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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위해 도망친 노복들의 이야기.jpg


업복이.png

 

사진 출처 : 드라마 추노. 후금/청의 보오이와 조선의 노비는 엄밀히 말해 비교적 차이가 존재하나, 이보다 적절한 짤을 찾기가 힘들어 삽입했다.

 

 

후금사 모음집

 

1621년 윤 2월 무렵의 후금은 폭풍전야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심양-요양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 계획의 실행이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1619년의 철령 공격 이후 최대의 공세 작전이었으며, 후금의 향후 명운을 결정지을 만한 대규모 전쟁 수행이었다. 그렇기에 당시 후금의 장수들은 전쟁에 앞서 부대를 철저히 준비시켰고, 병사들은 활과 화살, 검과 창을 준비하고 말들을 두둑이 살찌우며 임전태세에 도달했다.


그러나 이렇게 국가적으로는 임전 상태에 돌입했다고 해도, 그 국가에 소속된 백성들의 감정이란 통제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런 와중에도 그들 사이에서는 남녀간의 사랑이 존재했다.


윤 2월 26일, 후금에서는 이 남녀간의 사랑으로 인해 촉발된 사건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양구리2.PNG

 

삽화 출처 : 칼부림, 양구리

 

 

 

해당 판결의 당사자는 누르하치의 6촌 종제이자 당시 후금의 최고위 장수였던 구사 어전(gusai ejen) 아둔(adun)의 집에서 일하고 있던 보오이(booi, 가속인) 남자 1명, 그리고 누르하치의 사위이자 아둔과 마찬가지로 후금의 최고위 장수였던 양구리(yangguri efu)의 집에서 일하던 보오이 여자 1명이었다.1


이들이 서로 모시는 주인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사랑까지 하게 된 이유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같은 후금 한실에 소속된 국가 최고위의 주인들을 모신 만큼 집안간의 왕래가 많은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를 만나 마음을 주게 되었고, 이윽고 연인관계로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들의 관계는 주인의 허락이 없이 이루어진 사통(latufi)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이 주인에게 자신들의 관계를 알리지 않고 사통한 까닭은, 보오이 계층으로서 감히 다른 주인의 보오이와 눈이 맞았다는 사실을 함부로 주인에게 알릴 수 없었던 탓으로 보인다. 만약 두 사람이 이 사실을 자신들의 주인에게 고했을 때에 양구리와 아둔, 두 사람이 어떻게 반응했을 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두 사람은 주인들이 자신들의 관계를 허락치 않을 것이라 지레 걱정을 했던 것 같다.


몰래 정을 통하던 그들은 그런 관계에 지쳤던지 함께 도망을 상의하였고, 실제로 함께 도주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안가서 다시 돌아왔다. 당시 후금은 1619년의 사르후 대전 이후 사실상 최대 규모의 전시체제가 가동되고 있던 상황이었고, 그런 만큼 상황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최고위 장수 두 명의 가속인들이 함께 몰래 도망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탓에 도망쳤다가 함께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기 전에 진즉에 도주를 포기하고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는 그들 모두 주인이 고위급이자 한실의 일원이었으며, 후금이 총력전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함부로 야반도주를 자행한 것은 자칫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트릴 수 있었던 탓에 나름 주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런 탓에 보오이들의 문제에 대해 이례적으로 후금의 한인 누르하치가 직접 결론 내리게 되었다. 

 

누르하치10.PNG

 

삽화 출처 : 칼부림

 

 


이 문제에 대해 누르하치는 그들에게 엄격한 처벌을 내릴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글을 내려 아둔의 남자 가속인과 양구리의 여자 가속인의 관계를 정식으로 인정하고, 그로 말미암아 두 사람을 정식으로 맺어주었다.2


전쟁 직전에 일어난 야반도주와 관련하여 누르하치가 이런 결론을 내린 까닭은 여러가지로 추정된다. 첫째로, 이들이 도주를 하긴 했으나 곧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왔다는 것이 참작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하나 만으로는 누르하치가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도리어 부부로 맺어준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누르하치의 관용에 대해서는 이 보다 많은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이 둘의 도주가 단순한 적전이탈이나 탈영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서로의 사통 관계 때문에 일어난 문제였던 것이 컸다. 탈영등의 문제였다면 대규모 원정 직전에 발생한 문제이니만큼 단호하게 엄격한 군령을 적용하였겠으나, 그저 자신들의 연인 관계가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에 함께 도주를 선택한 문제였기 때문에 관용을 베풀었을 것이다.


