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음….”
킹 헤일로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주어 들어올렸다. 시야가 희뿌옇고 몸이 노곤한 것이,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
눈을 움직여 이리저리 둘러보니 난생 처음 보는 살풍경한 방이 보인다. 벽지도 바르지 않아 회색 콘크리트 벽이 그대로 드러난 방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병과 주사기들이 무더기로 쌓여있을 뿐이었다. 창문도 꼼꼼히 막아둔 데다가 낡은 백열 전구 하나만이 켜져 있는 통에 그마저도 잘 볼 수 없었다.
‘꿈…인가?’
도저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애당초 킹 헤일로라는 우마무스메는 이런 허름한 공간과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다.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그녀라면, 휘황찬란한 인테리어로 장식된 고급스러운 방에 놓인 천개 덮인 침대에서 잠을 청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어째서 이런 곳에서 깨어난다는 말인가. 그녀가 별 고민 없이 꿈이라고 여긴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졸려….’
무언가 깊게 고찰을 해보려 해도 안개가 낀 듯 흐릿한 머리가 사고를 막는다. 그녀의 명석한 두뇌도, 강철 같은 의지도, 이 압도적인 무력감 앞에서는 저항할 수 없었다. 온몸을 녹여내리는 듯한 나른함에 몸을 맡기고 다시 잠을 청하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할 뿐이다.
킹 헤일로는 몰려오는 수마 앞에 저항하지 않고 다시금 눈을 감았다. 반쯤 잠든 의식 속에서 이런저런 풍경이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킹의 어머니 리간토나가 주최한 파티. 정작 리간토나는 바쁜 일정 탓에 짧게 인사만 하고 자리를 떴고, 그녀의 딸인 킹 헤일로가 그 빈자리를 채웠다.
킹의 눈길을 끌었던 남자 한 명,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반갑게 인사를 했었지. 생각 외로 마음이 잘 맞아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센스도 좋아 마침 목이 마르다 생각했을 때 무알콜 칵테일 한 잔을 권했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됐더라? 기억이 나질 않는다.
“헉!”
킹이 눈을 부릅뜬다. 그 남자가 건넨 음료를 먹은 직후 기억이 부자연스럽게 끊겼음을 상기하자 그녀의 직감이 경종을 울린다. 몰래 잔에 수면제를 타 두었음이 분명하다.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고, 호흡이 가빠진다. 킹은 힘겹게 몸을 움직여 비척비척 일어섰다.
“으….”
이상하리만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수면제 외에도 무언가 특별한 약물을 사용한 것일까? 킹은 벽을 짚어가며 한 걸음 한 걸음 문을 향해 나아갔다.
그 남자의 속셈은 무엇일까? 약을 먹고 의식을 잃은 자신을 이런 곳으로 몰래 옮겨 오다니, 불안한 예감밖에 들지 않는다. 최소 몇 주, 혹은 몇 달에 걸쳐 치밀하게 계획한 함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끼익.
“...!”
“아, 일어나셨네요.”
문까지 대여섯 걸음 정도를 남겨둔 그 순간, 예의 그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남자는 숨을 몰아쉬며 벽에 반쯤 기대어 있는 킹을 보고 싱긋 웃었다.
“몸도 안 좋으실 텐데 무리하지 마시고 앉아서 쉬세요.”
“자, 잠깐…!”
남자는 대뜸 킹의 손목을 잡아 도로 침대로 이끌었다. 킹은 있는 힘껏 저항해보려 했지만 단 한순간도 버틸 수가 없었다. 우마무스메와 히토미미의 완력 차이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꺅!”
결국 힘없이 침대 위로 나동그라지는 킹. 킹은 여유 넘치는 태도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에게 한껏 경계심을 드러내며 그의 눈동자를 쏘아보았다.
“당신…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뭐, 별 건 아니에요. 즉효성 수면제를 먹고 비틀대는 당신을 부축해준다는 핑계로 파티장에서 빼낸 다음, 자고 있는 동안 신경근 차단제를 조금 주사했을 뿐이에요.”
으르렁대며 묻는 킹에게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남자. 그의 시선은 킹의 목덜미를 향한다. 그 시선을 따라 손으로 만져 보니 과연 옅은 주삿바늘 자국이 남아있었다. 이 방에 쌓인 약병과 주사기들은 그런 목적이었던 것인가.
“...목적은?”
킹은 두려움을 애써 삼키며 재차 물었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외국은 아닐 터. 시간을 끌면 이상함을 알아차린 자들이 곧 달려와줄 것이다. 여차하면 핸드폰을 통해 위치 추적을 할 수도 있고 말이다.
“당신의 어머니… 리간토나에게 해묵은 원한이 있거든요. 그녀가 내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갔듯, 저도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고 싶어서요.”
남자는 킹의 속셈을 알아차렸음에도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유감인걸. 내 어머니는 나 같은 반푼이에게 손톱만큼의 애정도 느끼지 않으신다고.”
