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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후기 조선군의 편제는 원거리 병과가 압도적으로 많았을까?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시리즈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1편 - 소개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2편 - 송덕기. 그리고 현대 택견의 시작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3편 - 두 거인의 죽음과 혼란기의 개막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4편 - 대한택견회의 부상과 이면의 문제점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5편 - 대고소시대와 돌아온 송덕기 택견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6편 - 결련택견협회의 비상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7편 - 통합 대회와 대한택견연맹의 체육회 가입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8편 - 황금기의 뒷면과 또 다른 계승자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9편 - 결련택견협회의 내전과 위대태껸의 등장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10편 - 태껸춤과 정통성 논쟁 上편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11편 -태껸춤과 정통성 논쟁 下편-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12편 - 옛법택견의 짧은 봄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13편 - 서울시 문화재 결련택견과 택견진흥법 -


오싹오싹 택견 시리즈

1편. 택견 4대 협회의 간략한 특징 요약 및 기술 모음집

2편. 택견은 왜 주먹이 아니라 발차기부터 배웠을까? 

3편. 택견에도 개파조사가 있다?!

4편. 놀이인가 무술인가? 기록을 통해 알아보는 구한말 택견.

5편. 택견과 석전의 상관 관계

6편. 제 1회 택견 경기와 실종된 활갯짓

7편. 택견의 손질은 본래 검술에서 왔다(?!) 上편 

8편. 택견의 손질은 본래 검술에서 왔다(?!) 下편

9편. 조선의 중앙군 훈련도감과 택견 上편

10편. 어째서 후기 조선군의 편제는 원거리 병과가 압도적으로 많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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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여러분, 택견빌런입니다.
지난 시간에 여러분께 예고 드린 바와 같이 오늘 글에선 후기 조선군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분석을 해 보고자 합니다.
다만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조선군에 대해 무얼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역사에 관심이 딱히 없으신 분이라고 해도 일단 조선군이 활을 잘 쐈다던가, 화차와 같은 화약 무기 개발에 신경을 썼다는 정도의 이야기는 다들 들어보셨을 테고, 조금만 더 딥하게 전쟁사에 관심을 가지셨던 분들이라면 갑사로 대표되는 기병이나 조선의 군단병(?) 팽배수를 떠올리시는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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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조선군의 모습.png)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위의 이미지들은 대체로 조선 전기~중기 사이의 조선군의 모습에 더 가까우며, 화약 무기 활용에 적극적이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중기~후기의 조선군은 우리에게 익숙한 전기~중기의 조선군과는 꽤나 다른 모습을 가졌습니다.
그렇다면 중기~후기의 조선군은 대체 어떤 무장과 전술을 바탕으로 한 조직이었을까요?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선 임란 이후 시작된 일련의 군제 변화를 따라가야 할 필요가 있으며, 16세기 이후의 조선군에게 있어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병서(兵書)가 있다면 바로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저술한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들 수 있을 겁니다.
1. 척계광과 기효신서


기효신서를 저술한 척계광은 산동성 등주 사람으로, 북에서는 장성을 침노하는 몽고족을, 남에서는 명나라의 해안 지방을 약탈하는 왜구를 일소한 명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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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째 얼굴상이 이 분을 닮으셨습니다...?)


???: 차 빼 이 새끼야 바뻐~!




그는 단병접전에 능한 보병들로 구성된 왜구를 상대하기 위해 사(궁수), 포(총포수), 감(창검수)으로 부대를 구성시켰고 이를 《절강병법》이라 칭하였으며, 단순한 보병전술서로 그치지 않고 병력의 징집, 훈련, 군수물자의 생산과 보급까지 총망라 하여 그 요체를 기효신서에 서술하였습니다.
이러한 척계광의 절강병법에 있어 특히 주목 받은 용병술은 바로 다양한 종류의 무기를 든 병사들로 구성된 분대전술(원앙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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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1592에 묘사된 척가군의 원앙진)




일반적으로 등패수 둘, 장창수 둘, 낭선수 둘, 당파수 둘, 포수(삼안총) 둘, 그리고 이들을 모두 총괄하는 기수 하나까지. 총 11~12명을 1개 조로 편성하여 


원거리에선 화창을 장비한 당파수와 삼안총을 든 포수, 그리고 활을 장비한 장창수가 화력투사를 통해 적을 제압하고,





(삼안총을 장비한 포수가 교전 중에 사격을 가하는 모습)


