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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좀 씌워주실 수 있나요? 작성자입니다.

안녕하세요?
감사하게도 저번 글을 베오베로 보내주신 덕분에, 이제 눈팅족에서 종종 글 올리는 유저(?)로 변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베오베 티켓 한 번 써보려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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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중퇴.
열 여덟에 집을 나왔고, 당시 수중에 단 한 푼도 없던 나는 배가 고팠다.
친구의 도움으로 쪽방을 구했다.
대각선으로 누워야 다리를 다 펼 수 있는 월 14만원짜리 고시원.
급한대로 주방보조일을 시작했다.
한여름 삼계탕집 주방.
한창 배가 고플 나이, 푹푹 찌는 주방에서 복날을 세 번 이겨내는(?) 동안 나는 매일 배가 고파 하루 서너 번 현기증이 났다.

하도 배가 고파서 사장님께 여쭸다.
"혹시 가게에서 제가 맘껏 먹을 수 있는 게 있을까요? 버려지는 거나 팔 수 없는 그런 거요."
맘씨 좋은 사장님은 골똘히 생각해보시더니 대답했다. 
"글쎄. 무? 치킨무? 너 일 열심히하니까 그정도는 맘껏 먹어라. 하하하."
그때부터 나는 틈날때마다 무를 엄청 먹었다.
사람 몸뚱이만한 다라에 그득 담아둔 치킨무를 주걱으로 푹푹 퍼담아 그릇에 수북하니 쌓아놓고 먹었다.
허겁지겁 씹어먹는 무는 시큰했지만 맛있었다.
눈시울도 조금 시큰했다.
괜찮아. 머지 않아 나는 글을 쓸 거니까.
버티자.

첫 월급을 현금으로 모두 인출해 친구에게 절반을 건넸다.
쪽방에 널브러진 만 원짜리들을 내려다보며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조금의 여유(?)가 생기자 드디어 동네를 조금씩 돌아다녀봤다.
근처에 헌혈의 집이 있었다.
"헌혈 하면 초코파이 준다던데..."
더벅머리의 나는 홀린듯 문을 밀고 들어가 예쁜 간호사 누나들에게 꾸벅 인사했다.
"헌혈하러 왔어요." 
그때부터 2주에 한 번 헌혈을 했다.
한 번 갈 때마다 초코파이와 오렌지주스를 많이도 먹었다.
그 즈음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대학에 가기 위해 많은 일을 했다.
택배 상하차, 공단 라인맨, 까대기, 보안요원, 현금수송, 텔레마케팅, 편돌이, 호텔 연회팀, 카페 바리스타, 건설현장, 안전감시단, 음식점 서빙...
덜컹거리는 승합차에서 영어단어를 외웠고 새벽에 나가 새벽에 들어오면서 시를 외웠다.
조금만 더 버텨 보자. 나는 건강하니까.
머지 않아 대학에서 글을 배워서 좋은 글을 쓰게 될 거야.

육군 3대 꿀보직이라는 155미리 견인포 주특기로 군생활을 마치고, 다시 2년을 닥치는대로 일하며 공부했다.
할 수 있어. 이제 진짜 다 왔다고.
그렇게 스물 다섯 겨울, 나는 제주도 농장에 있었다.
하필이면 또 무밭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서울 번호로 전화가 왔다.
"합격하셨습니다. 등록은 몇일까지..."
"저 예비 18번인데 합격이라고요? 보이스피싱 아니에요?"
거짓말처럼 서울의 모 대학에 들어선 나는 과대표와 학생회, 부조교 등 할 수 있는 건 다 하면서도 모든 과목 A+를 찍었다.
학교생활은 그냥 숨만 쉬어도 너무 좋으니까, 힘들지 않았다.
사실 링겔을 세 번이나 맞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내가 소설을 배우고 있어.
내가 지금 시창작 강의를 듣고 있다고.
그 와중에도 버릇처럼 헌혈은 했다.
어쩐지 계속 배가 고팠으니까.

