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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딸)괴문서]일등성과 사건의 지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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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 출저:https://www.pixiv.net/artworks/116861424)


운명이란 바뀔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한때 자신의 탓이 아닌 일에도 깊은 죄책감을 가진 채 스스로를 혹사하며 달리다가,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일을 통해 구원을 찾았다. 그렇게 그녀는 질주하고, 또 질주하며 ‘반짝이는 일등성’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터프를 가르는 자신을 불태우는 푸른 혜성.
어드마이어 베가라 불리는 우마무스메는 그날을 계기로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생전 처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길을 골라서 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언제나 멋대로 있어 준 한 사람이 있었다.
산을 뛰어다니며 자기 자신을 몰아세우고 있던 그녀를 기절할 정도로 체력을 소진해 가며 뒤쫓아 왔던 사람.
그녀의 길이 곧 자신이 갈 길이라고 말해줬던 사람.
트윙클 시리즈에서 굴곡을 그리는 그녀, 아야베-그녀의 동기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이 별칭을 자주 썼다-의 뒤에서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쓰며 무너져가는 몸과 정신이 쓰러지지 않도록 받쳐준 사람.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을 희미하게 품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
“…씨! …씨!”
“어서 빨리… 급차를….”
그렇게 언제나 그녀가 자신만의 길을 찾기를 바라며, 뒤에서 받쳐주던 이가-.
“트레, 이너…?”
ㅡ쓰러졌다.
도끼질 당한 고목이 천천히 넘어가듯, 느리면서도 빠르게.
그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두 눈으로 본 탓일까, 주변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가 웅웅거리는 메아리처럼 귀에 울렸다. 그것은 가슴이 이해를 거부하고 머리가 수용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다고 두 눈에 비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되지 않는 법. 정신이 종잇장처럼 날아가 버리는 느낌을 생생히 받으며, 아야베의 호흡은 점차 가빠지기 시작했다.
“아야베 씨, 정신 차려요! 아야베 씨!”
“숨을 그렇게 쉬다간 아야베 씨도 쓰러져요! 천천히! 천천히!”
룸메이트인 카렌은 물론, 클래식을 뛸 당시 라이벌로서 같이 터프를 내달렸던 나리타 탑 로드까지 어떻게든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피를 말리는 상황 속에서도 노력을 거듭했다. 하지만 사람이, 아니 우마무스메가 어디 말을 들었다고 바로 진정되는 생물이던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우마무스메들이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바로 발치 앞에서 섬뜩한 사이렌을 울리는 구급차로 실려 가고 있는 트레이너를 향해 고정된 눈동자는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새하얗게 질려있던 안색이 파랗게 변하기 시작하며, 이내 끝없이 흔들리던 자수정 색 눈동자 안의 동공이 발작을 일으키듯 줄어들었다 커지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어서 빨리 아야베 씨를 보건실로! 이러다간 앉은 채로 기절한다!”
심각할 정도의 과호흡과 함께 찾아오는 혼미한 의식 속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현실을 부정하는 것만 같은 단말마. 그것을 예리하게 포착한 순간, 평소의 가극왕 가면을 벗어던진 티엠 오페라 오가 급하게 뒤따라오는 가운데 어드마이어 베가는 멀어지고 있는 사이렌 소리를 마치 메아리처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 걸까.
‘아야베 씨의 트레이너 씨, 위 천공으로 인한 쇼크로 쓰러진 거래요.’
어둑어둑해지고 있는 저녁, 그녀의 곁을 지켜주고 있던 룸메이트 카렌이 한 말은 여전히 깊은 밤이 되어서도 깨어 있는 아야베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위 천공.
문자 그대로 위에 구멍이 나버리는 증상.
그리고.
“…견디지 못할 정도의 통증이 온다.”
