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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사이코패스 죽이기

[ '엄지 연쇄살인'의 네 번째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네 번째 피해자 '최 모양'도 다른 피해자들처럼 왼쪽 엄지가 절단된 채로 발견되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엄지 자리에 조화가 꽂혀있었습니다. 그 살해수법 역시 다른 세 건의 사건과 똑같아, 경찰은 같은 범인의 소행으로-. . . ]

최무정은 홀로 자신의 방 침대에 걸터앉아, 딸과 함께 찍은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밝은 미소로 팔짱을 낀 딸과 무뚝뚝해 보이는 본인의 모습.

[ 아휴~최기자... 딸아이 일은 정말 유감이야. 아니 어떻게 딴 사람도 아니고, 최기자 딸이 연쇄살인 피해자가 될 줄은 정말! 휴~ 힘내게. 근데...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인터뷰는 언제쯤 가능할까? 내가 계속 이 사건 취재해온 것은 최기자도 알고 있지? ]

연예부 전문 기자 최무정 기자. 그의 딸이 서울을 떠들썩하게 하는 엄지 살인 사건의 네 번째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최무정은 사진 속 딸의 얼굴을 엄지로 한번 쓸었다. 딸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렇다. 최무정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이해가 안 되어 의문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왜? 왜 내 딸이? 어째서? 어떻게? 
정말 순수하게 궁금한 얼굴의 최무정은, 허리를 숙여 침대 밑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는 무릎 위에 올려둔 상자를 열어보며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자 안에 엄지손가락은 3개 밖에 없는데 말이다.

엄지 연쇄살인의 진범인 최무정. 그는 네 번째 피해자가 자신의 딸이란 것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무정은 잘린 엄지들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누군가 내가 범인이란 것을 알아냈다. 그 누군가는 법의 심판 대신 다른 선택을 했다. 내게 가족을 잃은 아픔을 똑같이 느끼게 하려 했다. 그게 누굴까? 아마, 이 엄지손가락들의 주인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최무정은 상자를 닫아 넣고, 핸드폰을 꺼내 동료에게 전화를 걸었다.

" 김기자. "

[ 어~ 최기자! 좀 어때? 괜찮아졌어? ]

" 엄지 연쇄 살인 사건 조사한 것들, 모조리 준비해 줘. 나도... 그 사건을 취재해야겠으니까. "

최무정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 후- "

작게 숨을 고른 최무정은 자신이 걸어온 높은 계단을 돌아보았다. 경사진 산동네의 최상단. 아무렇게나 바른 시멘트 계단에서부터 가난이 느껴졌다.
군데군데 녹이 슨 파란 철문 앞에서 수첩을 꺼내 확인하는 최무정. 

' 첫 번째 피해자 장진주. 할아버지와 단둘이 삼. '

최기자는 낡은 철문을 바라보다, 전선이 노출된 둥근 벨을 눌렀다. 

' 빽-! '

큰 기계음이 울리고 잠시 뒤,

" 뉘시오? "

백발의 노인이 '끼이익-' 철문을 열었다. 

" 안녕하십니까? 최무정 기자라 합니다. "

최무정은 인사를 하며 노인의 얼굴에 집중했다. 중요한 순간이었다. 자신을 본 노인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미세한 표정 변화도 잡아야만 했다. 과연 이 노인이 내 딸을 죽였을까?

" ... "

한데, 긴 세월을 보낸 노인의 얼굴은 무심했다. 숨을 쉬지만 않았다면, 동상이라 해도 믿을 만큼의 정적이었다.

" 인터뷰 안 합니다. "

노인은 그대로 돌아섰다. 그때, 최무정의 입이 열렸다.

" 제 딸이...이번에 네 번째로 엄지를 잘렸습니다. "

멈칫하며 돌아선 노인은, 가만히 최무정을 바라보았다.

" ...들어오시구려. "

.
.
.