1학년 말, 전학년 통틀어 그 해 최고의 단편 소설에게 주어지는 최우수 상을 받아냈다.
내 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1년 동안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버린 나는 휴학을 선택했다. 
그리고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중국집 주방.
양파와 대파를 무지하게 썰어댔고, 손도 몇 번이나 썰었다.
그래도 오히려 에너지가 회복되는 게 느껴졌다.
언제든 다시 돌아가면 되니까.
조금씩 이뤄내고 있으니까, 충분히 쉬고 다시 시작해보자. 나는 건강하니까.
그러던 어느날.
서른 몇 번의 헌혈 중 언젠가 등록했던 조혈모세포 기증 동의(골수기증) 건으로 전화가 왔다.
"XX님 혈액샘플과 일치하는 환자분을 찾았어요. 20대 여성이신데, 혈액암으로 투병중이세요."
다시 여름 주방에서 땀을 흘리고 있던 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나와 같은 20대가 투병중이란다.
심지어 기증을 받지 못하면 높은 확률로 사망한다고 한다.

나는 10여년 전, 치킨무를 허겁지겁 입에 쑤셔넣던 나를 떠올렸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그래도 별 탈 없이 시행착오를 이겨냈던 10여 년.
그건 내가 건강해서 할 수 있었던 거다.
의지가 있고 꿈이 있는데 몸이 건강하지 못했다면, 나는 10여년 동안 조금씩 이뤄왔던 것들을 가질 수 있었을까?
다른 방법이 없고, 오직 유전자가 일치하는 익명의 사람으로부터 기증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게 안되면 그냥 죽는 수 밖에 없다면.
아주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할게요. 합니다."
코디네이터의 안내대로 혈액검사를 다시 진행했고, 이식 가능하다는 결과를 받았다. 그리고 몇 차례 더 연락이 오갔다.
"환자분께서는 크리스마스에 기증받길 원하세요. 물론 기증자님께서 결정하실 일이고, 기증자님이 편하신 날로 잡으시면 됩니다."
"크리스마스로 잡아주세요."

기증 일자에 맞춰 미리 주방 직원 대타를 구하고 일을 그만뒀다.
그리고 한 달 동안 마치 임산부가 된 기분으로 꾸준히 운동을 하고 가려먹고 잘 자려고 애썼다.
좋아하던 술도 끊었다.
이식 3일 전.
헌혈처럼 진행되는 기증이었기에, 골수를 혈액에 흐르게 하는 유도주사를 맞기 시작했다.
3일동안 헉, 소리가 날 정도로 허리가 욱신거렸다.
생각보다 고통스러웠지만 지금 순간에도 누군가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다는 생각에 묵묵히 버텼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몇 시간에 걸친 추출이, 그리고 이식이 진행됐다.
내 몸에서 빠져나간 골수가 구급차에 실려 떠났다.
너무나도 다행히, 무사히 이식이 완료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라는 생각에 그제야 뿌듯해졌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다.
법적으로 제한이 되어 알 수도 없다. 오직 센터 코디네이터의 중계로 진행될 뿐이다.
이식을 한다고 해도 무조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나를 위해서.
아무런 보상도 없이 공들여 기증을 진행했고,
덕분에 완전히 망가졌던 골수가 재생되기 시작해서 마침내 두 발로 일어설 수 있다면.
그거면 된 거다.

평등은 공정한 기회라고 배웠다.
개인이 사회를 단 번에 바꿀 순 없지만, 적어도 다른 한 명에게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거다.
나의 작은 수고로움이 누군가의 삶이 된다면, 거기서 망설이면 안되는 거다.

본의 아니게(?) 수입이 끊긴 상황.
마침 연락이 온 학교 선배를 따라 장르소설을 배우러 평택으로 떠났다. 
몇 개월 후, 평택 사무실에 편지가 도착했다.