심지어 급성복막염도 와서 심각함에 심각함을 더 끼얹어 쇼크로 인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면서 아야베는 어두운 보건실에서 스마트폰의 화면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시선이 커튼 사이로 드러나는 창 너머의 하늘을 향했다. 비록 도심에 가깝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인공조명이 적은 트레센 학원의 하늘. 그 남색 캔버스 위에 다소 희미하지만, 은하수가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밤이 찾아왔음에도, 그녀는 좀처럼 별을 보러 나가고자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기 전에 늘 정리하는, 폭신폭신함을 즐기기 위해 사용하는 기숙사의 이불 건조기에 대한 것이 천체를 관측하러 가는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우선순위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지금 눈에 들어오는 정보들로 인해 그럴 여유가 모조리 사라졌으니까.
“대체 어째서.”
인터넷에 떠올라 있는 각종 사례를 보면 볼수록 아야베의 기다란 귀는 바닥까지 닿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축 처져갔다. 한때 그녀도 과거에 사로잡혀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탓에 극심한 고통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래, 분명 그건 왼쪽 다리였지.
발목에 가해진 무리한 부하로 인해 언제든지 골절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던 아야베는, 그녀의 운명과 함께 저 멀리 밤하늘로 사라져 준 여동생의 가호로 인해 그것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비록 엄청난 상실감이 왔더라도, 돌이켜보면 국화상을 뛰고 있던 그 순간 일어난 자매와의 이별이자 구원을 통해 트윙클 시리즈를 완주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남은 시리즈가 순탄했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기어코 데뷔하기 전부터 입에 달고 살던 나르시시즘에 가득한 말대로, ‘세기말 패왕’이라는 칭호를 쟁취해 낸 티엠 오페라 오. 그리고 그런 패왕에게 도전하기 위해 계속해서 뛰던 탑 로드와 도토.
그리고 역시나 왕을 왕좌에서 내려오게 만들기 위해 나타난 새로운 세대들.
여전히 적응하기 힘든 그 가극왕을 상대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분투했던가.
얼마나 많은 패배가 있던가.
솔직히 기억도 안 났다.
제아무리, 아니 어쩌면 ‘더비 우마무스메’라는 영광을 쥔 적이 있기에 그러한 패배의 연속은 무언가 끓어오르는 분함이 넘쳐흐르게 했다.
고질적이던 다리의 문제가 해결되어 한층 더 가벼워진 달리기로도, 그녀의 특기인 강인한 다리의 파워로도 끓어 넘치는 재능이 완전히 꽃핀 또 다른 라이벌을 넘어서기는커녕 추격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는 소리였으니.
하지만 그럼에도 더없이 큰 만족감을 느꼈다.
더비 이후 심해져 온 다리 통증으로 인해 중간에 하차할 것을 고민까지 했었던 트윙클 시리즈를 결국 완주했으니까.
그것도 최고의 황금기를 맞이한 동기이자 친구를-솔직히 탑 로드와 도토까진 무난히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그 오페라 오를 이렇게 칭하기엔 아야베는 여전히 적응이 조금 안 되긴 했다-상대로 모든 걸 불태우며 순수하게 그녀가 원하게 되었기에 본능에 따라 터프를 질주했다.
인생에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시기는 그녀가 혜성처럼 질주하던 내내 지지해 준 팬들을 위한 마지막 헌사로서, 시니어 아리마 기념으로 끝을 맺었다.
비록 뒤에 URA 파이널스라는 신생 레이스에 한 번 더 발을 들이긴 했지만, 이제 경주와 경쟁으로 냉정함 뒤에 초조함과 불안이 있던 시기는 막을 내렸다.
그렇게 수많은 우마무스메들이 손에 꼽는 명예인 더비 우마무스메의 영광을 쥔 채로 어드마이어 베가는 현역에서 내려올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랬기에, 그녀를 뒷받침 해주던 사람이었던 트레이너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날이 늘어났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감상으로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었고, 아리마 기념을 끝으로 내려오는 것을 확정하던 크리스마스 날에도 도저히 이상하다는 말 외에는 감상을 요약할 수 없던 사람.
그는 아야베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녀가 자신을 혹사하며, 자책하지 않도록 그가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무너지지 않도록 등을 밀어줬다.