킹은 코웃음을 치며 받아쳤다. 하지만 그리 대답하는 그 목소리에는 짙은 슬픔과 씁쓸함이 서려 있었다. 아닌 척 하면서도 내심 모친의 애정을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어설픈 연기를 통해 드러나고 말았다.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조금 전부터 모친에게서 우마톡이 어마어마하게 오고 있는데요. 몇 시간 동안 대답 좀 하라고 애걸했다고요. 30분 전쯤 경찰에 신고했다는 메시지도 보냈고요.”
남자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저… 정말이야?”
킹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묻는다. 그 퉁명스러운 어머니가 정말로 납치당한 자신을 걱정하고 있단 말인가?
“글쎄요, 사실 몰라요. 핸드폰은 파티장 비상계단 난간 사이로 떨어뜨렸거든요. 꽤 높은 데서 떨어뜨렸으니까 거의 확실하게 부서졌겠죠.”
“당신…!”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바꾸었다. 킹은 격한 분노를 터뜨리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
하지만 자신을 핥듯이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에 분노는 빠르게 잦아들고 두려움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저 남자의 말대로 핸드폰이 부서졌다면, 구원의 손길이 오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어쩌면 영영 아무도 자신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핸드폰이 부서졌다는 것은 정말일까? 이 정도로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실행할 정도니, 오히려 자신이 의식을 잃은 동안 핸드폰을 이용해 알리바이를 만들고 상황을 교란했을지도 모른다.
“읏…!”
남자가 셔츠 소매의 단추를 풀고 소매를 두 번 접어올린다. 킹은 별 거 아닌 그 행동에서마저도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몸을 움츠렸다.
“하핫….”
한 꺼풀 허세가 벗겨지고 남아 있는 것은 연약한 여자아이 한 명. 무서워서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리려 하는 그 모습으로부터 당당한 ‘킹’의 면모는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남자는 그 사실이 어쩐지 너무도 반가워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 약하디 약한 아이가 그 리간토나의 딸이라니. 이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다면 난감해질 수도 있었는데, 이 아이는 저항할 의지 자체를 잃고 공포에 집어삼켜져 버렸다. 생각 이상으로 일이 너무 쉬워져서 허탈함마저도 느껴질 정도다.
“복수…를 한다고 했었지. 어떤 식으로… 하려는 거야…? 도, 돈이라면… 내가 얼마든지….”
킹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묻는다. 어설프게나마 교섭을 해 보려는 시도였을까. 하지만 역시 무르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밀실에 남녀 한 쌍 만이 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하나 뿐이잖아?”
“아, 안돼! 저리 가! 꺄아아아악!”
남자는 킹의 미약한 희망을 단숨에 부숴버리고 침대 위에 누운 그녀를 덮쳐들었다. 킹은 거리낌 없이 자신을 탐하는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한 팔로 그녀의 양 팔을 봉하고 그대로 옷을 찢듯이 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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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자의 손은 이제껏 그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킹의 비밀스러운 곳으로 향했다. 킹은 난생 처음 느껴보는 파멸적인 공포감과 뒤섞여 피어오르는 야릇한 기대감에 아랫배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감각을 느꼈다. 그녀는 그 낯선 감정과 남자의 우악스러운 손길을 뿌리쳐보려 했지만, 그 헛된 저항은 되려 남자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뭐야, 이거?!”
킹의 트레이너는 질색하며 책을 내려두었다. 이런 낯뜨거운 책이 킹의 책장에 꽂혀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얼굴에 불이 붙은 듯 화끈거렸다.
-트레이너, 내 방 책장에서 서류 하나만 가져와줄 수 있어? 아침에 서두르느라 챙기는 걸 깜빡했지 뭐야.
그래, 자신은 분명 킹이 두고 온 서류를 가져다 주기 위해 그녀의 방에 왔다. 눈에 띄는 위치에 놓여 있던 서류봉투를 들어올리자, 순정만화 풍 표지를 가진 작은 책 하나가 드러났다. 킹이 어떤 만화를 좋아하는가 궁금해 표지를 들춰보니, 그 정체는 더없이 질척질척하고 음습한 관능소설이었던 것이다.
‘아니, 뭐… 킹도 한창일 나이니까 이런걸 좋아할 수는 있어. 그건 이해해. 그런데. 이 삽화… 어떻게 봐도 킹이잖아? 글에서도 [킹 헤일로]라고 명시하고 있고….’
책 내용의 절반을 차지하는 삽화에는 어떻게 보아도 킹 헤일로와 똑같이 생긴 여자 주인공이 그려져 있다. 본문에서 [킹 헤일로]라 지칭하는 것을 보면 그녀를 묘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게다가 이 남자는… 나… 잖아? 뭐지, 대체?’
게다가 킹을 비열한 함정에 빠뜨리는 상대역은 트레이너 자신이다. 이름에 대한 묘사는 일절 없이 ‘남자’라고만 말하고는 있지만, 삽화에 그려진 얼굴은 틀림없이 자신의 것이다.