근거리에선 등패와 장창, 낭선, 당파가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 주며 유기적으로 협력해 적을 제압하는 것을 핵심으로 여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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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군 등패수가 적의 공격에 노출 당하면 처하면 후방에 위치한 당파수가 구원을 해 줍니다)





(이 영상에서 원앙진이 어떤 방식을 통해 근접해 오는 적들을 제압하는지가 잘 묘사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술을 통해 왜구를 효과적으로 토벌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자 척계광의 절강병법은 빠르게 명군 사이로 퍼져 나갔으며, 임진왜란 시기 조선으로 파병된 남병(명나라 남쪽 지역의 병사들)의 활약을 본 조선 조정은 훈련도감을 중심으로 기효신서의 체계를 흡수하는 한편 적군인 일본군의 전술 또한 참조하여 종래와는 다른 형태의 전면적 군제개혁을 시도하게 됩니다.
네, 이른바 조선 중~후기를 대표하는 군제인 삼수병 체제가 그것이었습니다.
2. 절강병법의 토착화. 삼수병 체제
삼수병이란 활을 쏘는 사수, 조총을 쏘는 포수, 그리고 등패, 낭선, 장창을 들어 단병접전을 담당하는 살수. 이렇게 병과를 3개로 나누어 부대를 구성하는 것으로,


척계광이 절강병법에서 부대를 사(궁수), 포(총포수), 감(창검수)으로 나눈 것을 계승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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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효신서의 원앙진을 취하고 있는 조선군 살수대)



하지만 마냥 절강병법을 배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데, 그 이유는 1개의 살수(감) 분대(원앙진)의 구성원 중 장병기를 든 병사들에게 활을 휴대시켜 필요할 경우 궁병(사)의 역할을 수행하게 하고, 편제를 함에 있어 살수와 포수의 비율을 4대 1로 하여 투사무기를 통한 원거리 제압보다는 적병과의 단병접전에 높은 비중을 둔 종래의 절강병법과는 달리


누가 활의 민족이 아니랄까봐 조선군은 살수로부터 사수(궁병)를 따로 떼어낸 다음 포수(조총병)의 비율을 크게 늘리는 등, 병종의 편제 및 운용에 있어 유의미한 변화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살수는 오로지 백병전만을 담당하고 사수와 포수는 원거리 화력투사에만 집중하는. 일종의 병과 분리를 통한 분업화를 시도하였던 셈인데, 확실히 이러한 개념은 모든 보병은 근거리 전투 뿐만이 아니라 원거리 전투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살수 분대에조차 장창수에게 활을 들려주고 삼안총을 든 포수 둘을 포함 시킨 절강병법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죠.




external/muye24k...

(실제로 이러한 방향성을 반영한 것인지 18세기에 기록된 무예도보통지의 원앙진을 보면 기효신서의 원앙진과는 달리 삼안총을 든 포수가 사라지고 장창수가 넷으로 늘어난 것을 확인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곧 척계광이 기효신서에서 제시한 필승전략 전투법을 조선이 100퍼센트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실제로 절강병법을 따르던 명군에선 나타나지 않던 문제가 조선군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근접 병과의 숫자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는 것이었죠.
3. 후기 조선군의 문제점.
후기 조선군의 근본적인 약점은 바로 근접전을 전담할 병사들의 숫자가 적어도 너무 적었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모든 병사들이 머스킷으로 무장한 전열보병의 시대에조차 보병 돌격에 이은 백병전은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한 수로 평가받을 만큼 중요한 입지를 가지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조선에 본격적으로 기효신서의 체계가 정착된 17세기는 아직 서양에서조차 대중적으로 테르시오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총창진이 전장의 주역이었던 시기로,




테르시오 - 나무위키


(파이크와 머스킷으로 무장한 총창진의 모습. 종래의 기병 돌격으로는 이러한 파이크 방진을 무너뜨리기 어려워 기사로 대표되는 중기병의 시대를 끝낸 게임체인저였습니다.)