허름한 방 안에 노인과 마주 앉은 최무정. 쿨피스가 담긴 컵을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살림살이가 별로 없는 방은 모든 것이 옛날 느낌을 풍겼다. 손잡이가 어긋난 서랍장, 브라운관 TV, 전기장판 위에 펼쳐진 솜이불, 헤진 벽지와 천장. 그 모든 것이 눈앞의 노인을 닮아 있었다. 노인과 함께 늙었고, 노인과 함께 이곳에서 생을 마감할 것 같았다.

" 그래, 나도 뉴스를 보았지. 네 번째 희생자가 중학생이라더니...쯧. "

노인의 얼굴은 안타까운 빛을 띠고 있었다. 최무정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예...제 딸입니다. "
" 그 옘병할 놈을 잡아 쳐 죽여야 하는데...백번 천번 죽여도 모자랄 놈을... 어휴 "

노인은 분노했지만, 내쉬는 한숨이 무기력해 보였다. 
최무정은 가만히 그 모습을 살피다가, 

" 손녀분의 사건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그날 진주양이 어쩌다, 어떻게 살해당했는지, 혹 뭔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다던가 말입니다. "
" 그건 왜? "

노인의 인상이 불편하게 찌푸려졌다. 최무정은 담담히 답했다.

" 저는 그놈을 잡을 생각입니다. 제 딸을 죽인 범인을, 제 손으로 잡을 생각입니다. 뭐든지 좋으니, 알려주십시오. "
" ... "

노인은 최무정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 그날 저녁... 진주는 레슨을 받으러 가는 길이었어. "
" 레슨이요? "
" 보컬 레슨... 비싼 레슨이었지. 내가 돈이 있었으면 보탰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
" 예에... "
" 우리 진주는 가수가 꿈이었거든. 정말 노래를 잘했어. 이런 집에서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분명 티브이 나오는 가수가 되어 있었을 거야.. 목소리가 정말로 예뻤거든. "
" ... "

최무정은 그날 밤을 회상했다. 살려달라며 울먹이던 여자아이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 잠깐만, "

노인은 서랍장 위에서 카세트 플레이어를 가져와 놓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 ~~~ ~~ ~~~~ ~~ ~ ~~~~♬ ]

여자아이의 노래소리가 녹음되어 있었다. 노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 어때? 정말 잘 부르지? "
" ...네에. "
"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살아 있을 때 아무것도 못 해줘서 내가 그게 너무 미안해... 부모 없이 힘들게 자란 우리 진주, 아무것도 못 해보고 새벽부터 일어나 온종일 여기저기 일만 하다가 그렇게 갔어.. 남들처럼 놀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 것도 못해보고, 그렇게 갔네. 불쌍해서 어떡하나? 내가 참 미안해서 어떡하나... "
" ... "

최무정은 노래가 나오는 카세트에 눈이 고정된 채 침묵했다. 노래가 끝난 뒤에도 얼마간.

" ...혹시, 무언가 별다른 단서는 없으신 거군요? "
" 으음.. 그래 없네.. "
"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들르겠습니다. "

최무정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 노인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자신의 딸을 죽이기에는 노인이 너무 허약했다.

" 그래.. 잘 되길 바라네.. "

노인은 굳이 나가서 배웅하지 않았고, 최무정은 가볍게 묵례 후 방문을 열고 나섰다. 

' 끼이익- '

녹슨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최무정. 한데? 최무정은 문을 닫지 않고 우뚝 멈춰서 마당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 끝에, 쇠로 된 '아령'이 보였다. 최근에도 사용한 것처럼 깨끗한 상태의 아령이.

" ... "

묘한 표정의 최무정은 천천히 철문을 닫았다.

.
.
.

[ 정상영업합니다! ]

" ... "

최무정은 국밥집 앞에 커다랗게 붙어있는 현수막을 보고 있었다. 두 번째 희생자, 홍혜화의 부모가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하나뿐인 외동딸을 잃었던 부부였다. 최무정의 예상으로는 가게고 뭐고 문을 닫고 있을 줄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게 의외였다.
최무정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중년의 여인이 반갑게 맞이했다.

