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당 우마무스메의 멘탈과 컨디션을 관리하는 것은, 트레이너의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이다.
컨디션이 절부조냐 절호조냐에 따라서 평소 능력에 많게는 20%까지도 더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트레이너 대부분은, 어지간하면 담당 우마무스메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한에서 말이지만, 때로는 조금 과한 부탁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그라스 원더는 무리한 부탁을 하는 편이 아니었다. 트레이너 본인 또한 정말 의외라고 생각은 하지만, 실제로 그라스 원더가 그에게 무리한 부탁을 한 적은 없었다.
뭐, 혼인신고서에 지장 찍으라고 나기나타를 들고 협박을 한 적이 있긴 했지만…그런 부분만 뺀다면 정말로 야마토 나데시코, 요조숙녀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런 담당 우마무스메가, 트레이닝의 휴식 시간 중에 갑자기 뺨에 손을 올린 채로 후후 웃으며 그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트레이너 씨와 게임이 하고 싶어요.”
“……?”
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라스 원더가 정상적인 부탁만 하는 아이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트레이너 본인이 걸려 있지 않은 상황에서나 그러는 것이다.
그라스 원더가 말하는 ‘게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하지 않은 채로 그래, 라고 고개를 끄덕인다면…분명 ‘어른의 게임을 할까요~?’라며 그를 덮쳐오는 담당 우마무스메를 보게 될 수도 있다.
그런 불상사는 막아야 한다. 그는 조심스레 그라스 원더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연다.
“게임…? 무슨 게임을 하고 싶다는 거니?”
여기에서 ‘어른의’, 아니면 ‘사랑 어쩌고’, 또는 ‘둘만의’ 등의 수식어가 붙은 말이 나오면 전력으로 도망가야 한다. 잔뜩 긴장하며 재빨리 달려갈 수 있도록 근육에 힘을 불어넣으며 그는 그라스 원더의 답변을 기다린다.
그런 트레이너 씨의 변화를, 그라스 원더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아무래도 우마무스메이기 때문에, 타인의 신체적인 변화에 상당히 민감한 편이다. 트레이너 씨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트레이너 씨는 겁쟁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라스 원더는 작은 한숨과 함께 그의 질문에 답변한다.
“최근에 스페쨩과 세이쨩, 츠루쨩이 셋이서 게임을 하는 것을 잠시 구경했었는데, 재미있어 보였어요. 그런데 저는 게임을 그다지 잘하지 못해서…트레이너 씨가 조금 알려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나도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닌걸.”
그라스 원더의 말에 그는 반사적으로 거짓말을 해 버렸다. 게임을 못 한다니, 한량을 자처하는 그에게 있어 노는 것을 못 한다는 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전자오락 또한 그에게 있어 풍류 중의 하나다.
그렇기에 그는, 어지간한 게임은 평균 이상을 한다. 그리고 특정 게임에서는 랭커라 불릴 정도로 고이고 고인, 썩은 물이다.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그라스 원더에게 진실을 이야기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적당히 못하는 척, 그라스 원더의 호승심을 부추기지 않을 정도로 납작 엎드려야 한다고 본능이 고했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트레이너 씨라면 저보다는 잘하시지 않을까요.”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 중등부 여자아이에게 게임으로 진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크나큰 모욕일 테니까. 그리고 트레이너 씨에 대해서라면 거의 모든 것을 안다고 자처하는 그라스 원더는 분명, 그 사실 또한 알고 있으리라.
얼마나 잘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라스 원더보다는 잘한다는 것을.
“그래, 얌전히 게임만 한다면야.”
“어머, 트레이너 씨는 저를 믿지 못하시는 건가요?”
“…….”
그야, 수틀리면 나기나타를 휘두르는 평소의 모습이 있지 않은가. 사무라이라는 존재는 서민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던가.
물론, 그런 사무라이의 기세에 꺾일 조선의 선비가 아니지만, 그런 선비로서의 절개를 위협하는 일에 구태여 발을 담글 필요는 없다.
그라스 원더가 그의 담당 우마무스메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담당 우마무스메의 컨디션 관리, 잠시 머리 한쪽 구석에 치워두었던 그 사실을 떠올리자마자, 그는 입 안이 씁쓸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믿지, 우리 그라스 원더를 안 믿으면 누굴 믿겠어. 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렇네요…….”
어색할 정도로 딱딱한 그의 웃음에, 그라스 원더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라스 원더는 이내 의심과 경계의 시선을 거둔다. 어쨌건 트레이너 씨가 그녀에게 게임을 가르쳐주는 것을 허락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목적은 따로 있다. 게임을 배운다…는 것은 물론 거짓말이 아니지만, 그것만이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라스 원더가, 트레이너 씨의 취미 중의 하나가 게임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당연히 전부, 트레이너 씨가 최근에 어떤 게임을 즐겨 하시는지까지 꿰고 있을 정도다.
