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1995년 5월 어느 날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 나는 대학 신입생으로서 무사히 수험생 생활을 마치고 대학에 들어왔다는
기쁨보다는 성적을 유지하지않으면 만화책을 뺏긴다는 압박감에 더이상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알바를 할 수 있으니 꿈에 그리던 LD(비디오 테이프보다 화질이 좋은 큰 CD이다)를
살 수 있다고 좋아하는 요즘 시대에 흔히 말하던 오덕이었다
그리고 내 덕질의 대상은 '마도카'였다. 마법소녀 말고...
내가 말하는 마도카는
80년대에 연재된 만화 오렌지 로드의 주인공이시고 풀네임은 '아유카와 마도카'.
500원짜리 해적선을 타고 한국에서는 '고은비'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마도카이다
뭐 어쨌든 사건이 일어났던 날은 마치 '운수 좋은 날'처럼 매우 기분 좋게 시작되었다.
그 날의 수업은 오후에 있었으므로, 오전에 회현 지하 상가의 단골집에 들러 주인 아저씨께 부탁한지
두 달만에 도착한 화보집을 수령하였다. 그리고 원본 만화책도 2권 구했다.
이제 마지막 권만 구하면 원본 콜렉션을 완성시킬 수 있다!
그리고 아저씨가 단골 손님 특전이라며 전지 사이즈의 단독 일러스트도 서비스로 주셨고.
게다가 잠시 돌아보다 보니 '오! 나의 여신님' 달력도 구했다.
5월이 됐는데도 아직 남은 달력이 있었다니!
그리고 버스 정류장 앞 서점에 들려 윙크(순정만화 잡지)를 샀는데, 아주머니가 사은품이 남았다며
이은혜 님의 블루 일러스트 포스터를 그냥 주셨다. 기분이 좋아셔서 강경옥 님의 노말시티 단행본도
하나 샀던 걸로 기억한다.(참고로 나는 그 당시에도 꽤 건장하게 생긴 남자였다)
나는 Jansports 가방과 도면통에 달력과 일러스트를 넣어, 꼭 앉아서 버스를 탔다.
학교에 가면 동아리 방으로 가야지. 가면 여신님 오덕인 A가 어제 술을 진창 마시고 꽐라가 되어서
이제서야 겨우 일어났을 것이니 그 녀석에게 달력을 인질로 삼아 술이나 얻어먹자.
하는 생각에 기분이 대단히 좋았다. 그리고 그렇게 학교로 가는데...
버스가 학교에 가까이 가면서 뭔가 분위기가 수상해졌다. 학교 두 정거장 전부터 소위 닭장차라 불리던
전경들의 버스가 길가에 주욱 서 있었고, 길에는 전경들이 누워 대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학교 정문 앞은 분위기가 더 심각했다. 버스 안에서 순간 스쳐 지나 본 학교 안에는
구호가 적힌 형형색색 깃발과 쇠파이프를 들고 마스크를 쓴 학생들이 얼추 100명은 넘개 모여 있었던 거 같다.
얼핏 보니 다른 대학교 학생도 많은 듯 했다.
그렇다... 지금은 5월이었던 것이다. 당시 5월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대학마다 시위가 잦았는데,
아마 그 날도 집회가 있었고 경찰들도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것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그 때 버스에서 내리지 말고 그냥 지나쳤어야 했다
군자는 위험을 가까이 하지 않는 법이라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 놈의 술이 뭔지... A에게 술을 얻어먹을 생각에 나는 버스에서 내려 학교를 향했다.
정류장에 내려보니 상황은 심각했다. 학교 안에서는 꽹과리 소리가 곳곳에 들리고 있었고,
전경들이 길 양 옆에 도열하여 흉흉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내가 거기서 딱히 잘못한 건 없었지만 흉흉한 분위기에
위축이 되버린 나는 쭈뼛쭈뼛 정문 쪽으로 걸어 갔는데,
정문 앞에서는 법대생 하나가 손에 법전을 들고 외치고 있었다.
"학생 여러분! 영장이 없는 불심 검문은 불법입니다!