" 어서 오세요~! "

식당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최무정이 한쪽 식탁에 자리 잡자마자 곧바로 물과 컵을 가져다주는 중년 여인,

" 뭐 드릴까요? "
" ... "

최무정은 중년 여인이 자신의 얼굴을 편안하게 바라보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오픈형 주방에 있는 중년 남성과 눈이 마주치고,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주문 대신에,

" 엄지 살인 사건의... "

순식간에 표정이 굳는 부부. 곧바로 주방에서 큰 소리가 나왔다.

" 옘병할 엄지 살인! 도대체 언제까지 이 지랄이야?! 딸내미 뒤진 집이라고 아주 가게가 다 망하겠네! "

중년 부인도 차가운 얼굴로 허리를 세웠다.

" 형사님인지 기자님인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더 드릴 말씀도 없고요. 식사하실 거 아니면 그냥 나가주세요. "
" ... "

최무정은 말없이,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 이번에 살해당한 네 번째 희생자.. 제 딸입니다. "
" 아! "
" 으음! "

움찔하고 놀란 두 부부는 서로를 한번 바라보았다.

.
.
.

" 크~! "

중년 남성이 쓰게 소주를 털어 넣고 인상을 찌푸렸다. 맞은편의 최무정은 곧장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둘은 손님 없는 식당에 국밥 한 그릇을 놓고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 선생네 딸은 이제 중학생이었다면서? 쩝. 우리 딸은 그래도 28살이었는데. 안타깝게 됐네.. "
" 죽음에 나이가 무슨 차이랍니까? 다 불쌍하지요. "
" 그래... 그렇지 불쌍하지. 우리 딸, 당신 딸... "

최무정의 얼굴은 안타까움을 연기했지만, 그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남성을 관찰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소주 한잔을 털어 넣고 국밥을 몇 번 떠먹는 최무정. 
중년 남성은 그 모습을 보며 히죽,

" 맛있지? 아마 못해도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 거야. "
" 예. 정말 맛있습니다. "
" 그럼! 방송국에서 촬영하자고 몇 번이나 찾아왔었는데! 우리 어머니 때부터 딴생각 안 하고 2대째 지켜온 맛이라고 이게! 이제 우리 혜화가 이어받았으면 3대째 이어지는 맛이었는데...휴~! 그렇게 국밥은 하기 싫다고 하더니, 죽을 건 뭐람? 아니 하기 싫으면 하기 싫은 거지, 죽을 건 뭐람..? "

중년 남성은 슬프게 웃었다. 

" 기어이 결혼 날짜까지 다 잡아놓고 그렇게 갔네 그래. 그렇게 갈 줄 알았으면 싸우지나 말 것을 그랬어. 결혼 누구랑 하면 뭐 어떻다고.. 국밥 안 하면 뭐 어떻다고... "
" ... "

최무정은 할 말이 없어 다시 국밥을 떠먹었다. 정말로 맛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중년 남성은, 소주 한잔을 털어 넣고 물었다.

" 그래, 선생이 범인을 잡아보겠다고? 그런데 우리도 뭐 아는 게 없어. 그 새끼가 워낙 쥐새끼 같은 새끼라, 뭐 남겨 놓은 게 있어야지! "

이를 빠드득 가는 중년 남성의 눈빛이 살벌했다. 최무정은 그 눈빛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 생각했지만, 확실한 건 없었다.

" 기자라니 뭐, 다른 정보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경찰도 못 잡은 걸 우리가 어떻게 잡겠어? 쩝.. "
" 예에.. "
" 사실, 우리 딸 남자친구 놈이 경찰이거든? 근데 모른대! 몰라서 너무 죄송하대! 울면서 그러더라고.. 몰라서 너무 죄송하다고.. "
" 흠... "

최무정은 경찰 남자친구라는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무언가?