그런 그라스 원더에게 중요한 것은, 트레이너 씨와 같이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금 깊게 생각해보자면, 남녀가 게임을 같이 하는 행위…그것은 어지간히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하기 어려운 행위다. 그래, 마치 연인 사이 같은―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라스 원더의 뺨이 살짝 달아오른다. 트레이너 씨를 보며 평소보다 조금, 미세하게, 트레이너 씨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끈적한 시선을 보내는 것은, 그녀가 불퇴전의 사무라이이기 이전에 한창때의 우마무스메라는 뜻이리라.
그러나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곤, 우후후 웃으며 트레이너 씨에게 말한다.
“뭐, 좋아요. 저와 트레이너 씨 두 명 뿐이기도 하니, 둘이서 할 수 있는 대전 게임으로 어떨까요.”
트레이너 씨가 최근에 우마파이터 6을 즐겨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제안을 건넨다. 한 방에서 같이 대전격투 게임을 하는 남녀…컨트롤러를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자연스레 신체 접촉도 일어나고, 게임에서 진 것으로 트레이너 씨를 조금 토닥이기도 하고.
그런 연인들의 데이트 같은 알콩달콩한 시츄에이션을 상상하니,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 같은 그라스 원더였다.
“호오.”
그러나 트레이너 씨가 받아들인 것은, 조금 다른 의미였다.
불퇴전의 사무라이인 그라스 원더가, 자신에게 대전격투 게임을 같이 하자고―가르쳐 달라는 말랑한 말 따윈 잊은 지 오래다―말을 한 것이다.
그 말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니, 사무라이가 선비에게 내민 도전장이다. 현실의 무력으로도, 게임 속의 무력으로도 트레이너 씨를 개처럼 발라버리겠다는 그라스 원더의 확고한 의지 표명이 아닌가.
아! 담당 우마무스메가 이리도 건방지게 도발을 해 오다니, 이 어찌 티배깅을 위시한 조선 게이머의 인성질을 보여주지 않을 수 없으랴!
물론 그 끝은 그라스 원더의 나기나타를 피하며 춤추는 것이겠지만, 스위치가 들어가 버린 지금의 트레이너 씨는 그런 것 따윈 생각하지 않는다. 오롯이 그라스 원더를 이기기 위해서, 그것도 그라스 원더가 감히 대들지 못할 정도로, 그녀의 도전장을 자근자근 씹어줄 생각뿐이다.
“좋다, 그라스 원더. 오늘 트레이닝이 끝난 후, 저녁 먹고 내 기숙사 방으로 와라.”
“엣……?”
예상치 못한 트레이너 씨의 자택 초대에, 그라스 원더의 얼굴이 귀 끝까지 빨갛게 달아오른다. 이, 이이, 이런 것까진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요조숙녀답게 침착한 얼굴로 트레이너 씨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저녁 식사 이후에 찾아뵙도록 하겠어요.”
“그래. 각오 단단히 하고 오렴.”
“……?!”
트레이너 씨 본인은 ‘게임에서 쳐발릴 각오’를 말한 것이겠지만, 그라스 원더는 ‘여자로서의 각오’를 하고 오라는 뜻으로 알아들었으리라. 그렇지 않았다면 침착함을 유지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퐁, 하고 흥분 상태의 얼굴이 되진 않았으리라.
“네, 녯…….”
게다가 당황한 것인지, 그 불퇴전의 사무라이답지 않게 혀를 씹는 모습까지 보이며, 트레이너 씨 앞에서 평소에는 보여주지 않는 추태―그라스 원더의 생각으론 추한 모습이다―까지 보여버린다.
정작 트레이너 씨는 그런 담당 우마무스메를 보며, 왜 귀여운 척이지? 라며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말이다.
* * * * * * * * * *
그런 그라스 원더의 들뜬 기분이 차갑게 식는 데에는, 불과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트레이너 씨와의 약속대로 저녁 식사 이후, 일곱 시 정도에 트레이너 씨의 기숙사 방문 앞에 도착한 그라스 원더는, 침착하게 심호흡을 한번 한 뒤,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트레이닝이 끝나자마자 평소보다 조금 빠른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대로 기숙사로 달려간 그라스 원더는, 방에 있던 엘 콘도르 파사를 대충 나기나타를 몇 번 휘둘러 내쫓은 뒤,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승부 속옷을 갖춰 입었다.
마음 같아서는 승부복까지 입고 트레이너 씨의 기숙사를 방문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너무나 그라스 원더답지 않은, 어색한 행동이다.