셋째로, 서로 주인이 다른 보오이들의 연인 관계를 인정해 주는 사례를 만듬을 통해 보오이들이 연인과의 관계 같은 상대적으로 소소한 문제로 도주를 시도하는 상황을 차단하고, 먼저 주인에게 고하여 관계를 인정 받는 시도를 하게끔 조치하여 불필요한 인력 이탈과 낭비 문제등을 차단하려 했을 공산이 있다.


넷째로, 당시가 전쟁 직전이었다는 상황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전쟁 직전이기에 더욱 엄격하게 군민의 이탈을 단속하는 것이 기본 모토겠지만, 이들이 도주한 이유가 '전쟁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서로간의 연정 때문이었으므로 도리어 이들의 관계를 인정해 주고 맺어줌으로서 전쟁을 앞둔 군병들의 지나친 긴장을 완화시키고 국가의 고조된 분위기를 조금 이완시키는, '훈훈한 미담'으로 활용코자 했을 공산이 있다.


다섯째로, 누르하치 본인의 관용적인 면모를 선전하기에 두 사람에 대한 선처와 그를 통한 긍정적인 미담의 제작이 좋은 도움이 된다. 누르하치는 자신이 관용을 베풀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웬만하면 관용을 베풀기를 선택하였다. 당장 그의 거병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있었던 옹골로 공략 당시, 자신을 저격한 오르고니와 로코를 용서한 사례도 이와 같은 부분에 해당될 것이다.3 해당 문제 역시도 누르하치 본인이 관용을 베풀 수 있는 범위에 들어서 있었으므로, 이들을 맺어줌으로서 누르하치는 자신의 관대함을 선전하는 동시에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시키고자 했을 공산이 존재한다.


실제로 누르하치가 이 중에서 몇 개의 이유를 고려했는지, 혹은 모든 이유를 전부 고려하며 그들을 용서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사료상에서는 누르하치의 마음 속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사랑에 빠져 도피까지 하려 한 두 명의 보오이들을 용서하고 맺어준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사료문에 '라투피(latufi)'라는 단어가 쓰인 탓에, 이 둘의 관계가 한쪽 혹은 양쪽이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한 상태에서 서로 간통(불륜)을 저지른 관계라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실 이 때의 라투피는 사통, 밀통 으로 해석해야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만주어 '라투피'는 '붙다', '묻다', '간통하다', '밀통하다', '사통하다'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간통의 경우 이미 결혼을 한 사람이 자신의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와 몰래 정을 통하는 것을 의미하며, 사통의 경우 부부관계가 아닌 이들이 서로간에 몰래 정을 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밀통 역시 사통과 비슷하다. 이 둘은 간통보다 명백히 범위가 넓다.


이 사건의 경우, 사건 당사자 두 명이 서로 모시는 주인들 몰래 정을 통한 경우이기에 '라투피'라는 단어가 쓰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즉슨, 간통이 아닌 밀통의 의미로 '라투피'가 쓰였다는 것이다. 사건 이후 이들이 법리에 의해 정식으로 맺어졌으니, 이 쪽의 해석이 실제적으로 더욱 가능성이 높다.



1.보오이와 관련하여서는 최형섭, 「滿文 일기 《閒窓錄夢》을 통해 본 보오이(booi)의 삶과 정체성」,  『中國文學』 99, 한국중국어문학회, 2019;마크 C.엘리엇, 『만주족의 청제국』, 이훈·김선민 역, 푸른역사, 2009;임계순, 『청사』, 신서원, 2001등을 참조.

2.『만문노당』 권18, 천명 6년 윤 2월 26일.

3.『만주실록』 권2, 을묘년 2월.

 

본인 작성. 추천주면 감사

댓글
  • 거북행자 2025/02/23 14:38

    비유하기 애매하지만, 서양 중세의 사용인이나 로마 시대의 고급 노예? 라고 봐야 하나
    아무리 전시라지만 단순 노예였다면 누르하치가 직접 손을 대기보단 내부에서 조용히 다졌을 텐데

    (pRNLJr)

  • 미하엘 세턴 2025/02/23 14:41

    무엇으로도 비교군을 형성하기 힘들지만 대체적으로 가속인 정도라고 칭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음.

    (pRNLJr)

(pRNLJ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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