' 탕! 탕! 탕! '

" ? "

갑자기 주방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최무정의 고개가 돌아갔다. 큰 중식도를 내려치며 고기를 잘라내는 중년 여인. 
그 모습을 보며 최무정은 문득, 생각했다.
딸의 시체에서 엄지 부분의 날카롭던 절단면은, 최소한 저런 솜씨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
.
.

최무정은 주소가 적힌 쪽지를 바라보며 눈앞의 빌라를 확인했다.
4층 건물. 세 번째 희생자, 송서선의 집이 4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라 계단으로 오르는 최무정. 
한데,

' 툭! '

" 어이쿠! 죄송합니다~ "

계단에서 급하게 내려오던 사내와 3층에서 가볍게 부딪혔다. 

" 아닙니다. "

짧게 고개를 흔들며 지나치는 최무정. 
계단 아래로 내려가던 사내는 순간, 멈춰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
.
.

4층 송서선의 집 앞에 선 최무정. 위쪽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힐끔거리고, 벨을 눌렀다.

' 띵-동! '

" 송희선 씨 계십니까? "
" 네~ 누구세요~ "

조금 앳된 목소리가 들리며, 여학생이 현관문을 열었다. 한데,

" ?! "

최무정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이 커지며 동요하는 여학생!
최무정의 눈빛이 빛났다. 유족 중에서 처음으로 반응이 있었다. 

" 학생? 혹시 저를 아는- "

최무정이 눈매를 좁히던 그때,

" 혹시! 최무정 씨 아니십니까?! "
" ?! "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최무정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까 3층에서 지나쳤던 사내였다. 

" 맞군요! 희선아! 내가 아까 말했던 그분 말이야! 알지? "
" 으, 으응 오빠. "

사내는 자연스럽게 최무정의 곁으로 다가와 자신을 소개했다.

" 엄지 살인마에게 살해당한 최여주 양의 아버지 되시죠? 저는 두 번째 피해자 홍혜화의 약혼자, 김남우라고 합니다. "
" 아아. "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최무정의 입이 작게 탄성을 냈다. 이 사내가 그 경찰이구나. 
김남우는 넉살 좋은 웃음으로 송희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 실은, 제가 경찰인데.. 범인을 잡기 위해 유족분들을 찾아다니고 있었거든요. 안 그래도 최무정 씨에게도 찾아뵐 작정이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뵙네요. "
" 아, 그렇습니까? "
" 네. 아까 희선이랑도 최무정 씨 이야기를 했었는데 하하하! 거참, 신기합니다. "
" 네에... "

최무정의 표정이 묘해졌다. 송희선의 얼굴을 힐끔 보니, 무언가 꺼림칙한 눈치가 보였다. 

" 근데 최무정 씨가 이곳에는 어쩐 일로...? 아, 괜찮으시면 들어가서 얘기하실까요? 희선아? "
" 으,응! 네, 들어오세요. "
" 아 예. "

마치 김남우가 집주인인 것처럼, 셋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김남우와 최무정이 방바닥에 마주 앉자마자,

" 커피 드릴까요? 드릴게요. "

송희선이 부엌 쪽으로 이동했다. 그 뒷모습을 쫓는 두 사내. 김남우가 씁쓸하게 말했다.

" 어릴 때 부모님을 잃고 언니랑만 힘들게 살던 아이인데.. 유일한 혈육인 언니가 그렇게 되어서 참... "
" 예에.. "
" 그 빌어먹을 새끼는 왜 죽여도 그렇게 착하고 불쌍한 사람들만 죽였을까요? "
" ... "

최무정은 김남우의 물음을 깊이 생각했다. 뼈가 담겨있는 질문일까? 그냥 하는 말일까?