그래서 평소의 교복을, 평소보다 조금 더 단정하게 가다듬고, 트레이너 기숙사로 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마지막 심호흡으로 불퇴전의 각오를 다진 그라스 원더는, 기숙사의 철문을 똑똑, 두 번 두드린다.
그러자 잠시,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뒤, 끼이익, 기름칠이 되지 않은 경첩의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린다. 트레이너 씨는 이미 옷을 갈아입었는지, 검은 반바지에 하얀 반 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아무래도 집이니까 편하게 입으신 것이겠지, 트레이너 씨가 풀린 모습을 보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기 때문에, 그라스 원더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호호 웃었다.
“각오는, 됐냐?”
“네? 네네넷, 네넵…!”
그러나 갑작스러운 트레이너 씨의 기습에, 그라스 원더의 꼬리와 우마미미가 발딱 일어선다. 평소완 다른 꾀꼬리 같은 소리로 내지르다시피 대답하자, 트레이너 씨가 피식 웃는다.
“좋아, 들어와. 긴장하지 말고.”
“네에…!”
긴장이 안 될 리가 있겠는가.
그라스 원더가 트레이너 씨의 기숙사에 방문한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분명 트레이너 씨의 방에서 그의 체육복을 입고 같은 침대에서 잠든 적은 있었지만, 트레이너 씨는 그라스 원더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굳이 트레이너 씨의 기숙사에 초대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트레이너 씨가 먼저 그라스 원더를 초대한 것이다.
이건 이미 잠재적 우마뾰이 동의라고 봐도 된다. 에이신 플래시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며, 사쿠라 로렐이라면 이미 트레이너 씨와 미스 빅토리아 라이브를 준비하고 있었으리라.
이날을 위해 아껴둔 승부 속옷이 빛을 발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뿐이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한 걸음 한 걸음 정갈하게 트레이너 씨의 방 안쪽으로 걸어간다. 트레이너 기숙사는 일반적인 원룸에 비해서 제법 큰 편이었기 때문에, 정면에 적당한 사이즈의 TV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트레이너 씨가 미리 준비해 둔 듯, 모 회사의 플레이스O이션 5와 컨트롤러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어쩐지, 어딘가의 세가무스메가 캬아악―!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세가의 콘솔은 망해버린 것이 사실이거늘.
아무튼, 나란히 놓여 있는 두 개의 컨트롤러를 보니, 그라스 원더와 트레이너 씨가 나란히 앉아 게임을 하는 모습이 상상이 된다. 샤워하고 나와 트레이너 씨의 와이셔츠를 입고, 둘이 앉아 게임을 하며 웃고 떠드는, 그런 행복한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다.
그러나 트레이너 씨는 그런 그라스 원더의 머릿속은 추호도 모른 채, 그녀에게 씩 웃으며 말한다.
“게임 그냥 하면 재미없지 않겠냐. 작은 내기라도 하는 게 어때?”
“후후, 그렇네요.”
트레이너 씨의 말에 그라스 원더의 귀가 쫑긋거린다. 이건…이건 틀림없는 연인 간의 알콩달콩한 내기다. 게임에서 지면 옷을 하나씩 벗는다거나, 아니면 키, 키스…라거나 하는, 그런 사소하면서도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내기.
역시 트레이너 씨…평소의 경박한 행실이 허언이 아니었던 것인가. 저 자신만만한 미소와 긴장이라곤 전혀 하지 않는 모습은, 정말로 여자를 다루는 법을 아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드니, 깊은 곳에서부터 조금씩 흥분 상태가 되는 것만 같았다.
“일단 게임을 가르쳐 주긴 할 건데…그 이후 실전에서 나를 이기면 내가 뭐든지 들어줄게.”
“뭐, 뭐든지……라고 하셨나요?”
“그래, 뭐든지.”
“……!!”
트레이너 씨가 잘못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하여 되물어보았지만, 트레이너 씨는 틀림없이 ‘뭐든지’라고 말했다. 평소 같았더라면 그 뭐든지에 추가적인 조건―예를 들면 ‘상식적인 것’이라거나 ‘선을 넘는 건 안 돼’와 같은 것들―을 붙였을 텐데, 이번에는 그런 것도 없이 그냥 ‘뭐든지’라고만 한 것이다.
그라스 원더가 프러포즈를 바란다면, 로맨틱한 프러포즈를 해 줄 것 같은 느낌의 뭐든지였다.
그렇다면, 그라스 원더 또한 전력으로 임할 것이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않은가. 트레이너 씨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그라스 원더는 고개를 끄덕인다.
“좋습니다. 내기를 받아들이겠어요.”