그런 그가, 누구보다 이타적이고 상냥하던 사람이 자기 자신을 챙기지 않았다.
“…왜 자기 자신에게는 내게 한 것처럼 신경 쓰지 않은 거야.”
이해하기 힘들었다.
자책감에 사로잡힌 채 살다가, 그것에서 해방되어 자신을 위한 삶을 향해 발을 딛기 시작한 아야베에게 있어서는 그건 여태 봐온 트레이너의 모습하고 무언가 상충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다만 곰곰이 돌이켜 생각하니 이상한 점이 드문드문 떠오르긴 했다.
-더비를 마쳤을 때.
그녀가 처음으로 우마무스메로서의 달리고자 하는 본능과 승부욕에 휩싸여, 일순간 자책감에 휩싸이지 않은 채로 내달려 더비 우마무스메라는 영광스러운 호칭을 얻게 된 날.
그날 밤, 그녀를 축하해주기 위해 단출하지만 그래도 조용한 장소에서 둘만의 작은 기념 파티를 했을 때. 트레이너는 가끔 기침을 콜록거리며 가슴을 가볍게 치는 모습을 보였다. 처음에는 감기에 걸리거나 급하게 음료를 마셔서 체한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지만.
-그때부터 증상이 있었구나.
생각해 볼수록 드문드문 기침을 콜록거리며 가끔 화장실로 달려가서 몇 분이고 있다가 돌아오던 그의 모습은 시니어 시즌을 거치는 와중에도 점점 보이는 빈도가 잦아져 갔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트레이너는 결코 단 한 번도 아야베의 앞에서 약을 먹는 모습을 보이질 않았다. 아니, 애초부터 병원에 간다는 생각 자체를 한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당신을 잘 모르는 걸까?”
3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그동안 트레이너를 지켜봐 온 어드마이어 베가는 바늘로 가슴팍이 쿡쿡 찔리는 느낌을 받으며 조용히 혼잣말했다. 그에 대해서 알게 된 게 나름 많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완전한 자만이었다.
그는 그녀에 대해 섬세한 트레이닝 스케줄을 만들어 주며, 고꾸라지지 않도록 지탱해 줬음에도 그 자신에 대한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역설적으로 생각해 보면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를 걱정시킬 정도로 자신에 대한 것을 챙기지 않았던 그녀가, 이제는 트레이너를 걱정하고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쇼크가 올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음에도, 그가 왜 그랬는지 이해를 못 하는 자신에 대해 오랜만에 어두운 자책감을 품은 그녀는 이내 LANE에 어떤 메시지가 오며 일어난 진동을 느꼈다.
『통보! 자네의 트레이너가 30분 전 의식을 회복하여 일반 병실로 이동했다네! 병원의 이름은 A 대학병원, 면회 가능 시간은….』
유능한 트레이너가 한순간에 목숨을 잃을 뻔한 탓일까, 어린 소녀 그 자체인 이사장도 최대한 건조한 투로 그녀가 알아야 하는 소식을 직접 전해왔다.
-오전 7시부터 면회가 가능하다, 라….
시간을 곱씹어 생각한 아야베는 이내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마음을 쿡쿡 찔리게 한 장본인인 그가 보고 싶었다.
트윙클 시리즈에 발을 들인 이후, 아니 국화상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낯설지만 동시에 익숙한 쓸쓸함이 룸메이트가 기다리고 있을 기숙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어드마이어 베가에 드리우고 있었다.
-⏲-
“에헤이, 조졌네 이거.”
한편 새벽의 병실에서 눈을 뜬 트레이너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매우 단순했다.
-좀 과로해서 속이 쓰린 거로 생각했더니 위에 빵꾸 나고 급성복막염이라니, 아이고야.
하필 아야베와 스케줄을 짜기 위해 본관의 교실에 간 순간, 도저히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복통이 닥쳐와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던 기억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문제는 그 와중에도 또렷하게 남아 있던 것이 있는데-.
-아야베….
담당 우마무스메이자, 여지껏 담당들을 여럿 거쳐왔음에도 존재감이 없던 그를 단숨에 더비 트레이너라는 엄청난 위치로 올려준 아이. 위태롭고, 냉정해 보이는 그 외모와 다르게 자신에게 무자비할 정도의 혹사를 강요하던 과거에 짓눌려있던 소녀.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그녀가 고꾸라지지 않도록 뒤에서 지탱해 주며 진정으로 원하는 길을 향해 달릴 수 있도록 표지판을 알려주는 것이 전부였다. 자신의 트레이닝 실력에 한계를 느끼기도 했지만, 아야베가 스스로 바라는 길을 걷기를 원했다.
비록 그녀의 트레이너가 되게 된 계기는 다소… 우마무스메들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형태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 그녀가, 자책감에서 해방된 이래 새로운 길을 향해 질주한 끝에 훌륭히 트윙클 시리즈를 소화해 낸 아야베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형언하기 어려운 것을 느끼게 했다.
