖에는 비장을 보하고 신장을 이롭게 하는 효능이 있다' 하였다.
남조 송나라의 관리인 하상지는 과로로 병을 얻게 되자
모유로 자신의 병을 다스렸다고 송서에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의 저명한 의학자였던 왕도는 자신의 저술인 외태비요에서 귀머거리 치료법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다.
"겨자씨를 잘게 갈아 모유와 섞은 다음, 솜으로 싸서 귀에 넣으면 차도가 있다."
또한 모유는 치료약 뿐만 아니라 장수약이기도 했는데
한나라의 재상 장창이 치아가 없어 모유를 먹고 104살까지 살았다는 기록은 유명하다.
그런데 동진 시대의 의학자 갈홍은 포박자내편에서 장창의 이 일화를 두고
"장창이 부녀자의 젖을 먹은 것은 장수의 작은 기술이다." 하였는데
정작 갈홍 자신은 80세까지 밖에 살지 못하였다고.
명나라 사람들 또한 모유를 장기간 복용하면 장수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모유를 선가주 라고 불렀다.
이시진은 본초강목에서 복유가 라는 노래를 인용하여
매일아침 모유를 한되 마시면 다시 아이가 되어 오래오래 살게 된다 하였다.
명나라 사람이 모유를 마시고 장수 신기록을 수립하였다 하는데
명나라 때 사조제가 쓴 오잡조 라는 책에서는 양성(중국 하남성)에는 240세 된 사람이 살고있는데
곡식을 먹지 아니하고 다만 증손자 며느리의 젖을 먹는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글의 진위 자체가 의심스럽긴 하다....
글의 존재 유무가 아니라 글의 내용의 진위.
MAD MAX: FURY ROAD 중에서
청나라 황궁에서 소비되는 모유는 엄선된 120명의 유모들이 공급했는데
청나라 귀족들에게는 모유를 음용하는 것이 매우 보편적이었다.
당시 좋은 조건의 귀족 집안에는 대부분 유모를 두고 손자, 손녀에게 젖을 먹이는 것 이외에도
주인의 일상에도 공급케 하였으며 궁에는 유모를 관리하는 "내자부"라는 기관까지 설치하였다.
청나라 왕궁의 후비들에게 공급되는 모유는 북경의 교외에서 만들어졌는데
청나라 조정은 매우 엄격하게 유모를 선별하였다.
북경 교외의 두개 현을 대상으로 각 아문에서 이러한 부녀자들을 모았다.
남편이 있으며 신체가 건강하고 품행이 올바르며 자녀가 질병이 없고 건강하며
셋째 아이를 낳은지 3개월이 된 15~20세 이하인 양가의 부녀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각 계절마다 40명의 유모를 골라 황궁 내의 전용 방에서 몸조리를 하게 하였다.
이렇게 선발된 유모들은 "좌계내구" 라고 불렸다.
별도로 선발된 80명의 후보 유모들은 "점묘내구"라고 불리었으며
조정의 관련 부처에서 전문적인 음식을 제공하였고, 계절마다 유모들의 무리를 번갈아가게 하였다.
영화 中에서
블로그 링크 짤 보면 알겠지만
진짜 모유 먹는거 맞다.
모유의 소비가 가장 많았던 왕조는 당연하게도 청나라였으며
이러한 유행은 황실 귀족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청나라는 북방의 소수민족이었던 만주족이 세웠으며
그들은 북경에 정착한 이후에도 적지않은 만주족의 풍습을 유지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젖을 마시는 풍습"이 있었는데
청나라의 지배층들은 만주족의 "젖을 마시는 풍습"에
한족의 모유 양생법이 결합하자 청나라의 귀족들은 모유 음용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청나라 황제 가운데 모유 음용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황제는 옹정제와 건륭제가 있다.
이 두 황제는 궁정 비방인 귀령집에 가장 큰 흥미를 지녔다.
귀령집은 본디 청의 궁중 비방이 아닌 명의 궁중 비방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민간 비방이었던 도가의 연단술이 명나라 가정 연간에 궁중에 들어온 것이다.
명 세종 가정제 주후총은 선도를 신봉하여 천하 명의들에게 선약을 가져오도록 어명을 내렸다.
당대에 유명한 방사 소원절과 도중문이 도가의 서적인 운급칠첨에 기록된 노군익수산을 새롭게 배합하여
불로장생의 선약을 황제에게 바쳤다.
"노군익수산"은 본디 갈홍이 처음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개량한 후에 효과가 좋았다.