다시 말해 화약 무기가 아직 냉병기를 완전히 압도하지 못한 시대였습니다.
하물며 동시대 서양에선 총창진의 견고함에 밀려 거의 퇴출 되다시피 한 철기(鐵騎 : 중기병)가 여전히 현역이었던 동북아의 상황상, 돌격으로 진을 부수러 들어오는 적과의 단병접전의 중요성은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덜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적은 숫자의 근접 병과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7세기와는 약 100여년의 시대적 간극이 있긴 하지만 18세기 훈련도감에 소속된 병사들의 보직을 확인해 보면 포수가 2440명이고 살수가 738명, 기병이 833명으로(훈련도감의 경우 사수가 없고 전원이 포수였다고 합니다), 원거리 전투를 담당하는 포수에 비해 이들을 보호해 줄 살수의 숫자가 지나치게 적은 것을 확인 가능한데,





(ㄹㅇ 띵작중의 띵작. 이게 역사 시네마지)




실제로 사르후 전투에서 침착한 화력 통제를 통해 전투 초반엔 나름 선전했던 조선군이 후금군에게 패한 결정적 이유가 모래바람을 타고 들어온 청군의 기병 돌격을 전체 병력의 25%에 불과했던 살수들이 버텨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떠올려 보면 17세기의 조선군의 편제도 18세기 조선군의 편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을 짐작 가능하며,


"전훈 분석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닐텐데 적의 돌격을 받아내어 줄 수 있는 살수의 숫자를 왜 늘리려 하지 않은 거지?" 라는 의문이 절로 들 정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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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당시의 후금군이 동북아 최강의 기병 전력을 자랑하는 이들이었다는 건 좀 감안해 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 : 야! 2등도 잘 한 거야!!!



하지만 사르후 전투를 비롯한 정묘/병자 호란의 여러 패전들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이 18세기의 기록에 나온 것과 같은 편제를 유지한 것은 조선군이 안일했다기 보단 현실적으로 다수의 투사 병종과 소수의 근접 병종을 유지하는 것이 조선이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에 가까웠기 때문이라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위의 편제가 조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에 가까운 선택이었던 것일까요?
그 대략적인 이유들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1) 유목민을 상대로 살수를 중심으로 한 방진을 꾸리라고? 자네 제정신인가?


농담 같지만 실제로 이것이야말로 후기 조선군 뿐만이 아니라 초기 조선군의 병력 가운데 투사 무기를 가진 병종(궁노수/총통수)의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던 원인이었습니다.
보병이 기병의 돌격에 대응하기 위해선 창을 비롯한 장병기로 무장한 보병들이 마치 고슴도치처럼 단단하게 뭉쳐야 한다는 것은 중세의 전쟁을 다룬 영화나 기타 매체를 본 분들이라면 다들 상식처럼 알고 있는 사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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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창벽에 들이 박아야 하는 기병의 심정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하지만 역사적 기록들을 살펴보면 상당히 의외인 결론이 나옵니다.


한국이나 중국, 러시아, 동유럽과 같이 초원의 유목민족과 부대끼며 살아온 정주민족들의 군제를 살펴보면 기병 돌격을 막기 위한 방진보다는 아래와 같은 전투 수레를 이용해 싸우거나(동유럽/러시아/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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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Guliali-Gorod. 동시기 서유럽에선 파이크 앤 샷이 전장을 지배할 때 러시아의 주적은 중앙아시아 초원의 유목민이었으므로 수레를 대기병 장애물이자 엄폐물로 삼고, 소형 화포와 머스킷으로 유목민들을 상대했습니다.)



온갖 투사 무기로 병사들을 무장 시키거나(중국/한국), 아예 내가 유목민이 되겠다(...)는 미치광이 마인드로 중앙군의 절반을 기병으로 편제 하는(조선 초) 식에 가깝지 일반적으로 매체에 나온 것과 같은 단단한 창병 방진을 유지하는 경우는 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창병 방진이란 엄밀히 말해 정주민족 대 정주민족끼리의 보병전과 대기병전 양쪽에 범용성 있게 쓰이는 전술에 가깝기 때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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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병 방진으로 유명한 팔랑크스만 해도 대기병을 상정했다보다는 보병전에서 우위를 가져가기 위한 측면이 강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목민의 기병은 정주민족의 기병 편제와는 달리 무장이 빈약한 다수의 경기병과 소수의 중기병으로 구성되어 


정주민족이 운용하는 중기병들과 같이 진을 깨러 들어오는 식의 기병 돌격을 벌이기 보단 아래와 같이



수많은 유목민국가들은 궁기병만운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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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군의 전술들. 거짓 후퇴와 상황에 따른 유동적인 부대의 운용을 통해 적을 말 그대로 농락하는 유목민족 특유의 전술을 잘 볼 수 있다.)




다수가 활과 같은 투사무기로 무장하여 활을 쏘고 도망치고, 다시 다가와서 쏘고 도망치는 것을 반복하여 적의 전열을 흐뜨러뜨리는 스웜 전술을 즐겨 구사한다는 특징을 가집니다.