트레이너의 몸뚱이가 고통을 버티지 못하고 스러지며 의식이 저 멀리 삼여신들이 놀란 표정을 짓는 장소로 날아가기 직전 눈에 들어온 건 아무리 표현해도 그의 갑작스러운 이상증세에 여태 한번 보여준 적 없는 격렬하기 이를 데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였다.
경악.
공포.
일반적이라면 그런 극도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표정에 걱정해야겠지만, 트레이너는 다소 다르게 그것을 곱씹었다.
데뷔전을 준비하던 당시부터, 국화상에 이르기까지 의식적으로 타인들과 거리를 두며 그들의 감정에 대한 공감을 최대한 자제하던 아야베의 모습이 뇌리에서 스쳐 지나갔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 침착하다 못해 차갑게까지 느껴지던 일상에서의 모습.
그러나 그녀를 억누르던 죄책감에서 완전히 풀려난 후 점점 또래의 다른 우마무스메들처럼 차츰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그가 걱정보다는 다소 놀라움을 느낄 정도로 강한 감정을 안색에 떠올렸다.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들과 같은 표정을 짓게 되었구나.”
이걸 좋아해야 하는 것인지 걱정해야 하는 것인지 솔직히 트레이너도 감을 잡기 힘들었다. 다만 확실한 건, 설령 트레센 학원을 졸업하더라도 아야베는 이제 사람다운 표정과 행동으로 손쉽게 사회에 녹아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분명 그건 교육자로서는 좋은 일이긴 했지만….
어째 생각할수록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녀가 ‘구원’을 받은 후, 처음 토해낸 감정이 무엇이던가.
자신에게 닥친 문제 때문에 그나마 남아 있던 여동생의 흔적마저 사라진 것에 대한 자기 파멸적이던 분노 아니었던가?
비록 그 후에는 울음을 터트리긴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볼수록 좀 무섭긴 했다.
그야 담당 트레이너라는 사람이 담당 우마무스메만 챙기다가 자기한테 병환이 닥친 것도 모르고 같이 질주했으니 화가 안 치솟으면 그게 사람이나 우마무스메인가? 그 사토노 그룹이 구현했다는 AI 삼여신들도 이 꼴을 보면 ‘어린 양,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는 것이 좋을 거야?’라고 말할 것이 분명할 정도의 일인데 이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망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떠올린 응급 수술의 흔적이 잔뜩 남은 붕대를 배에 두른 걸 넘어 옆구리에 호스까지 푹 박힌 채 비스듬하게 병상에서 앉아있던 트레이너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
그러니 면회 시간이 시작된 후 담당의 분노 대신, 다른 것이 닥칠 것은 그에게 있어서 전혀 예상 못 한 것이었다.
담당은 트레이너를 닮고 트레이너는 담당을 닮는다는 것이 꼭 들어맞는 이야기였다.
-⏲-
몇 시간 후.
결국 예고되었던 일이 들이닥쳤다.
“…저기 아야베?”
“할 말 없어?”
“…저.”
“분명히 해야 할 말이 있을 텐데?”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걸까, 트레이너는.”
“….”
처음은 어느 정도 예상하던 말의 연속이었다.
칼처럼 면회 시작 시각에 딱 맞춰서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아야베의 모습은 실로 위압감이 대단했으니까. 그 자수정 빛 눈에 푸른 불꽃이 일렁거리는 것만 같이 누가 봐도 확실한 분노를 두른 채 팔짱을 끼고 추궁하는 그 모습은 3인 병실에 있는 다른 환자들은 물론, 노련하기 이를 데 없는 간호사들도 등골이 서늘해져 움츠러들 정도였으니 할말을 다한 셈이다.
“징조가 꾸준히 있었는데도 그걸 무시하고 넘기면서 병원도 안 가고 버틴 것이 미안하다는 걸까?”
“….”
“아니면 담당 교실 앞에서 갑자기 픽 쓰러진 거?”
“….”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로운 칼처럼 푹푹 꽂히는 가운데 차마 말을 못 하는 트레이너를 지긋이 쳐다보던 아야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대체 왜 내게만 신경 쓰고 자신에게는 신경을 안 쓴 거야?”
뒤이어 나온 말이 다소 뜻밖이라는 점이 좀 달랐지만.
“어, 그건….”
“변명하려 하지 마. 시리즈 내내 징조가 있었으면서 그걸 참아온 거잖아. 대체 왜 그랬어?”
아야베의 말에 선뜻 답하기가 어려운 것일까, 트레이너는 온갖 말이 목 너머로 나오려다가 마는지 여러 번 멈칫했다. 꽤나 인고의 시간을 거친 후, 그의 입이 겨우 열렸다.
“담당이 계속 괴로워하고 있는데 기껏 좀 피곤해서 생긴 통증 정도는 버텨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지.”
“아, 그렇…. 잠시만?”
어느 정도의 답변은 미리 오는 길에 머릿속에서 예상하였지만, 전혀 의외의 답이 튀어나왔다. 자신이 힘든 걸 보고 위에 구멍이 뻥 뚫리는 고통을 버텼다고?