“네가 지면 뭘 내가 받아 갈지 확인도 안 해봐?”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야 당연히, 그라스 원더의 처음부터 끝까지…모든 것이 아니겠는가. 트레이너 씨에게라면 기꺼이 드릴 수 있다. 어느 쪽이건 그라스 원더에게는 이득이 아닌가. 이건 내기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트레이너 씨는 그라스 원더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인 양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은데…지고 나서 후회하진 말고.”
그라스 원더가 자신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절대, 결단코, 무조건, 반드시 없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라스 원더와 트레이너 씨,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다가, 결연함이 깃든 얼굴로 컨트롤러 앞으로 다가가, 천천히 자리에 앉는다.
그리곤 거의 동시에 컨트롤러를 들어 올리고, TV에 시선을 맞춘다.
* * * * * * * * * *
트레이너 씨의 게임 강의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진행되었다.
아무래도 대전격투 게임이라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그라스 원더이니만큼, 이것저것 가르쳐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실제로 연습 게임까지 해가며 게임에 익숙해지도록 배려해 준 것이었다.
적어도 그라스 원더는 배려라고 느꼈다. 정작 트레이너 씨 본인은 내기가 너무 재미없게 끝날 것을 의식하여 최대한 열심히 가르쳐 준 것뿐이지만.
티배깅도 아슬아슬하게 지고 나서 당하는 것이 더 꼴 받지 않겠는가. 수많은 게임에서 수많은 인성질을 하고, 당해본 사람으로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애초에 트레이너 씨는 이 게임의 시리즈 첫 번째 타이틀부터 했던, 고이다 못해 썩은 물이었고, 그라스 원더는 오늘 해당 게임을 처음 해보는 초보 중의 초보였으니까.
물론, 그래도 명색이 우마무스메라고, 그녀의 높은 반사신경과 동체시력은 가끔 트레이너 씨를 깜짝깜짝 놀라게 했지만, 피지컬만이 대전격투 게임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작 중등부, 게다가 초보의 심리로 트레이너 씨의 산전수전 다 겪은 고수의 심리를 파훼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그 결과로 그라스 원더가 쥐고 있는 컨트롤러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빠직, 까득, 같은…플라스틱에 금이 가는 소리, 부서질 것만 같은 위태로운 컨트롤러의 생명.
그야, 트레이너 씨가 초보를 대하듯 게임을 했다면 그냥 그라스 원더가 바랬던 대로 알콩달콩하고 끝이 났겠지만, 지금의 트레이너 씨는 그라스 원더를 철저하게 밟아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단순히 자라나는 새싹을 밟아버린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티배깅까지 서슴지 않고, 그라스 원더의 캐릭터가 다운되면 어김없이 들어오는 짠손 능욕.
그런 행위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라스 원더는 처음에 몰랐지만, 세 판쯤 지나고 나서도 트레이너 씨가 계속 다운된 캐릭터를 짠손짠발로 가지고 놀자, 자연스레 입술을 꽉 깨물게 되었다.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모를 리 없을뿐더러, 눈치 빠른 그라스 원더가 아닌가. 트레이너 씨가 지금 자신을 일부러 모욕하고 있다는 것을, 그라스 원더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능욕당하느니 할복을 해버릴 불퇴전의 사무라이에게 있어, 이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내다 못해 망치로 산산조각 내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잖은가.
그저, 트레이너 씨와 꽁냥거리며 게임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이런 처사는 너무나도 가혹하지 않은가.
그러나 트레이너로서는 분명, 그라스 원더가 게임으로 승부를 걸어 온 것이었다. 많고 많은 게임 가운데 대전격투 게임을 알려 달라고 했다는 것은 분명한 도발이 아닌가.
그리고 원래 대전격투 게임은 맞으면서 배우는 것이다. 같은 패턴으로 계속 맞다 보면, 파훼법을 스스로 깨달아 가는 것이니까.
“……하.”
그러나 트레이너 씨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그라스 원더의 인내심은 그리 깊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불퇴전의 사무라이가 가진 인내라고 해봐야, 레이스의 스태미나와 같은 것이다. 3천 미터를 달릴 정도만 있는 것이다.
죽일까, 그라스? 참아, 원더. 그라스와 원더가 그녀의 내면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만큼, 지금의 그라스 원더는, 옆에 놓인 의자를 들어 트레이너 씨의 머리를 내려찍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했다간, 트레이너 씨의 트가 박살나, 레이너 씨로 되어버릴 것이 뻔하다. 아무리 그래도 게임에서 인성질을 한 것이 죽을죄는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우효~9연승이다! 내기 승리까지 단 1승!”