" 그러게 말입니다. "
" 어휴. 듣자 하니, 최무정 씨도 아이 엄마 없이 홀로 딸을 애지중지 키우셨다던데, 얼마나 슬프셨을지~ 짐작하기도 어렵네요. 정말 슬프셨죠? "
" 예에..힘들었습니다. "

최무정은 눈앞의 사내를 보며 직감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이 자가 내 딸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을 것 같다고.
김남우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 근데, 여기는 무슨 일로...? "
" 아, 저도 개인적으로 범인을 좀 잡아보려고.. 제 직업이 기자인지라, 혹 단서가 될만한 것들을 모아서 정리를 좀 해볼까 싶어서 말입니다. "
" 아! 그렇습니까? 이거 반갑네요. 저와 똑같은 목적이셨다니. "

김남우가 미소 지을 때, 송희선이 커피를 가져와 최무정에게 내밀었다.

" 여기.. "
" 아 고맙습니다. "
" 희선아 내 것은? "
" 오빠는 아까 먹었잖아요. "

송희선은 작게 웃으며 옆에 자리했다. 한데, 입을 자주 열지는 않았다. 
최무정은 가만히 송희선을 관찰하고 말을 걸어보았지만, 그다지 반응을 읽어낼 순 없었다.
모든 대화가 거의 김남우의 주도로 이루어졌기에 더 그랬다.

" 희선이한테 듣기로, 언니가 살해당하기 전에 방송국을 갔었다고 하더군요. "
"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게 왜? "
" 저는 그 부분을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 살해당한 송서선 씨의 주머니에서 찢어진 '아이돌 사인'이 발견됐거든요? 그게 이상했단 말입니다 저는. 범인이 찢었을 이유가 없는데, 그럼 송서선 씨가 왜 그 사인을 찢었을까요? 희선이에게 주려고 방송국에서 힘들게 구했다던 사인을 말입니다. "
" 이상하긴 하군요. "
" 그래서 저는 혹시...죽기 직전에 송서선 씨가 찢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왜 찢었을까? 무엇 때문에? 범인이 아이돌이라서? 푸하! 그럴 리가 없겠죠. 근데, 제가 알기로 우리 혜화도, 죽기 전 같은 방송국에 들렀던 일이 있었지 뭡니까? 예능 작가 일을 하는 친구를 보러 말입니다. "
" ... "
" 알고 보니, 장진주 양도 오디션을 보러 방송국에 갔던 적이 있었더군요? 처음으로 희생자들 간의 연결고리가 생긴 거죠. "
" 아! 대단하군요. "

최무정은 겉으로 태연함을 표했지만, 속으로는 매우 놀라고 있었다. 연예부 기자인 그가 희생자를 물색했던 곳이 바로 그 방송국이었다. 

"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따님도 방송국에 들렀던 적이 있으십니까? 아! 너무 당연한 질문이겠네요. 아버지가 연예부 기자이신데 하하하. "
" ... "

최무정의 눈이 가라앉았다. 눈앞의 사내가 말 속에 어떤 의도를 담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맹렬하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일부러 말해주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사내를 의심하는 게 자신의 착각일까?

" 물론, 아직은 전혀 실마리도 못 잡고 있습니다. "
" 예에.. 그렇습니까. 안타깝군요. "
" 기자님께서도 뭔가 정보를 알아내신다면 제게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제 연락처입니다. "
" 아 예.. "

최무정은 김남우와 명함을 교환하면서 생각했다.
 
이 사내의 두개골을 열어보고 싶다. 지금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
.

참 공교로운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딱딱하게 얼굴이 굳은 최무정이 택배 상자 안에 들어있는 '엄지'를 보고 있었다.

" ... "

딸의 엄지였다. 설마 이런 식으로 딸의 엄지를 되찾게 될 줄은 몰랐다. 하필 자신이 마지막 유족까지 모두 찾아본 이후에, 김남우라는 경찰과 만난 이후에 곧바로? 