명 황제 주후총은 매우 기뻐하며 이 약의 이름을 거북처럼 장수한다는 뜻의 귀령집으로 명명하였다.
귀령집은 명나라 궁중 비방중에서 보물이었으며, 청나라에 이르러서는 비방은 있으나 실제 약은 없었다.
그러나 이를 복용하고 싶었던 옹정제는 옹정 8년 궁중의 어의들에게 귀령집을 만들도록 하였고
이것의 제작에 성공하자 어용 성약이 되었다 한다.
청나라의 귀령집에는 당귀, 두충, 청염, 생지, 쇄양, 숙지, 보골지, 천우근, 구기자, 천문동, 육종용 등의 33가지 맛의 약초와
모유, 초(초산 醋), 우물물, 냇물, 소주 등이 들어간다.
이 비방을 만드는 과정은 복잡하고 신비스러운데
35일간 고았다가 다시 우물물에 7일을 담가두어야 하며 닭이나 개를 피하여야 하며
또한 귀령집은 필히 황주(중국의 증류주)와 함께 복용하여야 한다고 한다.
청나라의 궁중 문서인 귀령집방약원위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데
"복용 후에는 온몸에서 열이 나며, 모든 곳이 순통하고 단전은 따뜻해지며
움츠렸던 양기가 발동한다" 하였다. 복용 후의 반응을 보면, 고대 제왕들이 즐겨 먹었던 "장양약(정력제)"의 효능과 비슷하다.
웅정제는 귀령집에 큰 관심을 지녔으며 후대 황제들 또한 하루라도 마시지 않으면 아니되는 보약으로 신봉하였다.
이리하여 청나라의 황제들은 날마다 모유를 복용하게 된 것이다.
이 밖에도, 몸이 약했던 광서제가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자 어의가 그에게 준비해 준 구명 비방은 따뜻하게 데운 모유였다.
그러나 청 황실의 모유의 최대 소비자는 자희 태후(서태후)라 할 수 있다.
자희 태후는 함풍제의 황후이고 동치제의 생모이다.
자희 태후가 26세 되던 해에 함풍제가 붕어하자 갓 6세가 된 재순이 황위를 계승하고
자희 태희는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자희 태후는 매일 반그릇의 신선한 모유를 마셨는데 이 습관이 죽는 날까지 지속되었으니
무려 47년을 마신 셈이다.
자희 태후가 모유를 마신 것은 피부미용을 위해서 마신 것이었는데
어약방에 매일 평안 양생약을 올리도록 규정하였고
이 약은 때와 절기에 따라 각각 다르게 만들었다.
자희태후는 일찍부터 수절하고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았으며 몸매는 변화하지 않았다.
당시 자희 태후의 시종을 맡았던 여관 덕령은 자희 태후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는데
자희태후의 몸에 검버섯이나 반점이 없었으며 어린 소녀의 몸매(?)와 같았다고한다.
사진의 왼쪽 두번째 뒷쪽이 덕령이고 중앙의 인물이 자희태후(서태후)이다.
솔직히 내 생각에는 별 효용이 없는듯 하다.
덕령은 궁중생활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영문판 어향표묘록을 출판하였고
이 책에서 그녀는 자희 태후의 미용은 모유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말하였다.
자희 태후는 신선한 모유를 마시는 것 이외에도 진주가루(!)를 함께 복용하였는데 이 또한 그녀가 매일 복용한 비방이다.
사실, 모유가 미용에 효과가 있다는 것을 자희 태후가 처음 발견한 것이 아닌 고대부터 있던 비방으로
송나라 정부에서 편찬한 태평성혜방에는 흑반을 제거하는 비방이 이렇게 적혀있다.
밀타승 2량을 잘 갈아서 가루로 만들고 여기에 모유를 섞어서 얼굴에 바르며 매일 밤에 사용한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푸이의 유모는 3년동안 푸이의 유모 노릇을 하였는데, 정작 그녀의 딸은 영양 결핍으로 죽었다.
그 소식으로 인해 모유의 품질이 상할까 염려한 순왕부에서는 그 소식을 그녀에게 전하지 않았다.
9년째 되던 해에 한 부차(婦差/청나라 때의 여관)와 태감이 싸우자
태비는 그들을 내쫓기로 하였고 유모 또한 데리고 나가도록 결정하였다.
온순하고 모든 것을 참아냈던 이 사람은 미소와 침묵으로 9년 세월을 지낸 후,
비로소 자신의 딸이 이미 죽고 없음을 알았다.
블리자드가 중국과 친한 이유가 있었구나
블리자드가 중국과 친한 이유가 있었구나
모유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