트레이너 씨가 다시금 승리를 거두었고, 이번에는 짠손짠발이 아닌, 그 자리에서 캐릭터의 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
그 의미를, 그라스 원더가 모를 리 없다. 그리고 더는, 트레이너 씨의 그 모욕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곧바로 소파 위에 있는 쿠션을 손으로 집어 들고, 전심전력으로 트레이너 씨의 얼굴을 향해 휘두른다.
“컥―!!”
“트레이너 씨…게임 참 당근같이, 하시네요…?”
“아니, 꼬우면 이기던……켁! 크헉! 끄악! 야, 야야, 잠깐만, 잠깐, 타임! 멈춰! 그만…끄허억!”
“그렇게! 초보를! 가지고 노는 것은! 재미! 있으셨나요!”
우마무스메의 근력이긴 하지만, 그래도 쿠션이다. 트레이너 씨가 느끼기에는 죽지 않을 정도로 적절히 아프기만 한 것이다. 물론 한방 한방이 망치로 얻어맞는 것처럼 둔탁하니 아프긴 하지만, 죽진 않을 테니까.
“후우…후우….”
“살려…줘…내가 잘못…한 것 같…아….”
그리고 그라스 원더의 폭주는, 그녀가 거친 숨을 내쉬며 숨을 고르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트레이너 씨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라스 원더가 손을 조금만 움직여도 반사적으로 사과의 말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런 트레이너 씨를 보며, 그라스 원더는 다시금 TV 앞에 정좌하고 컨트롤러를 잡는다. 그리고 트레이너 씨에게도 다른 한쪽 컨트롤러를 (반쯤 강제로) 건넸다.
“다른 게임을 해요.”
“아니, 우리 내기는―”
“다른, 게임을, 해요.”
“……넵.”
이런 분위기에 내기를 지속하자는 말은, 제아무리 눈치 없는 트레이너 씨라도 함부로 입밖에 내뱉지 못한다. 얌전히 책장 한쪽에 꽂혀 있는 타이틀 몇 개를 가지고 와, 그라스 원더 앞에 늘어놓는다.
“어떤 걸 하고 싶어?”
“트레이너 씨와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좋겠어요.”
“그럼, 협동 가능한 RPG 같은 걸로 어때?”
“좋네요. 우마네스트도 해본 적 있으니까, 잘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네.”
그라스 원더의 기분이 살짝 풀린 것 같아지자, 트레이너 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타이틀을 하나 꺼내어 디스크를 본체에 집어넣었다. 그러면서 게임이 구동되는 동안, 긴장이라도 풀 겸 해서 그답지 않게 약간 주절거린다.
“이거, 대학생 때 재미있게 했었는데, 엔딩을 못 봐서 말이야. 다행히 옛날 타이틀도 호환이 되는 기기라서, 이럴 때 한번 해 봐야지.”
“후후, 트레이너 씨의 추억이 담긴 게임이네요.”
그라스 원더가 모르던 트레이너 씨의 모습과 추억이 담긴 게임이라는 소리에, 그라스 원더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린다. 컨디션이 절부조에서 순식간에 호조까지 올라온 것만 같은 변화였다.
“……?”
하지만, 동시에 정체 모를 위화감이 트레이너 씨를 지배했다. 그러고 보니, 왜 이 게임을 클리어하지 못했었지? 그런 원초적인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한번 잡은 게임을 끝까지 하지 않고 유기할 리가 없었다. 뭔가…분명히 뭔가 게임을 클리어하지 못할 만한 요소가 있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그것이 게임 내적 요소는 아닐 것이다. 못 깨면 공략이라도 봐서 클리어하는 것이 그의 플레이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게임 외적인 요소 때문에 클리어하지 못한 것인데…대학원생 때도 아니고, 학부생때 했던 게임을 왜 클리어하지 못했―
“……저기, 그라스? 이거 말고 다른 게임 하는 게 어떨까?”
“어머, 왜 그러시나요?”
“아니, 그…그게, 그…생각해보니 더 재미있는 최신 게임들이 있는데, 굳이 옛날 게임을 할 필요가 있나 싶네.”
“저는 트레이너 씨의 추억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좋은걸요.”
“…….”
그라스 원더가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트레이너 씨를 바라보자, 그는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 게임 타이틀은 분명, 그의 추억이 가득 담긴 것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잊고 있었지만, 이 게임에 담긴 추억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이 독점력 내장의 담당 우마무스메가 이 추억을 들추어 본다면, 분명, 그는 오늘 밤 나기나타의 칼날 아래에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잘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로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라스 원더에게 필사적으로 다른 게임을 권한다.
그러나 그라스 원더는 보기보다 눈치가 빠르다. 트레이너 씨가 슬그머니 다른 게임의 CD를 집어넣으려 하자, 그런 그를 제지한다.
“…뭔가 켕기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따, 딱히 없는걸. 하하, 하…….”