영장을 제시하지 않으면 그냥 당당히 학교로 들어오십시오!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불심검문이 무슨 뜻이더라? 음... 공대생이라 어렵구만. 불심 + 검문인가? 불심은 佛心인가?
검문은 뭐지? 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 앞의 학생들이 사복 경찰들로 보이는 사람들 앞에서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꺼내고,
간이 책상에 앉은 어떤 사람이 내용물을 하나하나 검사하고 있었다.
순간 그리고 머리 속에는 "아! 씨1발! 좇됐다...!"라는 생각이 엄습했고,
그 순간 어떤 험상 궂은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아저씨에게는 내가 어떻게 보였을까?
결코 평범한 외모라고는 할 수 없는... 산도적 같은 인상
허름한 의복 (당시 LD를 살려고 돈을 아끼느라 의복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불온서적이 가득 들어있을 듯한 빵빵한 가방 (마도카 쨩의 화보집 + 강경옥 님의 노말 시티 단행본...)
이적물 대자보 수십 장을 들어있을 듯한 도면통
하지만 도면통에는 마도카 쨩과 이은혜 님의 블루 포스터가 들어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사복경찰로 보이는 아저씨가 사무적인 정중함으로 내게 말했다.
"학생 잠시 검문에 협조해주세요. 주민증이랑 학생증 보여주고, 가방이랑 도면통은 나 주고."
하지만 가방의 내용물을 하나하나 꺼내 늘어놓으며 확인하는 모습을 보니, 내용물을 들키면
난 분명 쪽팔려 죽을 것이다. 게다가 주위에 여학생도 많았으니
오덕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현재처럼 심하지 않았던 그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물을 들키면 난 정말 그 장소에서 쪽팔려 죽을 것 같았다.
난 그녀들을 지켜야된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가방을 꼭 끌어 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요? 아저씨가 혀..형사에요? 왜 남의 소지품을 하..함부로 보자고 하세요? 영장 있어요?"
그러고나서 내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리모컨에 있는 음소거 버튼을 누른 듯 주위가 고요해졌다.
옛날에는 정말 불신검문 많앗음.. 짜증..
와... 저정도면 할아버지다 할아버지
ㅜㅜ 눈물 없이 읽을 수 없었다. 흐흑
문민정권이전에는 경찰이 깡패들 역할을 대신하던 시기라 참 별거아닌걸로 살벌하고 고작 혐의사실 만으로도 구타당하고 집으로 귀가하던
사람들이 많았더랬죠
저보다 몇년 빠르신것 같은데... ㅎㅎ 저도 그거 뭔지 알아요.. ㅎㅎ 소년 감성 자극하던 초능력 만화...
ㅎㅎ 나중에 보니 별게 아닌데...
아야라미 레이.. 입덕의 계기가 된 에바.. ㅎㅎ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캬 오렌지로드!!!
근데 어? 어? 엇!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때 저는 엄마뱃속에서 영양분이나 호로록 할 때인데 학생운동과 불심검문이라니 ㄷㄷㄷㄷ
그 후에 받을 눈빛을 상상하니 저같아도 그자리에서 자살충동들거같네요ㄷㄷ듀ㅠㅠㅠ
회현지하상가. 현대전자 오팔전자
근데 뉴타입은 안사셨어요?
역사의 현장!
마도카라면!!!! 떳떳하십시오!!!!
94학번 마도카 덕후가!!
저게 그 현대판 문익점인가 뭔가 하는 그거냐
오렌지로드는 진짜 바이블이었다고 삼촌이 얘기해주네요.
불심에서 빵 터졌네요..ㅎㅎ 주변 대학생과 경찰들에게 받았을 그 모멸감을 어떻게 견뎠을까? 진짜 멘탈 갑이신 듯.....
차라리 대자보라도 있었으면 학생들에게 영웅 대접이라도 받았을 건데, 진짜 안타까운 상황이었네요.
LD라니 대단... 그 지하상가에서 LD를 비디오에 복사한것도 팔았었는데
이후 용산에서 vcd가 풀릴때까지
와 시발 난줄
역시 오타쿠는 집 안이 제일 안전...ㅠㅠ 집 안에서 인터넷으로 덕질할 수 있는 세대 오타쿠라 정말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