‘혹시… 괴롭힘의 일종인 것은 아니겠지? 혹시 모르니까 마저 확인해 봐야겠어.’
킹을 이렇게나 집요하게 괴롭히는 내용으로 빼곡히 찬 것을 보면 그녀에게 모종의 위해가 가해질 것이라는 예고일지도 모른다. 트레이너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책장을 넘겼다.
작중의 남자는 킹을 억지로 범하고 엉망이 된 몸을 카메라로 찍은 후, 주위에 적당히 얼버무려 두었으니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처신하라는 말과 함께 떠나갔다. 어설프게 주위에 도움을 청했다가는 이 사진을 퍼뜨리겠다는 협박도 잊지 않았다.
정사를 치르며 킹을 쾌락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묘사가 너무도 노골적이고 강렬하여, 트레이너는 킹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원래의 목적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책의 내용에 더없이 집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첫 거사를 치르고 며칠이 지난 후, 남자가 킹에게 연락을 해서 인적 드문 곳으로 불러내는 시점에 도달했을 때.
“트레이너!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연락에 답장도 안 하고! 내가 위치 말해줬잖…”
기다리다 지친 킹이 잔뜩 화난 기색으로 방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킹은 트레이너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다가, 그의 손에 들린 익숙한 책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평상시에는 다른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도록 서랍 깊숙이 숨겨두는데, 하필 어제 갑자기 몸이 달아올라 셀프뾰이를 할 때 쓰고 책장에 대충 꽂아둔 것이 문제였다.
“자, 자, 자, 잠깐만! 그걸 왜 보고 있는 거야?”
“아, 아니! 이거는 너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읽은 거야!”
상황파악이 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책을 빼앗는 킹. 트레이너는 허둥대며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얼굴이 벌게져 있었던 탓에 설득력이 없었다.
“...어디까지… 봤어?”
킹이 떨려오는 숨을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묻는다. 남자와 킹 헤일로가 첫 거사를 치르기 전, 그러니까 킹이 사라진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파티장에 머무르던 시점까지만 봤다면 아직은 만회할 수 있다. 추종자가 써 준 팬픽이라던가, 취미로 끄적인 소설이라던가 하는 이야기로 둘러대면 트레이너도 더이상 캐묻지는 못할 것이다.
이 소설이 유명 동인작가, [DIGI-TTANG]과 [도보 메지로 선생]에게 거금을 들여 의뢰한 특별합동 커미션이라는 사실만은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된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어머니에 대한 애증섞인 사랑, 트레이너를 향한 타오르는 연정, 내심 품고 있는 파멸욕구를 극한까지 버무린 이상성욕 종합선물세트라는 사실만은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다.
‘...잘못 대답하면 죽는다…!’
트레이너는 킹의 눈빛에 담긴 그녀의 간절한 바람을 읽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킹은 이 소설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하는 듯 보인다. 소설책을 보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들켰으니, 비교적 얌전한 내용이었던 초반부만 봤다고 하면 괜찮지 않을까?
“처, 첫 두세장 정도…? 어, 맞아! 딱 그 정도만 봤어! 하하!”
그리 결론내린 트레이너가 멋쩍게 웃으며 발뺌을 한다. 하지만 그를 오랜 시간 봐 왔던 킹은 그것이 거짓말임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철컥.
“어… 킹 헤일로 양? 문은 왜 잠그시는 거죠? 뭘 하려고?”
킹이 지체없이 문을 2중으로 잠그고 도어체인까지 건다. 트레이너가 조심스레 묻자, 킹은 섬뜩한 미소를 내보였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밀실에 남녀 한 쌍 만이 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하나 뿐이잖아?”
27p 좌상단에 써 있는, 남자가 처음으로 킹을 덮쳐 강제뾰이할 때 내뱉는 바로 그 대사! 이 상황에서 저 대사를 썼다는 것은 역으로 킹이 자신을 강제뾰이한다는 뜻!
“킹! 진정해! 뾰이는 안돼! 이런건 적어도 네가 졸업하고 나서…!”
“어떻게 이게 뾰이를 말하는 문장이라는 걸 한번에 알았어?”
“...아차.”
“역시 본 거 맞잖아!”
트레이너는 자신이 킹의 유도신문에 걸려들었음을 한발 늦게 깨달았다. 무어라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킹은 번개같이 달려들어 트레이너를 침대 위로 밀어 넘어뜨렸다.
“킹! 안돼! 이러지 마!”
“이런 비밀을 알아챈 남자를 아무렇지 않게 보내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아,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을테니 제발!”
“걱정 마…♡ 저항하지만 않으면 아프지 않게 끝내줄 테니까…♡”
“응오오오오옥!”
그 눈물겨운 저항이 무색하게도, 트레이너는 조금 전 읽었던 관능소설의 주인공이 그러했듯 킹과 질척질척한 뾰이를 하게 되었다.
주인공이 킹을 범한 것과는 반대로 킹에게 일방적으로 쥐어짜이는 신세가 되긴 했지만.
우라라는 아무 것도 못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