“그러면 이걸로, 같이 해도 괜찮겠지요?”
“최신 게임이 더 재미있을―”
“아무쪼록, 이걸로.”
“…….”
애초에 히토미미가 우마무스메의 근력을 이길 수 있기나 한가. 그라스 원더가 살짝 힘을 주어 그의 손을 누르자, 그는 비통한 표정으로 CD를 다시 바꾸어 집어넣는다.
곧이어 TV 화면에 그라스 원더도 익히 알고 있는 일본 모 제작사의 로고가 나오고, 곧이어 게임의 타이틀이 나온다. 새 게임이라 쓰인 것을 누르려다가, 문득, 그라스 원더는 트레이너 씨가 무엇이 두려워 이 게임을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후후, 트레이너 씨의 귀여운 추억…한번 살펴볼까요?”
그렇게 웃으며 새 게임 바로 아래의 ‘불러오기’를 누른다. 세이브 파일이 몇 개 주르륵 표시되고, 그라스 원더는 맨 위에 있는 11시간 22분짜리 세이브 파일 하나를 누른다.
게임의 주인공 이름이 표시되고, 불러오시겠습니까? 라는 문구가 화면에 뜬다. 그런 그라스 원더에게서 트레이너 씨는 살금살금 잰걸음으로 멀어지려 시도한다.
“트레이너 씨는 주인공 이름을 본명으로 지으시네요. 정말…귀여우셔라.”
그라스 원더가 모르는 트레이너 씨의 일면을 또 하나 알아가고 있는 것이 즐거운 나머지, 그라스 원더는 싱글벙글 웃는다. 그러면서 세이브 파일을 불러왔고, 몇 초간의 로딩 후에 어느 한적한 성당으로 보이는 배경에서 주인공과 다른 파티원 한 명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 앞에는 성당의 신부로 보이는 사람이 마치 주례를 하듯, 그들 위편 단상에 서 있었다.
“…….”
결혼식, 인 것이다. 그제야 파티원의 성별이 여성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라스 원더는,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아무리 게임 속이라지만, 트레이너 씨가 본명을 적어 둔 주인공이 그라스 원더가 아닌 다른 여자와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이 불쾌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뭐, 게임이니까. 대견스럽게도 그녀 내면의 독점력을 잘 갈무리하며, 그라스 원더는 여성 캐릭터의 이름을 바꿀 수 있나, 바꿀 수 있다면 그라스 원더로 바꿔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파티 화면으로 들어가 본다.
“…….”
그리고, 여성 캐릭터의 이름이 그라스 원더의 눈에 들어온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름이다. 디폴트 네임은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트레이너 씨와 같이 3글자의 이름이다. 트레이너 씨의 동향 사람이라는 뜻이리라.
그런데, 트레이너 씨와 성이 다르다. 트레이너 씨의 가족 이름은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일본이라면 모친과 성씨가 같았겠지만, 트레이너 씨의 고향에서는 결혼한다고 성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러니, 모친…그러니까 어머님의 성함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라스 원더는 그 작은 가능성을 배제한다.
그야 당연하지. 세상의 여느 누가 모친과 같이 게임을 하고, 모친의 이름을 한 캐릭터와 게임상에서지만 결혼식을 올리려는 것인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러니, 이름의 주인공이 트레이너 씨의 가족은 아님을 확신한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이지 않은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막상 그 이름을 마주하니 감정이 통제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컨트롤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머리의 실핏줄이 살짝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으직, 하는 소리가 컨트롤러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트레이너 씨.”
그러나 차분히,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채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기숙사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반사적으로 그라스 원더는 어딘가에서 나기나타를 꺼내어 뒤로 던졌다. 휙,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더니, 히익, 하고 사람이 움츠리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려온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라스 원더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트레이너 씨, 왜 도망가시나요.”
“네가 던진 나기나타를 보렴. 안 도망가게 생겼나.”
“도망가지 않으셨다면, 던질 일도 없었답니다.”
“…….”
믿겠냐,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괜히 그라스 원더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 닫으시고, 이리 오셔서 앉으세요.”
불퇴전의 사무라이라면서, 이럴 때는 아메리칸, 그것도 서부의 카우걸 같은 행동력이다. 총구를 들이밀고 자리에 앉으라는 격이 아닌가.
그러나 그라스 원더의 말을 그가 거부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도망쳤다간, 다음에는 그라스 원더가 항상 품고 있는 작은 단도가 정말로 그의 목덜미에 꽂힐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얌전히 문을 닫고, 살금살금 그라스 원더의 옆으로 걸어온다. 그리곤 슬쩍, 그라스 원더의 눈치를 보며 그녀의 옆자리에 앉는다.