(신상정보가 배제된 상태고, 편지 주신 분의 뜻에 누가 되지 않을 것 같아 사진을 올립니다.)

그 감사함으로 열심히 글을 썼다.
봄이 가고 여름이 지났다.
그리고 내일, 메이저 사이트에 내 글이 연재되기 시작한다.

(연재할 작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홍보로 비춰질 수 있을 것 같아 자제하겠습니다. 혹시나 원하시는 분께선 꼬릿말 링크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인포메일 시절부터 오유와 함께 나이를 먹어왔습니다.
며칠 전 글로 난생처음 베오베를 가고 나니,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요즘 여러 문제로 오유가 시끌시끌한데, 조금은 따뜻한 글을 보여드리고 싶어 썼습니다.

앞으로는 짤막하게나마 재밌는 글을 주기적으로 올려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부지런히 정의롭게 살겠습니다. 
오늘도 많이 웃는 하루 보내세요 ^^

댓글
  • 둘포반장 2017/09/05 17:19

    아, 물론 우산 사건의 후기따위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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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로봇S2 2017/09/05 17:21

    작성자분 진짜 대단하신분이네요
    꼬릿말 보고 다녀도 왔습니다. 야구에 관한 글인거죠?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종종 들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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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태앨롱 2017/09/05 17:26

    편지 보는 순간.. 코끝이 찡..... 정말 작성자분 고생하셨던 만큼 노력 하셨던 만큼 모든일이 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수혈받으신 부부두분 께서도 항상 기도해주시니 잘 되실꺼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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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돼지아재 2017/09/05 17:33

    세상에 병신이 많은만큼
    작성자님처럼 멋진사람들도 많다는걸 작성하신 글 보고 깨닫습니다.
    멋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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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stlude 2017/09/05 17:47

    너무 멋지신 분이네요. 제가 다 감사합니다. 정말 멋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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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벽이닷 2017/09/05 17:48

    너무 멋지시네요
    정말 글 읽으면서 울컥했네요.
    작성자님 앞길에 꽃길만 펼쳐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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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막말러 2017/09/05 17:51

    멋지다...
    이런게 멋진 삶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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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앙졸라 2017/09/05 17:54

    담백한 문체가 참 보기 좋네요
    탐나는 필력입니다
    내심 우산 후기를 기대하며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 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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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rop자폭왕 2017/09/05 17:54

    저 편지 쓰신분도 정말 표현을 잘해주셔서
    더 와닿는거 같네요
    한글자한글자에서 어떻게 하면 더 고마움을 표현할수 있을지 고민한 흔적이 보입니다.
    멋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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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사조병장 2017/09/05 17:54

    아이고 아재요~ 글 보면서 코가 시큰하네요,
    아재 건강하고 탄탄대로 길 걸을 수 있게 응원해요.
    덕분에 저까지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어요.
    언제나 행복과 함께 하길 바라요. 힘든 일 있어도 슬기롭게 헤쳐나가길 바라요.
    퐈이팅!!!
    ...
    ..
    .
    중요한 건 그래도 아재징어, ASKY

    (uxvj3q)

  • 연애시대은호 2017/09/05 18:01

    필자의 고생했던 과거, 따뜻한 마음, 실천하고 행동하는 선행..
    지금 그 뭉클함이 더 한 것은
    아무래도 이 모든 것을 이렇게 술술 읽히도록 적어주신 엄청난 필력 때문 아닐까요?
    자기 생각을
    자기 일을
    이렇게 멋지게 적어낼 수 있다는 것 또한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또한 노력의 결과라면 엄지 척!!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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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나단이 2017/09/05 18:01