그렇기에 유목민들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에서 적의 기병 돌격을 받아내겠다는 이유 하나로 방진을 형성하는 것은 "여기에 쏘면 됨." 이라고 적힌 커다란 과녁판을 만드는 행위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거기에 보병의 응집력을 무기로 삼는 방진의 경우 기본적으로 대응이 둔중할 수밖에 없어 실컷 분탕을 친 다음 "잘 놀고 갑니다~^^" 하고 빠지는(...) 적에게 효과적인 대응을 할 수 없다는 단점 또한 가지므로,




가붕이 뜻, 시리즈와 만화 짤로 몇컷 챙겨가세요 : 네이버 블로그

(그야말로 가붕이 그 잡채.... ㅅ1발 붙어주기만 하면 대가리 쪼갤 수 있다고...!!!)



척계광 또한 자신이 북방에서 15년간 타안부(朶顔部)를 비롯한 유목민들과의 전투 경험을 집대성한 《연병실기(鍊兵實記)》에 자신이 과거 기효신서에서 제시한 것과 같이 냉병기로 무장한 보병 방진이 아닌, 소형 포를 장착한 전차와 조총, 쾌창, 그리고 화전 등의 화기로 병사들을 무장시켜 이른바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을 제압하는'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유목민족을 상대해야 하는 정주민족의 군제는 아무래도 같은 정주민족을 상대하기 위한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형태일 수밖에 없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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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남병(상단)과 북병(하단). 북병의 무장을 보면 기병까지 화약 무기로 무장시키고, 근접전을 담당하는 보병이 거의 없다는 걸 확인 가능합니다.) 




따라서 언제든 대규모의 경기병을 동원할 수 있는 유목제국인 후금(청나라)을 잠재적인 적국으로 두고 있는 조선의 입장에선 유목민족에게 그다지 효과적이라 말할 수 없는 살수 위주의 보병 방진보다는 


부대를 다수의 사수와 포수로 구성하여 적의 기병을 원거리에서 제압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선택이었던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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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하나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오기 전에 다 죽인다..!!!!)




거기다 조선군에겐 다수의 원거리 병력 편제를 유지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군의 대 후금 대전략이 그 이유였죠.





2) 야전이 아닌 니가와 수성으로 간다!!!!


광해군 시기 조선 조정은 후금과의 전면전을 상정해 수성 중심의 전략을 채택할 것인지, 아니면 야전을 겸할 것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습니다.
백사 이항복은 후금군이 공격을 해 올 때 성을 지키는 게 유리하고, 만약 한두 개의 성을 지나칠지라도 후방을 염려할 수밖에 없어 깊게 침입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수성 중심의 전략을 주장했고,



전시&場]백사 이항복 종가 기증전‥“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단 말인가!” 미술 문화 연예· 스포츠 기사본문 - 데일리한국

(어! 제정신이면 보급로 걱정 때문이라도 성 하나하나씩 깨면서 들어올 수밖에 없다니까???)



반대로 정엽은 적들이 성을 공격할 수도 있지만 저돌적으로 공격해 들어올 수도 있으므로 (빛나는 혜안...)


수성 뿐만이 아니라 야전에서 여진족과 싸우는 것 또한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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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저 시기에 편찬된, 척계광의 《연병실기》를 조선의 실상에 맞게 어레인지한 《연병지남》에서는 전차를 움직이는 포대이자 대기병 장애물로 이용해 후금의 기병을 상대하는 전술을 다루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척계광이 활약한 북중국의 초원 지대와는 달리 산악 지형이 많은 조선에서 전차가 과연 사용이 쉬울지의 여부나,  전차를 만드는 데 필요한 예산은 어떻게 할 것이며, 야전에서 후금군과 싸우기 위해선 다수의 기병 양성이 필수인데 임란 이후 군마를 키우는 목장이 상당수 소실된 상황에서 기병은 또 어떻게 구할 것인지 등등. 


현실적인 여러 제약 때문에 야전에서 전차를 이용해 후금의 기병을 막는다는 연병지남의 전술은 제한적으로만 도입이 되어야 했고, 결과적으로 이항복의 수성 중심의 전략이 채택되게 되었죠.






(안 돼! 안 돼! 안 돼!!! 그걸 선택하지 마!! 그 독트린을 선택하게 되면 참수작전에 수도가 따인다고!!!)