트레이너 씨의 인기척이 옆에 느껴지자, 그라스 원더는 TV 화면을 바라본 채로 트레이너 씨에게 말한다.
“전 여자친구, 분이시죠?”
그라스 원더의 말대로였다. 이 게임의 엔딩을 ㅂㅈ 않고 유기해버린 이유가, 전 여자친구와 헤어진 다음에 아예 기억에서 지워버렸기 때문이니까. 그렇다고 그라스 원더에게 거짓말을 하기도 조금 그래서, 적당히 어깨를 으쓱이며 둘러대듯 말한다.
“뭐어, 뭐.”
“괜찮아요. 화내지 않아요.”
“…….”
애초에 그라스 원더에게 화를 낼 권리가 있기는 한가? 네가 뭐 내 여자친구라도 되니? ……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저 속으로 투덜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야,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그라스 원더의 독점력과 나기나타 앞에 속절없이 사지가 뎅겅뎅겅 잘린 채로 그라스 원더에게 사육당할 미래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 여자친구분과 게임에서 결혼식을 올리려 하신 거네요. 후후, 즐거우셨나 봐요?”
“뭐, 그때는 그랬지.”
“흐응…….”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가 말하자, 그라스 원더는 괜스레 심통이 나서 뺨을 부풀리며 그의 허벅지를 살짝 꼬집는다.
“아얏!!”
하지만 말이 살짝이지, 우마무스메의 힘으로 꼬집는 것이다. 히토미미가 웃으며 버틸 수 있는 무게가 아니다. 자연스레 인상이 찌푸려지며, 그는 반사적으로 그라스 원더의 손을 쳐낸다.
“아…….”
트레이너 씨의 그런 반응에 적잖이 충격이라도 받은 것일까, 그라스 원더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고,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죄송, 합니다. 무심코 그만….”
하지만 이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트레이너 씨에게 사과한다. 그녀 또한 자신과 트레이너 씨가 아무런 사이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조금 선을 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레이너 씨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괜찮아.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
트레이너 씨에게 있어서 그라스 원더는, 폭력적인 담당 우마무스메라는 뜻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괜스레 자제하고 있던 감정이 북받치는 것만 같았다.
트레이너 씨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 드려야 한다. 그라스 원더는 트레이너 씨의 취향처럼 나긋나긋하고 청순하며, 트레이너 씨에게 의지하고 있는 우마무스메라는 것을.
그러니 청순가련한 그라스 원더를 보여드린다면, 약간의, 귀여울 정도의 질투심은 드러내도 되겠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꼬리를 움직여 트레이너 씨의 허리를 살짝 휘감는다.
“저기, 그라스? 꼬리는 조금…풀어주지 않으련?”
그러나 그것이 조금 부담스러웠을까, 트레이너 씨는 그녀의 꼬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곤란한 얼굴로 꼬리와 그라스 원더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트레이너 씨가 괜스레 귀여워 보였을까. 그래, 이런 사람이니 여자친구 정도는 있을 수밖에 없지. 다르게 생각하면, 그라스 원더가 연모하는 사람이 여자친구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 조금의 여유를 가지고, 그라스 원더는 후후 웃으며 더욱더 강하게 꼬리로 그를 휘감는다.
“트레이너 씨의 어떤 추억이 있는 게임인가 했더니, 전 여자친구분과 함께했던 추억이었네요.”
“그래서 내가 다른 게임을 하자고 했는데.”
“아뇨, 그러니 더더욱 이 게임으로 해야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그라스 원더는 옆에 앉아 있는 트레이너 씨의 팔에 머리를 살짝 기댄다. 갑작스러운 담당 우마무스메의 행동에, 트레이너 씨는 반사적으로 밀쳐내려 했지만, 이성이 그의 행동을 막아버린다.
그라스 원더가 괜찮다 괜찮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강력한 독점력을 내장하고 있는 아이다. 지금도 위태로울 정도로 많이 참고 있는 것이리라. 여기에서 밀쳐내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그라스 원더의 꼬리와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리라. 컨트롤러가 박살 나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였다.
“그래, 그라스 네가 원한다면야.”
그래서 트레이너 씨 또한 옅은 미소와 함께 그라스 원더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는다. 가끔 나기나타를 휘두르고 단도로 할복을 종용해서 그렇지, 본성은 착하고 여린 아이다. 지금처럼 나이에 맞는 귀여운 모습으로 쭉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라스 원더는 착한 아이일진대, 그녀의 독점력은 그렇지 못하다. 아무래도 검고 질척이는 독점력이란 감정은, 가히 붉은색에 금띠를 둘러 치장할 정도로 강력한 스킬이다. 맞으면 힘이 빠지는 감정이라니,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그 독점력의 두려움을 잠시 망각한 것이, 그의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고양이인 양 갸르릉거리며 그의 쓰다듬는 손길을 즐기던 그라스 원더는, 순식간에 눈을 빛내며 그의 팔을 끌어안는다.