순간 아야베의 마음속에서 싹 터오던 애매모호하던 감정이 대번에 자극받았다.
“그게 어째서 그만한 통증을 참아낼 이유가 되는 거야?”
“말했잖니, 아야베. 네가 가는 길이 곧 내가 가는 길이라고. 네가 힘들어할수록, 나도 그걸 같이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
“당신 정말….”
뒤에 ‘무모해도 정도가 있지’나, ‘남에게 너무 공감해 주잖아’라는 말이 나올 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드마이어 베가는 늘 그런 식으로 그의 이러한 말에 나름 받아쳐 줬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병실로 오기 전, 간호사를 통해 들은 바로는 염증이 매우 심각하던 탓에 며칠 늦었다면 진짜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는 말을 들은 것이 불과 몇 분 전이다.
거기에 한술 더 떠 가슴 깊은 곳에서 가파르게 줄기를 뻗는 그 감정은, 현실은 그 모든 가능성을 지워버렸다.
그러기에 그녀의 목에서 나온 말은, 원망이나 분노가 아니었다.
“…내가 가는 길에 함께 하겠다고 했으면서. 어째서.”
“아야베…?”
아야베의 입에서 나온 말에 담긴 것은 두려움이었다.
마치 길잡이, 아니 그걸 넘어선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한 트레이너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가 쓰러질 당시 머릿속을 일격에 마비시켰던 감각이 다시금 되살아 난 그녀는 그것을 비료로 삼아 3년 전, 모든 것이 시작된 날에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던 새로운 감정을 시시각각 가파르게 성장시켜 나갔다.
“당신도 내 곁에서 사라지려고 하는 거야?”
그 결과물은, 급작스레 쉰 것 같은 목소리로 새겨진 말로 표출되었다.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말을 들은 탓일까, 꽤 초췌한 환자 안색을 한 트레이너 역시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만 같은 표정으로 어드마이어 베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 멋대로 말했네. 얼른 회복해서 학원에서 다시 봤으면 좋겠어.”
지금껏 담당하던 우마무스메에게서 상상도 못 한 말을 들은 탓에 머릿속의 정리가 잘 안되는 트레이너의 모습을 뒤로 한 채 그 말을 한 당사자는 한번 발아하자 끝을 모르고 자라나는 감정을 다시금 숨기고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다소 얼이 빠진 눈으로 트레이너는 바라봤지만, 이때까지는 알 수 없었다.
불안감에 사로잡힌 일등성이 매일 아침, 딱 칼같이 첫 교시가 시작하기 전에 학원에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여 찾아올 줄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드마이어 베가가 하루아침에 자신의 속에서 넝쿨처럼 얽히며 자라나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대번에 파악한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생전 처음 겪는 그 기이한 감정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 것은 다소 훗날의 이야기니까.
-⏲-
『…언니의 트레이너 씨,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푸른 하늘 너머, 별의 강이 흐르는 남색 바다에서 누군가 말했다.
『그건 본디 언니에게 찾아올 운명이었어요. 비극 그 자체의 결말이었죠.』
누군가를 떠오르게 만드는 목소리지만, 더욱 감정이 깊게 담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미 결심을 굳히고 떠나간 자매가 발을 딛고 사는 대지를 내려다봤다.
『그 참혹한 결말의 운명이 마침내 완전히 사라졌어요. 네, 마침내 언니는 운명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어요.』
그렇게 말한 소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이에게 마치 고개를 숙이듯 빛을 일렁거렸다.
『그러니 부디 앞으로도 제 언니를 잘 부탁드립니다, 트레이너 씨.』
아직 밝은 아침 하늘 너머에서 새로운 앞날을 축복하듯, 별 하나가 크게 반짝거린 후 모습을 감추었다.
가지 않은 길을 향한, 인생이란 이름의 경주가 어드마이어 베가와 트레이너를 향해 열린 순간이었다.






오랜만에 써본 괴문서.

트레이너 죽여서 피폐 엔딩 직행해보려하다가 내 안의 또레나가 그러고서 니가 아야베 좋아하냐고 일갈해서 U턴함

아야베 너희도 좋아하지? 난 너무 좋아해

댓글

  • 메에에여고생쟝下
    2024/07/31 19:32

    악! 맛있다!

    (VYADbp)


  • 카니에타
    2024/08/01 00:26

    님 괴문서들 잘 보고 있어요

    (VYADbp)

(VYADb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