김남우의 얼굴을 떠올리던 최무정은, 택배 상자에 적힌 주소에 시선을 고정했다.
보내는 주소가 그대로 적혀있다는 것은 대놓고 찾아오라는 말이 아닌가?
그는 마다하지 않았다. 살인에 사용하던 칼을 챙겨나가면 그뿐.

.
.
.

주소는 시내 외곽의 버려진 집이었다. 하얀 페인트칠이 말라 떨어진 시멘트벽의 1층 건물.
안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지만, 최무정은 직진했다. 긴장감 없이 열린 문 너머에는 그럴만한 것들이 없었다. 다만, 

" ?! "

벽면에 최무정의 시선을 끄는 것들이 붙어 있었다. 딸의 사진들. 

음식과 찍은 사진. 친구와 장난을 치는 사진. 예쁘게 꾸미고 셀카를 찍은 사진. 최무정과 찍은 사진. 생일 파티에서의 사진. 놀이공원에서의 사진 등등, 온통 행복해 보이는 딸의 사진들이 벽면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최무정의 걸음걸이가 사진에 맞춰지며 천천히 벽면을 걸을 때, 어느 순간 사진이 변했다.

" ... "

첫 번째 희생자 장진주의 사진들이었다. 노래를 부르는 모습. 기타를 치는 모습. 작곡하는 모습. 할아버지와 웃는 모습 등등. 
온통 행복해 보이는 장진주의 사진들이 끝나자, 두 번째 희생자 홍혜화의 사진들이 이어졌다.
쑥스러워하는 부모님의 팔짱을 끼고 찍은 사진. 김남우와의 사진. 제빵을 하는 사진. 어릴 적 국밥집 솥을 휘젓던 사진. 프러포즈를 받았던 날의 사진 등등, 표정에 행복함이 가득했다.
그다음은 송서선이었다. 여동생 송희선과 영화를 보러 간 사진. 뽀뽀로 장난치는 사진. 가위를 들고 머리를 잘라준 사진. 어릴 적 부모님과 찍은 가족사진.

최무정은 벽을 따라 돌며 모든 사진을 보고 난 뒤에야 편지를 찾을 수 있었다.

[ 아빠에게 ]

" ... "

움찔 놀란 최무정은 천천히 편지를 개봉했다. 
편지 속 내용을 확인한 그의 눈이 흔들렸다.

- - - - -

아빠 나야. 아빠가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난 이미 죽었겠지? 미안해.

아빠 방을 청소하다가, 아빠가 뉴스에 나오는 연쇄살인범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어.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겠더라. 그렇게 좋은 아빠가 그렇게 나쁜 사람일 수 있다는 게 이상했어.
그래서 난 아빠가 죽인 사람들이 전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천하의 나쁜 사람들이라서 아빠가 죽였다고 생각하고 싶었어.
아니더라. 그 사람들 다 찾아봤는데 아니더라.
죽어선 안 될 사람들이었어. 착한 사람들, 열심히 사는 사람들, 행복해져야 하는 사람들이었어.
나 정말 많이 울었어. 너무 미안해서 정말 많이 울었어. 아빠가 저지른 죄를 내가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아빠가 내 죽음을 보고, 아빠가 저지른 잘못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지 깨달았으면 싶었어.
아빠가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그 언니들의 인생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았으면.. 그랬으면 좋겠다. 

늦더라도 아빠가 잘못을 뉘우쳤으면 좋겠어. 다시는 살인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야. 
미안해 아빠. 

- - - - -

" 자살이라고...? "

편지를 뚫어져라 보는 최무정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한참 동안 움직이질 못했다. 그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결론이었다.

.
.
.

최무정의 방. 
침대 위에 사진들이 널려있었다. 딸의 사진은 물론이고, 자신이 죽였던 여인들의 사진들까지.

반성과 사죄. 딸의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던 최무정의 화두였다.

장진주의 아름다웠을 인생을 떠올려보았다. 백발노인을 찾아갔던 그 날을 떠올려보았다.
홍혜화의 인생을. 국밥을 놓고 부부와 술잔을 나누던 그 날을 떠올려보았다. 송서선을, 송희선을, 김남우를.