따라서 어차피 야전을 하지도 않을 거, 양성하는 데 비용이랑 시간도 많이 드는 살수를 다량으로 양성할 바에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활쏘기를 즐기던 문화 덕에 병사를 모집하기도 쉬우며, 총기의 특성상 빠르게 숙련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지닌 사수와 포수를 양성하는 게 전략적으로도 이득인 셈이었던 겁니다.
사실 조선군의 이러한 판단이 딱히 잘못되었다고 하기도 뭐한 게


비록 정묘/병자 호란에서 연속적으로 패배하는 결말을 맞기는 하였지만 그건 조선군의 군 편제의 문제라기보다는 이괄의 난에 의해 조선군의 북방 방어선이 무너지게 되어 근본적으로 조선이 전쟁을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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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빅 트롤러 이괄좌... 딱히 그립지는 않읍니다...)




병자호란의 대표적 승전 가운데 하나인 광교산 전투의 경우 장수들의 침착한 화력 통제와 뛰어난 사격술을 지닌 병사들의 저격으로 청군의 기병은 물론 지휘관까지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고





(높은 숙련도를 지닌 병사들과 침착한 장수들의 지휘의 합작품.)



동시기 서양에서도 네덜란드의 장군 마우리츠 판나사우가 스페인의 테르시오를 제압하기 위해 선형진을 시도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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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전쟁영웅 마우리츠 판나사우는 당대 최강이었던 스페인의 테르시오를 제압하기 위해 장창병의 숫자를 줄이고 대신 총병의 숫자를 늘려 화력으로 승부를 보려고 했습니다.)




일단 맞추기만 한다면 막 훈련을 마친 병사가 전장에서 10년 넘게 구른 베테랑도 한 방에 보낼 수 있는 죽창화약무기의 가능성에 주목하여 총화기로 냉병기를 대체하려는 시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화약 무기가 전파된 지역이라면 어디에나 벌어진 보편적 현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조선 또한 시대의 흐름을 잘 따라간 편에 속했을 뿐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조선이 상대해야 했던(그리고 할지도 모를) 청나라는 일개 유목민 부락이 아니라 중국 대륙을 통일한 유목제국이기에 다수의 보병은 물론 정면으로 진을 깨뜨릴 수 있는 중기병과 포병들 또한 대량으로 동원할 수 있는 강대국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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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을 봐도 도저히 답도 안 나오는 수준의 영토 차이... 사기치지 말라고 진짜...!)




그리고 이 말은 곧 추가적인 보강이 없다면,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종묘 사직의 위기에서 조선이 또 다시 허무하게 무너지는 결과가 되풀이될 수 있다는 말과 동일했죠.



4. 그렇다면 해결책은?
그리고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전력 차에 대해 우리의 조상님들은 기적의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가라사대. "양이 딸리면 병사들의 질로 이기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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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잘모씀다...?)



무슨 미쳐버린 정신승리인가 싶겠지만 조선 조정은 매우 진지했습니다. 바로 정조 시대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그러한 노력들의 일환이었거든요.








그러므로 다음 시간에는 무예도보통지와 오군영의 병사들이 치룬 정기 무예 시험이었던 중순, 그리고 18세기 당시 조선군의 무장상태를 통해 좀 더 자세하게 후기 조선군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어째서 훈련도감을 비롯한 후기 조선의 중앙군이 택견을 많이 수련하였을 가능성이 높은지에 대해 한 번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대한 빠르게 다음 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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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택견 빌런이었습니닷!


댓글

  • ウルトラマンネクサス
    2025/02/09 15:25

    이집 뭔 유게에서 이런 귀한글을 쓰는겨;;;;;;;;;;;;;;

    (p1hRjv)


  • 커피크림우유
    2025/02/09 15:31

    그치만 재밌죠?

    (p1hRjv)


  • ウルトラマンネクサス
    2025/02/09 15:33

    쭈욱읽다보면 오오오 이런것이 하지만 우리가 서양 기술 흡수와 좀더 발전했다면 지금의 역사가 완전히 바뀌지 않았슬까 생각듬...

    (p1hRjv)


  • 커피크림우유
    2025/02/09 15:34

    선형진 비슷한 단계까지는 나아갔는데 저기에서 고착되어버린 느낌이 크죠. 호란 이후에 큰 전쟁이 없어서 그런 거기도 하고, 서양과 접촉하기엔 너무 후미진 곳에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구요 ㅠㅠ

    (p1hRj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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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9 15:35

    조선시대 군 편제만큼 흥미로운 것도 드문 듯
    보병은 중보병인데 원거리가 주력이고
    기병은 산악지형의 정주민족인데 편제는 스텝지대 유목민족에서나 볼법한 해괴한 조합

    (p1hRj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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