“트레이너 씨도 허락하셨으니까, 그러면 트레이너 씨가 이 게임에서 전 여자친구분과 함께하셨던 추억들, 전부, 전부 저와의 추억으로 덧씌우도록 해요.”
“뭣……?!”
“처음부터, 이 장면까지, 오늘 안으로 전부, 클리어하죠.”
“잠깐, 그라스야. 여기까지 11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내일은 주말이잖아요? 밤을 새워서라도 끝낼까요, 후후.”
“내 나이에 밤새우면 죽어!”
“트레이너 씨는 죽어도 그라스 원더와 같이 죽는 거랍니다.”
그러면서 꽈악, 그의 팔을 더더욱 세게 끌어안는다. 그의 허리를 감싼 꼬리 또한 더 강한 힘으로 그를 그라스 원더 쪽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벗어날 수 없는, 그라스 원더의 거미줄이다. 그제야 자신이 거미줄에 걸린 곤충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 주인공 이름은 트레이너 씨의 본명 그대로 쓰세요. 히로인의 이름은 그라스 원더로 지을 테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니, 그라스 원더 원더야.”
“트레이너 씨와 저의 결혼식, 반드시 치르고 갈 테니까요.”
“게임과 현실을 혼동하지 마!”
게임은 질병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라스 원더의 눈은 이미 살짝 맛이 가 있었고, 그녀의 귀는 트레이너 씨의 어깨를 찰싹찰싹 때리고 있었다.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이었다.
* * * * * * * * * *
다음날, 장장 11시간 하고도 45분간의 혈투 끝에, 그라스 원더는 염원했던 결혼식 이벤트를 치렀고, 만족한 얼굴로 트레이너 씨의 침대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라스 원더에게 자기 잠자리를 빼앗긴 트레이너 씨는, 침대에서 쌕쌕거리며 잠든 그라스 원더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하얗게 불태운 초췌한 몰골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히토미미와 우마무스메 모두 게임을 했던 시간만큼 잠에 빠져들었고, 일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대로 하룻밤 더 자고 가려는 그라스 원더를 필사적으로 설득하였으며, 트레이너 씨의 설득에 그라스 원더는 샤워하고 저녁만 먹고 돌아가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이번에는 승부 속옷을 사용할 기회가 없었지만, 다음에는 분명,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라스 원더가 트레이너 씨와 함께 있을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까.
그리고 그라스 원더는, 트레이너 씨의 전 여자친구처럼 트레이너 씨와 헤어지는 엔딩으로 끝낼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트레이너 씨의 방에서 샤워하고, 트레이너 씨가 차려 준 저녁―당근 함박스테이크―을 먹던 그라스 원더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무릎을 탁, 치며 트레이너 씨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러고 보니 트레이너 씨.”
“응?”
“내기에서 이기시고, 제가 뭘 요구하려고 하셨나요?”
“아, 그러고 보니 내기가 있었지. 뭐, 별 건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듯이 말은 하고 있었지만, 그라스 원더는 트레이너 씨의 심박수가 순간적으로 상승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긴장이라도 하신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트레이너 씨가 평소보다 조금 더 사랑스러워 보인다.
그라스 원더에게 무엇을 원하셨길래, 이렇게까지 긴장하시면서 말씀하신단 말인가. 후후, 입가를 가린 채 미소 지으며 트레이너 씨의 답변을 기다린다.
“네가 강제로 작성한 혼인신고서의 파기를……야! 나이프 휘두르지 마! 포크 던지지 마! 나기나타 꺼내지 마―!”
“별거 아닌 게 아니잖아요! 보여드릴게요, 트레이너 씨. 자아, 나의 길을…!”
“정신일도 하사불성 발동할 곳이 아니라고 여기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트레이너 씨는 현관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리고 그 뒤를 그라스 원더가 상쾌한 미소, 그리고 나기나타를 휘두르며 트레이너 씨를 쫓아간다. 중앙 트레센의 대운동장에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진다. 그러나 중앙 트레센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중앙 트레센의 평온한 일상이기 때문이다.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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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한섭 말딸라이브
좌석이다 헤헤 좌석
이도현
2024/06/07 21:07
"왜 귀여운 척이지?" ㅋㅋㅋ
린성신관알타
2024/06/07 21:23
트레센은 이래야 평온하지
쾌청솔라빔
2024/06/07 21:26
맛있게 잘 쓴다. 작가임?
darkms
2024/06/07 21:36
글로 돈을 벌 실력이 아니애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