머릿속이 복잡한 최무정은 상상했다. 딸이 무슨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자신에게 무어라 말을 하는지.

" ... "

결심한 얼굴의 최무정은 핸드폰을 들어 112를 눌렀다.

" 여보세요? 자수하려고 합니다. "

.
.
.

[ 엄지 연쇄 살인마의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놀랍게도 자신의 딸마저 살해한 그는-. . . ]

최무정은 유족들의 방문을 기다렸다. 그들의 화를 받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데, 며칠간 유족들의 방문은 없었다. 경찰에서 막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의 의문은 김남우가 찾아왔을 때 밝혀졌다.

" 갑시다. "

김남우를 따라 현장검증을 가던 중에 최무정은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 정신이 드나? "

낯선 지하실에서 유족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 ... "

최무정은 그들의 표정을 보고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법의 심판이 아니라, 직접 죽이고 싶었겠지. 
받아들인다는 듯, 묶인 의자에서 발버둥조차 치지 않는 최무정.
정면의 김남우가 물었다.

" 하나만 묻자. 왜 자수를 했나? "

최무정은 잠깐, 머릿속으로 대답을 찾았다. 자신도 정확히 모르는 질문이었다.

" 그냥 해야 할 일 같았습니다. "
" 그냥...? "

김남우의 인상이 찌푸려졌고, 옆에 있던 국밥집 중년 사내가 버럭!

" 이 개새! 더 기다릴 것 없어! 쳐 죽이자고! "

그의 곁에 선 중년 부인도 커다란 중식도를 들어 올렸다.
근처의 백발노인도 왜소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쇠파이프를 꽉 쥐고 있었고, 그 옆의 송희선은 언니의 미용가위를 쥐고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모두가 복수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데, 김남우가 제지했다.

" 아닙니다 장인어른. 확실하지 않아요. "
" 크으...! "

김남우는 다시 최무정에게 물었다.

" 너도 딸을 잃고 나니, 우리들의 심정이 이해가 됐나? "

최무정은 아니라고 할 순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 미안합니다. 내가 당신들을 진작 알았다면...절대 그녀들을 죽이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
" 저 씹새! 저걸 말이라고...! "
" 이..이...! "

유족들의 입에서 욕설이 터졌다. 최무정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 내가 그녀들을 알았다면, 그녀들을 죽이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나는 그녀들을 몰랐고, 죽였습니다. 지금 나는 그녀들을 압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후회합니다. 미안합니다. "
" ... "

최무정의 말은 솔직하게 들렸다. 어이가 없더라도, 솔직해 보였다.
복잡한 얼굴로 그 표정을 살피던 김남우가 말했다.

" 당신이 범인인 건 송서선 양이 죽었을 때 이미 알았어. 그녀 주머니 속 사인을 얻어준 사람을 쫓아가다 보니 당신이 나오더군. "
" 뭐...?? "

최무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미 알고 있었다고??

" 한데, 난 당신을 경찰에 넘기고 싶지 않았어. 이분들도 당신을 경찰에 넘기고 싶어 하지 않았지. 그럼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최고의 복수가 될까? "
" 무, 무슨...? "
" 당신 딸. "

차가운 김남우의 얼굴을 보며 두 눈을 부릅뜨는 최무정!

" 무...! "
" 그래 맞아. 내가 당신 딸을 죽였어. "
" ?! "

흔들리는 최무정! 딸은 자살한 게 아니었나??

" 당신의 살인을 흉내냈지. 그래야 당신이 우리를 찾아올 테니까. 그래야 당신이 죽인 그녀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이었는지 알게 될 테니까. "
" 왜...?! "
" 당신에게도 감정이 있기를 바랐어. "
" 뭐?? "

이를 악무는 김남우. 주변의 그들도 모두 그 표정을 닮아있었다.