    혹시  성함이  이 *     외자  아니신가요?
    전에   티비에서   군대가기전   헌혈 많이 하시던 젊은  분   나오는거 보고   제가    중단했던 헌혈  다시 하게  되었던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는데
    글 내용 보니  비슷한 면이  많은 것 같이서요. . .       덕분에   현혈  계속해서   지금은  52번째  헌혈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분 아니더라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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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물잔 2017/09/05 18:07

    고생 참 많이 하셨어요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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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쿄쿄냥이 2017/09/05 18:10

    진짜 멋있고 대단하신분이네요
    글만봐도 뭉클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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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루마끼 2017/09/05 18:13

    진심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온전히 인생을 자신의 의지안에 두셨군요
    인생에 늘 끌려다니기만 하는 중년으로서
    다시한번 존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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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로농 2017/09/05 18:13

    와 정말 힘들게 그리고 신념대로 살아오셨네요 정말.. 전 대학교 막학기 취준생이고 자소서 쓰고 있는데 이렇게 치열한 삶을 살아오지 않고 평이하게 살았다는게 반성이 되네요.. 어느 하나 목표가 아니라 문어발식으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풀기 좋을 스토리만 생각하고 살았어요. 제가 작성자님처럼 '글 쓰는것' 과 같은 정확하고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면 그 간절함을 구구절절하게가 아니라 그냥 이야기 할 수 있을텐데 요..
    존경하고 멋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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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넉울휘 2017/09/05 18:14

    멋지시네요~존경스럽습니다!
    앞으로도 글 기다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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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박 2017/09/05 18:15

    멋집니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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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긍정대답왕 2017/09/05 18:18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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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과망했으면.. 2017/09/05 18:19

    나는 단 한번이라도 당신만큼 치열하게 살았던 적이 있었던가.
    반성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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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마음의풍금 2017/09/05 18:21

    이분은 천사가 분명합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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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고픈곰수 2017/09/05 18:23

    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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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몬상어 2017/09/05 18:25

    영웅이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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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르니 2017/09/05 18:27

    울컥했어요
    너무 바르고 건강하신분 같아요
    어떤 글 쓰시는지 꼭 읽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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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승적으로 2017/09/05 18:27

    이보시오 천사 양반~~내 추천이나 받으시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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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룡코딱지 2017/09/05 18:28

    난 쓰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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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ㅂr 2017/09/05 18:30

    어제는 심장이 쫄깃했고
    오늘은 눈물을 흘렸어요.
    오랜만에 따뜻한 글을 본 것 같아요.
    앞으로 응원할께요.
    ˚✧₊⁎❝᷀ົཽ≀ˍ̮ ❝᷀ົཽ⁎⁺˳✧༚

    (uxvj3q)

  • 남님 2017/09/05 18:32

    님~~~~  좀~~~~~   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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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Huc 2017/09/05 18:36

    세상에...  한사람의 영웅 아니 몇사람의 영웅이신지 모르겠네요... ㄷㄷ!! 대단하다고 밖에 생각이 안듭니다. 그동안 살아오신 삶이나, 이식 결정에 따른 책임감까지.... 대단하고 또 대단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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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옴므 2017/09/05 18:36

    어우 눈물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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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충전 2017/09/05 18:40

    멋있다.. 글 읽고 이 세마디 생각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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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수야 2017/09/05 18:42

    짝짝짝
    우산얘기가 궁금하긴 하지만,
    이 글 너무 좋아요.
    좋은 일 많이 하시는군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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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츠님 2017/09/05 18:48

    소설이길 바랬는데 실화라니..... 멋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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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omi0523 2017/09/05 18:53

    읽는데 소름돋았어요
    실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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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얀콩떡 2017/09/05 18:58

    눈물이...멋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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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턱털요괴 2017/09/05 19:03

    우오옷!!! 멋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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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딸기맛파르페 2017/09/05 19:07


    머시쪙! 너무 머시쪄서 눈물이 다나양! ㅠㅠ
    앞으로 꽃길만 걸으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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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가다12 2017/09/05 19:08

    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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