" 당신 사이코패스잖아? 당신에게 감정이 없다면 어떡하지? 제 죽음에도 무덤덤하면 어떡하지? 그건 절대 참을 수 없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고통 속에서 죽어야 해 너는! "
" ! "
" 네 딸을 죽였을 때만 해도 불안했어. 딸의 죽음에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딸의 고백 편지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아 한다면? 어쩌면 난 널 죽이는 의미를 잃었을 거야. "
" ... "
" 하지만 너도 감정이 있었어. 설마 자수까지 할 줄은 몰랐지. "
" ... "

김남우는 스마트폰을 꺼내 동영상 하나를 재생했다.

" 너도 괴로워할 줄 알지? 그럼 봐야지. 네 딸이 어떻게 죽었는지. 잘 봐. 네 딸은 너 때문에 죽은 거야. "

최무정의 두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동영상이 재생되는 동안, 부들부들 떨리는 최무정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동영상이 끝나자, 김남우가 말했다.

" 네 딸과 약속했어. 대신 너는 살려주기로... 나는 너를 죽이지 않아. 하지만 저분들은... "

김남우는 뒤로 물러섰다. 그때까지 대기하고 있던 이들을 향해 말했다.

" 이젠, 안심하셔도 됩니다. 고통과 괴로움을 느낄 줄 아는 놈입니다. "

이날을 기다려온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최무정에게로 다가갔다. 진정한 복수를 위하여.
댓글
  • 복날은간다 2017/06/11 22:19

    사이코패스 소재로 이야기를 써보려다가...중간에 망삘을 느꼈습니다. 사이코패스를 표현하기가 힘드네요.. 분량이 아까워서 그만...!
    하하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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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accato 2017/06/11 22:42

    따.....따봉.....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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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quekkoo 2017/06/11 23:20

    저 진짜 맨날 챙겨읽는데...오늘 처음으로 의식적으러 추천눌러요. 맨날 푹 빠져읽느라 추천눌렀늨지 안눌렀는지도 모르겠아요ㅎㅎ 앞으론 추천 열심히 누를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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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리온보리밥 2017/06/11 23:23

    한편의 짜임새 있는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입니다
    아직도 여운이 가시질 않네요
    좋은 글을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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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7/06/11 23:28

    와... 재밌습니다!!!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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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리보jelly 2017/06/11 23:43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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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돌프무민 2017/06/11 23:58

    띠용...! 딸이 편지남겼을때 아니 자기손가락을 어떻게..?하면서 저 사람들 모두 합작한건 아닐까 했는데 맞았네요!!
    이야기 늘 재밌게 잘보고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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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매 2017/06/12 00:58

    엇 근데 제가 잘못 알고있는건지 모르겠는데..
    사이코패스가 고통을 모르는게 아니라, 남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는거라고 알고있어요.
    그러니까 사이코패스도 자기 나름대로 소중한것도 있고, 그걸 잃었을때의 감정도 있는거죠.
    다만 그런게 자신과 관련없는 남들의 경우가 되면 공감하지 못하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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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없는닉이있어 2017/06/12 01:37

    항상 너무 잘 읽고 있습니다.
    이런 작품을 감상하는 가격이 고작 추천 한 개 드리는 것 뿐이라니 죄송할 정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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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급열차 2017/06/12 02:05

    영화로 만들어도 재밌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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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3 2017/06/12 02:13

    사이코패스의 인간답지 않은 그 섬뜩함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딸의 죽음에 눈물을 흘릴 정도의 인물로는 보이는 글이라서 결말에 속이 다 쉬원하네요. 누군가의 눈에 눈물을 쏟게한다면 자신에게도 돌아간다는 걸 느끼게해줘서 좋았습니다^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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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德 2017/06/12 02:14

    이거 영화로 만들어도 재밌을것같아요
    와... 완전 몰입해서 읽었네
    매번 좋은작품 고맙습니다:]

    (kmjwJ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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